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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 기원
천희란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5월
평점 :
결국은, 남겨진 자들에 대한 이야기
『영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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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죽음을 향해 가는 길과 같다지만, 흔히 일상 속에서 죽음을 떠올리진 않는다. 모두가 앞날에 대한 많은 걱정을 하지만, 아직 닥쳐오지 않을 법한 먼 미래에 대한 생각을 매일하지는 않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 속 틈새로 '죽음'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는 데는 소중한 사람의 빈 자리 혹은 그 사람의 본질적 성향에 기인한 게 아닐까 싶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으로부터 일면식도 없지만 존경하거나 동경하던 사람의 죽음까지. 결만 다를 뿐 비슷하지 않을까. 천희란 작가님은 왜 첫 소설집을 온통 '죽음'으로 채운 것일까 궁금하여 인터뷰를 찾아보았더니 다음과 같이 말하셨었다.
“죽음에 관해 쓴다고 말할 순 있지만 죽음에 관해 알고 있다고 말할 순 없으니, 죽음 주변을 배회하면서 삶에 관해 쓸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경향신문 인터뷰 중)
내가 생각하기로 죽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곧, 삶을 이야기 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배회하면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건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남겨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어떠한 계기가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나 역시 처음 좋아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생각과 판단을 하려 했을 때, 가까운 가족의 죽음을 목도한 후 였다. 처음으로 타인의 죽음 이후, 남겨진 자의 삶을 생각해보게 됐다. 주체적은 삶, 선택, 방향에 대해 고민해보게 됐다. 물론 정답을 잘 찾진 못했지만. 어쨌든 처음으로 실존이랄까, 존재하고 살아가는 것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으니, 나의 삶의 큰 영향을 미친 것만은 확실하다. 그 전에는 그야말로 시키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살아왔기에. 문학의 역할에 대해 말하기엔 나는 아주 많이 서툴고 부족하지만, 내가 느끼기에 문학은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상기시킴으로써, 삶을 되짚어보게 하는 것. 그로 인해 다양한 감정들과 생각들을 빗대어 겪어보기도 하며, 더 잘 살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매개체 혹은 그 이면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것 같다. 다소 상투적인 표현이었지만.
아직도 인정할 수 없는 죽음이 너무나도 많기에. 하루의 한 순간은 꼭 죽음을 떠올려본 적이 있기에. 긴장되기도 했고 두렵기도 했다. 『영의 기원』을 펼쳐보는 일은 그런 용기가 필요했다. 위로는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되돌리고 싶은 시간들은 반드시 존재한다. 때문에 다시금 무기력이 찾아오기도 하고, 아무렇지 않게 잘 먹고 잘 살기도 한다.
어쨌든 살아있으니까, 이렇게 새로운 작품을 읽어볼 수 있는 것이다.
소설집에 실린 여덟 편의 소설 모두 다양한 죽음이 등장한다. 대개 남겨질 자들에게 보여주는 식으로 선택하는 죽음이 다수 등장했던 것 같다. 여러 죽음의 형태와 위치에 나를 대입해보며 읽어나갔다. 사실 처음부터 읽기 버거운 느낌이 있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어려움 때문이 아니라, 막연히 떠오르는 죽음과 관련된 생각들과 기억 때문에 순간 울컥하는 심정이 되어버렸기에. 제자리걸음으로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한 이야기 속에 갇힌 기분이 드는 상황을 반복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나에게는 역시 표제작인 <영의 기원>이 제일 인상 깊고 좋았다. 익숙한 이름과 연관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삶의 끝에 서 있던 '영'이 마지막으로 '나'를 찾아왔을 때, '나'의 자리에서 '영'을 안아주며 공감해주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다. 그 죽음에 관해 계속해서 던지는 '나'의 질문들은 전혀 낯설지 않았다.
처음 천희란 작가님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된 게 '2017 젊은작가상 수상집'에 실린 <다섯 개의 프렐류드, 그리고 푸가>이었는데, 그때도 이야기가 가지는 힘이 대단하다 생각했다. 편지를 주고 받으며 전개되는 작품 형식 속 서사가 탄탄하게 진행되면서도, 서로 맞물려가며 밝혀지는 이면의 진실이 흥미로웠다. 여기 실린 작품 중에 가장 가독성이 좋은 작품이 아닌가 싶다.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많았다.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식이라 대체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환상성과 종교적인 색채 혹은 모호한 분위기가 감도는 게 손에 잘 잡히지 않았고, 안개처럼 뿌옇게 시야를 가리는 느낌마저 들었지만. 이 묵직한 작품을 부족한 소양으로 다 헤아리지 못하는게 아쉬울 정도로 생각해볼 거리가 참 많았다.이건 좀더 시간날 때 다시 한번 들여다 봐야 할 것 같다.
(이렇게 다짐한 작품들이 많지만, 이번 여름 휴가때는 반드시 실천할 수 있도록 해야 겠다는 다짐을 또다시 남겨놔야 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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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무영의 정원>
그녀의 이름을 몇 번이고 되뇌면서, 나는 동시에 나의 이름을 곱씹는다. 아마 모두가 그럴 것이다. 서로에게 각인할 자신의 이름을 발설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죽은 자의 이름 앞에서 산 자의 이름이 무용해진다. 10쪽
반사적으로 나타나는 경련의 흔적조차 남지 않는 침대는 그녀의 절박함을 반증했다. 절대로 살아남지 않겠다는 완강한 결의가 육체가 지닌 삶의 의지를 이긴 것이다.
18쪽
원인도 모를 갑작스러운 죽음이 곳곳이 스며들 때. 나는 죽음을 스스로 결정하고 싶다며 자살한 여동생의 휴대전화에서 의문스러운 모임의 메시지를 발견한다. 이상한 죽음이 창궐한 뒤에 만들어진 이 모임은 자살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곳이었고, 동생에게 최근까지 메시지를 보낸 B는 JJ라는 닉네임으로 두 차례 자살 예고를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나는 동생의 가족임을 밝히지 않고 이 자살자들의 모임에 참가하게 된다. 이름 대신 이니셜로 서로를 호칭하고, 각자가 준비한 방식으로 죽음을 결정하는 여행. 일행 모두가 자신의 방식대로 떠났지만, 나는 우연히도 다시 살아나게 된다. 마지막으로 곁에 남아 있던 C마저도 잠이 들고, 나는 수상한 그림자를 발견하고, 태양이 떠오르기만을 기다린다.
장면 장면이 현재를 그리면서도 중간중간 과거의 서사가 밀려들어 오고, 나중엔 경계 없이 한데 뒤섞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부터 B의 시체를 옮기는 장면으로 등장하니, 무슨 스릴러인가 싶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간혹 이런 죽음을 바라곤 했었다. 아무런 고통없이 어느날 갑자기 조용히 잠드는... 원인 모를 죽음. 그렇게 흔적없이 사라져버리고 싶었는데. 이렇게 이야기로 등장하니 이걸 반갑다고 해야 할지.
결국 홀로 남겨지게 된 '나'는 휴식이 필요하다 했지만, 그건 생의 의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죽음을 바라지만 죽는 게 두렵기도 한 인간적이면서도 솔직한 태도. 피곤한 와중에도 '나'의 손엔 총이 쥐어져 있고, 누구에게 발견되면 오해받을까 걱정하는데서 그렇게 느껴졌다. 그 총으로 나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면 될 일이다. 스스로 삶을 종결하는, 그러한 선택들의 비밀스러운 모임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나'는 우연히도 살아 남았다. 그리고 완전히 종결될 때가 오기 전까지 '나'는 계속해서 살아가지 않을까. 평범함 사람의 위력을 발휘하면서.
<예언가들>
(…), 그가 원할 때면 언제든 창을 열고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 수 있는 현실 그 자체이다. 그것이 한때 그가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자유였으므로, 그는 이제 아무런 구속도 없이 주어진 드넓은 영토에서도 더는 새로운 자유의 감각을 획득하지 못한다.
38쪽
사라진 E 음계를 상상한다. 그것이 그녀에게 연약하고 구슬프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E 음계가 사라지기 전에 그녀가 단 한 번이라도 독립적인 E 음계의 인상을 그토록 구체적인 언어로 떠올린 적이 있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지금 그것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며, 그곳에서만 더 깊고 애잔하게 울려 퍼진다. 40쪽
여자는 음악을 구원이라 여겼다. 여자에게 연주는 인류의 역사를 기리는 행위였고, 동시에 안식과 평화에 다다르는 길이었다. (…) 모든 것이 불가능해지자, 모든 것이 가능했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 없는 헌신을 순교자적인 것으로 여겼고, 음악은 예정된 끝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리라 믿었다. 42쪽
종말의 시대, 공표된 날짜는 생각보다 너무 멀리 있고, 종말에 관한 다양한 계층의 예측과 전언. 결국 희망과 다짐보다 기다리는 일에 더 익숙해져야만 하는 사람들. 사형당했지만 기적처럼 다시 부활한 남자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시체안치소 직원에 의해 종말을 앞두고 일어난 기적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원치 않는 부활이었고 기적이었다. 그래서 결국 자신이 마지막에 간절히 남기려 했던 말은 무엇인지 끝내 알아내지 못하였지만, 정말 기적이 존재한다면 왜 다시 살아나게 된 것일까.
음악을 구원이라 믿는 여자. 끊어진 현이 도착하길 바라며, 바이올린 연주를 하는 여자. 특별히 뛰어난 연주능력을 가진 건 아니지만, 음악을 구원의 양식으로 믿으며, 도착하지 않은 네 번째 현을 기다리고 있다. 린치, 낯선 이들의 만남, 고요한 세계, 들리지 않는 음악. 자전거를 타고 온 사내. 사내가 전해준 작은 상자. 마치 희곡의 한 장면처럼 마무리되는 이 이야기 속 남자의 죄는 무엇이며, 자전거 탄 사내가 전해준 작은 상자 안에 든 것은 과연 무엇인가.
<영의 기원>
시계는 계속해서 돈다. 시간은 끊임없이 흐른다. 그런데 왜 0일까. 마치 시간이 완전히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시간의 측량이 불가능해지는 순간이 오기라도 한다는 것처럼, 81쪽
영이 나를 찾아온 것이니 묻지 않아도 언젠가는 입을 열고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털어놓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영과 함께 침묵했다. 아니,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83쪽
프리저브드 플라워는 한 장의 잎도 떨구지 않지만 서서히 빛깔을 잃어버린다. 꽃의 사라진 빛깔은 어디에 보존되는 것일까. 시들지 않는 꽃은 아름다운가. 잎을 떨구지 않는 꽃은 저주인가. 영은 꽃의 저주를 푸는 방법을 말해주지 않았고, 꽃은 여전히 단 한 장의 꽃잎도 떨구지 않는다. 88쪽
죽을 용기로 살았어야 해.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니까 죽을 용기와 살 용기, 그것은 과연 같은 종류의 용기일까. 나는 맑스와 마르크스, 그리스인과 희랍인, 자정과 0시, 두 번의 침묵, 분명 같은데 서로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것들을 생각한다. (…) 영은 아무것도 쓰지 않았고, 이제는 아무것도 쓸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살아 있기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한 답을 결코 알 수 없다. (…) 빈 편지지와 잉크가 가득 찬 볼펜은 무엇인가를 쓰기 위해 존재하는 물건이라는 것. 영은 죽었고, 나는 살아있다는 것. 그렇다. 그것 뿐이다. 97쪽
희랍의 시인들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이고 이미 태어났다면 될 수 있는 한 하루라도 빨리 죽어버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지. 그러니까 꼭 불행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어. 그건 남은 사람들의 몫에 불과할지도 몰라. (…) 때로 자살은 자신의 명예와 존엄을 지키는 방법이었다고 해. 그러니까 사고가 아니었더라도, 영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의견을 묻는 거라면, 나는 그게 사고가 아니었을 것 같구나. 98-99쪽
영을 생각하면, 영이 다가오는 것 같다. 그리고 때때로,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109쪽
눈이 많이 내리던 겨울, 술에 취한 영이 말도 없이 나를 찾아온다. 얼어붙은 그 손엔 편의점 비닐 봉투가 걸려 있었고, 그속엔 텅빈 편지지와 볼펜이 들어있었다. 영이 주고간 프리저브드 플라워는 빛깔만 사그라들 뿐, 시들지 않는 꽃이다. 다음날 영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전해듣고, 장례식장을 찾은 나는 슬픔이라는 감정과 더불어 영에 대한 기억을 회상한다. 언젠가부터 반복되는 꿈, 밝고 맑고 투명함을 뜻하는 이름의 '영'. 영이 다가오는 것 같다. 만질 수 없는, 투명한 영, 씁쓸한 미소 짓는 영을 그려본다.
무엇이 선행되었는가? 본질에 대한 질문이 이어진다. 나는 매일 동전을 던지고 있다. 앞면과 뒷면. 0과 1. 그리고 영은 왜 죽은 것일까, 왜 나를 찾아온 것일까. 많은 질문들을 던지게 한다. 빈 편지지에 남기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나, 시들지 않는 꽃처럼 기억 속에서 여전히 생생한 영의 이미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빛깔을 바랠지라도, '영'은 영원히 살아있게 되는 거라 믿고 싶다. 나의 마음 속에 그렇게 '영'을 담아두고 싶다.
한 편의 시같은 소설.
<다섯 개의 프렐류드, 그리고 푸가>
곧 결혼을 앞둔 '나(효주)'는 엄마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이자, 나의 후견인이 되어준 선생님에게 드디어 엄마의 죽음에 대한 진실에 묻는 편지를 보낸다. 그렇게 한 편씩 주고 받으며, 점차 더해가는 이야기 속엔 한 사람의 씁쓸하면서도 진솔한 마음과 애증이 드러나게 된다. 예술가이자 성소수자였던 선생님의 마음, 그 속에 감춰져 있던 진실 그리고 사랑했던 사람을 떠나보내는 대신 죄책감과 미움이 교차하는 가운데, 또다른 애정 속에서 길러냈던 효주. 그렇게 그리움의 편지를 쓴다. 새하얀 설원 위에 떠오로는 이미지가 아름다운 소설이다.
잔잔하면서도 시린 도입으로부터 차근차근 서사가 쌓여나갈수록 그 정교함과 세밀한 묘사 덕분에 더 잘 그려지는 것 같다.
<신앙의 계보>
믿음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끊임없이 갱신하지 않으면 강바닥의 흙처럼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유실되었다. 계속해서 흙을 퍼 나르고 땅을 다지는 것이 사제의 일이었다.
156쪽
P는 도쿄에 있는 한인 성당의 주임신부이다. 천주교 박해와 원폭 피해의 상흔이 남아 있는 나가사키의 우라카미(신의 속마음)성당을 방문하며, 어머니 덕에 자연스럽게 생긴 신앙, 자신이 품고 있던 신의 뜻에 대한 의문을 풀고자 한다. 그런 P앞에 우연히 나타난 마른 체구의 소년은 연신 기도하면 천국을 갈 수 있는지에 대해 묻는다. 학대를 당하고 있다는 아이를 보며 자신의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던 P. 불면증을 앓고 있던 그가 깊은 잠을 빠져들었다 깨어보니 아이와 함께 사라진 수면제 약병에 불안해하면서도, 스스로 비열하다 느낄만한 선택을 하고, 다시 찾은 아이의 눈 앞에 자신의 신앙을 파괴됐음을 깨닫는다.
<경멸>
그렇게 보입니까. 꺼져가는 촛불도, 시들어가는 꽃도, 앙상한 해골이나 화려한 보석 같은 것이 없어도, 당신이 그리는 그림은 어쩔 수 없이 모두 일종의 바니타스화가 아니겠습니까. 삶이 헛되다는 것을, 가까이 가면 볼 수 없고, 멀리에서는 실감할 수 없는 그 허망함을 당신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209쪽
그에게 예술은 짧았고 인생은 무한에 가까웠다. 그가 만든 무엇도 그보다 오래 살아남을 수는 없었을 터. 그는 언제나 현재에 속했고, 그의 작품들은 늘 과거에 남겨졌다. 과거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과거에 사라진 것으로서. 209쪽
당신이라는 2인칭 대명사로 서술해가는 형식이 독특한 소설이다. 미술기자인 ‘당신’이 겪은 화가 ‘그’는 자신이 불멸의 인간이라고 주장하며 기자의 눈앞에서 자살을 해 보인다. 그런 화가를 두고 '당신'은 황급히 현장에서 도망을 치지만 기자의 눈앞에 정말로 화가가 다시 살아 돌아오게 된다. 그로테스크하고 공포스러운 이미지가 선명하게 그려진다. '그'는 현실인가, 아님 '당신'의 상상이나 망상인가.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과 '그'를 지칭한다. 당신이라고 지칭되는 인물의 자리에 읽는 이로 하여금, 독자가 그 위치에 서서 이야기 속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해놓은 장치로 느껴진다.
<사이렌이 울리지 않고>
상상이 현실을 능가하기란 불가능하다고 형인은 믿는다. 우리가 아는 현실이란 지극히 선별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고통스럽고 추악한 것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이 고개를 들 때, 상상은 전복된다. 상상이 전복되고 나타나는 현실은 우리의 것이 아닐 것이다. 227쪽
설령 다르지 않다 해도, 그것이 형인의 실패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 세계에 형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므로. 형인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서는 날을 기다려온 것이다. (…) 공포 속에서 인간은 완전히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그녀의 눈 속에서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이, 형인의 계획이었다. 255쪽
이 무시무시한 지루함에서 벗어나야 해요. 아니 이 지루함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깨달아야 해요. 집으로 돌아가도 안전하지 않다는 걸요. 257쪽
사이렌이 울리면 누구라도 거대한 사건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사이렌이 곧 사건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결코 이해하지 않는다. 258쪽
유학 전문 업체에서 일하는 ‘형인’은 미국 명문대 입시를 준비하는 특별 관리 학생인 ‘수진’의 입학시험 접수에서 실수를 저지르게 되고, 이로 인해 사장과 ‘수진’의 부모로부터 부당한 요구에 시달린다. 모멸감을 느끼며 공항으로 ‘수진’을 마중 나가게 된 ‘형인’은 안개주의보 경보 사이렌이 울리고, 사방으로 깊어지는 농무를 헤치며 공항으로 향하고, 수진을 만나게 된다. 형인의 예상과 달리 수진은 진솔한 아이였고, 부모님 대신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형인을 언니라 부르며 친근하게 대해는 수진과 달리 형인은 자신이 당한 모욕을 되갚을 때만을 기다린다. 그리하여 '안전한 위험'이란 누구에게 해당되는 것일까.
참고 인내하는 사람들이 폭발하면 어찌될지 대체로 예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를 드러내보이는 방식이 더 거칠고 과감하다. 여러 변수에 의해 혹은 갑작스럽게 떠오른 이성과 주저함으로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을지언정, 또다른 적의와 허무, 이내 곧 새로운 시도가 이어질 것이다. 자신의 얼굴이 완전히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화성, 스위치, 삭제된 장면들>
광활한 우주는 한 인간을 그 자신의 심연으로 내동댕이치고, 외롭지 않은 인간조차 외로움의 의미를 알게 되는 그곳에서 마음이 허약한 자는 어둠에 마음을 빼앗인다. 아내에게도 우주는 그런 것이었으리라. 294쪽
우주선의 깊은 밤에 들려오던 것과 같은 소리들. 그 자신의 맥박과 호흡이 어둠 속에서 진동한다. 외부의 적막이 그의 신체를 삼키는 것이 아니라 신체의 소음이 공간의 적막을 뒤덮는다. 어둠은 그림자를 삼키지 않고 그림자가 몸을 부풀려 빛을 삼킨다. 297쪽
모든 이야기에는 언제나 미리 삭제된 몇 개의 장면이 존재하며,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삭제된 바로 그 장면들이다. 나는 영원히 달아나지 못한다. 다만, 이제 불을 끌 시간이다. 303쪽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그’는 아이가 이사해 나간 방에서 아내의 일기장을 발견한다. 화성 여행의 시대가 도래한 세상. 화성 여행자들의 겪게 되는 그림자 분실.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를 듣게 되고, 고립된 느낌, 공포와 외로움으로 인한 고통을 토로했던 사람들. 아내는 화성을 다녀온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주장하는 '그'와 그런 여행을 다녀온 적이 없이 떠났다는 아이. ‘그’는 중간중간 찢겨 나간 일기장의 내용을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채워 넣으면서, 아내의 자살 원인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이 리뷰는 현대문학 출판사의 '문학독후'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