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봄날의 소품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6년 12월
평점 :
절판


나쓰메 소세키의 세계에 관하여, 비하인드 스토리,





『긴 봄날의 소품』





중단편 2편과 신문에 게재된 수필들을 모아서 나쓰메 소세키 사후 100년 기념으로 출간된 책.




나쓰메 소세키의 유명한 여러 대표작 중에 내가 가장 먼저 접한 책은 『도련님』이다. 무심코 집어 들었다가 손을 놓지 못하고, 흥미진진하게 읽은 책 중 하나이다. 생각보다 재밌었고, 다음이 궁금해서 계속해서 읽을 수밖에 없는, 입심이 담긴 문장이 탄탄했고, 담백했고, 이야기가 뻗어나가는 과정이 유쾌했다. 


작가는 늦은 나이에 작가로 데뷔하여 짧은 창작 기간 동안 많은 작품을 남겼다고 한다. 그중 또 찾아보고픈 책은『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그 후』이다. 사실 여유가 주어진다면 한 편씩 다 읽어보고 싶다.


이번에 읽게 된『긴 봄날의 소품』은 작가의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해 거쳐가야 할 길과 같은 책인 듯 하다. 작품 세계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중·단편을 대작들에 도달하기 위한 통로로 사용했다고 하니 더욱 그러하다.



**



<이백십일>은 친구와 티격태격하며 궂은 날씨에 아소산을 오르기 위한 과정을 그렸다. 점심을 우동으로 먹는 것에서부터 아웅다웅 하기도 하고, 그 시대 특유의 유머를 보여주는 듯한 반숙 이야기와 더불어 사사로운 내기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위험에 처했을 때 서로의 안전을 위해 간절히 돕기 바쁜, 로쿠씨와 게이씨의 우정이 담긴 이야기는 소세키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쓰인 중편소설이다. 친한 사이라서 아무말대잔치가 열린 듯한 느낌도 있었다. 시대와 상관없이 허울 없는 사이란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열흘 밤의 꿈>은 1908년 아사히 신문에 연재된 소설이다. 정말 꿈 이야기를 옮겨 적은 듯한 기괴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로 가득하다. 각각의 꿈속, 어느 시점에서 갑자기 시작되는데 이는 정말 꿈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꿈에서는 개연성이 존재치 않는다. 갑자기 어디론가 이동하기도 하고, 쫓기기도 하고 누굴 기다리거나 만나기도 한다. 열 가지 꿈 속엔 죽음을 기다리기도 하고, '무'에 대한 깨달음이나 죄의 무거움을 은유하기도 하며, 원망과 후회, 생과 사가 오가기도 한다. 슬프거나 엉뚱하거나 맥락이 없거나, 어느 불상을 만드는 장인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단순한 상상력이 아니라, 정말 이러저러한 해괴한 꿈을 꾼 것을 바탕으로 한 기록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제목과 딱 맞는 꿈 이야기를 흥미롭게 읽을 수 가 있었다.


<긴 봄날의 소품>은 1909년도에 아사히 신문에 게재된 수필들을 한데 모은 것이다. 말 그대로 나른한 봄날의 일상, 그 소소함을 이야기하기도 하며, 런던 유학시절 에피소드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도둑이 든 이야기, 고양이 묘표를 세우고 나서야 바뀐 가족들의 태도라든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이야기들이나 셰익스피어 연구자 윌리엄 크레이그에 대한 에피소드라든지, 우연히 작가와 만나 차 한잔 두고 담소를 나누는 듯한 느낌을 주는 수필들이었다. 그만큼 나른하고 소소하다. 담백한 어조는 수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 실린 <유리문 안에서>는 1915년에 아사히 신문에 게재된 수필을 한데 묶은 것이다. 이때 작가는 건강이 나빠져서 칩거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마다 찾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들 다루고 있다. 읽다 보면 '나쓰메 소세키'라는 작가는 주변에 사람이 늘 끊이지 않았겠구나, 사람을 참 좋아하는 작가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작가의 인간적인 면모가 잘 드러나는 듯한 이 파트가 참 좋았던 것 같다. 


아직 작가의 작품을 고작 한 편 읽은 게 다라서, 그의 작품 세계가 어떠하다,라고 감히 말할 수가 없다. 일말의 힌트만 얻어가려 했을 뿐이다. 그런데 내겐 수필보단 역시 작품 쪽이 더 좋았던 것 같다. 글 속의 나쓰메 소세키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달라서, 문화가 달라서 그래서 아직 잘 보이지 않은 것들도 시간이 더 쌓이면 볼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다.




( 이 리뷰는 현암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내가 남에게 해줄 조언은 아무래도 이 삶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만 해야 할 것 같다. 어떤 식으로 살아갈까 하는 좁은 구역 안에서만 나는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다른 인류의 한 사람을 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삶 속에서 활동하는 자신을 인정하고 또 그 삶 속에서 호흡하는 타인을 인정하는 이사, 서로의 근본 의의가 아무리 고통스럽고 추하더라도 이 삶 위에 놓인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당연할 테니까. / 226-227쪽

지금의 나는 바보여서 사람들에게 속거나 아니면 의심이 많아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없거나, 이 두 가지밖에 없을 것 같다. 불안하고 불투명하고 불쾌감으로 가득 차 있다. 만약 그것이 평생 계속된다면 인간이란 얼마나 불행한 존재일까. /274쪽

집도 마음도 쥐 죽은 듯 조용해진 가운데 나는 유리문을 활짝 열고 조용한 봄 햇살에 싸여 넋을 잃은 채 이 원고를 끝낸다. /3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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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마음산책 짧은 소설
이기호 지음, 박선경 그림 / 마음산책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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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일상의 한 단면들을 모아 모아, 

골라 읽는 재미가 있지요.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하늘색 바탕의 초록색 산, 흰 구름과 회색 건물, 그 산을 오르고 있는 한 사람과 바람, 새인지 바람개비인지 알 수 없는 어떤 무엇. 뭔가 산뜻한 느낌이 드는 듯한 표지 그림에 끌려서 집어 들게 되었다.


짧은 에피소드나 티타임을 나누며 간단히 수다로 나눌법한 분량의 소설 40편이 하나로 묶인 책.


<우리에겐 일 년 누군가에겐 칠 년>, <아아아아>, <좀 쉬면 안 될까요?> 같이 세 가지의 타이틀 관련 분류된 이야기들 각각 열 편 이상으로 나눠져 있다. 


첫 소설부터 묘한 실소를 터트리게 하며 시작했다. 시작은 가뿐하게. 그러나 읽어 나갈수록 그냥 가벼이 웃을 수 없는, 그저 지나치기만은 할 수 없는 그런 글들이 차례로 이어졌다. 마냥 낯선 다른 세계 이야기들이 아니였고, 우리의 생활 속에 각자의 사연 같은 이야기들이었다. 라디오 사연으로 나올 법한 웃픈(웃긴데 슬픈)이야기부터, 어이없이 실소가 터지는 이야기, 짠하고 뭉클한 이야기, 슬픈 여운이 남는 이야기, 안타까운 공감이 이는 이야기 그리고 사회의 치부를 들춰내는 듯한 송곳 같은 이야기까지. 각양각색 많이도 모여 있다. 


이렇게 일상의 한 단면을 깊숙이 들여다보며, 촘촘히 직조해 놓은 이야기들을 창작해내는 일도 여간 힘든 게 아닐 텐데 역시 이기호 작가는 재주가 좋은 작가 같다. 너무나도 훌륭히 잘 해내기 때문이다. 물론 중간에 힘이 빠진 듯한...어색한 대화로 주를 이룬 소설도 있지만. 이를 소설로 불러야 할지 그냥 에피소드 모음이라 해야 할지 좀 낯선 구성 형식이긴 하지만. 이러한 시도들이 다양하게 이뤄지면 좋을 것 같다. 


오히려 별 것 아닌 부분인 것 같은 것도, 그것마저 너무 익숙해진 현실을 자조하며 반성할 만한 하나의 계기가 되어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산뜻하게 읽어나갈 수 있는 것 같지만, 그 안에 든 알맹이는 마냥 가벼운 것은 아니다. 우린 지금을 자꾸 질문해보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하며, 그저 익숙해지기만 하면 계속 당하고 퇴보하는 길에 이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건 정말이지, 슬픈 농담 같기도 한 것이다.


"어쩐지 자신이 원고지가 아닌 

삶 속에서 소설을 쓰고 있는 기분이었다네."

작가의 말 앞장 짤막한 말처럼.


제목 옆에 여러가지 색깔이 점이 찍어져 있는데 이게 무슨 코드 역할을 하는 것인지, 그래서 그렇게 분류해서 읽는 맛이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추측해보기도 했다. 일례로 분홍색 점은 실소를 터뜨리는 웃긴 이야기, 노란색은 짠한 웃픈 이야기와 같은...


난 첫 소설부터 터졌는데 일단 그러한 출발이 좋았다.



좋아하는 대상에 대한 험담은 참을 수 없고, 그러한 애정에 관해 나이는 전혀 상관없다는 것을 말하는 이야기로 처음 이 소설집의 문을 활기차게 열어준다. 읽으면서 무심코 웃어버렸는데, 이어「타인 바이러스」는 메르스 관련 에피소드였는데 역시 나도 모르게 터졌다. 소리 내서 웃게 한 소설은 처음이었는데, 묘하게 있을 법하면서 공감이 갔다.



가슴 뭉클한 이야기도 있고, 이기심에 관한 이야기도 있고, 가족의 탄생을 말하는 따뜻한 기운의 이야기도 있다. 또 아프게 공감 가는 이야기도 있었다. 수많은 좌절 속에 다시 일어서기 어려워진. 시작이 그 무엇보다 두려워진 삶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작은 기회 하나라도 시작한다면 그로 인해 다시 일어설 힘을 얻기도 하기 때문에...



잠들기 전, 하루를 마무리할 때 베개 맡에 두고 읽기에도 좋은 책이 아닐까 싶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부끄러운 듯 살짝 고개를 숙였다. 최 형사는 무연히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아이가 예전부터 태연 양에 대해서 험담을 많이 했습니다. 인터넷 게시판 같은 곳에서도…… 그래서 제가 참을 수 없어서……."
(…)
"아니죠. 그러면 누굴 사랑하는 게 아니죠. 사랑이 어디 합의할 수 있는 거던가요?"

/「벚꽃 흩날리는 이유」중에서

어머니는 계속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사람한텐 일 년이 강아지한텐 칠 년이라고 하더라. 봉순이는 칠 년도 넘게 아픈 몸으로 내 옆을 지켜준 거야. 내 양말을 제 몸으로 데워주면서."
나는 묵묵히 계속 삽질만 했다. 내가 파고 있는 어두운 구덩이가 어쩐지 꼭 내 마음만 같았다.

/ 「우리에겐 일 년 누군가에겐 칠 년」중에서

"앞으로 저희 집 배달은 여기 엘리베이터 앞으로 오시면 됩니다."
(…)
나는 왠지 조금 울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가게로 돌아가려고 몇 걸음 떼던 나는 그때까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던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이게 왜 …… 이런 일들이 생긴 거죠?"
갑작스러운 내 질문에 남자는 조용한 목소리로 이런 말을 했다.
"글쎄요. 아파트에 사니까 아파트만 생각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
/ 「아파트먼트 셰르파」 중에서

그는 비명을 지르며 아이에게 속엣말을 했다 고통 다음에야 비로소 가족이 이름을 부여받는 거야. 아아아아. 그래서 가족이란 단어는 들으면 눈물부터 나오는 거란다. 그는 계속 소리를 지르면서 되새겼다. 아아아아. 그는 정말이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래도 꾹 참고, 아이를 바라보면서 오랫동안 소리를 내질렀다. 아아아아.

/ 「아아아아」 중에서

나는 그저 무언가를 다시 해보려고 했을 뿐인데…… 그는 괜스레 케이블TV 속 셰프가 원망스러웠다. 누구에겐 초간단 요리가 또 누군가에겐 그렇지 않음을…… 아무도 그것을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초간단 또띠아 토스트 레시피」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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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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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고 싶은 온기와 같은 소설집,






『쇼코의 미소』







올 여름에 출간된 소설인데 겨울이 되어서야 읽게 되었다. 다 읽고 난 후의 최종감상은 따뜻한 온기를 가진 좋은 소설이라는 느낌, 올 겨울 마음이 헛헛해질 때마다 펼쳐보면 참 좋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려한 기교나 수식어 없이도 무던한 문체와 덤덤하게 표현된 문장들이 이어지는 데 오히려 전달력을 높여 주었다. 표제작인『쇼코의 미소』를 비롯한 총 7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소설을 완독한 후, 뒤편에 실린 두 개의 글에서 더 끌린 건 역시 작가의 말이다. 솔직한 고백이 더 진실되게 와닿았다. 


"자기 자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멸시와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림들 쪽에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작가가 되고 싶다. 그 길에서 나 또한 두려움 없이, 온전한 나 자신이 되었으면 좋겠다."


작가가 고백했듯이, 자신을 사랑하는 긍정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자신을 미워하고 혐오하는 부정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더욱이 멀리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었고, 가까이 공감할 수 있었다. 




『쇼코의 미소』



일본문화 개방시기에 각 국의 문화교류로 인해 교환학생처럼 일본인 학생들이 화자가 다니는 A시 고등학교에 견학을 온다. 그 중 언어가 조금 되는 친구들의 집에서 홈스테이 하듯 잠시간 생활하며 머무르게 되는데, 쇼코는 화자인 '나'의 집에 머무르게 된다. 


늘 변화를 싫어하고 무기력하기만 했던 가족들이, 낯선 손님의 방문으로 활력을 찾고 행동하는 모습을 낯설게 본 나와 문화 차이 속에서 소통이 잠시 엇갈리기도 했던 나와 쇼코. 유일하게 할 줄 아는 외국어가 일본어인 할아버지는 그동안 보여줬던 모습과 전혀 다르게 활발하게 의사소통을 하며 쇼코와 대화를 나눈다. 


쇼코가 일본으로 돌아가고 난 후엔, 나와 할아버지 각각 그녀와 편지를 주고 받는다. 한 대상을 두고 두 명이 동시에 펜팔을 하고 있는 것. 나와 비슷한 가정환경을 가진 쇼코는 나와는 다르게 냉소적이고 성숙한 소녀였고, 각자 자기 가족구성원인 할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녀가 보인 미소는 한 수 내려다보는 시선과 같았다. 쇼코는 더 먼 곳으로 여행을 꿈꿨고, 나는 한 번도 살던 도시를 떠날 생각따윈 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나는 서울로 대학을 갔고, 교환학생으로 캐나다를 다녀왔으며, 대학을 졸업하고 5년 동안 시나리오를 쓰고 단편영화를 찍었다. 나는 영화감독의 꿈을 꾸고 있었다.


대학 졸업할 즈음에 쇼코를 보러 일본에 간 나는 고등학교 때와는 전혀 다른 쇼코의 모습을 보게 된다. 노인의 고독한 모습을 한 나약한 모습의 쇼코의 미소. 그 손을 뿌리치며 나선 나는 꿈을 꾸면서 현실에 안주한 다른 이들을 얕잡아 보기도, 시기하기도 하고, 재능의 유무에 열등감을 느끼기도 한다. 


무심했고 멀기만 했던 할아버지에 대한 내가 가진 부채감은 아빠가 돌아가신 후 일나가던 엄마를 대신에 자신을 키워주셨다는 것과 알고 보니 유일한 관객이자 지지자였다는 것이었다. 병에 잠식된 아픈 몸을 이끌고 온 할아버지께 제대로 된 우산 하나 드리지 못해 우는 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다시 주고 받게 된 쇼코와의 편지, 만남. 쇼코는 도쿄에 가지 못했지만 안정적인 직업을 얻었고, 우울증을 극복했으며, 건강한 삶을 살아가게 되었고, 나는 다소 냉소적인 시선과 반복된 좌절로 절망에 무뎌져 이제 꿈을 종결시키려 한다. 


긴 여운이 남긴 소설이었다. 교차되고 서로 뜻하던 바와 다르게 반대로 흘러갔던 나와 쇼코의 삶. 그 시절의 우정과 꿈, 그리고 지금의 현실과 가까운 이야기들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의 우정은 이상하게도 소유욕에 가까웠고, 지나고 보면 부끄럽기 그지 없기도 하다. 그리고 정말 이것을 하게 될 줄 몰랐어, 여기만은 가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한 일들을 실제로 하고 있는 나를 보게 되기도 한다. 그렇게 삶은 내 예상과는 늘 반대로 비껴나 흘러가기 때문에 전혀 예측할 수가 없다.


현실에 안주하는 삶을 멈춰진 것이라 할 수 없고, 꿈을 향해 달린다고 해서 늘 활기찬 것도 아니다. 안정적인 선택이 형편없는 것이고 비겁한 마음이라는 것도 오만한 생각이 아닌가. 결국 관심과 애정이 필요했고,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더 컸던 것 같다. 새삼 여러 삶 속에서 죽음에 대한 갈망과 의지에 대한 것들이 많은 얼굴로써 살아가는 구나 싶은 소설이었다.



『씬짜오, 씬짜오』



어느 방향에 따라 우리는 피해자가 될 수도, 또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지의 잘못보다 알려고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잘못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화자의 가족이 독일에서 생활하는 동안 이웃 베트남인 가족과 친하게 지내게 된다. 호 아저씨의 따뜻한 정이 담긴 요리와 응웬 아줌마의 애정 어린 관심, 그리고 내가 호감을 가지고 있는 그들의 자녀 투이까지. 서로를 경멸하는 부부 사이 외롭게 고립되어 가던 '나'는 그들 가족과 어울리며 소통이라는 것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화목한 분위기에 안정감을 느끼고 행복해한다. 늘 그렇듯 행복은 깨지기 마련이다. 그 시작이 나라면 더욱 좌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수업 시간에 언급한 베트남전과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과 무지한 시선, 그와 별반 다를 것 없던 '나'의 무지는 이미 존재한 틈을 갈라버릴 계기로 적용되고 만다. 유일한 우정을 상실한 엄마의 좌절. 그리고 그 아래 텅 빈 공허와 같이 포기만 남게 된 '나'는 그저 안녕이란 말로 이별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의 이익을 취하기 위한 전쟁은 당하는 사람에겐 무참한 학살일 뿐, 이를 겪어보지 못한 바깥의 시선이 무엇을 알겠는가. 베트남 한 지역엔 한국군 증오비가 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 분노했던 우리가 누군가에겐 가해자에 불과할 뿐인 것이다.  


우리가 고통받았던 피해만큼 무지했던 진실도 절대 잊혀서는 안될 것이다.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먼 친척이었던 순애 언니는 열한 살 엄마보다 다섯 살이나 많았지만 작은 몸집의 소녀였다. 가족을 잃은 상실의 고통 속에서도 다정했던 언니를 사랑한 엄마. 이들의 관계의 변화를 그린 이야기다.


결혼을 하여 수줍은 소녀에서 여인이 되었던 순애 언니는 가정을 이루고 잘 살고 싶었으나, 당시 시대적 상황과 나라에 의해 처참히 부서지고 만다. 불통이 튈까 알면서도 모른 척 쉬쉬했던 시절, 무고한 일반 시민을 정치사범으로 몰아 죽이던 그야말로 권력의 일방적 통치로 암울한 시대였다. 어쩔 줄 모르던 순애 언니와 달리 엄마는 피해자의 모임에 참여하며, 그 목소리를 더 높였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리하면 알아줄거라 생각했을 정도로 순진한 시절이 지나가고, 사법살인이 진행됐고, 사형은 피해갔으나 온갖 모진 고문에 뼈가 훤히 드러나 살거죽만 겨우 남은 채 돌아온 형부, 그리고 순애 언니의 척박한 삶. 


엄마가 직장에서 같은 편인 아빠를 만나고 가정을 꾸리고 생활이 안정해질수록 순애 언니와의 사이는 더욱 소원해진다. 더는 다치지 않기 위해, 아픈 상처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서로를 배려했던 게 서로를 멀어지게 한 것이다. 늘그막에 다리 수술 후, 누워 있는 엄마에게 열여섯 소녀의 모습으로 와 인사를 건넨 순애 언니, 그녀의 딸이 건네준 그녀 사진을 보며 그 이름을 불러본다.



애정에도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의 상황이 더해지면 부담이 되고, 부끄러움에 마주하지 못하게 된다는 게 슬프다. 과거 잘못된 권력 행사가 현재까지도 자행되고 있다는 게 사실, 더 슬픈 일 같기도 하다.




『한지와 영주』



2차 세계대전 속 어느 젊은 수사가 프랑스 한 황폐한 마을에 지었다는 수도원에서 장기 체류하게 된 '나'와 봉사할 겸 머물게 된 '한지'의 이야기. 방문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올 수 있고, 기도하고 노동하고 싶은 이들은 얼마든지 머무를 수 있는 곳.


그곳에서 '나'는 프랑스 여행 중 일주일만 머물기로 했던 게 일곱 달이 돼버렸다. 대학원을 휴학한 스물일곱 살. 가장 치열해야 할 이십 대에 멈추어 머물고 있다는 사실에 가족인 언니는 비난했고, 자신을 만나주어 그동안 고마웠단 남자친구는 이별을 고했다.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마지막 나이트 가드 일을 하며 '나'와 한지는 대화를 나누며 점차 가까워진다. 나는 지질학을 연구했고 한지는 나이로비에서 수의사 일을 하고 있다. 나의 전 남자친구와 같이 나 역시 사랑 받는 것에 익숙지 않고, 받아야 할 이유도 모르는 사람이다. 한지에게는 몸이 불편한, 평생 돌봐야 할 책임이 있는 여동생 레아가 있다. 


한지에 대한 호감과 애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와 한지는 엇갈리고 만다. 어느새 '나'를 피하고 있는 한지. 그런 한지에게 짐이 되기 싫은 '나'는 사실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는 서툰 사람일 뿐이다.

동생에 비해 자유로운 자신을 스스로 자책하는 한지는 일정에 맞춰 떠났고, '나'는 침묵했다. 


그렇게 영주(나)는 자신의 마음을 매일 기록한 일기를 차가운 얼음 대륙에 묻는다. 


우리가 딛고 선 땅의 기원을 연구하는 영주와 그 땅을 딛고 선 생물들의 상처를 치료하는 한지. 

한지는 왜 영주를 피했던 걸까. 서로에게 좀 더 솔직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동생에 대한 책임감으로 더는 자신의 행복을 견딜 수 없었을까, 아니면 자신과 함께 한다면 영주에게 짐이 된다고 생각했던 걸까. 




『먼 곳에서 온 노래』



같은 노래패 동아라 선후배인 미진과 소은. 엄격한 선후배 문화, 남학생 중심의 집행부, 상명하복에 대한 문제제기를 했던 미진은 이제 막 스물이 지난 어린 여자애였다. 그녀 덕분에 시간이 흘러 학번 차가 난 후배인 소은은 마로니에 공원에서 미진과 함께 자유로이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러시아 유학을 떠났던 미진은 논문 심사를 앞두고, 서른 두 해를 넘기기 못하고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소은은 사랑 받는 것에 익숙지 않던 아이, 그러나 그런 소은의 보이기 싫은 나약하고 추악하다 여긴 모습들을 미진은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었다. 소은은 많이 아팠고, 미진 덕에 많이 괜찮아 졌으나, 미진은 이미 이 세상에 없다. 


미진의 룸메이트 율랴와의 만남은 미진을 추억하기 위한 그들만의 추모식이 아니었을까.

소은과는 조금 다르지만, 율랴 역시 어릴 적 아버지의 말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며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 하지만 율랴 역시 특별한 사람이라고 미진은 말해주었다. 


세 사람의 관계성이 묘하게도 연결이 된다. 모두 자신의 내부 속 말의 힘에 세뇌 당해 살아왔던 사람들. 미진은 그걸 깨부수기 위해 애를 썼고, 소은은 끙끙 앓았으며, 율랴는 그 말에 갇혀 있었다. 마음 아프게도 이 역시 공감 가는 이야기였다.






『미카엘라』



모든 것에 감사한 여자와 그를 못마땅해 하는 딸.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한 해, 그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로 상경한 여자. 그녀의 딸은 약골이면서 노동 운동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무능한 아빠를 대신해 가사와 경제 활동 전반을 힘들게 해왔던 엄마를 못마땅해 한다. 자신을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 귀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엄마에게 한없이 무뚝뚝한 딸이다. 가정을 책임지지 못하면서 헛된 꿈만 꾸는 아빠를 지지해주는 엄마의 고생이 보기 힘든 것이다. 


여자는 미사가 끝난 후 딸네 집에서 잔다고 하였지만 쉬이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주말이라 모텔비가 배로 올랐고, 할 수 없이 작은 찜찔방으로 향하게 된다. 찜찔방 탈의실 구석에서 만난 노인이 그의 친구가 손녀를 잃었는데, 자식을 잃은 이유를 알기 위해 나선 딸을 찾기 위해 헤매고 있는, 노인의 친구를 찾기 위해 같이 움직이게 된다. 겨우 겨우 이름을 확인하려고 보니 노인의 친구 손녀딸 세례명 또한 자신의 딸처럼 미카엘라, 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남편 땜에 고생스러울 적에 딸 아이가 존재함으로 인해 빛을 얻었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간다.


상실의 고통에 제대로 된 진상 규명도 이뤄지지 않는 세월호 유족들이 모인 거리에서 여자는 딸과 재회하게 된다. 아픈 눈물이 흐르던 여자의 마음 속으로 그 이름을 부르던 순간이었다. 빛이 다시 그녀의 가슴 속에 스며들었다.


이처럼 억울한 일이 또 어딨을까, 생때같은 어린 아이들이, 아직 꽃도 채 피우기 전에 아스러진 그 아이들을 잃은 부모 앞에 아직도 변하지 못한 현실에 화만 치민다. 누구는 지겹다고 그만 이야기 하라며 피로 섞인 아무말이나 뱉는다. 어이가 없다. 자신의 일이었어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유족들에게는 끝난 일이 아니다. 늘 가슴 앓이하며 살아가야 할 일인데, 감히 헤아리지도 못할 것인데, 분통터질 일이다. 


시간 끌기, 눈속임, 변명들 모두 치우고 다시 새로 다잡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제대로 된 진상규명이 이뤄져야 한다. 해결해나가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그때까지 절대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될 일이다. 


  




『비밀』



말자는 칠 년 전 암 판정을 받았다. 다행히 수술과 항암 치료 결과가 좋았고, 의사의 처방대로 꾸준히 식단 관리에 힘썼다. 규칙적인 스케줄로 먹고 자고 운동했다. 그리고 오 년 뒤, 완치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지금 암은 다시 재발했다. 이번엔 다른 쪽으로 전이된 터라, 상황이 더 좋지 않았다. 


딸 영숙이 맞벌이로 바쁜 터라 손녀딸 지민은 말자 손에서 자라게 되었다. 일찍 남편을 여의고 식당 일을 나가야 했던 말자는 영숙에게 못 줬던 애정을 모두 지민에게 쏟게 된다. 곱게 곱게 오냐오냐 하며 키운 지민은 딸 내외가 전해오길 중국 작은 마을에서 선생님 일을 하느라고 바쁘다고 한다. 


말자는 딸 내외가 애써 감추려고 한 사실을 이미 다 알고 있는 터였다. 이미 한 번 죽을 목숨, 더 태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던 건 그 때문이었을까. 


가족끼리 서로를 위해 감춘 비밀은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것 같다. 가족이기에 허울 없이 가까울 때도 있고, 한없이 낯설 때도 있으며, 더없이 무거울 때도 있다. 가족 사이에 비밀이란 그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




해설에 언급되었듯이 최은영 작가의 문장은 화려한 기교가 없다, 어찌 보면 전통적인 성격을 지닌 소설들이라고 하였다. 이는 좋게 말하면 담백한 것이고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 미숙한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전하고자 하는 바를 온전히, 바로 전달 받을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야기의 모티브라고 할까, 전반적인 배경들 모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들로 이뤄지고 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이야기부터 사소하고 일상적인 생활 전반의 이야기까지 모두를 아우르고 있다. 굉장히 스펙트럼이 넓은 작가인 것 같다. 다룰 수 있는 이야기가, 등단한 지 얼마 안 된 젊은 작가라기엔 너무 능숙하고 자연스럽다. 많은 연습이 이어졌던 걸까, 타고난 이야기꾼인 걸까.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난 좋은 작가 한 명을 더 알아가 더할 나위 없이 기쁘기만 하다. 


이야기 속 인물들 모두 내가 가진 성질과 일치하는 부분도 있어서 더욱더 공감이 갔다. 그래서 위로가 되기도 했다. 특히 표제작인 『쇼코의 미소』와『한지와 영주』이 여운이 길었고 두고 두고 읽고 싶은 소중한 작품이 되었다. 『미카엘라』와 『먼 곳에서 온 노래』역시 가슴 아릿하게 좋았다. 


소중한 이에게 꼭 선물해주고픈 책을 오랜만에 만났다. 그녀가 보여줄 다음 세상도 기대가 된다. 그리고 이렇게 좋은 작가와 좋은 작품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 무척 감사하다.



나는 차가운 모래 속에 두 손을 넣고 검게 빛나는 바다를 바라본다.
우주의 가장자리 같다. 9쪽

가족은 언제나 가장 낯선 사람들 같았다. 14쪽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24쪽

꿈. 그것은 허영심, 공명심, 인정욕구, 복수심 같은 더러운 마음들을 뒤집어쓴 얼룩덜룩한 허울에 불과했다. 꼬인 혀로 영화 없이는 살 수 없어, 영화는 정말 절실해, 같은 말들을 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제대로 풀리지 않는 욕망의 비린내를 맡았다. 내 욕망이 그들보다 더 컸으면 컸지 결코 더 작지 않았지만 나는 마치 이 일이 절실하지 않은 것처럼 연기했다. 34쪽

새벽에 눈을 뜨면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단단한 땅도 결국 흘러가는 맨틀 위에 불완전하게 떠 있는 판자 같은 것이니까. 그런 불확실함에 두 발을 내딛고 있는 주제에, 그런 사람인 주제에 미래를 계획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니. 57쪽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 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양쪽 모두 떠난 경우도 있었고, 양쪽 모두 남겨지는 경우도 있었으며, 떠남과 남겨짐의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도 많았다. 90쪽

세상은 사람에 대한 사람의 사랑을, 제 목숨을 몇 번이고 팔아서라도 사람을 살려내고 싶다는 그 간절한 마음을 도리어 비웃었다. 사람에 대한 사랑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리너 너희 힘없는 인간들은 언제나 조심하고 사는 것이 좋을 거라고, 그 평범한 인간 여덟 명의 목숨 따위가 뭐가 대수냐고, 우리가 법이라고 하면 법이고 빨갱이라고 하면 빨갱이인 거라고, 꿇으라면 꿇으라고, 사람 같은 거 명분만 달아놓으면 쉽게 죽일 수도 있는 거라고, 그러니 입 다물고 말이나 잘 들으라고.
그들은 나라에 의해 살해되었다. 108-109쪽

죽고 나면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기를 바라왔다고. 아니, 차라리 처음부터 나라는 것이 없었으면 했다고. 그게 삶을 겪어내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을 테니까. 141-142쪽

불교 신자였던 할머니는 사람이 현생에 대한 기억 때문에 윤회한다고 했다. 마음이 기억에 붙어버리면 떼어낼 방법이 없어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는 법이라고 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떠나도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라고, 애도는 충분히 하되 그 슬픔에 잡아먹혀 버리지 말라고 했다. 안 그러면 자꾸만 다시 세상에 태어나게 될 거라고 했다. 나는 마지막 그 말이 무서웠다. 164쪽

노래는 끝났고, 우리에게는 선배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시간이 남아 있었다. 210쪽

아이는 저만의 숨으로, 빛으로 여자를 지켰다. 이 세상의 어둠이 그녀에게 속삭이지 못하도록 그녀를 지켜주었다. 아이들은 누구나 저들 부모의 삶을 지키는 천사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누구도 그 천사들을 부모의 품으로부터 가로채갈 수는 없다. 누구도.
(…) 그리고 그이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 너무 멀고 힘들지 않기를 바랐다. 다친 마음을 마음껏 짓밟고도 태연한 이 세상에서 그이들이 더이상 상처받지 않기를 원했다. 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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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긴 잠이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0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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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탐정, 사와자키를 만나보자

 

 

『안녕, 긴 잠이여』

 

 

 

 

하라 료의 작품 중에서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내가 죽인 소녀』와 같은 전작이 아닌 세 번째 작품인 『안녕, 긴 잠이여』을 제일 먼저 읽어보게 되었다. 요근래 탐정소설을 주로 탐독하고 있는 모양이 됐지만 새로운 탐정을 만나는 설레는 일이다. 무엇보다 대다수의 리뷰 글에서 호평과 호평에 이은 글들을 보아하니, 너무 기대가 되었다.

 

사와자키는 40대 후반 남성이자 와타나베 탐정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는 사람. 와타나베는 사와자키를 탐정의 길로 인도한 파트너이자 탐정사무소의 소장. 그러나 십 여 년전 폭련단 조직 세이와카이의 각성제 거래현장을 잡기 위해 경찰이 준비한 1억엔과 조직이 준비한 3kg의 각성제를 미끼 역할을 맡게 된 와타나베가 들고 잠수를 타버린 것. 그의 행방을 비롯한 노여움은 파트너였던 사와자키에게로 향하게 된다. 와타나베의 거취와 돈의 행방 등을 끊임없이 묻는 경찰 니시고리 경부와 세이와카이의 간부 하시즈메. 후에 둘은 본인들의 목적을 위해 사와자키의 목숨을 기꺼이 살려주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야기는 약 400여일만에 도쿄로 돌아온 사와자키에게 한 달 전부터 기다린 의뢰인이 있었으며, 이를 대신 전해주던 노숙자 마스다 게이조와도 관계가 엮이면서 시작된다. 의뢰인 우오즈미 아키라는 고교 야구생일 당시 승부조작 혐의로 힘든 시기를 보낸 청년으로, 무혐의를 인정받았으나 새로운 가족 구성원이었던 누나 유키가 자살한 사건이 발생한다. 주변의 시선으론 누나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한 답답한 동생으로 그려지지만, 사실은 죽기 전 울면서 전화한 유키가 승부조작을 권했단 사실,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경기에 임했으나 결국 지고 말았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라커룸엔 오백만엔이 담긴 가방이 발견되었다는 것 등. 사건은 촘촘하게 연결되어 제대로 밝혀지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렀고, 여전히 의문을 지울 수 없던 우오즈미가 습격을 당해 입원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사건을 파헤치게 된 계기가 되어준다.

 

사와자키는 어떤 인물을 대하든 간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인물, 겁을 먹었던 연민을 느꼈던 간에 이를 결코 드러내지 않는다. 무덤덤한 태도를 일관하며 냉정한 시각으로 사건의 증언부터 인물간의 관계가지 모두 파헤치고 다닌다.

 

사건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핵심적인 인물인 아키라의 누나 유키, 그녀는 정말 자살한 게 맞는 것인가, 아니면 타살이었을까. 그녀가 죽음에 이르게 된 경위가 무엇인가. 사건 뒤에 정말로 감춰진 사실들이 드러날수록 역시 추리소설의 묘미인 반전에 반전이 거듭된다. 진짜 숨겨진 흑막이 누구였는지도.

 

 

소설은 500페이지 이상을 육박한다. 긴 호흡이지만 차근히 읽어나간다면 좋을 것 같다. 허나 전작들을 읽어왔고, 사와자키 탐정과 그의 주변인물들에 대한 탐색을 모두 끝낸 독자라면 설레는 마음으로 읽었을 테지만, 처음 읽는 독자는 나처럼 초반을 매우 지루해할 수도 있다. 중반까지 지지부진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으나, 중후반 말미에서부터 긴박한 서사 전개가 가쁜 호흡으로 진행되니 뭔가 몰입력을 확 올려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후반은 정말 재미있게 봤다.

 

작가와 역자가 밝혔듯이 하라 료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하드보일드를 쓴다 함은 챈들러의 문체처럼 쓰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이 책의 제목도 챈들러의 작품에서 따와 지었을 정도. 이에 역자는 하라 료의 작품을 즐기는 방법으로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을 읽은 후, 하라 료이 작품을 읽길 추천하기도 한다. 그럼 더 알찬 재미를 느낄 수 있다고. 이는 다음 기회에 전작들을 읽기 전에 시도해봐야 겠다.

 

사와자키는 나름 흥미로운 인물이다. 그러나 그를 소개한 낭만마초라는 수식어는 별로 맘에 들지 않는다. 고독한 탐정이란 이미지와는 잘 맞지만...뉘앙스가 그닥. 낭만마초라...역시 별로.

 

 

소설이 쓰인 시대가 90년대 후반이기에 더 흥미로운 구석도 있었다. 전화서비스를 이용하는 부분도 그렇고, 여러모로 낯선 시대로의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와타나베라는 인물 때문에 경찰과 폭력단으로부터 끊임없이 들들 볶이는 사와자키를 보자니 안쓰럽기만 했는데, 그들의 촉이 맞았다는 걸 후에 드러나자 약간 민망하기도 했다. 의연한 태도에는 역시 구린 구석이 있었던가.

 

그의 작품이 많이 번역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독자들의 호평일색이었다는 점이 뭔가 재미든 뭐든, 보증된 책이란 인상을 받게 했다. 초반의 묵직한 분위기를 거뜬히 이겨내고 중반까지 나아갈 수 있는 독자들에게 하라 료의 사와자키 탐정을 만나보시길 추천드리고 싶다. 지금 이 계절과도 잘 어울리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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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세일즈맨 앨버트 샘슨 미스터리
마이클 르윈 지음, 최내현 옮김 / 북스피어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앨버트 샘슨 매력은 지금부터 -




『침묵의 세일즈맨』





『침묵의 세일즈맨』은 마이클 르윈의 앨버트 샘슨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이다. 1권인『인디애나 블루스』로부터 십 여 년이 흘렀으나, 앨버트 샘슨의 탐정 사무실은 여전히 파리만 날린다. 재개발 사업이 진행 중인 인대아나폴리스에서 입주해 있던 건물에선 쫓겨날 위기에 처했고, 결코 손대지 않으려 했던 비상금은 절반 이상 써버렸으며, 아내와 이혼한 후 만난 적 없는 딸이 12년 만에 찾아오겠다는 소식을 전한다. 


밥벌이가 되지 않는 일상이 이어지고 위기의 샘슨은 급기야 신문에 수수료 할인 광고를 내걸게 되고, 이내 걸려온 전화를 통해 드디어 사건 의뢰가 들어온다. 의뢰인 토머스 부인은 로프터스라는 제약회사에서 영업사원으로 근무하던 남동생이 회사에서 폭발 사고를 당해 크게 다쳐 입원한 상태인데, 가족인 자신이 면회를 할 수 없는 것에 의문을 가진다. 회사에서는 최고의 의료를 제공하기로 했지만, 7개월째 감염 위험의 이유로 면회를 금하고 있다는 것이다. 


샘슨이 일을 맡고난 지 얼마 안 되어 오랜만에 상봉한 딸은 열여덟의 꽃다운 나이의 어엿한 아가씨로 성장해 있었고, 이제 메리앤이 아닌 샘이라 불러 달라 한다. 방학 동안 잠깐 들렀다는 샘. 딸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아빠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던 샘슨은 부녀상봉에 낯설어하지만, 사건이 진행될수록 샘은 부족한 아빠에게 참으로 착한 딸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준다. 부자 새 아빠에게 받은 돈으로 친아빠의 궁핍한 삶의 기본적으로 필요할 요소들을 몰래 챙겨 두려 하는 것도 모자라, 그의 일에 대한 호기심에 꽤나 훌륭한 조수가 되어준다. 의뢰인의 정보를 함부로 공유할 수 없기에 합법적인 방침으로 일을 진행하기 위해 샘은 탐정 면허 또한 얻게 된다.


처음엔 단순히 가족의 면회를 금하는 회사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되었으나, 얽히고 설킨 일련의 관계들은 뜻밖의 것들이라, 그 사이 샘슨의 의뢰인은 사고를 당해 입원해있는 존 피기의 누이인 토머스 부인에서 그의 아내인 린으로 바뀌게 된다. 토머스 부인은 목적인 돈이 수중에 들어오자 동전 뒤집듯 열의와 같은 태도가 식은 것도 모자라 그에게 의뢰한 일의 비용마저 내기 꺼려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샘슨은 참으로 열심히 탐정으로서의 제 역할에 충실하게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기 바쁘다. 


노련한 탐정은 아는 척 허세를 부리며 역으로 사람들에게 정보를 제공 받기도 하며, 정보꾼 활용은 물론 적당한 거짓말과 추진력으로 사건의 진위를 파악하고자 한다. 한 단계씩 진실에 가까워져 갈수록, 그 특유의 감과 행동력을 통해 추리했던 것들이 하나 둘씩 맞아 들어가고 곧 큰 사건의 틀에 가까워져 갈수록 그에게 닥친 위기는 이전의 것들과는 강도가 다르게 그의 생명을 위협하기도 한다. 지금은 혈육인 샘과 같이 있기도 하니 약점이 하나 더 는 셈이기 때문이다. (이전의 작품에서 오독했던 '내 여자'는 전 아내가 아닌 그의 '여자친구'였다.)


단순히 영업사원이 아니었던 존 피기, 화학을 전공했던 그는 추가 근무를 파트타임으로 쪼개가며 연구원 일을 맡아 했으며, 그의 친구이자 변호사에게 남긴 봉투에는 죽은 뒤에 열어보라는 메시지와 함께 거액의 돈이 담겨 있었다. 전 의뢰인과 달리 자식을 잃고 남편마저 잃어 무기력해진 존 피기의 부인 린은 샘슨의 새로운 의뢰인이 되어 주었고, 어르고 달랜 작전을 통해 병원으로 쳐들어간 샘슨은 존의 생사 여부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조금 빗나갔던 의심은 그가 감당하기 어려운 큰 진실로 다가왔고, 경찰은 그를 제지하기 이른다. 


전작에서도 종종 나왔지만 탐정이 되기 전에도 그는 이런 저런 일탈을 많이 행했고, 탐정으로서도 행하지 말아야 할 범법 행위가 한 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게 또한 그의 약점이기도 했다. 그의 친구 제리 밀러는 여전히 성실한 경찰이었고, 돈을 더 받았다고 해서 누가 말린다고 해서 탐정으로서 그는 절대 멈추지 않는 인물이다. 진실을 알고자 하는, 해소되지 않은 그의 열정은 식기는 커녕 더 불타오른다.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제약회사의 직원이자 샘의 데이트 상대인 레이의 표현대로 샘슨은 참으로 재밌는 인물이다. 전작에서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그의 매력이 물씬 드러난다. 엉뚱하면서도 제 갈 길 간다는 마이웨이 스타일의 인물의 위트가 새삼 발휘되는 작품이다. 그의 언어가 웃겨서 피식 피식 웃게 된다. 마냥 유쾌한 스토리는 아닌데 흡입력과 몰입도가 대단하다. 왜 첫 번째 작품에서 네 번째로 건너 뛰었는지 알만하다. 역자의 후기에서도 밝혔듯이 이 시리즈 중 가장 크게 상업적인 성공을 이룬 작품이라고 한다. 소시민적인 탐정이지만 역시 그가 맡은 사건의 흑막이랄까, 감추어진 진실과 뜻밖의 반전은 큰 재미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한 호흡에 읽기에도 좋다. 생각보다 너무나도 재밌게 읽었기 때문에 이건 출판사의 의도에 맞게 다음의 앨버트 샘슨 시리즈도 너무 궁금해지는 것이다. 처음 1편은 앨버트 심슨을 첫 선보이는 작품이니 처음으로 나와야 했고, 이 다음의 반응을 확신할 수 없으니, 제일 재밌는 작품을 먼저 내놓고 보는, 그런 작전이 잘 통할 것 같다. 소심하면서도 무시 당하는 건 견딜 수 없어 하던 바른 생활과는 거리가 먼 유연한? 탐정이었던 그의 매력과 오해했던 부분들이 해소될 정도로 너무 매력적이었다. 더 잘 표현할 수 없는 게 안타까울 정도로 그는 참 매력적인 인물이다. 미미 여사의 안목이란. 역시 그녀가 감탄하며 영감을 받을 만 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까지 포기 않고 막힐수록 뚝심 있게 제 할일 해나가는 샘슨이 멋지게 진실을 다다르는 순간, 그의 목숨이 위협의 정도는 컸지만, 읽는 독자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는 지점은 분명 존재한다. 구구절절 써봤자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이건 정말 추천하고 싶다. 설정은 하드 보일드적으로 보이지만 인물은 전혀 다르니, 그저 그가 이리저리 때때로 거짓말로 속이고, 아는 척 허세를 부리면서 알아내는 과정을 따라가 보는 건 무척 재밌는 일이다. 읽는 내내 요근래 쌓였던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샘슨과 그의 딸인 샘의 활약을 보는 것도 즐거웠다. 부녀 간의 대화와 호흡이란 뜻밖의 좋은 케미로 다가왔다.


결론은 다음 앨버트 샘슨 시리즈를 하루 빨리 만나고 싶다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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