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곳에 살고 있나요? - 공간디렉터 최고요의 인테리어 노하우북 자기만의 방
최고요 지음 / 휴머니스트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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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좋아하는 곳'으로 가꿔보는 것은 어떨까,





좋아하는 곳에 살고 있나요?











(목차 이미지 출처: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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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낡은 아파트이다. 30년 이상 되었고, 구조물만 튼튼할 뿐, 그외의 것들은 거의 날림으로 시공된 것을 살아가면서 절실히 느끼고 있다. 바로 옆집만 해도 몇 년 전 리모델링을 하여 공간의 낡은 부분을 손보았고, 지금도 종종 공사하는 소음이 들리곤 한다. 낡아서 고칠 게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와중에 우리집은 삭막한 분위기 속, 세월의 흔적 그대로의 모습에서 전혀 변화하지 않고 있다. 살고 있는 이들이 그렇게 무심하기 때문이다. 한때 인테리어 공사를 시도해보려 하였으나, 여러가지 여건 속에 무산되었고, 결국 그런대로 살아왔다. 가끔 집안 구석구석을 둘러보면 안쓰럽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사는 이들의 무관심 속에 방치된 집이 가엽게 느껴졌지만, 어떻게 손봐야 할 지, 내 선 안에서 가능한 부분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고요님의 블로그도 역시 우연히 방문하게 되었다. 낡은 다가구 주택이 어떻게 변신하였는지, 그 변화된 모습이 놀랍고 신기했다. 마법의 손이라도 가지신 건가, 난 이런 센스가 없지, 공간디렉터란 무엇일까. 이렇게 하나 둘 호기심과 궁금증이 일었다. 그리고 마침 그 노하우가 담긴 책을 받아보게 되었다.





큰 돈을 들여야만, 엄청난 노동력을 들여야만

내 집이 가치 있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집을 가꾸는 것은

스스로 행복해지는 법을 찾는 일입니다.  (14쪽)


가만히 앉아서 제자리에 있는 물건들만 봐도 기분이 좋아지는 곳.


나에게는 그런 공간이 필요했다. 


모르면 몰랐지 누구나 한번 겪어보면 알게 된다.

사실 집이라는 곳은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39쪽)


자신의 공간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나'라는 사람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 저는 이런 것들이 소수만을 위한 특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집'이라는 공간이 주는 혜택은 우리가 얼마나 부자인지, 얼마나 시간이 많은 사람인지와는 상관없이 누구나 누릴 수 있고, 또 반드시 누려야 한다고 믿고 있어요.


(…)


집을 가꾼다는 것은 우리의 생활을 돌본다는 이야기와 닮았습니다. 방치하지 않는다는 의미죠. 어느 구석, 어느 모퉁이 하나도 대충 두지 않고 정성을 들여 돌보는 것. 그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삶을 대하는 방식이자 행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40-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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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취향 찾기


센스가 없다는 말 뒤엔 나의 귀찮음과 게으름이 있었다. 잘하는 사람은 타고난 것에 노력을 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내가 좋아하는 것엔 지속적인 관심이 있었고, 그렇기에 더 좋아할 수 있었던 것인데, 집순이가 집을 방치한 채 두었으니 생활 속 활력이 생길 리가 없었다. 주말이면 종일 지내는 공간이 익숙한 편안함만 빼면 아늑함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볼래야 볼 수 없는 곳으로, 그렇게 삭막한 상태 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왔었다. 항상 집으로 가고 싶어했지만, 그 집은 내가 돌아갈 곳이기에, 나의 가족이 있는 곳이기에, 나의 쉼이 있는 곳이기에 원했던 것뿐이었다. 그 공간을 사랑한 적은 없었다.


고요님이 어릴 적 살았던 집에 대한 묘사를 보다보면 한적한 오후의 따스한 햇살이 머무는, 참 좋은 집이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내가 늘 꿈꾸던 집 같은, 뭔가 과하지 않고, 안락한 느낌의 집.



사람들은 자가인가 전세인가 월세인가에 따라 집 가꾸기의 적극성과 주저함이 달라질거라 생각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게 현실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어진 상황에 맞춰 하면 좋을텐데 늘 상황은 여의치 않기 때문이다.


이때 공간을 가꾸는 저자의 마인드는 얼마나 오래 살 것인가, 내 소유의 집인가와는 상관없이 지금 내가 머무는 공간을 편안하고 좋아하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의 중요함을 말한다.  


이것저것 모든게 완벽하게 맞춰진다면야 정말 좋겠지만, 세상엔 꼭 내맘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이건 결국 선택을 해야만 한다. 완벽함을 바라지 아니하고,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선에서. 그렇기 위해선 나만의 취향이 있어야 한다. 이에 나는 취향이 딱히 없는데...라고 생각하며 책장을 넘기자 바로 취향은 어디서 찾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기가 막히게 좋은 구성이다. 앞선 내용에서 생긴 물음을 바로 다음 장에서 해소할 수 있도록 되어 있으니 말이다.


저자는 지내는 사람의 본질이 담긴, 생활패턴에 따라 탄생한 공간, 즉 유행에 휩쓸리지 않는 나만의 것, 취향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럼 나의 취향을 어떻게 찾는 게 좋을까. 저자는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는 지 알아가고자 할 땐, 일단 따라 하고 싶은 공간 이미지를 찾는 것을 추천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계속 눈에 들어오는 스타일이 있을 것이고, 그 스타일이 눈에 들어오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방법 중 하나인 핀터레스트를 통해, 각 이미지간의 공통정을 찾아볼 수 있게 된다. 이어 나만의 무드보드를 만들어 시각화하면, 결국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담아 집을 가꿉니다. 나를 닮은 우리 집이 진정성 있고 따뜻한 공간이면 좋겠다는 마음으로요. (68쪽)


# 실천으로 옮기기


먼저 손쉽게 시도할 수 있는 것들부터 변화를 시도해본다. 침구나 커튼, 패브릭과 소품을 바꾸는 것부터 시도해보는 것이다. 그리고선 정리하는 작업에 돌입한다. 기준은 내가 손을 댈 수 있는 분야부터, 하나씩 차례대로. 잡동사니 정리에서도 내가 쉽게 손을 댈 수 있는 부분부터 시도해보는 것. 남겨야 할 것들과 버려야 할 것들의 분류 작업을 하면서 사랑하고 아끼는 물건만을 남기는 것이다. 



언제나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비움'. 공간을 구성하며 집중해야 하는 것은 물건보다는 전체의 분위기다. 물건은 채워 넣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솎아내는 대상이자 치열한 겸열의 결론이어야 한다. 비운다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인지 공간에 대해 오래 고민해본 사람들은 알고 있따. (92쪽)


간단하게 말하자면 제가 생각하는 정리정돈이란 '물건을 정리하고 사랑하는 것들을 남기는 작업'이자 '물건의 제자리를 정해주는 작업'입니다. 정리와 정돈 작업으로 나누어 생각해볼게요. (93쪽)


# 인테리어 계획


본격적인 인테리어 계획에 들어갈 땐, 그대로 둘 것과 바꿀 것을 정하고 시작해야 한다. 인테리어를 생각할 땐 그 집에서 어떻게 생활할 것인지, 공간별로 나의 생활 패턴을 돌아봐야 한다. 라이프스타일은 사람마다, 시간과 가치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나의 일상을 떠올려 볼 때 더 확연히 그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 또한 나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일에 가깝다. 


그리곤 나의 취향별 모아놓은 무드보드에서 실현가능한, 지금 나의 공간과 비슷한 부분을 찾아 원하는 디테일을 실행으로 옮기는 것이다. 저자는 좋다고 생각하는 남의 것의 일부분을 따라한다고 해서 그대로 똑같이 실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는 곧 '나다운 것'이 된다고 말한다. 내가 가진 물건들과 어우리질 때 말이다.


# 스케치 작업


상상했던 부분들을 실제로 스케치 작업을 통해 하나씩 실현 가능성을 더해가본다. 실측 사이즈를 알면 더 구체적은 계획을 세울 수가 있다고 한다. 


사실 스케치의 의미는 똑같이 꾸미는 것에 있지 않고 공간의 성질과 분위기를 정하고 설레는 상상을 시작하는 데에 있어요. (156쪽)


# 바꿀 수 있는 것들 한에서


고치기 어려운 것들을 굳이 다 바꾸려고 애쓰지 마세요. 저희 집 같은 경우도 낡은 느낌을 굳이 감추지 않고 적당히 드러내서 전체적인 분위기가 친근하고 따뜻하게 느껴지도록 인테리어를 했어요. 정성이 조금만 들어가도 집은 확실히 달라집니다. 우리는 시공 전문가가 아니니 어찌할 수 없는 것에 너무 힘을 쏟을 필요는 없습니다.  

(177쪽)


초보자가 쉽게 도전할 수 있는 것에는 페인팅이 있다. 페인트의 속성에 따라 여러가지 선택사항이 달라지겠지만, 이를 실행하고 몸소 느껴봄으로써 얻어지는 효과도 분명히 있을 것 같다. 


물론 이또한 깨끗하게 청소를 끝낸 뒤, 곰팡이 등을 모두 제거한 뒤에, 하는 게 중요하다. 결국 정리정돈 작업이 가장 기본으로 돼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공간별 페인팅 작업과 가구, 소품 배치, 타일을 붙이는 작업 등을 셀프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전해주고 있다. 좁은 공간을 나누고, 조명을 바꿔주고, 스프레이 작업 등과 같이 실제로 하나씩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다. 이런 실전에서 흥미와 보람을 느끼지 못한다면, 인내심이 부족한 사람들은 쉽게 포기할지도 모르겠다(나와 같은 사람?).



# 좋아하는 것들과 함께


좋아하는 물건을 하나씩, 차근히 모아 채워넣는 작업이다. 이를 테면, 이건 꼭 있어야 하는 것이라든지, 계속해서 눈에 밟히는 것들을 하나씩 골라 넣는 작업이다. 나도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는 책장과 푹신하고 편안한 의자는 꼭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어서 공감이 갔다. 


저자는 매일 마주하며 쓰는 것들일수록 더 신경써서 골라야 방치되지 않을 수 있다고 한다. 



# 가꾸며 살아가는 것



우리 집에 와본 지인들은 매일 세팅을 하면서 살면 피곤하지 않냐고 묻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저는 집이 어느 정도 집다운 모습을 갖추게 될 때까지 들였던 고민과 노력의 과정을 '생활감'이라는 이름으로 간단히 망가지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여 있고 아름다운 상태, 그 자체가 본래의 모습인 집을 꿈꾸었기 때문이에요.  (242쪽)


(…),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다 저를 위해서입니다. 아침에 습관적으로 물건들을 살피면서 저녁에 다시 돌아올 나 자신을 생각해요. 이 집에 들어와서 기분이 좋겠구나, 하고요. 나를 돌봐주는 거죠. 피곤하고 지친 몸과 마음으로 돌아올 나를 위로하는 것이고요.  (245쪽)


나를 위한 공간을 위해 품을 들이는 일은 어쩌면 수고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상태의 공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했을 때 느껴질 나의 감정도 그대로 상상이 된다. 나라도 내가 좋아하는 공간은 오래도록 변치 않은 모습으로 있어주길 바랄 것 같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역시 부지런해질 필요가 있다. 좋아하는 공간을 얻는 일이란 그리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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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나의 공간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렇게 머무는 공간에 대한 청결성만 생각하면서 정작 그 공간이 주는 느낌이나 분위기에 대해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나의 공간을 가꾸는 건 즉, 나의 삶은 가꾼다는 것과 같다는 말에 너무 공감이 갔다.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며 돌아오는 곳이 아늑하고 편안한, 바라보기만 해도 좋은 공간으로 있어준다면, 그런 것 또한 바로 행복이 아닐까. 


공간 디렉터일을 하는 저자는 자신이 어떻게 공간을 들여다보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직접 실천에 옮기게 되었는지, 취향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차근히 하나씩 말을 건네듯 전해준다. 때론 타인의 시선들 때문에 고심했던 부분들에 대해서도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 사람이 머무는 공간은 즉 그 사람을 뜻하는 것과 같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곳에 생각해보면 정말 지금의 나와 너무 닮았다. 의욕도 없고, 만사 귀찮고, 누적된 피로는 풀 생각도 못하고 그저 아무 표정없이 일상을 보내는 지금의 나의 모습. 그렇게 가꿔진 공간 속에서 사는 건 나의 선택과 권한 밖이라고 느꼈을 지도 모른다. 지금의 내게 과분한 사치같이 느껴졌을 지도 모른다. 오래 머문 그림자 속에 되려 편안함을 느끼듯, 변화가 두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은 실행으로 옮겨야 한다. 좋아하는 곳에서 살고 싶다면 말이다. 오랜 시간이 걸려도, 때론 원치 않는 방향으로 결과가 나오더라도. 하나씩 차근차근 해가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우선 나에겐 취향을 찾는 게 맨 우선일 것 같다. 돌이켜보면 한 번도 집안 분위기를 환기시킬, 인테리어를 찾아보지 않았다. 이건 나의 집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시도조차 무용지몰일 거라 생각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마음에 걸렸던 것은 한번도 바꾸지 않은 커튼에 있다. 벌써 이 십년이 넘게 낡은 패턴과 세월의 흔적 그대로 담긴 커튼을 그저 그 상태로 두기만 했었다. 


주변의 지인들도 커튼 정도는 쉬이 바꿀 수 있을 거라 말했지만, 나는 늘 낡은 집이라 틀부터 바꿔야 한다며 온갖 핑계를 댔었다. 귀찮고 게을렀기 때문이다. 내가 매일 쉬고 잠을 자는 공간이면서, 내가 늘 앉아 있는 책상과 맞닿아 있는 그 커튼을 이제 바꿔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지금 이 마음이 변하기 전에 나의 취향을 찾아 커튼을 찾아봐야 겠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휴머니스트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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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오늘은 나한테 잘합시다 - 어쩐지 의기양양 도대체 씨의 띄엄띄엄 인생 기술
도대체 지음 / 예담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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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의기양양 도대체 씨의 띄엄띄엄 인생 기술

 



일단 오늘은 나한테 잘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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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인터넷에서 '행복한 고구마라는 만화를 봤다흔히 말하는 비유처럼 황새를 쫓다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뱁새 이야기나백조를 꿈꿨던 미운 오래 새끼 같은 이야기 같았지만 결말이 조금 달랐다인삼 밭에 있는 고구마는 인삼이 아니라서인삼이 아니라는 걸 알아서 불행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인삼이 아니어도사실은 고구마였어도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꼭 누구처럼 성공하지 않아도멋지거나 예쁘지 않아도특별한 존재가 아니어도존재함으로써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그 지점을 바라볼 수 있게 한 그 그림이 정말 좋았다그런데 마침 이끌려 보게 된 책이 지금아니 늘 슬럼프 구덩이 속으로 몸을 구겨 넣는 나에게 주고 싶은 책이 되었다.

 

이번 생은 망했다며 넋 놓고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그냥 흘려보낸 시간들은 다시 되돌릴 수가 없는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포기하지도 못했다내 인생 단 한 번 운도 없었으니앞으로 한 번쯤 운이 트이지 않을까 기대해본 적도 있었다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까 고민해보았지만 나아지는 것도 없었다난 뭘 해도 늘 여전히 같은 모습이었고그래프가 요동치듯 기분은 수시로 바뀌곤 했으며어느 순간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이 세상에서 지워지고 싶었다.

 

내가 원해서 태어나고 싶었던 게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던 순간도 있었다주변에 지인들 중 워커홀릭이나 즐겁게 인생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며 지지부진한 생을 살아가는 데가 더없이 한심스러웠고그런 말이 그대로 나에게 화살처럼 날아와 내 마음에 박히기도 했다뭐라도 하지왜 집에만 있냐는 말도 많이 들었다그런데 잘 모르겠다확실한 건 태생이 집순이라는 것과 게으름을 지표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서 성실히 최선을 다하며흘러가는 시간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삶... 지금껏 이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크게 바뀔 것 같진 않다그래서 나쁘다고 손가락질 받을 건 아니지 않을까답답해 보여도 이게 내 삶의 방식일 수 있으니까.

 

집순이 기질이 다분한 도대체 씨의 삶의 기술이라고 해야 하나살아가는 방식이 나와 흡사한 부분이 좀 많았다그래서 더욱 공감하고 지인으로 알고 지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앞서 '행복한 고구마'를 그릴 수 있는 통찰력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에 매력이 더했다군데군데 스며있는 유머와 사고방식이 긍정적이었고물론 긍정적이기 위해 노력한 것일 수도 있지만기본적으로 건강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책은 총 6부로 나뉘어져 있고제목과 파트별 타이틀도 어찌나 공감이 가든지. (1부 어쨌든 출근은 해야 2부 장점은 있어 3부 이러려고 이렇게 사는 게 아닙니다! 4부 망한 걸까 5부 이 와중에 즐거워 6부 무엇이 되지 않아도이건 꼭 같이 나눠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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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 보낼 때 자주 드는 생각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니참으로 기발하다한 수 배워가는 기분.



그동안 매일같이 사간 여행을 하고 있었다니스스로 대견하다.



이건 마치 영원불변의 법칙 같은...



이런 생각으로 몇 년을 잠 못 이루고 보냈는지...



가질 수 있는 게 충분해서 기쁘네...



애송이다운 '폴짝이 포인트



소름 끼치게도 한심하지 않았던 적이 없다.




매일 가는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다이어트 글을 북마크할 때의 기분이다.

 


그건 바로 인생의 진리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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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는 일을 찾는 게 너무도 어렵다하지만 만약 찾게 된다면이제 스스로를 그만 괴롭힐 수 있을 것 같다.


바보가 아니야, 47

 

나는 그대로였다더 이상 돈 계산을 하지 않아도 되고운송 프로그램을 다루지 않아도 되고어제 잠깐 본 사람들의 얼굴을 오늘 다시 기억해내지 않아도 될 뿐이다해야 할 일이 달라졌을 뿐이었다나에게 맞는 일을 맡았을 뿐이다그 이유만으로 나는 더 이상 바보가 아니게 되었다.

 

전에는 지긋지긋 했지만 이것마저 못하는 시절 속에 살아보니 매일 노동을 할 수 있는 것이 무척 감사하다.


일상의 힘, 54

 

누군가는 한없이 슬퍼할 자유도 없는 월급쟁이의 비애라고 할 것이다그러나 나는 그것이 일상의 힘이라 믿는다.

 

게으른 동시에 죄책감을 느끼는 행태를 너무 자주 반복한다어쩌면 파멸의 순간이 자주 찾아오는 것도 견딜만한 지옥에 있기 때문일지도이게 다 게으름 DNA 때문이다.

 

애써 괜찮다고 위안하며 그냥 살아가고 있는 것일 뿐.


먹고살 건 많아, 163

 

사람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정말 괜찮은 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그러나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뾰족한 수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삶은 너무 고달프다그러니 서로에게 혹은 자신에게 건네고 있는 것이다격려하듯위로하듯확인하듯다짐하듯조용히 달래듯먹고살면 됐지먹고산다는 게 어디야먹고사는 게 중요하지야야먹고살 건 많아.

 

하지만 사실은

당신도 이미 알고 있듯 정말 괜찮지는 않은 것이다.

 

하고 싶을 위해서라면 하기 싫은 일은 감내할 수 있을 것 같다근데 하고 싶은 일이란 뭘까.


종합세트, 232

 

이젠 인생의 모든 순간을 내 마음에 드는 일로 채우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물론 그러면 좋겠지만 아마 그런 삶은 여간해선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그냥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 순간을 견딜 수밖에인생은 종합세트이니까.

 

나도 내 스스로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많다이해 못할 타인의 삶까지 관여하고 싶지 않다이런 사람이 있다면 저런 사람도 있겠지.이해보단 인정으로.


이유를 묻지 마세요, 253

 

우리는 서로를 꼭 완전히 이해해야 할 의무도이해시켜야 할 의무도 없다그냥 서로를 바라보며 각자의 삶을 살아가면 된다. ‘재는 그런 사람인가 보구나’ 하며.

 

그런 와중에도 욕심은 잘 버려지지 않고여전히 부족하지만그래도 받아들이는 자세를 가져보려 한다.


별수 없죠, 264

 

나에게 맞는 수심과 유속의 강을 찾으면그때 배를 띄울 수 있을 거라 믿으며조금씩이라도 내 배를 만들어가고 있을 수밖에 없다.

영영 배 같은 거 띄울 날이 오지 않을 수도 있겠지.

그렇대도 그렇다면 별수 없죠’ 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한정되어 있을 테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외쳐보는 것이다.

 

좋은 책을 읽고 나누고 싶을 때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을 하고 싶어진다하지만 책 선물은 마치 내 취향을 강요하는 것 같아 저어 될 때가 많다그래서 어느 순간 잘 안 하게 되는 것이다하지만 도대체 씨의 이 책 만큼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다안 그래도 고된 삶나부터 스스로에게 너무 심한 채찍질은 이제 그만 두고서 ''부터 살펴보는, ''에게 잘하는 삶을 살아보자고 말해주고 싶다.


 


(이 리뷰는 위즈덤하우스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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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개와 같은 말
임현 지음 / 현대문학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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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살아간다는 것과 부끄러움에 대하여,



그 개와 같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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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젊은작가상 대상을 수상한 임현의 첫 소설집엔 10편의 단편이 실렸다. 임현이라는 작가는 생소했지만, 그를 알리는 첫 작품집이 기대가 됐다. 한데 실린 단편들을 차례차례 읽어나갈 수록 혼란스럽기도 했고, 난해하게 느껴지기도 했으며, 살짝 가미된 유머에 웃어보기도 했다. 


몇몇 작품들 속 인물들은 무언가를 표현하고, 글을 쓰고자 했다. 이는 꼭 그 인물들이 작가의 분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읊조리듯 말하는 어조는 마치 혼잣말하는 것처럼 보였고,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된 게 다수 차지하고 있어, '나'라는 하나의 자아 속 여러 내면의 모습들이 세분화되어 여러 군중 사이에 스며들어 있는 듯한 인상을 줬다. 날 것의 경험들을 토대로 하나씩 지어진 이야기들이 때론 엇갈리듯, 때론 정방향으로 쌓여 올려져 있었다. 


그 개와 같은 말은 무엇일까, '개'같다는 말은 보통 잘 풀리지 않는 고통같은 상황이 닥쳤을 때 나오는 표현 아닌가. 이를테면 어머니보다 더 먼 미래를 본 아이가 자신의 미래를 알기에 고통스러워 할 때? 제자와의 일방적 관계를 비겁한 변명으로 회피하려고 할 때? 아무렇게나 베껴쓴 글이 다시 돌아와 나를 괴롭힐 때? 끝을 암시하는 꿈을 꾸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때? 말로써 사람을 찌를 때? 소중한 사람을 지켜주지 못한데서 오는 비루함과 자책? 오해의 소지를 안고 살아가야 할 때? 매순간 불안을 떨쳐낼 수 없을 때?일까. '개'같은 삶은 순간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가능한 세계>

 

뇌종양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아버지의 죽음 뒤로 홀로 남겨진 모자(母子)의 이야기이다아홉 살 소년인 나는 무척 똑똑한 아이다한편으로 앞날을 내다보는 예지력을 가졌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이를 이상증세로 보는 어른들나는 어머니의 뜻대로 상담을 받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자신이 테러리스트가 될 운명을 타고난 것처럼본 것 그대로 실행이 될까 두려워하는 소년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난 인물로 인해 변수가 생길 수도 있다고 하지만, 다가올 일들을 알고 있기에 여러 변수와 맞닥뜨릴 때마다 열린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 때문에 여러 변수와 가능성을 염두에 두게 된다면얼마나 고된 삶이 되겠는가소년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기록하는 것과 무관하게어차피 일어날 일은 어떻게든 일어날 거란 생각이 든다이를 직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결국 불행한 미래를 바꾸기 위해 여러 가능성을 닫아 두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이란과연 이라 할 수 있을까.

 


<고두>


<고두>는 화자가 직접적으로 말을 건네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군대에서 사고를 당해 유공자가 된 아버지아버지의 당당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태도를 빌어 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고백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정의도덕아버지와 같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삶을 살지 않겠다는 신념그런 믿음을 설파하던는 연주와의 관계에 이르렀을 때 자기합리화와 이기적 변명만을 늘어놓는다과연는 아버지와 다른 태도로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부정한 자들의 도덕과 정의, 그들이 생각하는 올바른 세계에 대한 믿음그런 현실의 일면을 화자의 언어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사람들은 적극적인 혐오를 통해 그 세계 바깥에 존재한다고 믿는 착각 속에 살고 있다면서 말이다.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인간으로서 도덕과 윤리를 마땅히 지켜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결국은 다 자기만족이란 허울만 남게 되는 것은 아닌지. 소설보다 더 충격적인 현실 속 사건들처럼 많은 질문들을 던지게 된다.

 

모든 이타적인 행동에는 이기적인 의도가 숨어 있단다선물을 준다는 것은 돌려받을 대가를 바라서이고 남을 위한 칭찬은 곧 나의 평판으로 이어져서 훗날을 도모하는 밑거름이 되지알아듣겠니지금 당장의 손해처럼 보이는 행동들이 나중의 이익을 담보하게 된단다손해 아니라 투자선물 아니라 거래. 32-33

 


<엿보는 손>

 

나는 어느 모임에서든 주목을 받길 원하지만 늘 소외받는 인물이다. 이와 반대로 실제로 그 유명세를 누리고 있는유제호에게 강력한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 어느 날 나는 유제호의 신작 소설이 자신의 작품과 유사하다 못해 동일한 것을 보고 흥분하여 이 일의 진위를 따지고자 한 통의 메일을 보내게 된다유제호라는 인물이 자신의 아버지의 자서전이야기나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하며,‘를 만나고 싶었으며앞으로도의 이야기를 예상하여 쓸 수 있을 정도의 경지에 다다랐다고 말한다유제호를 만나러 그를 찾아간 날그의 집에서 발견된 원고는 내가 행동하고 저질렀다고 믿을 법한 일들이 서술되어 있고방문 너머로 존재하는 건 그의 사체일지아님 텅 빈 공간일지 알 수 없는 채로 끝이 맺어진다.


해프닝의 가벼운 분위기로 시작된 소설은 화자의 자리를 재배치함으로써 사실 진위 여부의 책임을 독자에게 전가한다뭔가 익숙한 듯 독특한 형식의 소설이다.

 

 

어떤 책은 누군가의 삶을 완벽히 뒤바꾸어놓기도 합니다그러나 그 경우저자의 능력보다는 독자의 잠재력이 더 요구되는 것 아닙니까제아무리 훌륭한 고전이라 한들 그걸 읽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평가가 다른 것 아니겠습니까.잠언시집 한 구절에 새삼 감동을 받았을 때는그 책의 무게감 때문만이 아닙니다마침 그런 위로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81

 


<좋은 사람>

 

어떤 사람을 안다는 것은 어느 정도까지 깊이 연관되어야 된다는 뜻일까. 자주 표현되는 '좋은 사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소설이었다영화를 찍는 우재와 글을 쓰는 나이야기의 중심은 우재가 영화 제작비를 벌기 위해 한 아이스크림 광고 공모전을 준비할 때 도와줬던 후배의 죽음에 두고있다자신의 식당을 촬영장소로 내어준 남자와 연기를 했던 후배그리고 메인으로 촬영을 돕게 된 나나와 우재는 어떤 면에서 많이 닮았기 때문에 더 잘 맞기도 했고더 잘 틀어지기도 했다.


후배의 죽음을 알린 우재는 에게 화를 내며 후배를 좋은 사람의 칭하는 부분에 대해 지적한다. 이에 나는 자신과 우재가 겪은 조난에 대해 부풀리듯 말하던 우재의 모습이 떠오르게 된다.


생각해보면 대개의 경우 그랬다알고 있지만 정말 잘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일반적인 관계 속에서 죽음이라는 틈이 생겼을 때나중에 회상하기를 '좋은 사람인데 안 됐다'라고 말을 하곤 했다. ‘좋다좋은상태로 간략히 하나의 테두리 안에 그를 가두고서그 외의 다양한 일면들을 생략된 채. 애도의 상투적 표현으로 사용해왔던 건 아닐까좋은 사람이란 무엇일까잘 알지 못함과 최선의 애도의 표현은 이렇듯 함부로 하는 배려가 되어 버린다무심코 말해버린 것들 속에서.

 

“()넌 아무것도 모르잖아원래 질이 나쁜 사람일 수도 있는데 그런 사람이 죽으면 너는 뭐라고 말할 건데네가 뭘 안다고 그렇게 말해왜 다들 무책임하게 좋았다고만 해불쌍하니까씨발 존나 불쌍하니까 다 잊어버리고 좋은 것만 생각하라는 거야뭐야그럼 좋은 사람 이외의 그 애는 다 어디로 가는데어떻게 좋은 게 그 애의 전부야왜 함부로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

 


<무언가의 끝>

 

털이 붉은 토끼 꿈과 죽음들아버지의 열의가 담긴 집, 그 집에선 형과 형수, 가 살았고, 종국엔 나만 남게 되었다아버지의 죽음지하 방에 세 들어 살던 어떤 남자형의 사고그 집에 세를 주며 살고 있는 나다양한 세대가 살았지만이젠 덩그러니 나만 남게 되었다가까운 죽음들 앞에 항상 꾸었던 털이 붉은 토끼 꿈남겨진 자들의 삶형수와 나의 삶이 차분하고 나른하게 이어진다

묘한 잔상꿈 이미지와 함께 이야기들은 대체로 산발적으로 흩어진 느낌이 들었다. 어떤 ‘에 대한 이야기인가책임에 대한 이야기인가갈피를 잘 못 잡겠다어떤 여운이 남는 듯한데 무엇 때문인지 잘 파악되지 않는게 아쉽다.

 

그리고 나는 그 일에 대해 아주 잊고 살다가 어떤 장면들 속에서 섬뜩해지는데 이를테면 지하철을 탔다가 노약자석에 앉은 젊은 여자에게 폭언하는 노인을 보면서친절하지 않다고 뺨을 맞았다는 마트 직원의 일화 같은 것을 들으면서 그게 그렇게 나쁜 일인가 나쁘긴 나쁜데 진짜 나쁜 일이라면 누가 그 노인에게 욕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는가 친절하지 않은 것과 뺨을 때리는 것 중 뭐가 더 나쁜 쪽일까 생각하는 중에 그 남자를 자꾸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누가 더 나빴던 것일까. 139-140

 


<그 개와 같은 말>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상대의 약점과 흠을 낼만한 말들을 잘도 찾아내서 한다는 어느 소설의 구절이 떠올랐다그건 참으로 무섭고 비참하게 만드는 말들이다. '나'는 세주와 대화 하던 중 연경에 대한 일화가 떠올랐고어릴 적 하천에 내던져진 개가 떠올랐고철교 밑 허술한 집이 떠올랐다매일 같이 스쳐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 중 인연으로 엮일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기본적으로 더 각박해진 느낌이다기본적인 예의 같은 것들이 상실된 기분그래서 안그래도 잘 그려지지 않는 앞날이 비참하고 무섭게 느껴지는 게 아닐까이를 테면 그 개 같은 말처럼 말이다.

 

미혼모라든가장애인 같은 말들이 나는 무서워요그런 것들은 언제고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인데 그게 내가 될까봐 무서운 거지.()언젠가 버스에서 기사와 다른 운전자가 싸우는 것을 보았는데 그 사람이 기사에게 평생 버스나 운전해라,라고 말하는 거예요나는 그 말이 너무 슬퍼서 이봐요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화를 내고 싶었지만 못했어요.()주의가 산만하고 수업에 방해가 되길래 단순히 경고 차원에서자꾸 이러면 부모님 모시고 오라고 한다겁을 주려고 했던 건데그 녀석이 조금도 기죽지 않고 생글생글한 얼굴로선생님은 계약직이잖아요하는 거예요.(선생이라는 것이 생선처럼 비리고 값싼 말처럼 느껴졌어요그리고 이제껏 그 아이가 나를 어떻게 보고 있었나 생각하니 무섭더라구요정말 비참하고 무서운 기분이 들었어요.”

 


<거기에 있어>

 

신혼여행 길에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한 무영과 은우무영은 한쪽 팔을 잃게 되고은우는 기억하지 못한 채 무언가를 잃어버리게 된다일 때문에 바빠진 은우와 강박 증세를 보이는 무영변한 무영을 견뎌내는 것이 홀로 남겨진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은우비참하고도 슬펐고폭력적이어서 더 아프게 느껴졌다긴장감 속 차분하게 이어지는 은우의 진술은 앞으로 밝혀질 사건의 진실을 대해비참한 고통을 더해주었다아무 일도 없다고 말하는 은우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믿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모든 게 그날의 일들로부터 시작된 것이다이렇게 미루고 나면 원망할 수 있었다뚜렷한 대상이 있었고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체념할 수 있었다누가 불행의 원인을 스스로 짊어지고 싶어 하겠는가그럴 바에야 희생당한무능한 존재로 남는 편이 나았다. 199

 

잃어버린 것이 있었다. 분명 그날 이후로 은우는 무언가 잃어버렸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은우는 알지 못했다.
어느덧 호숫가의 인적은 바람에 쓸려 간 듯 모두 사라져버렸다.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더 어두운 무영의 형체만 서 있을 뿐이었다. 은우는 묻고 싶었다. 당신이 오역한 문장을 고쳐놓은 것을 보았느냐고. 아직 무영은 그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늦은 가을이었다. 은우는 혼자 남는 일이 가장 두려웠다.  201쪽

 


<>

 

기억의 왜곡앞선 이야기 속 뺑소니 사건의 목격자의 진술 다시 등장한다이번엔 그 목격자 본인의 이야기로남편과 닮은 사람의 목격담이 종종 들려오는 와중에 한 뺑소니 사건을 목격했다며 진술에 임하는 남편뭔가 어색하고 의뭉스러운 면을 보이며자신을 꼭 닮은 사람을 봤다며 불안함을 보인다. 자신이 단독자로써 존재치 못한다고 믿는, '닮는다는' 것에 대한 불안은 점점 심해져간다. 불안함이 전이된 듯 역시 혹시 홀로 버려질까 불안해하게 된다.



<말하는 사람>

 

한 때 화목한 가정을 꿈꿨던 나와 문영은 오래전에 멀어졌다관계나 현상에 대해 몰두하는 문영은 언제나 글을 쓰고자하며, 세상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려 한다재혼한 남편에게서 폭행을 당하는 어머니의 무언의 의중에 따라 모른 척 했던 나는 그 불행에 일조하는 것이 되었을까문영과는 왜 가정을 이루지 못했을까문영의 마음속에 남은 어릴 적 초대되어 갔던 친구의 집, 가난한 살림의 풍경에서 뛰쳐나간 기억그리고 그때의 미안한 마음과 부끄러움을 회상한다문영에게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털어놓았다면 달랐을까문영은 어떤 식으로 말해주었을까.

 


<불가능한 세계>

 

부정적 상황을 가정하며 의기소침하는 소진과 그와 반대로 지금의 안온함과 불행과의 거리감에 안심하는 민재. 소진은 자신이 자꾸만 달아나려 했기에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이 남아있다. 아버지마저 잃게 될까 전전긍긍하는 것과 달리 소진의 아버지 장 교수는 연구에만 몰두한다. 이 연구의 문제점에 심각성을 알지 못한 채, 늙은이 취급만 한다 여기는 딸과 매순간 부딪히기만 한다. 아버지와의 불화가 잘 해소되지 않은 채 감추고 싶은 것들까지 민재에게 들키게 된 소진은 결혼기념일을 앞두고 한 임신에 대해서도 불안해한다. 민재는 소진의 과도한 불안과 의심이 걱정스럽기만 하다.

 

그들에게 문제가 될 만한 것은 거의 없어 보였다. 당연하고 일상적이며 전혀 도드라진 데가 없는 생활이었다. 이런 식의 사소한 견해 차이조차 어느 가정에서나 겪고 있는 평범한 갈등일 뿐이었다. 다만 그런 것들 가운데 언제든지 다르게 보일 가능성이 남아 있었다. 아무도 없는 거실에서 혼자 자신의 이름을 불러보았을 때 소진은 왜 이제껏 한 번도 그래보지 못했나, 내가 나를 부르는 것뿐인데 무슨 이유로 슬퍼지는가, 전에는 하지 않았던 생각에 빠져버린 적도 있었다. 265쪽

 



 **



대체로 일상적인 대화 속에 파고드는 균열과도 같은 아득한 틈이 느껴지는 주제가 군데군데 들어가 있었다. 명확한 점도 있었지만 모호한 점도 있었다. 이러한 모호성은 소설의 특성보다 시적 특성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모호함 그 자체가 어느 부분에선 시적 세계를 더 확장시키는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소설에서 그런 특징이 느껴지는 것에 조금 당혹스러웠다. 손에 잘 잡히지 않는 이야기들이라 먼 듯 했지만, 어떤 부분에선 더없이 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확실한 건 그저 쉽고, 가볍게 읽어나갈 수 있는 작품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개성이 분명해 읽는 이로 하여금 호불호도 많이 갈릴 듯 같기도 하다.


여러 단편들 가운데 가장 많이 얼굴을 드러낸 것은 '부끄러움'이었다. 인간이 부끄러움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일까, 윤리와 도덕은 그러한 면에서 비롯된 것일까, 고민해야 할 주제가 연달아 등장한다. 


이야기 속 인물들이 부끄러움을 느끼는 순간은 대개 타인에게 어떤 식으로든 민폐를 끼쳤다고 인식하는 순간이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들키고 싶지 않았던 면을 보게 되었거나, 의도치 않게 파헤친 형국이 되었을 때 주로 발동되는 것 같았다. 아직 풀리지 않은 실마리들 투성이다. 

한편으론 '개'같은 상황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부끄러움이 나타나는 것 같기도 하다. 겉에 드러나 있는 것들, 그 사람을 보여주는 것들은 거창한 수식어나 가정환경, 학벌 같은 부수적인 것들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에 있다는 것을. 때때로 쉽게 오해하고, 보이는 것만 보고, 쉽게 배려라는 것을 하기 때문에 발생되는 '개'같은 순간들. 그 순간엔 그 사람의 안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배려가 정말 배려가 되고, 감춰진 것들 속에 빛나는 무엇의 진가가 발휘될 수 있도록 말이다. 


아직도 뭐가 뭔지 잘 알지 못하는 것들 투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집은 큰 여운을 남긴다. 반드시 생각할 거리를 던져둔 채 유유히 뒷모습을 보이며 사라져간다. 읽어나가는 와중에도 풀리지 않은 것들에 대한 난항이 거듭됐지만, 좋은 작품임은 확실하다. 계속해서 생각하며 곱씹게 되는 책이기 때문에...소설가 임현의 다음 작품도 기대해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리뷰는 현대문학 출판사의 '문학독후'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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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기쁨
에릭 엠마뉴엘 슈미트 지음, 류재화 옮김 / 열림원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인간 내면의 틈삐걱거림을 들여다보는, 



『검은 기쁨』










**



4편의 단편이 실린『검은 기쁨』은 2010년 공쿠르 단편소설상 수상작이다. 이 명예로운 상을 수상한 것과 별개로 소설에 대한 소개글에서 각 단편들이 가진 이야기 속의 긴장감이 궁금해 이 책을 읽어보게 됐다. 




<생 소를랭의 이상한 여인>

 


한적한 시골 마을, 노부인 마리 모레스티에는 유명세를 누리는 인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세 번 결혼하고 세 번 모두 사별한 후, 죽은 남편들로부터 많은 유산을 물려 받은 것도 모자라 젊은 애인과의 관계 또한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그녀는 법적으로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녀가 남편들을 독살했을 것이라 의심한다. 소문과 시선과 유명세 모두 당당히 즐기며 살아가던 그녀는, 어느 날 아름다운 외모의 청년 신부 가브리엘이 마을에 부임해오자마음의 큰 변화를 겪게 된다젊은 주임신부의 관심을 독차지하기 위해 그녀는 그동안의 사건에 대한 고해성사를 하게 되고이내 그를 혼란에 빠뜨리다가브리엘의 간곡한 설득 끝에 한 그녀의 선택이상한 망상과 착각의 말로는 어떻게 될 것인가.

 


마리 모레스티에는 말 그대로 이상한 여인이다. 70세 노부인이 젊은 청년에게 과한 망상과 호감을 가지는 것이 대체로 잘 와닿지 않았다. 너무 먼나라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실제로도 그러겠지만. 하지만 사실 그녀는 그 누구보다 욕망에 솔직한 여인이었던 게 아닐까 싶다. 똑같은 가면을 쓰고 서로를 대하는 사람들범죄자로 의심하면서 호기심은 거두지 않고같은 공간에 있는 것에서조차 거부감을 느끼면서도그녀의 유명세를 이용하는 마을 사람들마을 사람들이 마리에게 그러했듯이마리 또한 자신이 행한 것과 달리 이런 유명세를 즐겼으니 말이다. 가브리엘의 설득에 자신의 숭고한 정신의 성녀가 된 것처럼 착각하는 마리의 마지막 선택은 어쩌면 당연하게 느껴진다. 그녀의 욕망은 잠시 불타올랐다 이내 사그라들었고, 그렇게 계속 반복해왔던 것이 아닐까.

 

 

 

 

<귀환>

 

그레그는 화물선 그랑빌의 기관들을 점검하고 수리하는 기술자다. 악착같이 일을 하고 돈을 버는 것만이 자식들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던 무심한 인물이기도 하다. 어느 날그레그는 배 위에서 딸이 죽었다는 전보를 받게 되고네 딸 중 어느 딸이 죽은 것인지에 대한 생각에 빠진다더 사랑했던 딸 그레이스인가정이 안 갔던 미운 딸 조안인가아니면 조용한 큰딸 케이트제일 어린 막내 베티그런데 어느 딸이 죽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자신이 가장 아끼는 딸이 아니길 바라는 생각이 들자, 더 큰 고민에 빠지게 되는 그레그. 며칠 후 육지에 도착해 사실을 확인하게 되기까지그는 난생 처음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되고곧 번민의 늪에 빠지게 된다.

 

모든 부모가 완벽한 인격을 가진 것이 아니다또한 부모라고 해서 완벽한 인격을 가져야 하는 것도 아니다보통의 인간일 뿐인간이라면 아무리 평정심을 유지한다 해도 마음의 우선순위가 있을 것이다어쩌면 당연하게 간과했던 부분이 아닐까애써 아니라고 믿고 싶은 마음에부모는 모든 자식에게 평등한 마음을 나눠주고 있다고그레그가 자식의 부고소식을 듣고 자신의 네 딸 중 가장 아끼는 딸의 죽음이 아니길 빌었던 마음이 순간 튀어나왔음에 당황했던 것처럼부모 자식 간은 물론이고 형제 사이에서도 더 마음이 가고 잘 맞는 사이가 있고피를 나눈 관계임에도 남보다 못한 사이처럼 서먹하고 안 좋은 경우가 있다혈연관계의 민낯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사람의 마음이란또 사랑이란 이성과 논리의 기준으로 나눌 수도 없다.

 

가족에게서 늘 도망치듯 바다에서 삶을 이어갔던 그레그처음은 술주정뱅이 아버지로부터그 다음은 자신이 이룬 가정으로부터세상과 마주하기 두려웠고불신했던 만큼 시야도 좁았던 그다. 


선박그랑빌이 부두에 도착하고 익숙한 실루엣이 보이자존재의 상실에 대한 확인을 부정하고 회피하려 하지만결국 진실은 뜻밖의 것으로 다가온다그레그의 기억 속에 잊힌 존재였지만그로 인해 그가 새롭게 태어나듯 과거의 무심하고 지배적이었던 태도를 버리고다정한 아버지로 변화할 수 있게 되었다육지에서 멀어지려 애썼던 바다 위의 삶에서 육지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아내와 딸들은 이를 기적처럼 보았고앞으로가 더 나아질 것임을 암시하고 이야기는 끝이 난다.


 


그레그는 이런 생각에 놀라고 어이가 없어 털썩 주저앉았다전에는 한 번도 이렇게 순위를 매겨본 적이 없었다그런데 우선순위는 있었던 것이다겉으로 드러냈을까그레이스나 다른 아이들에게아니다이런 편애의 감정은 그의 마음 깊은 곳어두우면서도 활기찬접근할 수 없는 곳에 지금까지 자리하고 있었다. / 80

 

지금 그는 네 딸 가운데 어느 하나의 죽음을 바란 것 아니던가없어도 될 만한 아이를 고른 것 아닌가무슨 권리로누가 선장의 입에서 조안의 이름이 나오도록 허락했는가그애를 지목한 것은 살인자의 행위나 다름없지 않은가머리를 굴려 사람 죽이는 생각이나 하는 자가 아버지라 할 수 있나진짜 아버지라면 모든 딸들을 지켜내야 하는 법인데…… / 84

 


그레그는 예상치 못한 고통을 겪으며 비로소 생각하기 시작했다숙고라는 끝없는 노동이 그의 내부에서 일어났고 그는 녹초가 되었다겉모습이 바뀐 것은 아니다다만 과거의 그레그가 지금 그레그의 내부에 자리를 잡았다도덕적지적 의식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온했던 야수의 집으로 들어와 앉았다. /92

 

 


 

<검은 기쁨>

 


열아홉 크리스는 온갖 메달과 상최우수 타이틀을 휩쓸 정도로 우수한 피아니스트이다하지만 그 승리는 집착과 연습모방으로 얻어낸 것이라 생각하며, 동경하는 바이올리니스트 악셀의 진짜 연주에 열등감을 느낀다. 크리스와 악셀은 태국의 어느 섬에서 열린 캠프에 참가해 1위 자리를 놓고 경쟁을 하게 된다캠프 마지막 날 그들의 운명을 바꿔놓게 될 사고가 일어나고 크리스는 자신의 욕망과 열등감에 비열한 선택을 하고 만다이십 년이 지나악셀은 불구가 되어 성녀 리타 종교용품을 팔아 생계를 연명하고 있었고크리스는 문제 청소년들을 감호 치료하는 빌라 소크라테스에서 교육관으로 일하고 있었다복수의 칼날을 다지는 악셀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온 크리스서로 기대하고 상상했던 것고 정반대의 모습이 되어 마주하게 된 두 사람의 말로는 어떤 모습일까.

 

각자 서로에 대해 상대의 삶을 이상적으로 생각하며 살아온 두 사람, 크리스의 잘못은 되돌릴 수 없고, 이미 일어난 사건으로 불구가 된 악셀의 처지를 대신해줄 수도 없다. 마지막엔 우정으로 표현된 두 사람의 관계는 애증과도 가까운 것 같다. 너무나도 동경했기에 뺐고 싶었고, 이제 시간이 흘러 서로 뒤바뀐 처지에 복수는 의미 없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인간의 내면엔 그런 이상적이고 바른 것들만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삐뚤어지고 뒤틀린 채 고약한 악취를 풍길 법한 못된 것들도 존재할 것이다. 순간 순간의 선택에 의해 우리는 다음을 향해 나아간다.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것일까, 끊임없는 선택과 시험 속에서 인간성을 버리지 않고 진실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중심을 잘 잡아야 하는 게 중요한 것 같기도 하다.


나라면 어땠을까, 경쟁이 과열되는 이 사회에서 난 당연히 패배자로써 살아가지 않았을까. 만약 크리스만큼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1등이 되지 않고선 못 견딜만큼 강렬하게 열망했다면, 나는 과연 선한 선택, 당연한 인간의 도리를 다한 선택을 했을까. 



하나같이 반듯하고 비슷비슷해서 조화로워 보이는 다른 소년들에게서는 슬픔혹은 권태가 엿보였다왜냐하면 그들은 텅 비어 있었으니까그러나 악셀에게는 벼락같은 전격적인 에너지가 있었다정직하고공평하고 여유가 있고 과장된 것 같으면서도 엄격한 절제가 있었다어떤 정령과 공모하는 듯늘 자신감 있고 고상하며 멋진 우상처럼 밝은 빛이 났다. /102-103

 

이제는 사십 대가 되어 식탁에 마주앉아 있는 두 사람 사이에 큰 착각과 오해가 생겨나고 있었다각기 상상 속에서 그들은 서로 다른 사람이었다분명하고 결정적인 특성을 가진강한 개성의 인물은 각자 조각했던 것이다크리스에게는 악셀이 하나의 완벽한 정전正典이 되어 있었고악셀에게는 크리스는 성공의 한 전형이 되어 있었다상대를 대신하고 싶은 의지와 초월하고 싶은 의지가 뒤섞여그들은 각각 상대를 모델로 삼으며 삶을 건설해온 것이다그런데 이제 그들의 공상적인 건축은 무너질 위기에 있었다. /159-160

 

우리가 되어야만 하는 존재에 우리는 언제쯤 도달할 수 있을까젊은 시절에아니면 먼 훗날에지성과 기질은 주어지는 것이지만 우리 교육과 환경부모에 의해 길러지기도 한다성인인 우리는 각자의 선택을 통해 스스로를 만든다. /162

 

 

  

<엘리제의 사랑>

 


집시 성향의 카트린은 앙리를 만나 지금은 프랑스 영부인공화국 대통령의 아내 마담 모렐이 되었다자유를 잃고 사진 속 우아한 품격의 여성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에 신물이 나지만여전히 앙리를 사랑하는 카트린. 앙리의 정치생활에 이용당하고, 다른 여인에게 눈을 돌리는 것에 반해 더이상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카트린, 그의 약점인 대선에 활용된 정치 공작을 말하며 끊임없이 공격과 긴장 속 관계를 이어간다. 자신의 약점을 발설할까 두려운 앙리와 그의 질투와 두려움을 즐기는 카트린은 두 차례 의문의 사고를 겪고, 그로 인해 암 발병 사실을 알게 된다. 이내 사랑의 이름을 대신한 미움을 거둔 카트린은 교요히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미운 소리만 골라하던 두 사람은 카트린의 죽음 뒤에 출간된 앙리에 대한 사랑 고백을 담은 책을 통해 모든 오해가 풀리게 되고, 앙리는 과거와 추억을 회상하며 살아가게 된다. 


자유롭고 싶었지만, 자유대신 사랑을 선택한 카트린, 자신이 이용당했음에도 그의 질투까지도 얻고 싶어했던 카트린은 죽음을 마주하고, 앙리에 대한 진심을 적어나갔을 때의 심정은 어땠을까. 두 사람의 관계성은 특수해보이기도 하지만, 일부분의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서로에게 일말의 감정이 남아 있었기에, 끊임없이 자극하고, 질투하고 미워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면 그토록 서로를 괴롭히지 않았을 것이다. 너무 늦게 깨달은 자신의 마음을 추억을 회상하며, 카트린을 떠올릴 만한 것들 속에 파묻혀 살아가는 앙리가 어리석어 보이기도 했다. 


생은 늘 후회로 점철되어 있는 것 같다. 앙리가 뒤늦게 그의 사랑을 돌아봤듯이. 하지만 이런 점들이 바로 인간적인 부분이 아닐까 싶다. 사람은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자신의 결정을 되돌리지 못하기도 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도 한다. 아무것도 겪지 않는, 평탄한 삶을 꿈꾸지만, 좌절과 고통, 번민과 후회 등 겪고 싶지 않은 것을 겪으며 살아가게 된다. 그런 것이 삶이 아닐까. 매 순간 숱한 선택들로 인하여 또 다른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되는 것. 그렇게 자신을 알아가는 것이 살아간다는 것이 아닐까.


 

카트린은 자신의 삶이 일요일 오후 같다고 생각했다길고음울하고막연한 희망과 모호한 회한으로 가득 찬 느낌맛볼 만한 달콤함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좋았겠지만모든 게 너무 썼다.  /182

 

형식은 간혹 우리를 구제한다무질서에 위협받는다면 겉모습이라도 지켜야 우리는 혼돈 속으로 처박히지 않는다겉모습은 껍데기이므로 강하다그것은 버틴다그것은 우리를 버티케 만든다.  /227

 

감정은 겉감과 안감에 다 붙어 있다증오 없는 사랑이 있을까애무하는 손은 곧 단도를 쥐게 된다분노를 모르는 사랑이 있던가모순을 안은 한 충동 때문에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그 충동으로 삶을생을 전할 수도 있다우리 감정은 무엇에서 무엇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모호하게 뒤섞여 있다검은색과 흰색처럼모순 속에서 팽팽하게 긴장된 채때론 너울처럼 파동하고때론 구부러지며 흐르는 물처럼 최악이 최상이 되고 최상이 최악이 될 수도 있다.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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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되게 등장하는 성녀 리타는 역경과 고난에서 꽃피우는 상징처럼 보인다성녀 리타를 공통적으로 각 소설에 빈번하게 등장시키며, 말하고자 했던 모호성이 무엇인지 다 읽고 나서도 잘 와닿지 않았다. 이를 테면 나에게 좋게 느껴지는 것이 타인에게는 불행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인가. 양면성모순아이러니이러한 말들로 표현하는 대신 성녀 리타를 등장시킨 것 같다그가 등장하며 함의하는 바를 눈 맑은 독자가 알아낼 수 있길.

 

작가는 단편집을 일컬어 부케를 만들 꽃을 찾는 게 아니라 부케 역할을 하는 꽃을 찾는다고 말했다. 하나의 큰 틀과 전체적인 맥락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각각 별개의 세계로 보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작가의 말이 너무 긴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작가가 많은 것을 고백할수록, 독자로 하여금 상상하고 짐작했던 것들이 마치 문제풀이 답을 찾는 듯 해소시켜야 된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때론 궁금한 채로, 조금 모호한 상태로 계속해서 곱씹는게 훨씬 흥미롭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곧 좋은 길잡이가 되어주기도 한다. 일명 비하인드 스토리 같은 작가일기는 말이다. 창작노트라도 불러도 될 것 같다. 작가는 각 이야기마다 관계 속 긴장을 야기시키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이런 상황을 만들어낼 때의 희열도 느껴진다. 또한,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제유법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의 문장은 호흡이 길지 않고, 각각의 비유는 퍽 매력적이다. 


우리는 자유로운가에 대한 질문은 큰 공감이 됐다. 그건 우리만의 착각이 아닐까, 이미 많은 것들이 엉키고설킨 세상 속에서 내가 믿고 있는 자유가 실제로 그 효력을 발휘하는게 얼마나 될 것인가. 그건 '진짜' 자유가 맞는걸까. 


네 편의 이야기 중 가장 인간적으로 와닿았던 <귀환>이었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집 전체적으로 인간성을 다룬 소설들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지금의 우리는 우리가 내린 선택의 결과물이다. 내 인생의 첫 선택을 하던 순간이 떠오르기도 했다. 수동적이며 주체적이지 못했던 삶 속에서, 겪게 된 '상실'과 그로 인해 처음으로 '나'를 위한 삶, '나의 삶'을 생각해보게 됐다. 그때의 선택에 늘 감사하다. 그렇지만 여전히 휘청거리며, 또 흔들리면서 살아갈 것 같다. 


『검은 기쁨』이렇듯 여러 생각할 거리를 남기는 작품인 것 같다. 너무 훌륭한 작품이라는 듯한 수식없이도 이미 훌륭하다. 낯선 이름이었지만, 다방면으로 활동하는 작가이기에 다른 장르의 작품도 궁금해진다. 다음엔 그의 작품의 맨 얼굴만 들여다보고 싶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열림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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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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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여자들의 보통의 삶




『82년생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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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고, 도서관 예약순위, 대출순위가 아직까지 1위인 데가 많고, 베스트셀러 코너에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82년생 김지영』을 이제야 읽어보았다. 어느새부턴가 조용히 페미니즘 열풍이 불었다. 지금도 여러 곳에서 그 열풍이 점점 거세지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의 영역은 함부로 발을 들여놓기 어렵고 낯선 구석이 있다. 내가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숱한 차별을 겪었음에도 그게 차별인지 인지하지도 못한 채, 의문도 갖지 않은 채 그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삶의 부분부분에서 아주 익숙하게도. 


문학에서조차 여성의 언어를 가지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여성의 언어는 늘 모성성, 여성성이라는 테두리 안에 갇히거나 정의되고 말았다. 여성성에 대한 정의 역시 아직 불확실하게 느껴진다. 왜 여성은 어머니로서만 환원되는 것일까, 어머니는 누구의 밥상만 차려주는 사람인가, 열려 있다는 시인들의 시 속에서도 종종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표현으로 대부분 그런 것들이 묘사되어 있다. 물론 시대가 그러했다. 오랜 시간동안 남아선호사상이 팽배했던 사회 속에 살았고, 이전의 어머니들의 그렇게 살아왔고, 그런 게 당연한 것이었다. 당연하기에 다음 세대에 이어지기까지 변화를 꾀하지도 못했고, 자신의 신념처럼 된 차별을 그대로 이어갔다. 왜 딸이라는 이유로 지워져야 했는가, 어떻게 변화를 꾀해야 했을까, 무척 어려운 일이다. 


또한, 평론의 일부분은 자신이 지칭한 비평어를 쓰기 위한 도구로 여성성을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성성이 무엇인가, 난 아직도 잘 모르겠다. 어느 순간부터 그랬던 것 같다. 너무 자연스럽게 여성스럽다는 표현을 쓰고 있었고, 여성스러운 것은 내성적이고, 수동적이며, 자신의 감정표현을 솔직히 말하기 보다 조심스럽게 수용만 해야 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겪었던 모든 것들에 내재된 성차별에 대해 이제 의문을 품게 되고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 역시도 직장 생활 내내 성추행과 희롱을 겪어야 했고,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들이었다. 그러나 어딘가 털어놓아 봐도 같은 여성이 아니고서야 모두 내가 처신을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왜 피해를 겪은 내가 책망을 들어야 하는가, 왜 대한민국은 피해자보다 가해자의 인권을 더 중요시하고, 대한민국의 법은 그토록 가해자에게만 한없이 너그러운 것인가, 가진 자들, 소위 지배계층의 논리로 가득한 법은 그 실효성이 얼마나 될 것인가. 왜 피해자가 범죄에 대한 예방을 해야 하고, 그 원인 역시 피해자에게서 찾는 것일까.


매일같이 발생되는 사건, 사고에 피해자가 여성인 경우, 혹은 약자인 경우 대비해 봤을때, 가해자들의 형량은 그들이 행한 죄에 비해 너무나도 가볍다. 피해자들의 겪은 고통은 앞으로의 삶 속에서 계속 지속될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제 그런 기사들을 보는 게 두렵기도 하다. 주변의 사람을 믿기 어려울 지경이다. 언론은 이제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채, 객관적인 사실보도 보다는 조회수를 올리기 위한 자극적인 제목을 내걸고, 피해자를 앞세워 기사를 쓴다. 그 피해자가 여자일 경우 특히 언제 어디서나 ~녀를 붙여 표현한다. 


세상은 어느샌가 남과 여를 갈라세우고, 서로에게 화살을 향하게 하며, 책임을 묻도록 편가르기를 하고 있다. 사회의 잘못된 부분을 약자에게 치우치며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불평등을 겪을수록 자신보다 더 약한 사람에게 공격을 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부조리를 말할 때, 지배계층이라 말하는, 누리는 자들에게 향하는 게 아닌 이유는 무엇인가, 자신이 불행했으니, 남들도 함께 불행해져야 한다는 심리는 무엇인가,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는 함께 같이 노력해나가야 하는 것인데, 왜 없는 사람일수록 자신보다 더 못한 처지의 사람에게 불행이 전해지도록 하는 것인가, 그렇게 의문에 의문이 이어졌다.


『82년생 김지영』은 김지영 씨가 출산 후 육아를 하면서 이상행동을 하는 데서 시작된다. 종종 주변 여자들로 빙의된 듯 말하는 지영 씨는 결국 시댁에서 큰 실수를 한 게 되고, 이후 과거로 돌아가 지영 씨의 삶을 연도별로 하나씩 서술해나가는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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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씨는 1982년 4서울의 한 산부인과 병원에서 태어났다아버지는 공무원이셨고어머니는 주부였다김지영 씨 위로는 두 살 터울의 언니가 있었고, 5년 후엔 남동생이 태어났다지금은 많이 사라졌다고 하나 그때 역시 남아선호사상이 뿌리 깊게 자리한 시대였고언니와 지영 씨는 자연스럽게 할머니와 아버지에게 홀대를 받았다그런 할머니 역시 고된 시집살이와 아들을 낳아야 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이 그러했고시대가 그러했기 때문에 살아온 세월로 인해 신념으로 굳힐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기에김지영 씨 어머니 역시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부담감을 겪었고그나마 막내는 아들을 낳았기에, 본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하게 됐다.

 

김지영 씨 어머니는 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만당연히 아들이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풍토 때문에 꽃다운 나이에 제대로 쉬지도먹지도 못한 채 일만 해야 했다그렇게 그 노력과 공이 고대로 되돌아왔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의대를 나와 출세를 하든경찰서장이 되었든모두 그들의 성공이었을 뿐이지김지영 씨 어머니 오미숙 씨의 성공이 아니었다남자 형제와는 연락도 모두 끊어지고 나서야 그때의 노력과 시절이 아쉽기만 했다.


김지영 씨는 3학년이 되면서 일주일에 두 번 학교에서 급식을 먹게 되었는데담임 선생님은 남학생부터 1번순으로 밥을 먹게 했고그나마도 늦게 먹으면 그렇게 혼을 내며 재촉을 해댔다생일이 늦은 여자아이들은 마지막에서야 밥을 먹게 되었고늦게 먹는다고 혼나는 것도 대부분 여학생들이었다한 아이가 용기 내어 급식순서를 바꾸자고 제안하기 전까지 잘못된 점이 있지만 그게 무엇인지 몰랐던 김지영 씨는 그때 조금씩 남녀차별을 인지하게 되었다항상 남자가 먼저인 게 당연했고주민등록번호도 남자는 1, 여자는 2로 시작하는 것에 의문을 품지도 않았다.

 

김지영 씨가 중학교 입학할 무렵부터 몇 년 사이 여중과 남중은 대부분 남녀공학이 되었고복장 규정이 무척 까다로웠다특히 여자아이들이 지켜야 할 규칙이 엄격하다 못해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써야 했는데같은 부분을 비교해보더라도 여학생들보다 남학생들에게 그 기준은 대체로 약화되었다하루는 운동화를 신고 등교하던 여학생이 벌을 받으며 복장규칙의 부당함을 알리자 그 이후는 기준이 조금 완화되었다고 한다.

 

중학교 2학년이 되자 지영 씨는 월경을 시작하게 됐다지영 씨의 초경은 언니와 같았다체형과 식성도 비슷하니 미리 예상을 하고 있었기에 놀라지는 않았으나붓고 뻐근하며 뒤틀리는 듯한 생리통은 견디기 힘들었다진통제는 너무 독했고핫팩은 휴대용이 아니라 불편했다.

 

고등학생이 된 지영 씨는 여학교로 배정되었고세상엔 많은 변태가 있음을 실제로 겪게 되었다무릇 학교 밖뿐만 아니라 교실 내에서 선생이라는 작자부터 빈번하게 학생들에게 추행을 했다학원을 다니게 되었을 때는 모르는 남학생에게 겁을 먹게 된 일이 있었으며우연히 버스에서 있던 여자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무슨 일을 겪게 되었을지 무서웠다데리러 온 아빠는 지영 씨의 처신 문제를 논했고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다시 연락하게 된 여자는 지영 씨의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세상엔 좋은 남자가 더 많다며 위로를 해주었기에 그나마 그 공포를 떨쳐낼 수 있었다.

 

아버지의 직장 역시 IMF의 영향을 비껴갈 순 없었고어머니의 경제력과 판단 덕에 투자사기를 당하지 않고무사히 가게를 열어 운영을 할 수 있게 됐다.

 

무사히 가고자 한 학과를 들어가게 된 지영 씨의 당찬 각오와는 다르게 좋은 성적을 얻긴 힘들었지만집에서 경제적 지원을 받지 않고 생활하기 위해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던 친구에 비해선 윤택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지영 씨 역시 취업 문턱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간신히 서류 전형을 통과한 뒤 면접을 보게 되더라도 몰상식하고 무례한 질문들 속 회사의 입맛에 맞는 답을 해야만 했고아니면 탈락이었다.

 

한 홍보대행사에 취직을 하게 된 김지영 씨는 일도 재밌고 동료들도 좋았다클라이언트와 갑질은 난감하고 불편한 사항이 많았고당시에 유행하듯 번지는 여성비하적 표현으로 ~녀가 퍼졌었다회식자리에서는 성희롱과 추행을 겪어야 했다.

 

회사 내 기획팀이 꾸려질 때는 그동안의 노력이 무색하게 여자사원들은 끼지도 못했다당연히 여자들이 직장생활을 하게 되면 겪게 될 결혼과 육아라는 장벽 때문이었다.

 

김은실 팀장은 여자 같지 않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 회식자리에 끝까지 남았고야근과 출장도 늘 자원했고아이를 낳고도 한 달 만에 출근했다처음에는 자랑스러웠는데여자 동료와 후배들이 회사를 나갈 때마다 혼란스러웠고요즘은 미안하다고 했다회식은 사실 대부분 불필요한 자리였고잦은 야근과 주말 근무출장은 인원을 보강해야 하는 문제였다출산육아로 인한 휴가와 휴직도 당연한 것인데 후배들의 권리까지 빼앗은 꼴이 됐다관리직급이 된 후로 가장 먼저 불필요한 회식이나 야유회워크숍 등의 행사를 없앴고남녀 불문 출산휴가와 육아휴직도 보장했다. - 113

 

김지영 씨는 미로 한가운데 선 기분이었다성실하고 차분하게 출구를 찾고 있는데 애초부터 출구가 없었다고 한다망연히 주저앉으니 더 노력해야 한다고안 되면 벽이라도 뚫어야 한다고 한다사업가의 목표는 결국 돈을 버는 것이고최소 투자로 최대 이익을 내겠다는 목표는 결국 돈을 버는 것이고최소 투자로 최대 이익을 내겠다는 대표를 비난할 수는 없다하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효율과 합리만을 내세우는 게 과연 공정한 걸까공정하지 않은 세상에는 결국 무엇이 남을까남은 이들은 행복할까. - 123

 

호주제 폐지가 되면서 어머니의 성을 따를 수도 있게 됐으나막상 그런 경우는 얼마 되지 않았다.

 

법이나 제도가 가치관을 바꾸는 것일까가치관이 법과 제도를 견인하는 것일까

- 132

 

넌지시 어서 아이를 갖으라는 시부모님 눈치에늦어진 이유를 지영 씨의 건강상태에 있다고 여기는 시댁의 눈초리도 견디기 힘들었다아이를 갖을 시기를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아이를 갖고 얻을 기쁨만큼이나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으나 공감해주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임신을 하고 난 후에도 직장을 다니는데 출퇴근 시간과 병원을 가야할 시간에도 눈치를 봐야 했고배가 불러오며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에도 눈치를 봐야 했다왜 그런 것일까작은 양보 하나에도 각박한 마음들에 눈치를 봐야 하는 것일까.

 

출산예정일이 가까워져 오면서 회사에 대한 고민이 많아졌다. 육아휴직을 할 것인가, 퇴사를 할 것인가. 

 

그놈의 돕는다 소리 좀 그만할 수 없어살림도 돕겠다애 키우는 것도 돕겠다내가 일하는 것도 돕겠다이 집 오빠집 아니야오빨 살림 아니야애는 오빠 애 아니야그리고 내가 일하면그 돈 나만 써왜 남의 일에 선심 쓰는 것처럼 그렇게 말해?” -144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끝났다김지영 씨가 능력이 없거나 성실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그렇게 되었다아이를 남의 손에 맡기고 일하는 게 아이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듯일을 그만두고 아이를 키우는 것도 일에 열정이 없어서가 아니다. -145

  

예전에는 일일이 환자 서류 찾아서 손으로 기록하고 처방전 쓰고 그랬는데요즘 의사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예전에는 종이 보고서 들고 상사 찾아다니면서 결재 받고 그랬는데요즘 회사원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예전에는 손으로 모심고 낫으로 벼 베고 그랬는데요즘 농부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라고 누구도 쉽게 말하지 않는다어느 분야든 기술은 발전하고 필요로 하는 물리적 노동력은 줄어들게 마련인데 유독 가사 노동에 대해서는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149

 

김지영 씨는 결국 회사를 퇴사하고 출산의 고통 끝에 아이를 낳았다. 자연분만를 권하며 출산에 대해 아름답다위대하는 말로 고통을 감내하라는 식의 표현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고, 2시간마다 하는 수유에, 집안일에 몸이 성할 데가 없었다


그러던 중 방문한 직장동료 강혜수가 알려준 소식은 놀라운 것이었는데직장 앞 여자화장실에 몰카가 있었고범인은 새로 교체한 보안업체 직원이었다는 것이다밝혀지게 된 과정도 어이가 없었고같이 사진을 돌려본 남직원들도 경찰조사를 받고 있으며강혜수 씨는 트라우마와 불안 때문에 정신과를 다니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다른 여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몇몇은 퇴사를 했고, 몇몇은 수면제를 복용하여 응급실에 실려 가기도 했다. 피해자가 된 여직원들은 나의 사진을 누가 봤을까, 두려워졌고, 누가 웃는 게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누군가의 시선이 두려워진 것이다.

 

 

가해자들이 작은 것 하나라도 잃을까 전전긍긍하는 동안 피해자들은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해야 했다. -156

 

어느 순간부터 ~충이라고 덧붙이게 되었을까.

 

그 커피 1500원이었어그 사람들도 같은 커피 마셨으니까 얼만지 알았을 거야오빠나 1500원짜리 커피 한잔 마실 자격도 없어아니 1500원 아니라 1500만원이라도 그래내 남편이 번 돈으로 내가 뭘 사든 그건 우리 가족 일이잖아내가 오빠 돈을 훔친 것도 아니잖아죽을 만큼 아프면서 아이를 낳았고내 생활도일도꿈도내 인생나 자신을 전부 포기하고 아이를 키웠어그랬더니 벌레가 됐어난 아제 어떻게 해야 돼?” - 165

 

그후 김지영 씨는 한 번씩 다른 사람이 되었는데살아있는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모두 여자였고장난을 치거나 속이는 게 아니었다정말 완벽하게 그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마지막은 김지영 씨가 상담받고 있는 정신과 남자의사의 독백으로 마무리되는데자신의 아내의 사정을 보고 김지영 씨를 이해하고또 그만두게 된 직원의 사정도 이해하면서 다음은 미혼의 직원을 뽑겠다는 현실에 입각한 말로 씁쓸하게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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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방송작가로 오랜 경력을 쌓아온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그의 글쓰기는 보다 객관적 성질을 띤다.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에 서 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공감한 만큼 한 사람의 삶을 전체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그 실존성을 높혔으며, 통계자료나 관련 자료 인용하여 묘사했기에 객관적이며 사실성을 더했다. 

(또한, 맞춤법과 띄어쓰기에 대해 아주 칼같이 지키려 했다는 게 여실히 보인다. 그부분도 아주 흥미로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 김지영 씨는 대체로 행복한 삶을 살아온 것으로 보인다. 부모님이 안정된 직장과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직장생활 역시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었고, 보통의 기준에서 괜찮은 남편을 만났기 때문이다. 중산층 가정에서의 여자의 삶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런 걸 따져 무엇하나 싶지만, 요즘 세상은 평범하면서도 보통적으로 살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그저 평안한 삶을 살아가기만을 꿈꾸는 데도 그것조차 쉽지 않게 됐다. 


페미니즘을 그저 여자들을 위한 것으로 착각하면 안된다고 말하고 싶다. 살만해졌으니 자신들의 이익을 찾겠다고 그러는 거 아니냐는 말에 대해 반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 역시도 페미니즘에 아직 발도 못 들여놓고 있다. 이건 '차별'에 대한 운동인 것이다. 이를 어쭙잖게 여자들의 이기심으로 포장하고 이를 비판하는 도구로, 그 개념도 확실히 인식하지 못한 채 함부로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서서히, 조금씩, 그 참된 의미를 알아갈 거라고 바라본다. 그렇기에 이를 설명하기에 좋은 예시로 나온 이 작품을 추천하고 싶다. 이는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여자의 보통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도 아주 세세하게 한 사람의 삶을 총괄하여, 구체적으로 묘사하며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한 번쯤 읽어보았음 좋겠다. 나 아닌 타인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이해해보려는 사람들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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