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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ㅣ 마음산책 짧은 소설
이기호 지음, 박선경 그림 / 마음산책 / 2016년 2월
평점 :
우리의 일상의 한 단면들을 모아 모아,
골라 읽는 재미가 있지요.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하늘색 바탕의 초록색 산, 흰 구름과 회색 건물, 그 산을 오르고 있는 한 사람과 바람, 새인지 바람개비인지 알 수 없는 어떤 무엇. 뭔가 산뜻한 느낌이 드는 듯한 표지 그림에 끌려서 집어 들게 되었다.
짧은 에피소드나 티타임을 나누며 간단히 수다로 나눌법한 분량의 소설 40편이 하나로 묶인 책.
<우리에겐 일 년 누군가에겐 칠 년>, <아아아아>, <좀 쉬면 안 될까요?> 같이 세 가지의 타이틀 관련 분류된 이야기들 각각 열 편 이상으로 나눠져 있다.
첫 소설부터 묘한 실소를 터트리게 하며 시작했다. 시작은 가뿐하게. 그러나 읽어 나갈수록 그냥 가벼이 웃을 수 없는, 그저 지나치기만은 할 수 없는 그런 글들이 차례로 이어졌다. 마냥 낯선 다른 세계 이야기들이 아니였고, 우리의 생활 속에 각자의 사연 같은 이야기들이었다. 라디오 사연으로 나올 법한 웃픈(웃긴데 슬픈)이야기부터, 어이없이 실소가 터지는 이야기, 짠하고 뭉클한 이야기, 슬픈 여운이 남는 이야기, 안타까운 공감이 이는 이야기 그리고 사회의 치부를 들춰내는 듯한 송곳 같은 이야기까지. 각양각색 많이도 모여 있다.
이렇게 일상의 한 단면을 깊숙이 들여다보며, 촘촘히 직조해 놓은 이야기들을 창작해내는 일도 여간 힘든 게 아닐 텐데 역시 이기호 작가는 재주가 좋은 작가 같다. 너무나도 훌륭히 잘 해내기 때문이다. 물론 중간에 힘이 빠진 듯한...어색한 대화로 주를 이룬 소설도 있지만. 이를 소설로 불러야 할지 그냥 에피소드 모음이라 해야 할지 좀 낯선 구성 형식이긴 하지만. 이러한 시도들이 다양하게 이뤄지면 좋을 것 같다.
오히려 별 것 아닌 부분인 것 같은 것도, 그것마저 너무 익숙해진 현실을 자조하며 반성할 만한 하나의 계기가 되어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산뜻하게 읽어나갈 수 있는 것 같지만, 그 안에 든 알맹이는 마냥 가벼운 것은 아니다. 우린 지금을 자꾸 질문해보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하며, 그저 익숙해지기만 하면 계속 당하고 퇴보하는 길에 이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건 정말이지, 슬픈 농담 같기도 한 것이다.
"어쩐지 자신이 원고지가 아닌
삶 속에서 소설을 쓰고 있는 기분이었다네."
작가의 말 앞장 짤막한 말처럼.
제목 옆에 여러가지 색깔이 점이 찍어져 있는데 이게 무슨 코드 역할을 하는 것인지, 그래서 그렇게 분류해서 읽는 맛이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추측해보기도 했다. 일례로 분홍색 점은 실소를 터뜨리는 웃긴 이야기, 노란색은 짠한 웃픈 이야기와 같은...
난 첫 소설부터 터졌는데 일단 그러한 출발이 좋았다.
좋아하는 대상에 대한 험담은 참을 수 없고, 그러한 애정에 관해 나이는 전혀 상관없다는 것을 말하는 이야기로 처음 이 소설집의 문을 활기차게 열어준다. 읽으면서 무심코 웃어버렸는데, 이어「타인 바이러스」는 메르스 관련 에피소드였는데 역시 나도 모르게 터졌다. 소리 내서 웃게 한 소설은 처음이었는데, 묘하게 있을 법하면서 공감이 갔다.
가슴 뭉클한 이야기도 있고, 이기심에 관한 이야기도 있고, 가족의 탄생을 말하는 따뜻한 기운의 이야기도 있다. 또 아프게 공감 가는 이야기도 있었다. 수많은 좌절 속에 다시 일어서기 어려워진. 시작이 그 무엇보다 두려워진 삶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작은 기회 하나라도 시작한다면 그로 인해 다시 일어설 힘을 얻기도 하기 때문에...
잠들기 전, 하루를 마무리할 때 베개 맡에 두고 읽기에도 좋은 책이 아닐까 싶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부끄러운 듯 살짝 고개를 숙였다. 최 형사는 무연히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아이가 예전부터 태연 양에 대해서 험담을 많이 했습니다. 인터넷 게시판 같은 곳에서도…… 그래서 제가 참을 수 없어서……." (…) "아니죠. 그러면 누굴 사랑하는 게 아니죠. 사랑이 어디 합의할 수 있는 거던가요?"
/「벚꽃 흩날리는 이유」중에서
어머니는 계속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사람한텐 일 년이 강아지한텐 칠 년이라고 하더라. 봉순이는 칠 년도 넘게 아픈 몸으로 내 옆을 지켜준 거야. 내 양말을 제 몸으로 데워주면서." 나는 묵묵히 계속 삽질만 했다. 내가 파고 있는 어두운 구덩이가 어쩐지 꼭 내 마음만 같았다.
/ 「우리에겐 일 년 누군가에겐 칠 년」중에서
"앞으로 저희 집 배달은 여기 엘리베이터 앞으로 오시면 됩니다." (…) 나는 왠지 조금 울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가게로 돌아가려고 몇 걸음 떼던 나는 그때까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던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이게 왜 …… 이런 일들이 생긴 거죠?" 갑작스러운 내 질문에 남자는 조용한 목소리로 이런 말을 했다. "글쎄요. 아파트에 사니까 아파트만 생각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 / 「아파트먼트 셰르파」 중에서
그는 비명을 지르며 아이에게 속엣말을 했다 고통 다음에야 비로소 가족이 이름을 부여받는 거야. 아아아아. 그래서 가족이란 단어는 들으면 눈물부터 나오는 거란다. 그는 계속 소리를 지르면서 되새겼다. 아아아아. 그는 정말이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래도 꾹 참고, 아이를 바라보면서 오랫동안 소리를 내질렀다. 아아아아.
/ 「아아아아」 중에서
나는 그저 무언가를 다시 해보려고 했을 뿐인데…… 그는 괜스레 케이블TV 속 셰프가 원망스러웠다. 누구에겐 초간단 요리가 또 누군가에겐 그렇지 않음을…… 아무도 그것을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초간단 또띠아 토스트 레시피」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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