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니스의 죽음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 10
M. C. 비턴 지음, 전행선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12월
평점 :
절판


미모의 청년 그저 소모됐을 뿐, 



『아도니스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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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등장인물' 속 프리실라가 해미시의 약혼녀로 소개되었다. 늘상 이 둘의 관계는 사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닌 사이도 아닌, 그런 애매모호한 긴장감을 즐기는 건가 싶은 사이였다. 이제는 서로의 마음을 속이지도 않고, 다른데 눈 돌리지도 않고, 훈훈한 비주얼 뽐내며 앞날엔 핑크빛 오오라만 풍길 줄 알았더니... 첫 페이지를 넘기기가 무섭게 두 사람 사이가 삐걱거리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 얼마나 허망한 기대였는지. 해미시의 애정가득한 마을 풍경을 묘사한 직후, 그의 평화로운 의식을 깨트린 건 다름아닌 프리실라의 숙소 개조 소음이였다. 


그렇다. 비공식적이지만 이 둘은 약혼한 사이가 되었고, 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눈들이 참 많다. 어쩌면 당연한 갈등이었고, 이에 대한 조짐은 예정된 불행이나 마찬가지였다. 도시의 생활을 기대하는 프리실라와 평온한 시골마을의 생활에 만족하는 해미시. 성공한 남자를 남편으로 삼고 싶은, 해미시는 그럴만한 인재가 맞다는 자기 확신으로 은근히 밀어 붙이는 프리실라와 성공을 결벽적으로 기피하는(자신의 공을 그토록 혐오하는 블레어 경감에게 돌리기도 했다), 전혀 이 마을과 낡은 숙소에서 떠날 생각이 없는 해미시. 


이 둘의 관계를 이렇게 횡설수설 길게도 늘어놓게 된 건 일말의 아쉬움이 남아서이기도 하다. 앞으로의 전개가 어떻게 될지 예상할 순 없지만, 어쩌면 이런 관계성이 반복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갈등을 보여주기 이전에 살짝의 달콤함을 던져 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물론 이 소설은 코지 미스터리이다. 로맨스는 부가적인 요소일 뿐, 미스터리물에 가미된 약간의 조미료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 그래도 작가 스스로의 역량이 한껏 발휘되는 분야이기도 하고, 이 번 에피소드에서는 사건보다 이 둘의 관계성이 더 크게 다가왔기 때문에, 더 큰 아쉬움을 남긴다. 


본격적인 사건의 중심으로 들어가, 해미시는 수개월 동안 지나치게 평화로운 로흐두 마을에 좀이 쑤셔오던 와중에, 두 사람의 미래에 대해 감정만 상하게 되고, 로흐두와 마찬가지로 해미시의 담당인 마을 '드림'에 매력적인 인물 피터 하인드가 등장하게 된다. 잉글랜드 출신 상류층 인물이 '검은 산으로 둘러싸인 검은 협만 끝에 자리한 음울하고 고요한 마을 드림'에 정착하고자 한 것이다. 해미시는 왠지 모르게 사건의 냄새를 맡은 것인지 이 인물을 탐색하기 위해 '드림'을 방문한다. 로흐두와 달리 '드림'은 정말이지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고요한 마을이기에 경찰의 등장에 긴장해버린다. 해미시의 묘사만 봐도 마을 간 분위기 차이가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다. 


해미시 맥베스는 침실 창문을 열고 게으르게 가슴팍을 긁어 대며 바깥 호수를 바라봤다. 표백이라도 된 듯한 날이었다. 태양 아래 높이 떠 흘러가는, 우유처럼 새하얀 구름이 주변 산등성이와 호수에서 색을 빨아들여 로흐두는 마치 예술 영화에 등장하는 마을처럼 흑백으로 변해 가는 듯 보였다.  5쪽



드림은 높이 솟은 검은 산으로 둘러싸인 검고 가느다란 협만 끝에 있는 평지로, 좀 독특한 장소였다. 자갈과 검은 돌덩이로 뒤덮은 해안에는 잘 자라지 못한 덤불 외에는 아무것도 뿌리 내리지 못했다. 동쪽에서 언덕을 넘어가는 좁은 1차선 도로만이 드림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였다. 물론 바다를 통해 들어가겠다고 무모하게 덤비지 않는 한. 마을에는 교회와 마을회관, 잡화점이 하나씩 있었고, 그 주위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지만, 경찰서는 없었다. (…) 드림에는 범죄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도 없었다. 심지어 주정꾼 하나도 없었다. 술집도 없거니와 술도 팔지 않기 때문이다. 16쪽


로흐두와 드림에 대한 묘사만 봐도 얼마나 대조적인지, 드림은 그야말로 고요하다 못해 따분한 마을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이런 생기 없는 마을에 미청년의 등장했으니, 작은 설렘과 소동은 물론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킬 것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피터 하인드는 외관만 멀쩡한 쓰레기였으므로, 그 미모 가지고 가만히 있어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지만, 그러만 이야기 진행이 안되고, 사건은 일어나지 않게 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피터 하인드는 키가 175센티미터쯤 돼 보였다. 얼굴과 몸은 황금빛으로 보기 좋게 그을려 있었다. 늘씬한 근육질 몸매에, 금빛 머리칼은 모자처럼 머리 위로 돌돌 말려 있었고, 그 아래로 높이 솟은 광대뼈에, 황금빛이 도는 갈색 눈동자 주위를 둘러싼 속눈썹이 짙었으며, 단호해 보이는 입술은 그린 듯이 모양이 멋졌다. 목선은 고대 조각가들이 꿈꿀 만한 모양이었다. 19쪽


"아니요." 해미시를 비롯한 고지 사람들은 싫어하는 사람의, 혹은 피터의 경우라면 '싫어진 사람'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것을 극도로 혐오한다. 56쪽



피터는 허영심 넘치는 속물이다 못해 다른 사람을 특히, 이성을 조종하는 데서 희열을 느끼는 사이코였고, 이리저리 추파 안 던진데가 없었고, 이에 웃기고도 슬픈 사실은 피터의 눈길을 받고자 외관을 치장하는데 힘쓰는 부인들 덕에 마을에 활기가 돌게 되었던 것이다. 남편들의 분노는 덤으로 말이다. 하지만 과연 이게 아무런 낙 없이 사는 중년 여성들의 잘못만 있는 것일까. 서로에게 실망한 채로, 인내를 강요당하며 살아왔던 게 문제 아니였을까. 이번 에피소드 역시 아픈 구석 하나를 꼬집고 가게 된다. 주요 화두는 결혼이다.


잠시 후 씻지도 않고 수염이 덥수룩한 해리가 헐렁한 바지 아래로 멜빵을 축 늘어뜨린 채로 발을 질질 끌며 나타났다. 해미시는 짜증이 확 밀려왔다. 늘 이런 모습으로 돌아다니면서, 대체 드림 남자들은 아내에게 뭘 기대하는 걸까?  85쪽


프리실라와의 다툼을 피하고자 드림의 분위기를 살피던 해미시와 그를 찾다 엉터리 점성술사로부터 제3자로 인해 헤어지게 될 거란 예언에 불안해하는 프리실라. 같이 살 집을 보러 다니면서 그 집의 문제를 발견하고 파고드는 해미시와 아버지의 반대에 반항하면서도 애써 진실을 외면하는 프리실라. 두 사람 사이에는 피터 말고 소피라는 토멜 성 호텔 접수원도 끼여들게 되는데, 제 3의 인물은 아마 이 인물일 듯 싶다. 엉망진창으로 흘러가나 싶지만, 어느 순간 서로에게 강한 애정을 느끼고 더 나아가는 듯 싶지만, 그럴 운명이 아닌가 싶은게 방해요소가 다시금 등장한다.


드림 마을 어부 해리의 딸 헤더가 찾아와 피터가 죽었다고 말하는데,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고, 갑작스럽게 마을을 떠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터와의 관계를 감추지 않았던 해리의 아내 베티는 실족사의 상태로 발견된다. 해미시는 피터의 잠적을 수상하게 여겨 그가 살아있는게 맞는지, 그의 정체를 밝히고자 동분서주한다. 그와중에 훌륭하게 강도도 잡았건만, 과잉방어로 고소당한 해미시와 이러한 일들을 부추긴 블레어 경감이 너무 여전해서 반갑기까지 했다.


피터의 과거사와 그의 가족까지 찾아 그의 생사를 알아보려 하지만 오리무중이고, 드림 마을은 전처럼 고요해졌으나 큰 상처를 입었다. 어린 헤더는 엄마를 잃었고, 피터가 오기 전까지 친한 친구사이였던 낸시, 베티, 에디, 앨리스, 아일사 모두 서로에게 등을 돌린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목사 아내 애니는 부인들에게 팬터마임 공연을 제안한다. 공연을 준비하는 중에 또다시 사건이 하나 발생되고, 이는 금방 해결되었지만, 깔끔하게 해소되는 것 없이 갈피를 못잡는 해미시는 결국 범인을 찾아낸다. 그것도 쉽게 자백도 받아냈지만, 발견한 시체는 다름아닌 픽트족 유골이었다나 뭐라나.



가치관과 신념, 각자가 살아온 세계가 엄연히 다르기 때문에 해미시는 상류층의 프리실라와의 신분 차이를 적잖이 느낄 수밖에 없었다. 프리실라 역시 그녀에게 그런 삶은 당연한 것이었고, 잘 살고 싶었기에 한 선택들이 그녀를 더 속상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런 점을 잘 묘사한 데에 있어서 작가의 천부적인 재능에 감탄하게 된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각 인물에게 이입할 수 있도록, 적절한 개연성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해미시는 슬프게 그녀의 부드러운 뒤통수를 내려다봤다. 그는 내일 그녀에게, 실제로 약혼을 하기는 했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들의 약혼은 이제 끝이라고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둘 사이에 가로놓인, 입 밖으로 내지 않은 그 모든 말들을 끌어안은 채 더는 하루도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301쪽 


내 삶에 남은 게 뭘까? 그는 생각했다. 다시 말단 순경으로 강등되었고, 프리실라도 없고, 예전의 삶으로 돌아와 있었다. 바깥에서는 바람이 거세게 불고 눈발은 창문에 부딪히며 소곤거렸다. 스토브는 붉게 활활 타올랐고, 팬에서는 스테이크가 지글거렸다. 그때 갑자기 경찰서가 다시 야비한 바깥세상에서 그를 지켜 주는 피난처처럼 보였다. 
"그래, 있던 곳으로 돌아왔을 뿐이야." 그가 타우저에게 말했다. 
337쪽



사실 두 사람이 행복해지기에 주변의 시선들이 너무 많기도 했다. 너무 공공연하게 알려졌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고, 시골마을 속 삶이 곧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누가 누가 뭘 했는지 금방 소문으로 이어지는 형태로 너무 가깝기 때문에. 

두 사람의 행복한 결실로 이어지기까지 많은 시련과 난관이 펼쳐질 거란 예상은 했지만, 약혼하기 무섭게 헤어질 줄은 몰랐다. 이제는 도무지 앞을 예측할 수도 없다. 전편까지는 나름 사건을 추리하는 재미도 있었지만, 이번엔 나 역시 해미시처럼 헤매기만 했던 것 같다. 그것도 말도 안되는 짐작으로 제발 아니길 했던 범인의 정체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안도해야 했고, 요즘 미스터리물이 얼마나 자극적이면 그런 생각을 했을까 싶기도 했다. 


헤어짐을 고하는 해미시의 홀가분함이 느껴진데 반해 나에겐 아쉬움만 남았다. 가까운 친구 사이를 갈라놓기를 좋아했던 피터, 이 시리즈의 불문율처럼 죽는 이는 한결같이 못된 인물인지라 그의 죽임이 너무 당연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둘 사이를 훌륭하게 방해했던 소피같은 여자가 아닌 각자에게 정말 좋은 상대가 나타나길 바랄뿐이다.




**



끝까지 두 인물에 대한 넋두리를 늘어놓은 건 그만큼의 애정을 가지고 있어서이기도 하다. 너무 힘들어 모든 것으로부터 회피하고 도망치고 싶을 땐 해미시가 찬양한 로흐두 마을의 풍경을 그려보곤 했다. 해미시가 바라는 삶처럼 성공을 위해 애쓰지 않고, 평화로운 마을에서 유유자적 살아가고픈 생각도 들었다. 당장이라도 로흐두 마을 속으로 들어가 살고플 정도로 고달프고 지친 나날들이었다. 


이야기에 빠져들면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으니 좋다. 오직 그 이야기에만 집중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너무나도 재미있고 매력적이라면 그건 바로 해미시 맥베스 시리즈를 두고 한 말이라 감히 칭하고 싶다. 다음 편 역시 너무 기다려진다.







(이 리뷰는 현대문학의 '해미시 맥베스 순경 독자단 3기' 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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