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기쁨
에릭 엠마뉴엘 슈미트 지음, 류재화 옮김 / 열림원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인간 내면의 틈삐걱거림을 들여다보는, 



『검은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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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편의 단편이 실린『검은 기쁨』은 2010년 공쿠르 단편소설상 수상작이다. 이 명예로운 상을 수상한 것과 별개로 소설에 대한 소개글에서 각 단편들이 가진 이야기 속의 긴장감이 궁금해 이 책을 읽어보게 됐다. 




<생 소를랭의 이상한 여인>

 


한적한 시골 마을, 노부인 마리 모레스티에는 유명세를 누리는 인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세 번 결혼하고 세 번 모두 사별한 후, 죽은 남편들로부터 많은 유산을 물려 받은 것도 모자라 젊은 애인과의 관계 또한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그녀는 법적으로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녀가 남편들을 독살했을 것이라 의심한다. 소문과 시선과 유명세 모두 당당히 즐기며 살아가던 그녀는, 어느 날 아름다운 외모의 청년 신부 가브리엘이 마을에 부임해오자마음의 큰 변화를 겪게 된다젊은 주임신부의 관심을 독차지하기 위해 그녀는 그동안의 사건에 대한 고해성사를 하게 되고이내 그를 혼란에 빠뜨리다가브리엘의 간곡한 설득 끝에 한 그녀의 선택이상한 망상과 착각의 말로는 어떻게 될 것인가.

 


마리 모레스티에는 말 그대로 이상한 여인이다. 70세 노부인이 젊은 청년에게 과한 망상과 호감을 가지는 것이 대체로 잘 와닿지 않았다. 너무 먼나라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실제로도 그러겠지만. 하지만 사실 그녀는 그 누구보다 욕망에 솔직한 여인이었던 게 아닐까 싶다. 똑같은 가면을 쓰고 서로를 대하는 사람들범죄자로 의심하면서 호기심은 거두지 않고같은 공간에 있는 것에서조차 거부감을 느끼면서도그녀의 유명세를 이용하는 마을 사람들마을 사람들이 마리에게 그러했듯이마리 또한 자신이 행한 것과 달리 이런 유명세를 즐겼으니 말이다. 가브리엘의 설득에 자신의 숭고한 정신의 성녀가 된 것처럼 착각하는 마리의 마지막 선택은 어쩌면 당연하게 느껴진다. 그녀의 욕망은 잠시 불타올랐다 이내 사그라들었고, 그렇게 계속 반복해왔던 것이 아닐까.

 

 

 

 

<귀환>

 

그레그는 화물선 그랑빌의 기관들을 점검하고 수리하는 기술자다. 악착같이 일을 하고 돈을 버는 것만이 자식들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던 무심한 인물이기도 하다. 어느 날그레그는 배 위에서 딸이 죽었다는 전보를 받게 되고네 딸 중 어느 딸이 죽은 것인지에 대한 생각에 빠진다더 사랑했던 딸 그레이스인가정이 안 갔던 미운 딸 조안인가아니면 조용한 큰딸 케이트제일 어린 막내 베티그런데 어느 딸이 죽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자신이 가장 아끼는 딸이 아니길 바라는 생각이 들자, 더 큰 고민에 빠지게 되는 그레그. 며칠 후 육지에 도착해 사실을 확인하게 되기까지그는 난생 처음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되고곧 번민의 늪에 빠지게 된다.

 

모든 부모가 완벽한 인격을 가진 것이 아니다또한 부모라고 해서 완벽한 인격을 가져야 하는 것도 아니다보통의 인간일 뿐인간이라면 아무리 평정심을 유지한다 해도 마음의 우선순위가 있을 것이다어쩌면 당연하게 간과했던 부분이 아닐까애써 아니라고 믿고 싶은 마음에부모는 모든 자식에게 평등한 마음을 나눠주고 있다고그레그가 자식의 부고소식을 듣고 자신의 네 딸 중 가장 아끼는 딸의 죽음이 아니길 빌었던 마음이 순간 튀어나왔음에 당황했던 것처럼부모 자식 간은 물론이고 형제 사이에서도 더 마음이 가고 잘 맞는 사이가 있고피를 나눈 관계임에도 남보다 못한 사이처럼 서먹하고 안 좋은 경우가 있다혈연관계의 민낯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사람의 마음이란또 사랑이란 이성과 논리의 기준으로 나눌 수도 없다.

 

가족에게서 늘 도망치듯 바다에서 삶을 이어갔던 그레그처음은 술주정뱅이 아버지로부터그 다음은 자신이 이룬 가정으로부터세상과 마주하기 두려웠고불신했던 만큼 시야도 좁았던 그다. 


선박그랑빌이 부두에 도착하고 익숙한 실루엣이 보이자존재의 상실에 대한 확인을 부정하고 회피하려 하지만결국 진실은 뜻밖의 것으로 다가온다그레그의 기억 속에 잊힌 존재였지만그로 인해 그가 새롭게 태어나듯 과거의 무심하고 지배적이었던 태도를 버리고다정한 아버지로 변화할 수 있게 되었다육지에서 멀어지려 애썼던 바다 위의 삶에서 육지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아내와 딸들은 이를 기적처럼 보았고앞으로가 더 나아질 것임을 암시하고 이야기는 끝이 난다.


 


그레그는 이런 생각에 놀라고 어이가 없어 털썩 주저앉았다전에는 한 번도 이렇게 순위를 매겨본 적이 없었다그런데 우선순위는 있었던 것이다겉으로 드러냈을까그레이스나 다른 아이들에게아니다이런 편애의 감정은 그의 마음 깊은 곳어두우면서도 활기찬접근할 수 없는 곳에 지금까지 자리하고 있었다. / 80

 

지금 그는 네 딸 가운데 어느 하나의 죽음을 바란 것 아니던가없어도 될 만한 아이를 고른 것 아닌가무슨 권리로누가 선장의 입에서 조안의 이름이 나오도록 허락했는가그애를 지목한 것은 살인자의 행위나 다름없지 않은가머리를 굴려 사람 죽이는 생각이나 하는 자가 아버지라 할 수 있나진짜 아버지라면 모든 딸들을 지켜내야 하는 법인데…… / 84

 


그레그는 예상치 못한 고통을 겪으며 비로소 생각하기 시작했다숙고라는 끝없는 노동이 그의 내부에서 일어났고 그는 녹초가 되었다겉모습이 바뀐 것은 아니다다만 과거의 그레그가 지금 그레그의 내부에 자리를 잡았다도덕적지적 의식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온했던 야수의 집으로 들어와 앉았다. /92

 

 


 

<검은 기쁨>

 


열아홉 크리스는 온갖 메달과 상최우수 타이틀을 휩쓸 정도로 우수한 피아니스트이다하지만 그 승리는 집착과 연습모방으로 얻어낸 것이라 생각하며, 동경하는 바이올리니스트 악셀의 진짜 연주에 열등감을 느낀다. 크리스와 악셀은 태국의 어느 섬에서 열린 캠프에 참가해 1위 자리를 놓고 경쟁을 하게 된다캠프 마지막 날 그들의 운명을 바꿔놓게 될 사고가 일어나고 크리스는 자신의 욕망과 열등감에 비열한 선택을 하고 만다이십 년이 지나악셀은 불구가 되어 성녀 리타 종교용품을 팔아 생계를 연명하고 있었고크리스는 문제 청소년들을 감호 치료하는 빌라 소크라테스에서 교육관으로 일하고 있었다복수의 칼날을 다지는 악셀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온 크리스서로 기대하고 상상했던 것고 정반대의 모습이 되어 마주하게 된 두 사람의 말로는 어떤 모습일까.

 

각자 서로에 대해 상대의 삶을 이상적으로 생각하며 살아온 두 사람, 크리스의 잘못은 되돌릴 수 없고, 이미 일어난 사건으로 불구가 된 악셀의 처지를 대신해줄 수도 없다. 마지막엔 우정으로 표현된 두 사람의 관계는 애증과도 가까운 것 같다. 너무나도 동경했기에 뺐고 싶었고, 이제 시간이 흘러 서로 뒤바뀐 처지에 복수는 의미 없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인간의 내면엔 그런 이상적이고 바른 것들만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삐뚤어지고 뒤틀린 채 고약한 악취를 풍길 법한 못된 것들도 존재할 것이다. 순간 순간의 선택에 의해 우리는 다음을 향해 나아간다.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것일까, 끊임없는 선택과 시험 속에서 인간성을 버리지 않고 진실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중심을 잘 잡아야 하는 게 중요한 것 같기도 하다.


나라면 어땠을까, 경쟁이 과열되는 이 사회에서 난 당연히 패배자로써 살아가지 않았을까. 만약 크리스만큼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1등이 되지 않고선 못 견딜만큼 강렬하게 열망했다면, 나는 과연 선한 선택, 당연한 인간의 도리를 다한 선택을 했을까. 



하나같이 반듯하고 비슷비슷해서 조화로워 보이는 다른 소년들에게서는 슬픔혹은 권태가 엿보였다왜냐하면 그들은 텅 비어 있었으니까그러나 악셀에게는 벼락같은 전격적인 에너지가 있었다정직하고공평하고 여유가 있고 과장된 것 같으면서도 엄격한 절제가 있었다어떤 정령과 공모하는 듯늘 자신감 있고 고상하며 멋진 우상처럼 밝은 빛이 났다. /102-103

 

이제는 사십 대가 되어 식탁에 마주앉아 있는 두 사람 사이에 큰 착각과 오해가 생겨나고 있었다각기 상상 속에서 그들은 서로 다른 사람이었다분명하고 결정적인 특성을 가진강한 개성의 인물은 각자 조각했던 것이다크리스에게는 악셀이 하나의 완벽한 정전正典이 되어 있었고악셀에게는 크리스는 성공의 한 전형이 되어 있었다상대를 대신하고 싶은 의지와 초월하고 싶은 의지가 뒤섞여그들은 각각 상대를 모델로 삼으며 삶을 건설해온 것이다그런데 이제 그들의 공상적인 건축은 무너질 위기에 있었다. /159-160

 

우리가 되어야만 하는 존재에 우리는 언제쯤 도달할 수 있을까젊은 시절에아니면 먼 훗날에지성과 기질은 주어지는 것이지만 우리 교육과 환경부모에 의해 길러지기도 한다성인인 우리는 각자의 선택을 통해 스스로를 만든다. /162

 

 

  

<엘리제의 사랑>

 


집시 성향의 카트린은 앙리를 만나 지금은 프랑스 영부인공화국 대통령의 아내 마담 모렐이 되었다자유를 잃고 사진 속 우아한 품격의 여성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에 신물이 나지만여전히 앙리를 사랑하는 카트린. 앙리의 정치생활에 이용당하고, 다른 여인에게 눈을 돌리는 것에 반해 더이상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카트린, 그의 약점인 대선에 활용된 정치 공작을 말하며 끊임없이 공격과 긴장 속 관계를 이어간다. 자신의 약점을 발설할까 두려운 앙리와 그의 질투와 두려움을 즐기는 카트린은 두 차례 의문의 사고를 겪고, 그로 인해 암 발병 사실을 알게 된다. 이내 사랑의 이름을 대신한 미움을 거둔 카트린은 교요히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미운 소리만 골라하던 두 사람은 카트린의 죽음 뒤에 출간된 앙리에 대한 사랑 고백을 담은 책을 통해 모든 오해가 풀리게 되고, 앙리는 과거와 추억을 회상하며 살아가게 된다. 


자유롭고 싶었지만, 자유대신 사랑을 선택한 카트린, 자신이 이용당했음에도 그의 질투까지도 얻고 싶어했던 카트린은 죽음을 마주하고, 앙리에 대한 진심을 적어나갔을 때의 심정은 어땠을까. 두 사람의 관계성은 특수해보이기도 하지만, 일부분의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서로에게 일말의 감정이 남아 있었기에, 끊임없이 자극하고, 질투하고 미워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면 그토록 서로를 괴롭히지 않았을 것이다. 너무 늦게 깨달은 자신의 마음을 추억을 회상하며, 카트린을 떠올릴 만한 것들 속에 파묻혀 살아가는 앙리가 어리석어 보이기도 했다. 


생은 늘 후회로 점철되어 있는 것 같다. 앙리가 뒤늦게 그의 사랑을 돌아봤듯이. 하지만 이런 점들이 바로 인간적인 부분이 아닐까 싶다. 사람은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자신의 결정을 되돌리지 못하기도 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도 한다. 아무것도 겪지 않는, 평탄한 삶을 꿈꾸지만, 좌절과 고통, 번민과 후회 등 겪고 싶지 않은 것을 겪으며 살아가게 된다. 그런 것이 삶이 아닐까. 매 순간 숱한 선택들로 인하여 또 다른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되는 것. 그렇게 자신을 알아가는 것이 살아간다는 것이 아닐까.


 

카트린은 자신의 삶이 일요일 오후 같다고 생각했다길고음울하고막연한 희망과 모호한 회한으로 가득 찬 느낌맛볼 만한 달콤함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좋았겠지만모든 게 너무 썼다.  /182

 

형식은 간혹 우리를 구제한다무질서에 위협받는다면 겉모습이라도 지켜야 우리는 혼돈 속으로 처박히지 않는다겉모습은 껍데기이므로 강하다그것은 버틴다그것은 우리를 버티케 만든다.  /227

 

감정은 겉감과 안감에 다 붙어 있다증오 없는 사랑이 있을까애무하는 손은 곧 단도를 쥐게 된다분노를 모르는 사랑이 있던가모순을 안은 한 충동 때문에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그 충동으로 삶을생을 전할 수도 있다우리 감정은 무엇에서 무엇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모호하게 뒤섞여 있다검은색과 흰색처럼모순 속에서 팽팽하게 긴장된 채때론 너울처럼 파동하고때론 구부러지며 흐르는 물처럼 최악이 최상이 되고 최상이 최악이 될 수도 있다.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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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되게 등장하는 성녀 리타는 역경과 고난에서 꽃피우는 상징처럼 보인다성녀 리타를 공통적으로 각 소설에 빈번하게 등장시키며, 말하고자 했던 모호성이 무엇인지 다 읽고 나서도 잘 와닿지 않았다. 이를 테면 나에게 좋게 느껴지는 것이 타인에게는 불행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인가. 양면성모순아이러니이러한 말들로 표현하는 대신 성녀 리타를 등장시킨 것 같다그가 등장하며 함의하는 바를 눈 맑은 독자가 알아낼 수 있길.

 

작가는 단편집을 일컬어 부케를 만들 꽃을 찾는 게 아니라 부케 역할을 하는 꽃을 찾는다고 말했다. 하나의 큰 틀과 전체적인 맥락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각각 별개의 세계로 보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작가의 말이 너무 긴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작가가 많은 것을 고백할수록, 독자로 하여금 상상하고 짐작했던 것들이 마치 문제풀이 답을 찾는 듯 해소시켜야 된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때론 궁금한 채로, 조금 모호한 상태로 계속해서 곱씹는게 훨씬 흥미롭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곧 좋은 길잡이가 되어주기도 한다. 일명 비하인드 스토리 같은 작가일기는 말이다. 창작노트라도 불러도 될 것 같다. 작가는 각 이야기마다 관계 속 긴장을 야기시키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이런 상황을 만들어낼 때의 희열도 느껴진다. 또한,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제유법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의 문장은 호흡이 길지 않고, 각각의 비유는 퍽 매력적이다. 


우리는 자유로운가에 대한 질문은 큰 공감이 됐다. 그건 우리만의 착각이 아닐까, 이미 많은 것들이 엉키고설킨 세상 속에서 내가 믿고 있는 자유가 실제로 그 효력을 발휘하는게 얼마나 될 것인가. 그건 '진짜' 자유가 맞는걸까. 


네 편의 이야기 중 가장 인간적으로 와닿았던 <귀환>이었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집 전체적으로 인간성을 다룬 소설들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지금의 우리는 우리가 내린 선택의 결과물이다. 내 인생의 첫 선택을 하던 순간이 떠오르기도 했다. 수동적이며 주체적이지 못했던 삶 속에서, 겪게 된 '상실'과 그로 인해 처음으로 '나'를 위한 삶, '나의 삶'을 생각해보게 됐다. 그때의 선택에 늘 감사하다. 그렇지만 여전히 휘청거리며, 또 흔들리면서 살아갈 것 같다. 


『검은 기쁨』이렇듯 여러 생각할 거리를 남기는 작품인 것 같다. 너무 훌륭한 작품이라는 듯한 수식없이도 이미 훌륭하다. 낯선 이름이었지만, 다방면으로 활동하는 작가이기에 다른 장르의 작품도 궁금해진다. 다음엔 그의 작품의 맨 얼굴만 들여다보고 싶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열림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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