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스푼의 시간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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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먹먹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뭘까,






<한 스푼의 시간>








명정은 재개발 지역을 앞둔 지역 인근의 오래된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다아내는 퇴직 후 빚더미에 얻은 세탁소를 운영에 도움이 되고자 아픈 몸을 모른 척 일하다 먼저 떠나고 말았다중매로 만난 아내와는 큰 다툼 없이 무던한 생을 같이 살았었다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어릴 적 해외로 유학을 가서 연락이 끊긴지 오래되었다공부를 마치고 오겠다는 게 삶의 터전으로 바뀌었고가정을 이뤘다는 문자 그대로의 서신만 보냈었던 아들은 비행기 사고로 생사여부가 불분명하게 됐다그런 아들로부터 커다란 택배하나가 도착하는데아들이 근무한 회사에서 개발했다던 인공로봇


둘째가 생긴다면 짓겠다했던 돌림자로 은결이라는 이름을 얻은 17세 소년의 모습을 한 로봇이 명정의 곁에 남게 된다이야기는 명정과 은결이라는 로봇그리고 동네에 남은 여러 가구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은결을 작동시키기까지 도와준 이는 동네에서 제일 가방 끈이 긴 영문학 박사를 수료한 세주똑 부러진 발음으로 전후 사정까지 알아봐준다로봇이 궁금한 아이들 시호와 준교는 심부름을 자초해 세탁소에 다녀간다어려운 가정 속에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이들 앞엔 현실은 어쩜 그리 무정한지 잇따른 불행이 일상의 별 다를 놀라움 없이 천연덕스럽게도 잘만 일어난다그 사이 은결은 정해진 프로세스로 판단을 내리고 말을 했고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은결도 감정의 동요를 느끼게 된다이를 테면 어린 시호가 다 커 어른이 되었을 때그에게 전한 소소한 연심이라든지그녀가 흘린 눈물에 대한 심장이 저릿하게 느껴지는 듯한 감각을 불안정한 심장박동 수로 느끼게 된다든지명정과 함께 하는 생활에서 세탁소 일에서도 별 다른 도움이 되진 않던 비싼 부품만 달고 있는 고급로봇이었던 은결도 성장을 하듯 요령을 익히며 살아가는 것이다.

 

인물간의 갈등보단 먹고 살아가기 힘든 척박한 현실에서 오는 서글픔이 곳곳에서 묻어난다별 것 아닌 것이지만 가해자는 떳떳하고 피해자는 고개를 수그리는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상황이 전복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말 그대로 더러운 세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차곡차곡 쌓인 세월 속에서 동네의 환경을 바뀌었고건물주는 세를 올렸으며 인근엔 아파트 단지와 상가가 들어서게 된다세탁소 역시 마찬가지였다명정은 세탁소를 운영한 시간만큼 의도치 않게 동네 사람들의 삶을 살펴보는 관찰자가 되었다세주는 이혼을 했고우울증이 시달리는 와중에 갓난쟁이를 돌봐야 했으며 양육비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다준교는 아픈 것을 참다 큰 병으로 도진 아버지를 잃고 지방의 대학에서 공부를 이어나가게 됐다시호는 행복과 희망을 꿈꾸지만 나아지는 게 없는 삶에서 일방적 폭력의 피해자가 됐고가족 구성원에게 위로조차 받지 못한 채 피로함만 느끼게 된다.

 

잔잔한 듯한 일상 속에서 작은 파동들이 수차례아프게 일어난다.

서글픈 삶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만 한다그런 척박함 속 은결이라는 인공로봇이 뜻밖의 매개체가 되어주기도 한다뭔지 모르겠지만 이음새 역할을 해주고 있다로봇이기 때문에 전후 사정을 묻지 않고 들어줄 수 있으며별다른 여지없이 기대어 울 수도 있는 것이다.

 

시간이 흐른 만큼 은결의 내부도 점차 삐걱댔지만 그보다 먼저 떠나게 된 명정에 이어 은결은 처음으로 충동적 행동으로 그의 유언을 찢는다항상 조심해야 했던 이불 빨래를 직접 발을 담그고 열심히 밟아댄다더불어 삶을 종결하려는 시도였다.

 

한 호흡으로 쉬지 않고 읽어나가서일까시호의 이야기에 이어 은결의 자살 시도처럼 보이는 행동을 했을 때순간 울컥하고 말았다.

 

로봇도 자살을 할 수 있는 것인가홀로 남은 적막함에 어찌할 도리가 없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한다면어떻게 해야 하는가.

 

로봇연구원으로 일하고 싶다던그래서 명정이 미리 부탁했던 대로 이뤄지진 않았지만 은결의 삶은 준교의 조카를 마주할 만큼 이어가게 된다정해진 프로세스와 판단한다와 하지 않는다하고 싶지만 하지 않는다하고 싶지 않지만 한다등등 말의 함축적 의미를 헤아리고 행간을 읽어내는인간적 감성을 더해진 로봇으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



구병모 작가의 작품은 아가미』 이후 두 번째로 접해보게 되었다아가미』 역시 신비로운 분위기가 일상 속에 침투한 소설이었다한 스푼의 시간』 역시 마찬가지이다이전의 작품의 문장은 어떠한지 잘 모르겠지만 이 작품에선 몇 번씩이나 되풀이해서 읽어야 할 만큼 걸리는 문장들이 많았다어조 자체가 로봇에 대한 서술이나 로봇이 말하는 부분이니 더 논리적으로 진술해야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복잡한 회로를 들여다 본 듯이 어지러이 몇 번이나 되돌아가야 했다그렇기 때문에 이야기의 힘이 탄탄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구체성이 담보되었기 때문에그저 설정만 가져온 것이 아닌 로봇의 발화를 했기 때문에 다소 딱딱하게 느껴졌지만 역으로 실체를 느껴볼 수 있던 게 아닌가 싶다좋은 소설이다두고두고 읽고 싶은 책이다아프지만 봐야 할 현실에서 오리무중의 상태로 회피하고 있었던 나를 반성해야 되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 구절




일반인이 잔일에 부려먹기에는 다소 기능이 과하다 싶은 고가의 로봇보다 중요하거나 피곤한 일들이, 영원히 마르지 않는 빨래처럼 일상 곳곳에 널려 있다. 세상은 한 통의 거대한 세탁기이며 사람들은 그 속에서 젖은 면직물 더미처럼 엉켰다 풀어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닳아간다. 단지 그뿐인 일이다. 29쪽

혈연을 비롯한 모든 관계를 한순간에 잘라내는 도구는 예리한 칼날이 아니다. 관계란 물에 적시면 어느 틈에 조직이 풀려 끊어지고 마는 낱장의 휴지에 불과하다. 51쪽

"보편적인 삶은, 아니 그냥 삶은, 어떤 것입니까"
(…) 데어버리도록 뜨겁고 질척거리며 비릿한 데다, 별다른 힘을 가하지 않고도 어느 결에 손쉽게 부서져버리는 그 무엇 114-115쪽

그러면 가족이란 결국 무거운 부담과 막대한 담보 및 거미줄 같은 채무로 연결된, 서로가 서로에 대한 인질인가. (…) 가족이 휴식이나 피난처가 아니라 피로와 염증을 유발하는 일거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둘러선 구성원의 표정이 상기시킨다. 150쪽

아무런 약품을 집중 분사해도 직물과 분리되지 않는 오염이 생기게 마련이듯이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어느 순간에 이르면 제거도 수정도 불가능한 한 점의 얼룩을 살아내야만 한다. 부주의하게 놓아둔 바람에 팽창과 수축을 거쳐 변형된 가죽처럼, 복원 불가능한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여야 한다. 157쪽

그러나 사람은 듣고 싶은 말만 들으면서 살아갈 수 없다. 대개 적의와 비난의 언사로 흘러넘치는 세계에서 그나마 들어줄 만한 말이라곤 공허한 말장난이나 모호한 비유 정도일 것이다. 그 밖에도 만나고 싶지 않은 얼굴들을 마주 대하며, 하기 싫은 일을 많이 양보해서 다섯 번 가운데 한 번은 하고, 맞추고 싶지 않은 분위기를 띄우며, 때론 누군가를 휴지통으로 삼기는커녕 누군가 뱉어낸 쓰레기를 자신이 기꺼이 삼켜주는 일도 한다. 170-171쪽

우주의 나이가 137억 년을 조금 넘나 그렇다지. 그 우주 안의 콩알만 한 지구도 태어난 지 45억 년이나 되고. 그에 비하면 사람의 인생은 고작 푸른 세제 한 스푼이 물에 녹는 시간에 불과하단다. 그러니 자신이 이 세상에 어떻게 스며들 것인지를 신중하게 결정하고 나면 이미 녹아 없애져 있지. 184쪽

그는 인간의 시간이 흰 도화지에 찍은 검은 점 한 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그 점이 퇴락하여 지워지기 전에 사람은 살아 있는 나날들 동안 힘껏 분노하거나 사랑하는 한편 절망 속에서도 열망을 잊지 않으며 끝없이 무언가를 간구하고 기원해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안다. 그것이 바로, 어느 날 물속에 떨어져 녹아내리던 푸른 세제 한 스푼이 그에게 가르쳐준 모든 것이다. 2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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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통 - 제5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
이희주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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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평생 이 정도로

사랑하는 감정을 알지 못할 거야."




『환상통』




덕질을 다루는 문학소설이라니그것도 스물다섯의 젊은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환상통은 몸의 한 부위나 장기가 물리적으로 없는 상태임에도 있는 것처럼 느끼는 감각을 말한다.


소설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M의 시선, 2부는 만옥의 시선, 3부는 만옥을 사랑한 민규의 시선을 담은 이야기다. M과 만옥은 아이돌 N그룹 공개방송을 기다리다 우연히 여러 차례 만나게 되어 말을 나누게 되고가까워지게 되었다가 어느 순간 연락이 끊기게 된다.

 

M과 만옥의 언어는 비슷한 듯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중심적으로 보는 것도 각기 다르다. M은 영상이나 이미지 등을 통해 좋아하는 마음을 발전시키며만옥은 멀리 앉아 있는 자리에서도 스크린 보다 무대 위의 그들의 흐릿한 모습을 보고자 한다이미지와 실재를 비교하는 듯한 전개 양상이 흥미롭다.


M은 통속적으로 아이돌이나 기타 서브 컬쳐를 즐기며 좋아하는 것을 폄하하는 시선들에 대해 대항하듯자신의 마음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M의 언어는 좋아하는 대상을 다 씹어 발라버리려는 듯 거칠고 과격하다반복되는 아름답다는 표현을 넘어서고부족한 언어를 충족시키고자 여러 연애소설을 탐독하게 된다그러나 쉬이 이입하지 못하고 괴리감과 거부감마저 들게 되는데흔히 등장하는 남녀 설정이 나이든 남자와 어린 여자였기 때문이고자신의 사랑은 짝사랑의 카테고리에도 속하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렇게 덕질은 그냥 사랑도 아니고 이상한 사랑으로 치부된다.


그러나 M은 언어로 기록을 남기려 할수록 이유 모를 회의감 같은 감정이 일게 된다그건 마치 가닿을 수 없었던 무언가가 언어의 모습으로 재탄생될 때 그 진위가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에 대한 허무함이 아니었을까대상에 대한 감정의 민낯을 보게 되었던 게 아닐까.


M은 그의 사랑이 기다림이라고 정의했다공개방송 무대를 기다렸으며다른 행사 무대의 스케줄을 보기 위해 대기하고 또 기다렸다어느 날그런 기다림의 끝에 영화촬영 소품으로 쓰인 눈을 보며 웃던 M은 그의 타오르던 사랑을 접게 된다.


만옥은 만개의 옥이라는 뜻을 지닌 이름의 여자이다. M과 같이 N그룹의 민규라는 멤버를 좋아하며사랑하고 있다그녀는 사생처럼 일거수일투족 좋아하는 멤버의 생활을 뒤쫓진 않지만 그와 더 가까워지고 싶어 한다더 알고 싶고 더 이해하고 싶어 사랑을 하는 것이다마치 연인 관계처럼 무대 위 누군가 민규에게 조금만 닿아도 격렬하게 분노한다분노할 때의 만옥은 몰아일체의 경지의 다다른 듯 욕설을 내뱉곤 한다주변을 지치게 하는자신을 좀 먹듯이 괴롭히며 사랑하는 만옥은 사랑을 하는 것인지 괴로워하는 것인지헛갈리며 포기할 선택지가 없으니 차라리 네가 죽어주길 바라기도 한다는 생각마저 한다.

 

만옥의 사랑과 M의 사랑은 중복된 내용으로 발화하기 때문에 비슷해 보이지만 조금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M은 어느샌가 덕질을 그만두었고만옥은 어느샌가 죽음을 맞이했다만옥의 죽음은 민규의 언어로 설명되어 있지만생뚱맞게 느껴지기도 했다이상한 사랑을 하는 그들 중 더 이상한 사람인 만옥이 위태로운 모습으로만 비춰졌다 하더라도그 말로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들의 사랑은 인정받지 못한 것에 대해 보상 받기 위해서인 듯 과격하고 외설스럽기까지 한다뼈와 살을 발라준다느니눈썹 한 올 한 올 핥아 올려주고 싶다는 등그들만의 언어로 씨발죽어도 좋아는 그러한 감정과 욕망의 집합체 같은 표현인 것이다.


마지막 3부는 공교롭게도 앞선 두 사람이 좋아하는 아이돌 멤버와 이름이 같은 남자의 이야기다민규는 만옥을 짝사랑하는 남자이고한결같이 외면당하면서도 그 옆을 지키는 사람이다그는 만옥이 죽고 난 후그녀를 더 이해하고자 같이 덕질을 하며 기다림의 시간을 함께한 M을 만나 당시의 만옥이 어땠는지를 듣곤 한다그렇게 여러 시도들이 쌓이고 끝내 좋아하는 이 발치에도 다가가치 못한 만옥 대신 민규라는 멤버에게 만옥의 이름으로 사인을 받는다.



**



소설 속엔 신선하고 날 것 그대로의 비유들이 넘쳐난다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지기도 하고욕망의 종합적인 표현으로도 보인다.

 

팬질덕질이라 불리우는 사랑이 특수성을 존중받지 못한 데서 오는짝사랑에도 속하지 않는 이상한 사랑이라 불리는 그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까발리고 있다이와 같이 아이돌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알만한 그들의 세계 속 전문용어들이 자주 등장한다그리고 그들이 그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소비하는 방식예를 들어 사인회 당첨을 받기 위해 앨범을 몇 십장씩 사는 것과 같이 실제 경험한 사례를 넣어둔 것 같기도 하다실제로 작가는 휴학생 시절 덕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노라고 고백했다덕통사고에 대해서는 소설의 뒷부분 작가 인터뷰에 실려 있다다소 과격한 표현들이 난무하지만 통속적인 편견의 시선을 향한 외침들이 왠지 모를 통쾌함을 선사해준다.


작가는 서브컬쳐에 대한 관심이 있었기에 이러한 작품도 쓸 수 있었다고 하였다나 또한 일명 덕질이라고 하는 서브컬쳐를 맹목적으로 좋아한 적도 있고정말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도 했었다.

 

팬이 아닌 일반인을 머글(해리포터에서 마법을 못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하는데머글의 시선에선 팬은 빠순이라고 폄하되며조롱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경험이 많기 때문에나이가 더 먹었기 때문에 성숙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닌데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현실 속에서 환상을 쫓는 듯 보이는 빠순이들을 한심하게 여긴다그러한 가치 판단은 모두 각자의 것이다같은 현실 속에서도 모두 각기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이렇듯 살아가는 방식 또한 다르다그저 하나의 일면인 것이다자신의 기준이 세상 모든 것의 중심이 되는 기준은 아니기 때문에각자의 취향을 존중해줄 필요가 있다개개인의 기호사항이니까.

 

덕질이 이상한 사랑으로 치부되는 이유는 관계라는 특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상대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얻어지는 관계성을 여기에 대입하기엔 무리가 있기 때문에그렇다고 이러한 애정을 단순히 이상하게 치부하는 것은 편견이자 관계의 권위를 따지는 것 같이 느껴지기에 되레 폭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그러나 굳이 관계를 직면하며 얻어지는 것이 아니더라도개개인에게는 일대일의 관계가 아닐까그렇게 하나씩 모여 하나의 거대한 팬덤으로 묶이게 되고 같은 것을 좋아한다는 특성만으로 든든함과 안정을 얻게 되는 것이다또한 그 대상과의 관계에서도 오랜 시간 함께 해나간 사이에서의 견고한 신뢰도 부여된다.


이러한 특수한 관계성을 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흥미로운 소설이다.

M과 만옥의 기록은 어쩌면 그 누군가의 기록이 아닌 덕질을 하는 이들의 대체적인 공감을 얻을 수밖에 없는일종의 고백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어차피 덕질하는 거 행복한 덕질이 될 수 있도록맘껏 표출시킨 것이다뜨거운 열망을 담은 고백의 서사.



 **



시도는 참신했고신선했고 날 것 그대로의 생명력이 살아 있었으며과격하나 서사를 이끌어가는 힘이 느껴지는 작품이다문단에서는 다뤄진 적 없었기 때문에 더 눈길이 갔을 것 같다호기심에 구미가 당기는 소설이지만 그들만의 언어에 거부감이 든다면 그 진입장벽을 넘어야만 하는하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내 보여준 적 없는 것을 까발리는 것만큼 통쾌한 것도 없지 않나 싶다이러한 힘을 지니고 있는 젊은 작가가 부러운 동시에 다음 작품 또한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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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박사는 누구인가?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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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믿는 모든 것들의 이면의 모습은?



『김 박사는 누구인가?』




이기호하면 떠오르는 건 독특한 형식으로 글을 쓰는 작가라는 것이었다. 처음 접했던『최순덕 성령충만기』역시 성경형식으로 형태를 취하며 서사가 이어가니 읽는 맛도 재밌는 소설이었다. 상상력과 재미, 독특한 형식으로 눈길을 사로잡지만 가벼운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그래서 한국소설에서는 드물게도 일본의 소설들처럼 가벼이 읽기에 좋다 느껴졌었다. 이상하게 그게 연달아 몇 편 이어지니 더 이상 손이 가지 않았는데, 문득 궁금해져서 들여다보니, 그런 호기심에 칭찬해주고 싶을 정도로 좋은 작품들이 한 곳에 실려 있었다. 



『행정동』


오재우는 졸업 후, 취직이 되지 않자 학연, 지연을 통해 단기알바식의 일을 얻어 하게 된다. 행정동에서 하는 업무란 수기로 작성된 학적부를 전산으로 일일이 옮겨 재기록하는 것이었다. 묘하게 공감가는 부분이 많은게, 경쟁자 한 명이라도 더 떨궈내서 정규직을 탈환해야 하는 요즘 현실에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는데, 유머를 잃지 않았다는 게 구미가 당겼다. 이건 이기호만의 능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느 부분에서 느닷없이 터지는게 그게 재미있는 부분이었다. 다음이 궁금해지도록, 첫 시작점이 좋은 소설, 배치가 특히 좋았다.



『밀수록 다시 가까워지는』


이 소설집에서 가장 매력적인,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된다. 말없이 묵묵히 일만 하던 삼촌에게 프라이드라는 차가 생기고 난 후의 스토리, 어느날 집앞에 세워진 삼촌의 프라이드 덕분에 나는 불편하지만 적응하며 그 낡은 차를 몰았고, 관심없게만 보았던 삼촌에 대해 하나 둘씩 알아가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인물의 성격 궁합이라 해야 할까, 할머니와 나의 관계성도 재밌었다. 삼촌의 노트 속 주행거리 기록들에 대한 것도. 후진이 안 되는 차를 가진 삼촌의 이야기는 묘한 여운을 남기는, 그래서일까, 독자인 나 역시 삼촌은 이제 어디선가 정착해서 누군가와 잘 살고 있기를 바라게 되었다. 



『김 박사는 누구인가?』


역시 현실이 드러나는 소설이다. 임용을 준비하는 주인공인 내가 심리적인 압박감을 해소하기 위한 상담을 나누는 이야기이다. 상담을 하면서 점점 자신의 가족에 대한 진실에 대해 가까워져 가는데, 화목해보였던, 안정적으로 느꼈던 관계의 이면을 하나씩 까발리며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이야기가 끝을 향해 갈수록 그래서 도대체 김박사는 누구인가, 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머릿 속의 또 다른 자아? 아님 통속적인 요소로써 불륜상대? 그래서 김박사는 누구인가? 우리는 보고 싶은 아름다운 것만 봐야 할까, 아님 추악한 그 이면도 다 까발려 봐야 할까. 삶을 직면하는 자세는 어떤 지점이 더 가까울 것인가. (맨 마지막 구절은 생각치도 못해 의외성을 가지지만, 궁금증이 완전히 해소되진 않았다. 의문에 의문을 더한 느낌?)



『저기 사람이 나무처럼 걸어간다』


화자는 앞을 못보는 전도사이다. 가난하지만 신앙을 통해 극복해 나가려 애쓰는, 남을 도우며 살아가는 삶에 만족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신도 중 한 명인 최 간호사는 그의 도움을 받음으로써 은혜를 갚고자하는 마음이 큰 사람인데, 기증자가 나타났다는 기쁜 소식을 전한다. 그는 보지 못한 자신의 아이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그러나 기증자의 가족의 동의를 얻어내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르고, 신이 자신을 시험에 빠지게 한 것처럼, 갈등하며 고민하다 발길을 돌린다. 이내 다시 돌아와 앉은 자리에 우연히 만난 소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화자는 지나온 세월에 말한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뱉은 침에 대해 감히 비난할 수 있을까. 독실한 신앙 뒤에 가려진 인간의 욕심을 애써 좋은 말로 포장해댄 것은 아니었을까. 



『탄원의 문장』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중간의 거리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누군가를 잃었을 때의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화자인 나의 제자의 죽음으로 사건을 시작된다. 군기를 잡기 위한 구실로 술을 잔뜩 마시게 된 피해자 박수희의 마지막 한마디의 진실은 너무 늦게 밝혀진다. 아끼던 사람의 뒷모습은 추악했고, 찌질하기 그지 없다. 얼굴을 잘 모르는 제자의 죽음과 아끼는 제자의 억울함과 미래를 위해 탄원의 문장을 시작한 '나'. 문장은 누굴 향해 있었어야 했을까. "이~" 애정의 담긴 한마디가 아프게 다가왔다. 그 이면을 보지 못한 어리석음은 참혹한 결과만을 불러오게 된 것이다.


이정(而丁)-저기 사람이 나무처럼 걸어간다 2 


이름때문에 잃은게 많다고 믿었던 사람 이야기이다. 개명을 하기 위해 착실하고 믿음직스러운 아들에게 부탁을 한 게 어째서 불행을 초래한 계기가 되어버렸을까. 이름은 구별을 위함이 아니었나. 왜 이름 하나 때문에 고통을 받아야 했을까. 배신자의 참회를 위한 이름은 그 이름의 당사자가 원했던 바가 아니었는데. 이름에 숨겨진 진실을 찾아갈수록 이야기 속 현실이 고통스러운 사건들로 이어져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사람이 나무처럼 걸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화라지송침』


그들 안에서 정의란 무엇인가. 염전 노예로 떠들썩했던 시기가 있었다. 피해자는 지나간 세월조차 보상 받지 못한 채, 가해자들은 가벼운 형량과 벌금으로 결말이 났었던. 이 사회가, 법은 허울에 불과하고 사회는 얼마나 썩어빠졌는지를 잘 보여준 일례였다. 이를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었다. 조금은 다른 지점의 이야기였지만. 아내와 장인어른, 두 부녀를 살린 큰 할아버지. 그리고 종숙의 아들이 갑자기 아내와 내 앞에 나타나게 된다. 두루마리 휴지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기종씨. 바깥일을 하는 아내에 대한 불만이 없다고 생각했던 나와 기종씨를 한 달간 집에서 머무리게 했던 일들. 아내와 기종씨와 관계 사이의 금은 어떤 것이었나. 홀로 남겨진 기종씨가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 이용당했던 시간들. 해소되지 않는 부분들에 군데군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연 내 상황에서도 선의가 계속 이어졌을까 싶기도 했다. 


『내겐 너무 윤리적인 팬티 한 장』


마지막에 실린 단편 소설인데, 이기호의 예전 소설들이 떠올려지는 작품이었다. 잘나가는 형에게 신세를 지는 못난 동생인 나는 형의 사각팬티를 반바지로 착각하여 입고 다닌다. 팬티 위에 팬티를 입은 꼴. 아직은 낯설은 동네에서 자신이 보고 믿는 그대로를 우기다가 벌어지는 오해와 해프닝들. 작품이 쓰인 시기를 보면 가장 먼저 쓴 소설이 아닐까 싶다. 사실 완전한 창작 시기를 알 수 없지만. 여기 저기 단편이 실린 시기에 따르면 가장 최근에 쓴 소설은 아님에 분명하다. 가벼운 해프닝같은 소설이다. 


이기호의 최근 작품들을 찾아보고 놀라웠다. 예전엔 가벼이 읽는 소설이라 생각했는데 어느새 중심이 단단히 갖춰진, 밀도 있는 소설 속에 우리의 삶이 잘 녹아 들어있었고, 그의 특기인 유머 또한 과하거나 모자르지 않고 섞여 있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매력적인 단편이 이렇게나 많이, 한 곳에 다 모여 있었다니. 지난 날의 짧은 식견을 반성하고 이기호의 다른 작품도 찾아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우리가 확고하게 믿고 있는 어떤 것들의 이면이 궁금하다면 끝과 시작, 위와 아래를 뒤집어볼 것. 그것이 내 소설의 기조가 되어버렸다"


작가의 한마디처럼 이 소설집은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었던 것들의 이면을 사정없이 까발려줬다. 그 결과는 참혹했지만, 우리의 생의 이면에는 이렇듯 아름다운 것으로 치장한 아프고 고통스러운 진실이 숨겨져 있었음을 늘 유념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이면을 볼 수 있는 눈을 기르고 싶다는 생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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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이면 - 1993 제1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이승우 지음 / 문이당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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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온전히 사랑하기까지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생의 이면』





소설은 작가인 화자가 '박부길'이라는 작가의 생애를 다루는 글을 의뢰받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뚜렷한 친분관계도 없을 뿐더러 한 작가의 생애를 훑는 과정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는 화자는 박부길의 글과 인터뷰, 그리고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하나씩 큰 줄기를 형성해나간다. 


박부길은 정신분열증으로 인해 갇혀 있다 자살을 한 아버지와 한없는 죄스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어머니, 그리고 버림 받은 상처를 안은 채 유년기를 보냈고, 다시는 고향에 돌아오지 않기로 다짐하고선 떠난다. 아버지에 이어 판사가 되어 집안을 일으켜주길 바라는 기대를 버리고서.

중화집 배달일부터 시작해서 신학공부를 시작하기까지는 운명적인 만남, 즉 사랑이 큰 계기가 되었다. 


어둠이 빛이 되는 동굴같은 안식처, 자취방에서 책속으로 침잠하는 생활을 이어가는 그에게 어떠한 사건을 계기로 그의 삶에도 '사랑'이라는 것을 안착할 수 있게 한 대상을 만나게 된 것이다. 교회 선생님이었던 그녀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신학공부를 시작했고, 조심스러운 관계가 이어져 갔으나, 늘 위태롭고 위험하게만 흘러가고 만다. 박부길의 여러 작품 속에서 자신의 생애의 대한 일면들을 가린 듯 보여줬는데 이를 통해 그의 생의 일종의 불행함과 사랑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서툰 모습들, 상대를 올곧게 바라보지 못한데서 비롯한 예측가능한 이별의 전조들. 이는 자신을 상처주는 것뿐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저 깊은 상처를 입히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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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이로 하여금 어느 부분에 중점을 두고 보느냐에 따라서 이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그리는 종교소설로 읽힐 수도 있으며, 사랑을 다루는 연애소설로도 읽힐 수 있다.

흐름에 따라 읽어나갔을 때는 실존적 성격의 질문이 주 화두가 되는 소설인가 싶었는데, 흘러가 다다른 것은 조금 다른 지점이었다. 이는 사람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까지의 여러 측면을 탐구한 소설처럼 느껴졌다. 박부길의 사랑의 실패로 끝나기 전에 그게 진정 사랑이었는가, 다시 묻고 싶을 만큼 처절하게 외로운 생에 안타까움이 더해지는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는데, 그건 모두 본인이 자초한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용된 구절에서 에리히 프롬의 질문처럼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한 데에는 어느 정도 공감하는 바다. 이는 밀고 당기기 같은 기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상대를 대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박부길은 그의 외로운 생만큼 자신을 사랑할 줄 몰랐던 인물이다. 동경하고 섬기는 존재로서, 상대를 신격화한 채 주는 애정은 폭력과도 같았고, 이에 자신도 크게 아프게 한 결과에 이른다. 사랑은 저절로 하게 되는 것이고, 자연스러운 감정에서 비롯된다 하더라도 그에 맞는 자연스러움에 대한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단순히 말하자면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주는지 모르고 쏟는 애정은 일방적이며 폭력과도 같이 느껴지기 때문에.


화자가 박부길의 작품과 생애를 차례대로 교차하며 서술하는데, 작품으로 인용된 글들 역시 모두 창작품일텐데 그것 역시 참으로 좋았다. 밀도 있는 문장과 서사에 박부길이라는 작가가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이승우 작가는 신학도이기도 했기 때문에 종교적인 색채를 띄는 부분에서는 더 묵직하게 와닿았던 것 같다. 


작가의 처녀작이라고 설명된 이 작품은 몇 차례 개정판의 서문에서 고백했듯이, 그야말로 작가가 애착을 많이 갖는 작품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당연히 성글게 느껴지는 부분도 군데군데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나이에 이런 묵직하면서도 심도 있는 작품을 창작해내는 작가는 역시 천재가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 추천 도서임에는 분명하나 청소년 추천도서라기엔 너무 어렵지 않은가 싶다. 물리고 물리는 문장의 연속의 진입장벽은 꽤나 높았으나, 확 와닿는 구절도 군데군데 자주 드러나기 때문에, 비유도 그렇고. 처음에 잘 들어가지 못하면 갇히는 듯한 느낌이 들거나 중도 포기하고 싶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분명한 것은 두고두고 읽고 싶고, 계속해서 만나보고 싶은 작가라는 것이다. 



**기억에 남는 구절





불행에 익숙해진 사람은 쉽게 운명의 무게를 받아들인다. 20쪽

사람은 왜곡하기 위해서 글을 쓴다. 현실이 행복해 죽겠는 사람은 한 줄의 글을 쓰고 싶은 충동도 느끼지 않는다. 오직 불행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만이 글을 쓰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24쪽 (소설 속 박부길의 글에서)

행복과 불행은 하나의 관념이다. 관념은 육체가 없는 것이다. 또는 육체와는 상관 없는 것이다. 행복은 불행의 관념이 부재한 관념이며, 불행은 행복의 관념이 부재한 관념이다. 25쪽

모든 금령이 신성한 것은, 그것들이 징벌의 공포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유발하지 않는 법은 신성으로부터 멀다. 신성은 어디 있는가. 두려움 속에 있다. 아니, 두려움에 대한 예감 속에 있다. 그런데 그것은 왜 두려운가. 금지된 것은 사람을 끈다. 그것이 이유이다. 35쪽

범죄는 달콤하다. 그 달콤함은 범죄 행위의 결과로서의 급부때문이 아니라, 금지된 법을 범하고 있다는 순간의 팽만한 긴장에서 오는 정신의 오락 때문이다. 36쪽

진실이 반드시 사실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진실은 사실보다 훨씬 포괄적이다. 내가 어떤 글을 읽다가 붉은 볼펜으로 줄을 그었으며, 그 붉은 줄은 여태 머릿속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 조이스를 읽음으로써 비로소 세상이 악몽임을 깨달은 것이 아니다. 나는 붉은 볼펜으로 줄을 그었다. 그것은, 그를 알기 전부터 이 세상에서의 나의 삶이 바동거리는 악몽에 다름 아님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제임스 조이스를 빌려 내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임스 조이스에게서 내 말을 발견한 것이다. 156쪽

우리는 운명을 보여 줄 수 없다. 그러나 운명적인 것은 얼마든지 보여 줄 수 있다. 운명은 여기 있거나 저기 있는 것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발음하는 그 자리에 있다. 운명으로 인식하는 자리에, 그 순간에 그 사람의 운명이 깃드는 것이다. 삶은 인식과 해석의 장인 까닭이다. 170쪽

나는 나 자신이면서 나를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내가 하나의 단순한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얼마나 많은가. 나는 누구인가, 나의 행동의 근거는 무엇인가, 하고 질문하고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나 또한 그 수많은 나 가운데 하나의 나에 불과할 뿐이다. 175쪽

이름을 쓰는 것이 인식의 방법이긴 하지만, 그것은 최악이 방법이다. 이름을 붙이는 것은 구별하기 위해서이지 인식하기 위해서는 아니기 때문이다. 구별을 통하지 않고는 인식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이름을 사용한다. 183쪽

독자에게 중요한 것은 소설 속에 형상화된, 또는 소설 속에서 독자가 발견해 낸 작가이지, 현실 속의 작가가 아니다. (…) 우리는 한 작가의 소설로부터 구성해 낸 한 인물의 초상과 그의 삶을 너무 편리하게 현실 속의 작가와 동일시해 버리곤 한다. 나쁜 버릇이다. (…) 아무리 진지한 독자도 이 버릇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다. 213쪽

사랑도 배워야 하는가. (…) 인간은 삶에 필요한 모든 기술을 습득하려고 한다. (…) 그런데 왜 사랑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가. 그것은 사랑에 대한 생각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처럼 수월한 것은 없다거나 사랑은 자연 발생적인 것이므로 따로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따위의 안이한 생각에 빠져 있다. 사랑에 실패하는 사람은 많지만, 사랑에 대한 자신의 능력 부족이 실패의 원인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랑을 유쾌한 감정 놀음이나 우연한 몰입쯤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 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다. 사랑에도 기술이 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들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면, 사랑이야말로 그래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사랑을 배우지 않을 때, 종종 사랑은 흉기가 되어 사람을 상하게 한다. 288-289쪽

고통을 통해 그는 아버지를 이해하고, 아버지를 껴안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글 쓰기는 감춰진 것의 드러내기이다. 그 드러내기는 그러나 감추기보다 더 교묘하다. 그것은 전략적인 드러냄이다. 말을 바꾸면 그는 감추기 위해서 드러낸다. 그가 읽은 대부분의 신화들이 그러한 것처럼. 3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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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내일 또 만나
윌리엄 맥스웰 지음, 최용준 옮김 / 한겨레출판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다시 들여다보고 싶은 책, 상실과 상실이 만나





『안녕, 내일 또 만나』






윌리엄 맥스웰은 뉴요커의 편집자로 일했고, 다수의 현대 영미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뽑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중 단연 많이 언급되는 부분은 앨리스 먼로가 극찬에 극찬을 아끼지 않음으로써 그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작가이기도 하다. 한 작가에게 이토록 많은 영감과 용기를 줄 수 있는 작가라니, 더없이 궁금해진다.


나는 『그들은 제비처럼 왔다』이라는 작품으로 처음 접한 작가이기도 하다. 그때도 큰 감명을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화려한 수식어가 필요하지 않고, 덥덤한 어투로 인물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세공해놓는 성실함도 좋았고, 아름다운 비유 역시 좋았다. 큰 재미를 바라고 읽는다면 실망할 수도 있지만 인물들과의 거리감이 멀지 않아 공감할 수 있었고, 나에게서 있었던 상실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기도 했다.


작가 자신이 겪은 상실에 대한 경험은 몇번이고 그 내면 속에서 아물지 않는 기억으로 회상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상실에 대한 경험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이전에 읽었던 작품에서도 그랬고, 이번에 읽은『안녕, 내일 또 만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상실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는 학자같기도 하다. 상처를 감추기 위해 회피하는 게 아니라 끈질기게 직면하고 있다는 점은 꼭 배우고 싶은 지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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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구성은 요근래 흔히들 말하는 막장의 불륜 스토리를 포함한, 한 마을에 이웃으로 살았던 두 소년의 상실에 대한 것이 주를 이룬다. 병으로 어머니를 잃었고, 다리를 잃은 형과는 심적인 연결고리를 잃었고, 아버지의 재혼을 통해 그마저도 상실로 느낄 만큼 아직 다 자리지 않은 소년의 상처. 그리고 그 소년 옆에 늘 거부없이 함께해주던 소년의 상처 역시 가족으로 인한 것이었다. 불륜관계로 인한 부모님의 이혼, 그리고 다시 한번 잃게 된 아버지. 


상실을 겪었지만 이를 밖으로 내색하지 않은 채, 우정을 나누는 두 소년은 많은 시간이 지나 우연히 다시 재회한 학교 복도에서 스쳐간 눈빛 사이로 지난 시간들에 대한 인사를 나눈다. 각자의 마음 속으로.

내일 다시 만나기로, 그러나 인사만 남은 아쉬운 이별이 되지만. 


이 작품 역시 덤덤한 어조로 여러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윌리엄 맥스웰의 대표작같은 작품이라고 했을 때 조금의 의문이 들기도 했다. 내겐 맨 처음 접한『그들은 제비처럼 왔다』이 더 매력적이고 여운이 남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추천하는 명작이 나에게는 별로 맞지 않는 건가, 싶어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두 같은 생각을 하는 것만큼 재미없는 일도 없지 않은가. 어쩌면 더 큰 기대로 보았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고, 생각보다 여러 인물이 등장한 만큼 비중조절이 잘 안 된 걸로 느껴져서 그런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소년의 상실을 다루기 위해 가족이 등장하는데, 주인공인 '나'의 가족을 다루는 것에 비해 클레터스의 가족을 다루는 부분이 피상적으로 느껴졌다. 책을 다 읽고 덮었을 땐 시큰둥한 기분만 남았는데, 후에 다시금 생각해볼 수록 여러 가지를 떠올리게 되었다. 상실과 관계성, 내일이면 여느 날처럼 똑같이 만날 수 있을 거란 막연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 우정.


묘한 여운이 일어서, 다시금 책장을 열어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여러 번 곱씹어 볼수록 매력적인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중심화두처럼 가족, 그리고 상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샐린저가 떠오르기도 했는데, 신기하게도 윌리엄 맥스웰은 실제로 샐린저의 편집자이기도 했다. 샐린저가 『호밀밭의 파수꾼』을 탈고한 후 바로 차를 몰고 맥스웰에게 찾아가 그의 집 현관에 앉아 함께 원고를 검토한 유명한 일화도 있다고 하니 더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고, 이는 함부로 손댈 수 없는 견고한 성벽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여운이 있는 그런 작품들을 쓴 작가들이 이미 인연을 맺고 있었다는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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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는 용기와 영감을 줄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한없는 신뢰감을 얻었던 편집자이자 작가였던 맥스웰의 작품은 이만하면 이미 검증된 게 아닌가 싶다. 그의 작품이라면 믿고 읽을 수 있는, 윌리엄 맥스웰은 그런 작가이다. 좋은 기회로 다른 작품도 더 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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