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이면 - 1993 제1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이승우 지음 / 문이당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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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온전히 사랑하기까지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생의 이면』





소설은 작가인 화자가 '박부길'이라는 작가의 생애를 다루는 글을 의뢰받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뚜렷한 친분관계도 없을 뿐더러 한 작가의 생애를 훑는 과정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는 화자는 박부길의 글과 인터뷰, 그리고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하나씩 큰 줄기를 형성해나간다. 


박부길은 정신분열증으로 인해 갇혀 있다 자살을 한 아버지와 한없는 죄스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어머니, 그리고 버림 받은 상처를 안은 채 유년기를 보냈고, 다시는 고향에 돌아오지 않기로 다짐하고선 떠난다. 아버지에 이어 판사가 되어 집안을 일으켜주길 바라는 기대를 버리고서.

중화집 배달일부터 시작해서 신학공부를 시작하기까지는 운명적인 만남, 즉 사랑이 큰 계기가 되었다. 


어둠이 빛이 되는 동굴같은 안식처, 자취방에서 책속으로 침잠하는 생활을 이어가는 그에게 어떠한 사건을 계기로 그의 삶에도 '사랑'이라는 것을 안착할 수 있게 한 대상을 만나게 된 것이다. 교회 선생님이었던 그녀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신학공부를 시작했고, 조심스러운 관계가 이어져 갔으나, 늘 위태롭고 위험하게만 흘러가고 만다. 박부길의 여러 작품 속에서 자신의 생애의 대한 일면들을 가린 듯 보여줬는데 이를 통해 그의 생의 일종의 불행함과 사랑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서툰 모습들, 상대를 올곧게 바라보지 못한데서 비롯한 예측가능한 이별의 전조들. 이는 자신을 상처주는 것뿐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저 깊은 상처를 입히고 만 것이다. 



**



읽는 이로 하여금 어느 부분에 중점을 두고 보느냐에 따라서 이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그리는 종교소설로 읽힐 수도 있으며, 사랑을 다루는 연애소설로도 읽힐 수 있다.

흐름에 따라 읽어나갔을 때는 실존적 성격의 질문이 주 화두가 되는 소설인가 싶었는데, 흘러가 다다른 것은 조금 다른 지점이었다. 이는 사람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까지의 여러 측면을 탐구한 소설처럼 느껴졌다. 박부길의 사랑의 실패로 끝나기 전에 그게 진정 사랑이었는가, 다시 묻고 싶을 만큼 처절하게 외로운 생에 안타까움이 더해지는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는데, 그건 모두 본인이 자초한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용된 구절에서 에리히 프롬의 질문처럼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한 데에는 어느 정도 공감하는 바다. 이는 밀고 당기기 같은 기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상대를 대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박부길은 그의 외로운 생만큼 자신을 사랑할 줄 몰랐던 인물이다. 동경하고 섬기는 존재로서, 상대를 신격화한 채 주는 애정은 폭력과도 같았고, 이에 자신도 크게 아프게 한 결과에 이른다. 사랑은 저절로 하게 되는 것이고, 자연스러운 감정에서 비롯된다 하더라도 그에 맞는 자연스러움에 대한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단순히 말하자면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주는지 모르고 쏟는 애정은 일방적이며 폭력과도 같이 느껴지기 때문에.


화자가 박부길의 작품과 생애를 차례대로 교차하며 서술하는데, 작품으로 인용된 글들 역시 모두 창작품일텐데 그것 역시 참으로 좋았다. 밀도 있는 문장과 서사에 박부길이라는 작가가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이승우 작가는 신학도이기도 했기 때문에 종교적인 색채를 띄는 부분에서는 더 묵직하게 와닿았던 것 같다. 


작가의 처녀작이라고 설명된 이 작품은 몇 차례 개정판의 서문에서 고백했듯이, 그야말로 작가가 애착을 많이 갖는 작품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당연히 성글게 느껴지는 부분도 군데군데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나이에 이런 묵직하면서도 심도 있는 작품을 창작해내는 작가는 역시 천재가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 추천 도서임에는 분명하나 청소년 추천도서라기엔 너무 어렵지 않은가 싶다. 물리고 물리는 문장의 연속의 진입장벽은 꽤나 높았으나, 확 와닿는 구절도 군데군데 자주 드러나기 때문에, 비유도 그렇고. 처음에 잘 들어가지 못하면 갇히는 듯한 느낌이 들거나 중도 포기하고 싶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분명한 것은 두고두고 읽고 싶고, 계속해서 만나보고 싶은 작가라는 것이다. 



**기억에 남는 구절





불행에 익숙해진 사람은 쉽게 운명의 무게를 받아들인다. 20쪽

사람은 왜곡하기 위해서 글을 쓴다. 현실이 행복해 죽겠는 사람은 한 줄의 글을 쓰고 싶은 충동도 느끼지 않는다. 오직 불행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만이 글을 쓰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24쪽 (소설 속 박부길의 글에서)

행복과 불행은 하나의 관념이다. 관념은 육체가 없는 것이다. 또는 육체와는 상관 없는 것이다. 행복은 불행의 관념이 부재한 관념이며, 불행은 행복의 관념이 부재한 관념이다. 25쪽

모든 금령이 신성한 것은, 그것들이 징벌의 공포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유발하지 않는 법은 신성으로부터 멀다. 신성은 어디 있는가. 두려움 속에 있다. 아니, 두려움에 대한 예감 속에 있다. 그런데 그것은 왜 두려운가. 금지된 것은 사람을 끈다. 그것이 이유이다. 35쪽

범죄는 달콤하다. 그 달콤함은 범죄 행위의 결과로서의 급부때문이 아니라, 금지된 법을 범하고 있다는 순간의 팽만한 긴장에서 오는 정신의 오락 때문이다. 36쪽

진실이 반드시 사실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진실은 사실보다 훨씬 포괄적이다. 내가 어떤 글을 읽다가 붉은 볼펜으로 줄을 그었으며, 그 붉은 줄은 여태 머릿속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 조이스를 읽음으로써 비로소 세상이 악몽임을 깨달은 것이 아니다. 나는 붉은 볼펜으로 줄을 그었다. 그것은, 그를 알기 전부터 이 세상에서의 나의 삶이 바동거리는 악몽에 다름 아님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제임스 조이스를 빌려 내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임스 조이스에게서 내 말을 발견한 것이다. 156쪽

우리는 운명을 보여 줄 수 없다. 그러나 운명적인 것은 얼마든지 보여 줄 수 있다. 운명은 여기 있거나 저기 있는 것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발음하는 그 자리에 있다. 운명으로 인식하는 자리에, 그 순간에 그 사람의 운명이 깃드는 것이다. 삶은 인식과 해석의 장인 까닭이다. 170쪽

나는 나 자신이면서 나를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내가 하나의 단순한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얼마나 많은가. 나는 누구인가, 나의 행동의 근거는 무엇인가, 하고 질문하고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나 또한 그 수많은 나 가운데 하나의 나에 불과할 뿐이다. 175쪽

이름을 쓰는 것이 인식의 방법이긴 하지만, 그것은 최악이 방법이다. 이름을 붙이는 것은 구별하기 위해서이지 인식하기 위해서는 아니기 때문이다. 구별을 통하지 않고는 인식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이름을 사용한다. 183쪽

독자에게 중요한 것은 소설 속에 형상화된, 또는 소설 속에서 독자가 발견해 낸 작가이지, 현실 속의 작가가 아니다. (…) 우리는 한 작가의 소설로부터 구성해 낸 한 인물의 초상과 그의 삶을 너무 편리하게 현실 속의 작가와 동일시해 버리곤 한다. 나쁜 버릇이다. (…) 아무리 진지한 독자도 이 버릇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다. 213쪽

사랑도 배워야 하는가. (…) 인간은 삶에 필요한 모든 기술을 습득하려고 한다. (…) 그런데 왜 사랑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가. 그것은 사랑에 대한 생각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처럼 수월한 것은 없다거나 사랑은 자연 발생적인 것이므로 따로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따위의 안이한 생각에 빠져 있다. 사랑에 실패하는 사람은 많지만, 사랑에 대한 자신의 능력 부족이 실패의 원인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랑을 유쾌한 감정 놀음이나 우연한 몰입쯤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 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다. 사랑에도 기술이 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들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면, 사랑이야말로 그래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사랑을 배우지 않을 때, 종종 사랑은 흉기가 되어 사람을 상하게 한다. 288-289쪽

고통을 통해 그는 아버지를 이해하고, 아버지를 껴안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글 쓰기는 감춰진 것의 드러내기이다. 그 드러내기는 그러나 감추기보다 더 교묘하다. 그것은 전략적인 드러냄이다. 말을 바꾸면 그는 감추기 위해서 드러낸다. 그가 읽은 대부분의 신화들이 그러한 것처럼. 3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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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내일 또 만나
윌리엄 맥스웰 지음, 최용준 옮김 / 한겨레출판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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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시 들여다보고 싶은 책, 상실과 상실이 만나





『안녕, 내일 또 만나』






윌리엄 맥스웰은 뉴요커의 편집자로 일했고, 다수의 현대 영미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뽑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중 단연 많이 언급되는 부분은 앨리스 먼로가 극찬에 극찬을 아끼지 않음으로써 그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작가이기도 하다. 한 작가에게 이토록 많은 영감과 용기를 줄 수 있는 작가라니, 더없이 궁금해진다.


나는 『그들은 제비처럼 왔다』이라는 작품으로 처음 접한 작가이기도 하다. 그때도 큰 감명을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화려한 수식어가 필요하지 않고, 덥덤한 어투로 인물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세공해놓는 성실함도 좋았고, 아름다운 비유 역시 좋았다. 큰 재미를 바라고 읽는다면 실망할 수도 있지만 인물들과의 거리감이 멀지 않아 공감할 수 있었고, 나에게서 있었던 상실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기도 했다.


작가 자신이 겪은 상실에 대한 경험은 몇번이고 그 내면 속에서 아물지 않는 기억으로 회상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상실에 대한 경험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이전에 읽었던 작품에서도 그랬고, 이번에 읽은『안녕, 내일 또 만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상실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는 학자같기도 하다. 상처를 감추기 위해 회피하는 게 아니라 끈질기게 직면하고 있다는 점은 꼭 배우고 싶은 지점이기도 하다.



**




이야기의 구성은 요근래 흔히들 말하는 막장의 불륜 스토리를 포함한, 한 마을에 이웃으로 살았던 두 소년의 상실에 대한 것이 주를 이룬다. 병으로 어머니를 잃었고, 다리를 잃은 형과는 심적인 연결고리를 잃었고, 아버지의 재혼을 통해 그마저도 상실로 느낄 만큼 아직 다 자리지 않은 소년의 상처. 그리고 그 소년 옆에 늘 거부없이 함께해주던 소년의 상처 역시 가족으로 인한 것이었다. 불륜관계로 인한 부모님의 이혼, 그리고 다시 한번 잃게 된 아버지. 


상실을 겪었지만 이를 밖으로 내색하지 않은 채, 우정을 나누는 두 소년은 많은 시간이 지나 우연히 다시 재회한 학교 복도에서 스쳐간 눈빛 사이로 지난 시간들에 대한 인사를 나눈다. 각자의 마음 속으로.

내일 다시 만나기로, 그러나 인사만 남은 아쉬운 이별이 되지만. 


이 작품 역시 덤덤한 어조로 여러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윌리엄 맥스웰의 대표작같은 작품이라고 했을 때 조금의 의문이 들기도 했다. 내겐 맨 처음 접한『그들은 제비처럼 왔다』이 더 매력적이고 여운이 남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추천하는 명작이 나에게는 별로 맞지 않는 건가, 싶어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두 같은 생각을 하는 것만큼 재미없는 일도 없지 않은가. 어쩌면 더 큰 기대로 보았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고, 생각보다 여러 인물이 등장한 만큼 비중조절이 잘 안 된 걸로 느껴져서 그런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소년의 상실을 다루기 위해 가족이 등장하는데, 주인공인 '나'의 가족을 다루는 것에 비해 클레터스의 가족을 다루는 부분이 피상적으로 느껴졌다. 책을 다 읽고 덮었을 땐 시큰둥한 기분만 남았는데, 후에 다시금 생각해볼 수록 여러 가지를 떠올리게 되었다. 상실과 관계성, 내일이면 여느 날처럼 똑같이 만날 수 있을 거란 막연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 우정.


묘한 여운이 일어서, 다시금 책장을 열어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여러 번 곱씹어 볼수록 매력적인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중심화두처럼 가족, 그리고 상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샐린저가 떠오르기도 했는데, 신기하게도 윌리엄 맥스웰은 실제로 샐린저의 편집자이기도 했다. 샐린저가 『호밀밭의 파수꾼』을 탈고한 후 바로 차를 몰고 맥스웰에게 찾아가 그의 집 현관에 앉아 함께 원고를 검토한 유명한 일화도 있다고 하니 더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고, 이는 함부로 손댈 수 없는 견고한 성벽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여운이 있는 그런 작품들을 쓴 작가들이 이미 인연을 맺고 있었다는게.



**




누군가에게는 용기와 영감을 줄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한없는 신뢰감을 얻었던 편집자이자 작가였던 맥스웰의 작품은 이만하면 이미 검증된 게 아닌가 싶다. 그의 작품이라면 믿고 읽을 수 있는, 윌리엄 맥스웰은 그런 작가이다. 좋은 기회로 다른 작품도 더 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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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붉게 피던 집
송시우 지음 / 시공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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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진실을 알지 못한 채,

그저 아름답게만 기억하려고 하는게 아닐까,



『라일락 붉게 피던 집』





일명 장르문학이라 칭하는 미스터리 소설을 국내작품으로는 거의 찾아보지 않았었다. 문단의 순문학의 자리가 확고할 뿐더러 뭔가 등한시 되는 분위기도 한몫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시장 구조도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일본의 장르문학이 거의 장악하다시피 차지하고 있는 구조가 자리매김한 듯한 형태이기 때문이다(내가 잘못 본 것일 수도). 



그야말로 숨 쉬듯 써내려 가는 듯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이미 수십 권이 번역 출간됐으며, 영화로도 리메이크 되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미미여사의 작품도 많이 번역되고 있고 그 외에 요즘엔 라이트 노벨(우리나라로 치면 웹소설에 해당하는)도 많이 나오고 있는 것 같다. 



작년에 국내 장르문학계에 획기적인 바람과 같은, 예상치 못한 수확은 단연『미스테리아』의 창간이다. 추리소설 전문 잡지라니, 국내 훌륭한 추리문학이 모두 모였다면 충분히 찾아볼 만한 것 아닌가. 우연히 읽은 이 잡지의 편집장? 편집위원의 인터뷰 중 추천작을 몇 작품 읽어보기로 했다. 그리하여 선택한 작품이 바로『라일락 붉게 피던 집』이다.



**



주인공은 잘나가는 대중문화 평론가이자 인기강사인 수빈. 수빈은 한 신문사의 의뢰로 어린 시절을 주제로 한 칼럼을 쓰기 시작한다. 1980년대 세울의 한 다가구 주택. 여러 세대가 한 집에 살았던 그 시절, 가난하지만 정겨운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는 수빈과는 다르게 아름답게 포장된 기억 속엔 상처뿐인 진실이 가려져 있을 뿐이었다. 라일락 나무 옆에 있던 집이라 라일락 하우스라 불리었던 집. 추억을 회상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던 수빈의 유년시절의 이야기는 예기치 못한 결과를 불러 일으킨다. 각 세대의 구성원마다 생동감 있게 그려지고, 인물간의 관계가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 



한 집에서 옆집 가족의 사정을 헤아려 아이의 끼니도 챙겨주기도 하고, 정을 나누며 살아간 그 시대에도 단절이란 게 존재했단 게 흥미로웠다. 너무 가까워서 오히려 못보는 진실이 있었던 것이다. 아이의 시각으로 봐온 기억이기에 가능했던 부분일 수도 있지만, 새삼 인간관계의 오묘함을 본 듯하다.


리얼리즘을 살린 서사에 구성도 짜임새 있어 전반적으로 재미있게 읽었지만, 아쉬운 점 역시 있다.




이건 저자의 취약점인 것인지 알 도리는 없지만, 기껏 공들여 만든 작품에 생뚱맞은 로맨스랄까? 멜로의 삼각관계는 공감도 안 되고 재미도 떨어진다. 주인공인 수빈이 과거를 되짚어 보며, 라일락 하우스 이웃들을 만나며 진실을 알아가는 모습은 좋은데, 여자로서 수빈은 좀 이상하게 보였다. 제대로 설명을 잘 못하겠지만 히스테릭한 여자의 일면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싶다. 유일하게 걸리는 부분이었다. 어떤 부분에선 섬세하지 못한 인물로 그려지기도 했으니 그냥 그러려니 넘길 수도 있다. 


사회의 한 단면을 예리한 시선으로 보여주면서도 미스터리적 요소도 갖췄다는 것만으로도, 앞으로의 작품을 기대해볼 만한 것 같다. 국내에도 훌륭한 사회파 미스터리가 많이 있기를 바란다. 어쩌면 내가 아직 찾아내지 못한 것일 뿐일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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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 죽은 자의 일기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29
정해연 지음 / 황금가지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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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악의란 대체 무엇인가,




『악의 - 죽은 자의 일기』





최고위층들만 사는 주상복합 아파트에서 투신한 여성 시체와 가족 관계로 보이는 늙은 부인의 시체, 그리고 시장 출마를 준비하고 있는 청렴결백 이미지의 국회의원. 사건종결 지시에도 끝까지 진실을 쫓는 형사, 마치지 못한 복수의 끝은 어떻게 될 것인가...대략적인 줄거리가 될 것 같다.


투신한 여성은 이미 죽은 이인데, 그녀는 홀로 복수를 준비하며 그 궤적을 일기에 남겼고, 서사 중간 중간 힌트처럼 부분적인 발췌가 들어가 있다. 말 그대로 죽은 자의 일기인 셈이다.



빠른 장면 전환을 위한 묘사, 치고 빠지는 식의 서술은 몰입도를 높혀준다.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그것도 입체적으로 다루지 못해 단면만 보여주는 드라마의 서술방식. 술술 잘 읽히긴 한다.


하지만 인물을 그리는 방식 역시 단순하다고 해야 할지, 평이하다고 해야 할지. 가해자와 피해자의 양상은 이미 오래전부터 소모된 스토리 구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끝부분은 묘하게 미적지근한 마무리를 남기고 끝나니 괜히 찝찝하기만 하다.


가면 뒤에 가린 진짜 얼굴의 추악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있어서도 상투적이다. 독자를 납득시키지 못한 채 한 줄 설명로 넘어가고, 악인이니까 그에 맞는 나쁜 짓을 해야 하니까, 당위성 따윈 없이 그저 그에 맞는 행적을 그리는데 그치고 만다. 꽤나 두꺼운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치밀하지 못하고 고개만 갸웃거리며 신속한 서사를 뒤쫓아가며 읽기 바쁘다. 


이 소설이 만약 사회의 어두운 한 단면, 비일비재하게 이루어진 정치쇼의 뒷면을 그리며 스릴러적 재미까지 더하려는 야망이 있었던 거라면 절대 성공한 작품은 못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스릴러와 사회비판적 시선 둘 중 하나만 선택해서 하나라도 깊게 파고들어 보여줬으면 어땠을까.


흔한 연속극, 아침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자극적인 스토리, 복수 동기 역시 너무 빈약하고 극대화시키며, 비극성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지 않고, 그저 장면을 보여주기 식으로 이어붙인 게 안타깝다.


피해자의 악의와 가해자의 악의를 구분짓기 위함인가. 악의가 피어나는 지점을 그리고자 했던 걸까.


기대작이라는 평을 보고 읽게 된 것 같은데, 글쎄...다음은 찾아보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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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애나 블루스 앨버트 샘슨 미스터리
마이클 르윈 지음, 최내현 옮김 / 북스피어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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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민 탐정 골라 읽기

앨버트 심슨 VS 스기무라 사부로

 

 

 

 

인디애나 블루스(Ask the Right Question)

 

 

 

 

 

미야베 미유키 여사의 스기무라 사부로 시리즈를 좋아한다. 셜록 홈즈를 좋아했던 것처럼, 엮인 관계성이나 스토리를 비롯하여 가장 혹한 부분은 역시 중심 인물의 매력이다. 그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드라마로도 재구성될 정도로 어느 정도 인기를 끌었던 것 같다. 나 역시 스기무라에게 어느 정도 매력을 느낀 부분이 있기에, 시리즈가 나온다는 게 너무 기대가 되고 기다려진다. 마침 국내에서도 행복한 탐정 시리즈라는 타이틀로 계속 번역, 출간될 예정인 듯 하여 더욱 반가웠다.

 

이러던 중 미미 여사가 아무 욕심이 없는 듯한 소시민 탐정 스기무라을 탄생시키기까지 영감을 준 작품이 있다고 하니 당연히 관심을 가지게 되고 아무런 의심 없이 바로 지르게 되었다.

 

 

 

사건의 줄기는 크게 하나다. 출생의 비화를 밝혀내는 것,

의뢰인 엘로이즈는 우연한(?) 과학 실험에 의해 자신의 부모님과 혈액형이 맞지 않음을 알게 된다. 이에 친부의 행방을 찾아 달라며 앨버트 심슨 탐정 사무소에 의뢰를 맡기게 된다. 과연 그 결말은 조금 충격적인 부분이 있다. 스팩타클한 추리과정이나 아름다운 인물과의 관계라든지 뭐, 그런 화려한 요소들은 찾아볼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탐정은 탐정이다. 앨버트 심슨은 훌륭히 그 진실을 알아내고야 만다.

 

 

 

**

 

 

 

마이클 르윈의 앨버트 심슨 시리즈의 첫 대면이다. 7년차 사립탐정 앨버트 심슨은 바른 생활 사나이라기엔 조금 무리가 있지 않나 싶은게 그가 일을 수행하는 과정에 저지르는 범법 행위가 좀 된다. 근데 그게 되레 매력적이다. 스기무라가 평범한 듯 사실 평범하지 않은 인물인 것처럼. 예를 들어 요즘 같은 경쟁구도가 기본인 시대에 재벌가에 들어가 그만한 출세욕도 없이 그저 관계성에 의문을 가지고 탐구하는 인물이라니, 착해빠졌다고 하기엔 어떤 부분에선 둔하고 무심하기까지 하다. 한 번 몰두하면 헤어나오지 못하는 집중력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바른 생활이라면 차라리 스기무라에게 더 적합한 수식어다.

 

그에 반해 앨버트 심슨은 다소 헐렁하다. 정말 인간적이다. 자신을 무시하는 것을 참아내지 못하며, 굴욕은 어떡해서든 소소한 일침이라도 가하려고 시시때때로 궁리한다. 7년 차 경력에 걸맞게 큰 성과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탐정 일을 행하는 데 있어서의 필수 정보 습득을 위한 인맥도 있다. 이혼한 아내에게는 '내 여자'라 부르고 그와 내 여자 사이에는 사랑스러운 딸도 있다. 탐정 일을 아직 본격적으로 시동걸기도 전인 스기무라와 다르게 앨버트는 노련한 탐정이다. 미행의 노하우도 있으며, 그 미행의 지루함을 견디기 위한 팁도 가지고 있다.

 

앨버트 심슨의 헐렁함은 의뢰인과의 관계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스기무라가 이혼을 하기 까지 엮인 이성과의 관계를 보자면 시작한 것도 아니고 시작 안 한 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긴장만 오간다면, 앨버트는 대놓고 의뢰인에게 사적 감정을 가지게 되는데, 이를 억누르려 참 애를 쓴다. 그래, 사실 이게 더 인간적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좀 별로였다. 그것도 어린 여성 의뢰인이었기에 민감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스기무라와 앨버트의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역시 탐정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고자 한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관계성, 인간을 내면을 들여다보려 애쓰던 스기무라가 탐정으로 재출발 하게 되었다면, 앨버트 역시 조사 도중 대면한 관계 속에서 적당 이상의 보수를 받고 손을 털었으면 끝났을 일을 이른바 진실을 알고자 한 호기심에 더 끝까지 매달린다. 중간 중간 찾아오는 회의감에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나, 그냥 돈을 받을 걸 그랬나, 하고 후회하는 부분은 역시 너무나도 인간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쫓고 되레 당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엮인 다른 과거 사건마저도 해결하게 도와준 셈이니 그 도리는 성실히 다한 것이다.

 

 

**

 

 

어쩌다 보니 같이 묶어 얘기를 하게 됐지만, 대조해보니 각각의 매력이 좀 더 잘 드러나는 것 같다. 읽을 때는 그렇게 재밌게 읽히지 않았는데, 스기무라와 대조해 이것저것 살펴보니 재밌는 요소가 참 많았단 걸 깨닫게 된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한 가지 흥미로운 부분과 별로였던 부분은 있었다.

 

 

흥미로운 부분은 미미 여사가 밝혔듯이 스기무라의 모티브가 앨버트로부터 시작된 점이다. 그런데 그 외에도 묘사를 하는 과정에서 재밌는 구석이 있었는데, 인물 묘사하는데 있어, 그 인물이 입고 있는 옷과 특징, 가구의 배치나 주변 배경 묘사 등이 세세하게 표현한 부분이 서로를 떠올리게 했다는 점이다. 미미 여사의 책이 두꺼워질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원인 중 하나가 세세한 묘사에 있다고 보는데, 마이클 르윈은 전반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 군데 군데 그러한 세밀한 묘사가 있다. 그래서 재밌었다.

 

아쉬운 부분은 역시 의뢰인과의 관계이다. 이 책이 쓰여진 시대적 배경이랄까, 도시 분위기 속에서는 그저 매력적인 도구로 쓰일 프레임일지 몰라도 읽는 내내 거부감이 들어서, 이 부분만 제외한다면 괜찮겠다 싶었다. 노골적인 것도 아니고 그저 암시하고 약간의 기류만 흐를 뿐이지만 그래도 역시 싫었다. 그래, 그것마저 없으면 이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탐정 이야기의 재미가 더 떨어질 거라고 느낄 수 있지만, 여튼 간에...이건 개인적인 사견일 뿐이다.

 

원제와 번역되어 출간된 국내 출간본의 제목의 성격이 각기 다른데, 이에 대해서도...영포자는 할 말이 없지만, 이것도 눈에 잘 띄게 할만한 제목으로 지었겠지...싶다. 같은 출판사에서 이렇게 연달아 앨버트 심슨 시리즈와 스기무라 사부로 시리즈가 나온 것은 독자로 하여금 감사한 일이기도 하다.

 

앨버트 심슨을 읽고 나니 스기무라 사부로 시리즈가 너무 읽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다음 작품도 너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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