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죽음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 9
M. C. 비턴 지음, 전행선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고난과 역경을 너머, 기적같은 행복이?!





『여행자의 죽음』
















**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평화로운 로흐두 마을, 순찰을 도는 해미시 맥베스 순경, 아니 이제 경사로 승진하여 부하 직원까지 두게 된 그에게 심히 거슬리는 불청객들이 마을에 머무르게 된다. 딱히 해를 가한 것도 없는데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줄기차게 경계하고 불길해하는 해미시는 자칭 집시와 같은 특성으로 떠돌이 여행객이라 소개하는 숀과 셰릴을 못마땅히 여긴다. 


그러나 이런 해미시와 달리 마을 사람들은 아무 거리낌없이 이들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싫어했던 해미시보다 더한 게으름을 보여도 한없이 너그럽기만 하다. 


그러나 폭풍전야라고 해야 할까, 사건이 일어나기 전 고요함으로, 해미시의 마음 속에서만 요동을 치고, 마을은 평화롭기만 하다. 그도 얼마 가지 않아 부서지고 말지만. 


경찰인지 청소업자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윌리 순경은 해미시와는 정반대의 타입으로 끊임없이 쓸고, 닦고, 광을 내기 바쁘다. 이에 해미시의 숙소는 온통 살균제 냄새로 가득차고, 또 마침 별 것 아닌 해프닝 같은 일들이 연달아 터져 골치가 아프다. 매번 맞춤법을 틀리는 윌리 덕에 보고서를 두 번 작성해야 하는 일상이 이어지고, 이래선 자신이 승진을 한 게 좋은 것인지 도통 알 수 없게 되는 해미시는, 시종일관 불쾌했던 숀의 살인사건이 발생되자,  큰 고심에 빠지게 된다. 


브르디 박사네에서 사리진 모르핀과 어머니협회에서 모은 기부금이 절도당하는 등 마을 내 절도 사건이 연달아 발생된다. 해미시가 숀을 쫓아내기 위해 안달복달하며, 과거 전과이력을 살펴보았을 때도 별 소득이 없었는데, 그런 그가 갑자기 처참히 죽임을 당한 채로 발견되며 사건은 더욱 미궁속으로 빠진게 된다. 그의 연인이었던 셰릴은 얼마 전 숀과 크게 다툰 이후 마을에서 사라지고 없는 상태. 절도 사건의 범인도 당연히 숀 일당이라 믿고 싶었던 해미시와 다르게 그들의 알리바이는 확실했고, 멘붕의 연속이 이어진다. 그 멘붕이, 혼란스러움이 텍스트 밖까지 생생히 전달될 정도이다. 


외부인의 소행이길 바라지만, 꼼짝없이 자신이 애정하는 마을 주민을 상대로 범인을 찾아내야 하는 해미시는 괴롭기만 하다. 유일하게 사건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프리실라만이 그의 안식이 되어주지만, 다퉜다가 다시 화해했다 재밌는 관계를 이어가는 둘이다. 


그리하여 해미시의 위상을 높아지는 것을 경계하던 블레어 경감의 얕은 술수는 간단히 해결했지만, 여전히 해결하기 어려운 살인의 진범 찾기.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와 사건의 정황을 파악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을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해미시의 고민이 참으로 눈물겹다. 그저 일처럼 대하면 그만일지도 모르지만, 우리의 해미시 경사는 정 많고 사람 좋아하는 인물인지라 참 큰일이다. 그러니 프리실라처럼 공과사 구분 확실하고 딱 잘라 거리두기를 할 수 있는 인물이 꼭 옆에 필요한 것이다.


이번 작품에서는 동성애클럽이나, 복장도착증, 히피? 등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등장한다. 해미시의 반응을 보자면 소설 속 세상은 아직도 폐쇠적이기만 하다. 점점 개방적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는 모습도 흥미롭다. 


고지인들 특유의 유머가 등장하는 것도 여전히 유쾌하고 재미있다.


우여곡절 끝에 모든 게 착착 해결되는 게 싶더니, 뜻밖의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세상에, 읽는 독자인 나 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 모두가 바라고 있었던 일이라니, 그동안 얼마나 답답했던지. 이제서야 속이 좀 후련해지는 기분이다. 


승진 이후 고난을 겪어야 했던 해미시는 모든 문제들이 해소되어 다시금 자신의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가고, 이제 좀더 자신의 마음에 솔직해진 두 사람이 앞날이 어찌될지 기대가 된다. 


해미시의 괴로움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다시는 마을 주민이 용의자가 되지 않길 바라야 겠다. 


'휴가'라는 것을 도통 모르고, 지나간 여름이 야속했지만, 그 못지 않은 휴식같은 작품을 만날 수 있어 너무 기쁘다. 해미시 맥베스 시리즈는 아직도 그 갈 길이 멀고도 머니, 지친 일상에 좋은 환기가 되어줄 듯 하다. 야호!











<이 리뷰는 현대문학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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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강
핑루 지음, 허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회색지대에서의 인간의 본성이란,




『검은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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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단수이허 기슭에서 일어난 커피점 살인사건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사건의 대한 의구점이 도드라지거나, 미궁 속으로 빠질만한 특이성을 가진 게 아닌, 이미 판결이 내려져 종결된 사건이라는 게 특징이라면 특징일 수 있겠다. 


2013년 2월, 3월 79세 늙은 사업가와 57세 중년여교수 부부가 여러 군데 몸에 치명상을 입고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범인은 이들이 즐겨찾던 커피점의 점장 27세 자전이라는 여성이었다. 사회는 그를 두고 '사갈녀'라 칭했고, 판사는 일간지의 기자처럼 피고를 추궁했으며, 정해놓은 답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세간은 선한 중년의 부부가 한 악인에게 당한 일을 엄히 심판하고, 흑백이 분명한 벌이 처해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작가 핑루는 달랐다. 인물들간의 관계성과 윤리적인 문제에 대해 더욱 고심했다. 그래서 이 작품은 현실의 사건과 소설적 상상력 사이의 무게중심,즉 거리 두기가 최대 중점이었을 것이다. 작가는 이를 위해 자전의 시선과 훙보의 아내 훙타이의 시선을 교차하여 서사를 진행시킨다. 각 장의 말미에는 사건과 연관되어 있거나, 혹은 전혀 무관한 사람들의 말들을 실었다. 사건에 대해, '악'이라는 성질에 대해 다채로운 시각을 엿볼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덕분에 소설 뿐아니라 현실 속 여러 인간군상들의 관점을 보는 게 흥미로웠다.



자전은 사회 밑바닥에 있는 여성들의 축소판이다. 어릴 적 다정했던 아버지를 잃고, 힘겹게 가정을 꾸려가는 어머니와 함께 빚을 청산하기 위한 가난한 생활을 이어왔다. 상경한 후에도 가난은 절대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지만, 행복한 결혼생활을 그리기도 했고, 따뜻한 부정(父情)을 바라기도 했다. 당연한 것들을 누리지 못해, 누리는 자에 대한 열등감과 불온한 감정들이 늘 내면에 내재되어 있었고, 이러한 각박한 마음을 드러내지 않게 늘 속을 감추게 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동창들의 빛나는 삶과 대조된 자신의 지지부진한 현실을 감추려 애쓰면서도, 열심히 커피점 일을 하며 매달 어머니께 돈을 부쳐드리는 효심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그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셴밍이라는 남자친구와의 미래를 꿈꿨으면서. 계속해서 혼란스러워하고 흔들렸던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자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장해보지 못했고, 어릴 적 아버지를 잃은 후 부정(父情)을 그리워하다보니, 소아성애자에 당한 폭행을 무엇인지 인지도 못한 채 자라게 되었다. 반면, 남편의 부정(不正)으로 인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훙타이는 어떠한가, 남부럽지 않은 직업과 자신의 삶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그녀. 첫 단추부터 잘못 꿰인 결혼생활의 실패와 암담함을 애써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오히려 무던해지려 했던 그녀는 왜 불행한 생활을 지속했을까.


자전이 훙보의 욕망을 자신의 착각으로 이해해버리지 않았다면, 겁탈을 당하게 된 상황에서 저항해볼 수 있었다면. 훙보의 계획을 훙타이에게 전했을 때, 훙타이의 반응이 그때와 달랐다면, 죽음에 이르러서야 하나씩 스쳐지나가는 상황을 그리지 않고 제때 행동했더라면, 불행한 결혼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훙보와 훙타이 모두에게 안전한 삶을 이어가게 했을까. 여러가지 가정들이 이어진다.


자전의 과거 어린 시절 이야기, 커피점에서 일하며 훙보를 만나게 된 이야기, 그리고 사건을 발생되고 난 후의 이야기. 법정에서 진술하는 자전과 강물 속에서 서서히 의식을 잃어가는 와중에 지난 삶을 되돌아보는 훙타이의 시선이 처연하게도 엇갈린다. 


훙타이의 생각도 교차되며 진행됨에 따라 훙보에 대한 원망, 증오에서 그의 죽음을 바라고 그가 없는 삶을 그리다, 그를 연민하며 동정하기도 한다. 안타까운 회한의 시선이 이어진다.


그래서일까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제목과 같이 검은 강이 지나는 어두운 길을 걷는 기분이 들었다. 


필연과 우연. 이에 더해진 인연과 악연. 우리가 살아가는 데 피할 수 없는 게 필연이라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옳은 것일까.



**




작가는 자전을 동정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자전 뿐아니라 소설 속 등장인물 모두 작가는 동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한다. 당시의 사법부의 태도에 문제제기를 하며, 문학과 사회현실 사이에서 거리를 두는 실험적 시도를 해보는 핑루의 메타픽션은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을까 싶다. 실제로 그렇게 한 인물의 내면 깊숙이 들어가고자 한다면 자신의 내면도 그만큼의 큰 손상을 입게 되는 게 아닐까. 비슷한 예로 <인 콜드 블러드>를 쓴 이후의 트루먼 카포티의 삶을 보자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인성이라는 문제(인간 본성이 가진 진실한 모습)를 말하고자 했다. 선과 악이 분명하게 구분지을 수 없는 회색지대에서의 한 인간의 선택에 대해 집중했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자전, 실패한 결혼을 감추려는 훙타이. 그녀들의 침묵이 초래한 결과는 어떠한지. 남의 일이라 여기며 아무렇지 않고 '사갈녀'라 칭하는 언론과 사람들의 태도는 또 어떠한지 말이다. 명명 되어짐으로써 그 안에 가둬버리는 '~녀'라는 꼬리표 같은 표현. 살인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그 어떤 경우라도 타인의 목숨을 함부로 앗아갈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인사건은 빈번히 발생된다. 어떠한 상황에서 어떠한 선택으로 이뤄지는가. 자전의 이야기보다 '사갈녀'라는 이름으로 감추고자 했던 사회의 이면의 진짜 얼굴은 또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옮긴이의 말에서 작가가 출간 후 좌담회에서 밝힌 한 마디를 덧붙이며 리뷰를 마치려 한다.


"나는 이 소설을 통해 흑도 백도 아닌 회색 지대를 보여주고자 했다. 우리가 소위 '악인'들과 같은 환경에 처했다면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그들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그저 운이 조금 좋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옮긴이의 말에서 




사이가 좋지 않은 부부들은 처음에는 사소한 마찰로 시작되지만 어느 한쪽이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하고 상대가 차갑게 노려보면 점점 의심이 깊어지고 서로 다름을 느낀다. 그런 뒤에 두 사람의 인생이 다른 목표를 향하고 있음을 발견하면 관계가 서서히 멀어지게 된다. 

 이렇게 멀어진 두 사람이 같은 공간에 있으면 가시를 바짝 세운 고슴도치 두 마리처럼 상대에게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안전거리를 유지한다.

 모든 결혼 관계에 대해 유효한 질문이 있다.

 그동안 서로를 위해 무엇을 했을가?

 그는 그녀를 위해 무엇을 했을까?

 반대로 그녀는 그를 위해 무엇을 했을까?


- Ⅲ 안전거리 92쪽



이따금씩 걷다 보면 이런 기분이 울컥 차오를 때가 있었다. 좌표를 잃고 GPS신호도 끊긴 채 빛도 없이 사방에 뿌연 안개만 자욱하게 떠다니고 있는 것 같았다. 자전은 걸음을 멈추고 우두커니 섰다. 계속 가야 할까? 


- Ⅳ모퉁이, 그 모퉁이 116쪽


누구에게도 사랑받아본 적 없는 자전은 사랑이라는 게 뭔지 잘 몰랐다. 


- Ⅳ모퉁이, 그 모퉁이 125쪽



자전이 훙타이에게 느낀 감정은 경쟁심, 승부욕, 질투, 부러움 등이 있었던 걸까.


남에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것을 무척 경계하는, 감정을 드러내는 걸 경멸하는 자전. 그 마음속엔 타인의 삶이 아무 조건없이 이뤄진 데에 대한 불만이 늘 자리잡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보상받을 수 없는 것은 공허하게 보낸 수많은 날들이었다. 그녀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기고 잘근잘근 씹혀 뭉그러졌다. 생리적인 욕구도 벌레 먹은 잎사귀처럼 서서히 시들어버렸다. 


- Ⅴ소원의 거리 162쪽



자전에게는 속마음을 털어놓을 친구가 없었다. 그녀에게 "잠깐 기다려. 넌 지금 길모퉁이를 잘못 돌았어. 어서 멈춰. 빌어먹을 그 생각을 떨쳐버려!"라고 외쳐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 Ⅵ행복의 거리 174쪽


자전은 훙보의 욕망을 알지 못했고, 자신이 어떻게 처신과 저항이 늦었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기에. 그가 아내를 없애자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 영영 못 벗어날 것이라는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는 게 가장 큰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사실 돌이켜보면 경고음이 여러 번 울렸다. 결혼 전 누군가가 나이도 많고 살아온 내력이 불분명한 남자와 결혼하지 말라며 그녀를 말렸다. (…)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이 남자가 자신과 결혼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배우자란에 누군가의 이름이 있다는 것은 보호색을 한 겹 뒤집어쓰는 것과 같다. 


- Ⅶ 기수지역 202쪽






(이 리뷰는 현대문학 출판사의 '문학독후'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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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소나타
차소희 지음 / 청어람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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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여름동화,



『여름소나타』





 


**

 

 

무더위가 잠시 가신 지금이야말로 말랑말랑한 이야기를 읽기 딱 좋을 것 같다. 로맨스 소설은 거의 처음 접해본다. 고등학생 때 야자시간에 반 애들이 돌려볼 때도 관심이 없었는데, 근래 너무 삭막하고 건조한 생활이 이어졌기에, 마음을 간지럽히는 이야기가 읽고 싶어졌다. 『여름소나타』는 그런 부분에선 적합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24살 윤리교생실습생 민채민, 20살 천재피아니스트 지선우. 이야기는 채민이로부터 시작된다. 대학 동아리에서 만나 4년간 연애했던 우진에게서 갑작스런 이별을 통보받고,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채민은 계절이 바뀌고, 모교로 교생실습을 나가게 된다. 

 

아버지의 사업 악화로 폭력이 이어지고, 어머니가 쓰러지신 뒤, 대신 경제활동과 학교생활을 병행해야 했던 채민. 이런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의 일방적인 괴롭힘으로 인해 힘들었지만, 열심히 제 꿈을 향해 노력해왔다. 그렇게 어떻게든 살아왔고, 좋은 사람을 만나 사랑도 하게 되었지만, 아물지 않은 상처에 더 큰 상처를 남긴 우진 때문에 주변이 잘 보이지 않던 채민에게 햇살같이 등장한 선우는 '순백' 그 자체로 보인다.

 

유명 쇼팽 콩쿠르 최연소 입상자인 선우는 촉망받는 피아니스트이다. 타고난 재능에 훈훈한 외모, 해사한 미소까지 완벽해보이는 선우에게도 역시 아픈 상처가 있다. 외도를 일삼는 아버지, 그로 인해 황폐해진 삶을 선우의 탓으로 돌리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마지막 선택으로 인해 불안과 공황장애를 앓게 된 선우는 웃음 뒤에 자신을 감추고자 했다. 지속적인 상담치료 덕분에 차차 나아지는 듯 싶지만, 매순간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려 한다. 그런 선우 앞에 수줍게 웃는 채민은 한 줄기 빛처럼 따스하게 느껴진다. 

마치 운명처럼, 서로의 눈에 비친 모습은 모순적이게도 환한 빛으로 각인된다.


'인연'으로 엮인 이들의 관계는 늘 불안해보인다. 불운한 상처를 안고 있는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온기와 빛을 찾는다. 상실과 상실이 마주하고, 상쇄되어 서로에게 치유제로 적용되는 것 같다. 본래 자신이 가진 상처와 후유증뿐 아니라, 교생과 학생의 입장이라는 면에서 일종의 불안을 내포하기 있기에 그로 인한 긴장감이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지속된다. 때문에 이들을 보면 안타까우면서도 조마조마했다.


그렇게 살얼음판 같으면서도 잔잔한 일상이 이어지고, 처음 가진 사랑하는 존재에 대한 갈망, 선우의 직진으로 채민의 마음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과거의 추억을 사랑하는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해 헤매었고, 인간관계에 있어서 다소 수동적이었던 자세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갈 길을 나아가게 된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시작된 인연은 처연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싱그럽게 마음을 간지럽힌다. 때문에 '곰살맞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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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쇼팽의 곡들을 자주 찾아 듣고 있는데, 신기하게도 『여름소나타』에서도 쇼팽의 이야기가 나오니 더욱 친근하게 느껴졌다. 목차도 중요하게 보는 편인데 낯선 언어라 처음엔 당혹스러웠다. 슬프게, 계산의?, 정치적으로? 고도의 예술적 기교, 도달, 불안, 끝, 걱정되는……. 뜻이 잘 맞는지는 확인할 수 없고, 그저 차례로 검색해보며 파트별 분위기를 유추해가며 읽었다. 아마 클래식과 관련된 용어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검색하며 찾은 뜻을 보니 이탈리아어인 것 같기도 하고. 여튼 수수께끼같은 목차였다. 


당연히 세부적인 묘사에 있어서 음악적 용어가 많이 바탕이 된 게 보였다. 그런 표현들이 인물과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준 것 같다. 또한 또 다른 커플인 도아와 지민을 통해 심리학적 분석을 바탕으로 하여 인물에 대한 설명을 했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개인적으로는 채민과 선우 보단 도아와 지민 커플이 담백하니 더 좋았다. 


작가는 사랑을 하니까 사람인가, 사람이니까 사랑을 하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이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언제나 그렇듯 '사랑'이란 주제 자체가 미지의 세계같고, 풀어도 풀어도 끝이 없는 숙제같은 느낌이 있다. 소설 초반부에 자주 등장했던 '아지랑이'는 이러한 고민의 흔적들이 드러난 표현이 아닐까. 


낯설고 또 낯선 세계였지만 대체적으로 흥미로웠다. 몇몇 인물의 어조는 좀 튄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 여전히 선우의 부모님 관계는 이해되지 않지만, 마음을 간지럽히는 이야기는 건조한 일상 속에 적절한 환기와 쌓였던 긴장들을 풀어내주기에 필요한 듯 하다. 여름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쇼팽의 곡과 함께 읽기 좋은 소설인 것 같다.


 



( 이 리뷰는 청어람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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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과 천둥
온다 리쿠 지음, 김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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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히 원하기에 더욱 아름다운,




『꿀벌 천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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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 리쿠. 작가의 이름을 들어도 봤고, 그의 책 제목으로 글도 써본 적은 있지만, 막상 책을 읽은 적은 많지 않았다. 어떤 작품을 쓴다고 정의 내리기도 모호하다고 생각하는 지점도 분명히 있었다. 그저 친한친구가 꾸준히 읽어온 작가라는 것과 그와 반대로 내게는 잘 안 읽혔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작품집은 또 있었다. 『도서실의 바다』라는 단편소설집. 그때의 나의 감성과 잘 맞아 떨어지는 작품이어서. 온다 리쿠를 처음 접한 작품이어서 이 다음도 이어가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이 작품집을 읽으면 늘 영화<러브레터>가 떠올랐다. 순수했고, 아름다웠던 아련한 기억 속 어느 순간들을 모아놓은 듯한 느낌. 코끝에 맴도는 그리운 향수가 떠오르는 그런 작품이었다. 그리고 지금 하반기 기대작으로 등장한 『꿀벌과 천둥』을 만나게 되었다. 오랜 시간 꾸준히 이어온 연재, 성실히 행했던 취재 속에서 차곡차곡 쌓인 악보들처럼, 클래식의 넓고 깊은 세계를 한껏 보여주는 이 작품은 올해 서점대상1위와 나오키상을 동시에 수상한 저력을 보여준다. 충분히 기대작으로 불릴만 하고, 무엇보다 분량이 참 만만치 않다.


처음 가제본을 받아 읽어보게 되었을 때, 분량에 압도당한 게 사실이었고, 이런 분량이면 과연 흡입력은 잘 잡을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첫 장을 읽어나가는 순간, 바로 이 낯선 세계로의 걸음이 즐겁게 느껴졌다. 처음부터 이렇게 재밌게 읽을 수 있다니. 대단한 내공이다. 



**



이야기는 일본의 요시가에 콩쿠르 무대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2009년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우승했던 '하마마츠 콩쿠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주변인물들은 주요 인물들과 직,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등장한다. 주요인물이라면 이 네 사람이다. 가지마 진, 에이덴 아야, 마사루 카를로스 레비 아나톨, 다카시마 아카시. 연령도, 자라온 환경도, 특징도 각기 다른 개성의 인물들이 한데 모여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생생한 묘사를 통해 말하는 인물의 시점을 전환이 자유자재로 이뤄지고 있고, 콩쿠르의 절차나 과정 등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을만큼 세밀하게 표현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느꼈지만 직접 귀로 들을 수 있도록, 보고 듣는 영상화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가도 책의 내용대로 완벽한 싱크를 연주하고 연기할 수 있는 인물이 있을까 싶기도 했다. 각설하고, 네 명의 주요인물들에 대해 간략히 말하자면, 


가지마 진, 양봉업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이동하며 피아노를 연주했던 소년, 천진무구한 얼굴과 순수함으로 무장한, 음악의 신의 가호를 받는 듯한 이 소년의 별명은 '꿀벌왕자', 아직은 때묻지 않은 천연 그대로의 상태에 있고, 전설적인 인물 유지 폰 호프만에게 사사 받고, 그 추천서를 통해 널리 널리 알려진 아이. 소년의 연주에 따른 반응은 '기프트'와 '재앙'으로 극과 극을 오간다.


에이덴 아야. 천채소녀. 음악을 사랑하게 했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무대에서 멀어져버렸던 소녀. 음악은 늘 가까이 두었기에 자신을 돌봐주고 챙겨주었던 분의 기대에 따라 오랜만에 참가하게 된 콩쿠르에서 제대로 된 부활을 선보인다. 아직은 세간의 관심과 평이 두렵지만, 그녀에겐 역시 뭔가 특별한 게 있다.


마사루 카를로스 레비 아나톨. 일본계 3세 페루인. 짙은 라틴계 얼굴로 이미 스타성을 가진 인기인이자 타고난 실력자. 그 역시 천재라는 소릴 듣는다. 하이브리드 차일드. 자신의 혈통의 좋은 점은 모두 물려받았지만, 일본사회의 차별과 적대심을 이겨내지 못했던 소년이 멋지게 성장하여 돌아왔다. 


이 소설에서 유일한 로맨스가 나오는데 또 한 몫 해주고 있다. 마아군과 아짱. 귀여운 추억과 관계성이 또다른 재미를 더해준다.


다카시마 아카시, 콩쿠르 참가자 중 최고 연령대에 있는 스물여덟의 가장. 자식에게 언젠가 자신의 음악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고자 마지막 심기일전하여 도전한다. 이 중 제일 평범하다고 하면 평범한 인물일수도. 그러나 사실 전혀 평범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책을 읽으면서 종종 예선, 본선에 등장하는 음악을 검색하여 들으며, 상상하며 읽어보았다. 가장 궁금한 건 에이덴 아야의 연주이고, 응원하고 싶은 건 다카시마 아카시였다. 예술의 모든 분야가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유독 조금이라도 어릴 때 발휘되는 천재성, 예술성에 대해 전혀 무관한 범인들이 보기에는 뭔가 선망과 동시에 질투가 찾아오며, 곧이어 회의와 허무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응원하고 싶어졌다. 묵묵히 고요한 듯 휘몰아치는 세계 속에서 자신의 무게중심을 지키며 나가는 인물이. 괜히 동일시하며 읽게 되는 구석이 있는 것 같다.


처음 참가 등록할 때의 이야기에는 평이하게 읽어나갔다면, 1차 예선부터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현장에 있지 않았는데도 긴장을 하며 읽어 나갔다. 그 과정에서 심사위원들과 콩쿠르 스태프들의 고충이나 고심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움직여주고 있기 때문에 무사히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됐다.


음악적 지식이 없어 작곡가별 특징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중간중간 나오는 묘사 덕에 인물들의 특징과 성향에 맞게 본선 곡을 골랐구나 싶었다. 본선은 무려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이기 때문에 그곳에 내가 있지 지 않다는 게 좀 섭섭하게 느껴질 정도로, 거대하게 다가왔다. 


음악을 글로 표현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막연히 떠올렸다 지워버린 생각을 온다 리쿠는 차분히 잘 해낸 것 같다. 음표 하나하나 그로 인해 그려지는 이미지들, 연주자의 성향에 따라 바뀌는 세계관, 표현력 모두 심혈을 기울여 들려주었다. 잠깐의 휴식을 통해 바깥으로 나온 마사루, 아야, 진, 가나데까지 청춘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는 듯이 코믹스러웠다가, 바닷가의 풍경 속에서 파도 소리가 들리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오랫동안 자신의 음악을 어떻게 꺼내 보일지 갈피를 잡지 못했던 아야는 역시 천재성을 뛰어 넘은 성장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자유분방한 연주를 보인 가지마 진을 통해서 이끌어지기도 했다. 진은 그런 아야를 알아보고 같이 갇혀있는 음악을 바깥으로 꺼내보자고 했다. 인연이란 실로 대단한 게 아닌가. 순서도 나란히 이어졌던 그들은 이전의 연주자가 포악스러운 세계를 표현했다면, 다음 연주자가 따스하게 끌어안는 연주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묘한 시너지를 불러일으켰다. 콩쿠르의 결과는 현실적이라면 현실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잠재성과 자라온 환경에서부터 겪었던 일들을 통해 형성된 그들만의 음악세계를 통해 쉽게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음악을 잘 모른다. 클래식 음악은 더더욱 모른다. 하지만 좋은 음악을 들을 때의 감동과 울컥하며 차오르는 전율은 막귀인 내게도 전달되지 않았을까. 경험해보지 못한 풍부한 클래식의 세계를 이제 막 조금 맛만 본 기분이다. 그래서 마지막 장을 덮게 된 순간 아쉬움이 남았다. 더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아름답게 세계를 그리는 방법도 있었구나, 새삼 반성하게 됐다. 섬세한 문장들에 다시 반하게 되었다. 한편 가지마 진을 그리는 방식에서 다소 상투적이게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이란, 이전에도 이런 자유분방형 천재 캐릭터(노다메나, 피아노의 숲의 소년 등)가 종종 등장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꿀벌과 천둥』은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세계인 듯하다. 


한 세계에서 단독자로서, '나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일이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여기 등장하는 네 인물들은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더 잘 해나가지 않을까. 세상에 흩어져 있는 음악을 좀더 자유롭게 맘껏, 표출하고 세상 밖으로 끌어내주지 않을까, 이런 기대가 생겼다. 


각 인물을 그리는 데 입체적이면서 생동감 있게 잘 표현되니, 읽는 독자는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됐다. 더위가 조금 식는 어느 날, 본래는 여름밤이 제격인 좋은 소설인데, 지나친 더위에 허덕이고 있는 지금은 에어컨 빵빵한 곳에서 소개된 음악과 함께 좋은 연주 속 세계를 여행하는 일은 그야말로 '휴식' 그 자체가 되어줄 것 같다. 치유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꿀벌과 천둥』이 새로운 일의 시작으로 정신 없던 내게 정말 감사한 선물이 되어주었다. 부디 다른 분들에게 '즐거운 휴식'이 되어주길 바란다.



**




(이 리뷰는 현대문학 출판사의 '문학독후'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가지마 진을 선사하겠다.
글자 그대로 그는 ‘기프트‘이다.
아마도 하늘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하지만 착각해선 안 된다.
시험받는 것은 그가 아니라 나이자 여러분이다.
그를 ‘체험‘하면 알겠지만, 그는 결코 달콤한 은총이 아니다.
그는 극약이다.
개중에는 그를 혐오하고, 증오하고, 거부하는 이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것 또한 그의 진실이며, 그를 ‘체험‘하는 이의 안에 있는
진실이다.
그를 진정한 ‘기프트‘로 삼을 것인지, 아니면 ‘재앙‘으로 삼을 것인지는 여러분, 아니, 우리에게 달려 있다.

유지 폰 호프만

참가등록 p 37

음악은 항상 ‘현재‘여야만 한다. 박물관에 진열돼 있는 전시품이 아니라, ‘현재‘를 함께 ‘살아가는‘ 예술이 아니면 의미가 없어. 아름다운 화석을 캐냈다고 거기에 만족해서는 그냥 표본에 그쳐 버리기 때문이지.

제2차 예선 p302

세상에 흩어져 있는 무수한 에너지의 조각, 반짝반짝 빛나는 빛의 조각을 들이쉬는 이미지.
그렇다. 지금 나는 세상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음악의 조각을 그러모아 내 몸속에서 결정을 빚어내고 있다. 내 안의 음악이 가득 차올라, 나라는 필터를 통해 이제 나의 음악으로 다시 세상에 나오는 것이다. 내가 음악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다. 나라는 존재를 매개로 이미 존재하는 음악을 세상에 들려줄 뿐이다.

본선 p 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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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의 책
김희선 지음 / 현대문학 / 2017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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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으로 시작해 소름 돋는 반전으로, 




무한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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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스러운 이미지들로 꾸며진 표지를 보건대, 과연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 있길래 이렇게 균열적인 그림으로 배치가 되어 있는 것일까란 생각이 이 책을 처음 받아보게 된 후, 들었던 생각이다.


띠지에서 나온 그대로, 이야기 속 로버트가 스티브에게 했던 말처럼, 내가 이 책을 감당할 수 있을까 싶었다. 500페이지 가까이 되는 분량도 그렇고, 지구종말, 시간여행, SF 등등 소개문구로 적혀진 분야 어느 것 하나도 크게 흥미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인물소개가 두 페이지에 걸쳐 있는 것만 봐도 등장하는 인물 수만큼 이야기의 세계관 역시 광활하게 펼쳐지겠구나 싶었다. 


이 거대한 이야기를 짧게 압축해서 정리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나, 감히 줄거리 소개랍시고 간략히 요약해보자면, 스티브라는 미국계 한국인에게 신은 구원자로서의 역할을 다하길 부탁하고, 이를 기록하는 노트와 만나야 할 인물에게 전달하기 위해 과거로 시간여행을 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다가올 소행성 폭발은 피할 수 없지만(지구의 생명력은 76억 년이 남았다 함), 대신 구원자의 희생이 이러지기 전과 후과 매우 다른 세계로 형성되고 이는 허구로 남을 거라는 것이다. 


프롤로그라고 해야 하나, 놀이공원에 갑자기 홀연히 등장한 소년, 명진 고아원 출신이라는 이 소년의 등장, 낯선 차림과 가지고 있는 소지품도 불가사의한 이 소년이 앞으로의 이야기의 주요한 축의 한 부분을 차지할 거라는 것을, 이야기를 읽고 나가면 자연히 알게 된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하고 발을 내딛는 순간, 곧바로 혼란이 찾아온다. 신의 강림에 대해 얘기를 하고, 신이 사실은 인간의 형상이 아닌 파충류라고 주장하는 내용이 예고도 없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혼란스러움을 나는 감히 인내라고 표현하며, 그 다음을 넘어서게 되면 흥미진진한 세계가 펼쳐질 것이라는 것을 미리 말해두고 싶다.


혼란스러움의 정체를 앞서 잠깐 말했지만, 이는 화자의 발화 방식에서 비롯된 것도 있다고 본다. 불안정한 심리 표현과 횡설수설로 이어가는 그 방식, 하지만 이야기의 구성 상 자연스럽게 선택한 방식이 아닐까 싶기도 한 게, 단순히 지구 종말의 관한 이야기라고만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무한의 책』은 대단히 복합적인 구성을 지닌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신박한 상상력에 비해 산발적으로 흩어진 느낌이 강했던 이유는 초반의 어수선한 배경 설정 때문이다.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들에 주요한 배경이 될 이야기들을 친절히 설명하기 위한 방식이 되레 몰입이 방해가 되기도 했다. 세밀한 묘사는 모든 부분에 적용된 것이 아닌 주요 몇 부분만 행해졌으면 어떠할까, 등장한 모든 인물에게 부여된 사연과 환경설정은 그 인물을 보다 입체적으로 그려지게도 하지만 읽는 독자로 하여금 다소 지치게 하기도 했다. 이러한 방식은 개인적으로는 초반부의 흡입력을 기대할 수 없지만, 중반부를 지나 후반부로 달려갈수록 이야기에 탄력성이 가해져 몰입으로까지 이끈다. 그 다음이 궁금해지기에 책장을 계속해서 넘길 수 밖에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주인공 스티브에게는 복잡하고 어두운 가정 환경이 주어지는데, 그의 아버지는 특히 시대의 아픈 한 축을 직접 겪은 인물이기도 하다. 급히 한국을 떠나야 했던 스티브의 가족은 도축공장에서 일을 하는 아버지와 세탁소에서 일하는 어머니, 어린 동생 성호와 주인공 성철로 이뤄졌으나, 내내 불우한 기운이 감돈다. 술에 취하기만 하면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와 발작을 일으키는 어린 동생. 그의 어린 시절을 함께 한 친구 디디, 그를 옭아매는 한 사건과 트라우마,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는 것 같은 스티브는 멜름가 1408번지 한국인 가족 몰살사건의 유일하게 남은 생존자이기도 하다. 어른이 된 그는 트루데라는 몰락한 도시? 슬럼가?라고 해야 할까, 그 도시의 도축공장에서 영업직으로 일하고 있다. 그가 사는 아파트에는 의지하는 동료도 있고, 언젠가부터 말 붙이고 친하게 지내게 된 전직기자 로버트도 있다. 


로버트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고 했던 T신부의 미발표 원고 <종교와 생물학의 통일장 이론에 관하여>를 읽게 된 스티브가 엮이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 신의 강림과 계시라는 앱, 비밀스러운 메시지를 주고 받게 되고,  과거의 여러 사건들의 실마리가 하나씩 풀려가며, 진실을 알리려는 자와 덮으려는 자의 사투, 결심과 시간여행, 그리고 미래는 살아감으로써 맞이할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뜻밖의 반전으로 소름이 돋았고, 소년의 정체를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결말은 새로웠다. 그래서 한 사람의 생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작동되는 것일까. 결국 살아간다는 것에 말하고 싶었던 걸까, 무한한 이야기를 끌여들여와 작가가 전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그 흐름을 따라가면서고 자주 고개를 갸웃거렸고, 어느 순간 알아차린 것도 있지만 풀리지 않은 의문도 남았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결심하고, 이 미로같은 이야기 속으로 재차 걸음해야 될 것 같은 생각도 든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끔찍했던 모든 것들은 어쩌면 지구 종말 같은 거대한 무게로 다가온 것이 아니었을까,

누구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그 안에 숨고 싶어질 만큼, 분열은 생존방식이 된 것은 아니었을까.


어떤 갈래를 진실로 받아들일 것인지는 오로지 읽는 이로 하여금 달린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결정하지 못하였다.

지구 종말에 대한 이야기인지, 음모 서사인지, 시간여행인지, 한 인물의 아픈 상처와 트라우마에 관한 것인지.


그저 처연하기도 했고, 안타까웠던 스티브에게 앞날엔 행복만 남았기를 바라며, 역시 어지러운 이 리뷰를 마무리해본다. 






(이 리뷰는 현대문학 출판사의 '문학독후'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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