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잔 이펙트
페터 회 지음, 김진아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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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릴러의 옷을 입고 과학철학서의 얼굴을 한 삶 이야기

『수잔 이펙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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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페터 회는 아이와 어른, 혹은 여자와 남자, 자연과 문명 등 두 세계 가운데에 서서 특유의 문체를 통해 삶의 의미를 재발견하게 하는 신선한 글쓰기를 하는 작가라고 한다. 그 주제 또한 삶과 맞닿아 있는데 이를 말하는 방식이 퍽 신선한 것이다. 여느 소설의 특성을 가진 듯, 아니 조금 벗어난 듯 보이기도 하는게, 마치 내가 읽고 있는 게 소설인지, 과학 철학서인지 헷갈릴 정도로 심도 있는 지식과 비유가 연이어 지는 반면, 슬며시 들어가 있는 위트가 서늘한 긴장 사이에서 위치해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적 약자인 여자와 아이들의 존재에 마음을 쏟는 이 작가는 과학의 진보로 양극화된 현대사회 문명을 비판하며 제3세계 아이들과 여성을 위한 재단을 만들어 후원할 만큼 실천적인 작가이다.

『수잔 이펙트』는 한 가족이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극도의 개인주의자의 성향을 지닌 가족 구성원이 어떻게 흩어지게 지며, 또 다시 어떻게 뭉치게 되는지 그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들이 처한 위기에서 살 길로 나아가는데 도사리는 위험들은 위기가 더 큰 위기로 다가오기도 하고, 되레 긍정적 성격을 지닌 구조의 길로 통하기도 한다. 

수잔은 물리학자이자 다양한 직함을 가진 유능한 사람이다. 그녀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녀의 눈을 바라본 사람들은 몇 분 이내 자신의 속내를 고백해내는 것이다. 이성을 좋아하며, 물리학을 사랑하는 사람. 여자인 동시에 강한 모성을 가진 사람. 
그녀의 남편인 라반도 이와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유망한 피아니스트. 예술가인 그 역시 반경 3m이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의 재능을 가히 폭발적으로 발산된다. 사람들에게 칭송 받길 좋아하며 한데 아우르는 매력까지 겸비하고 있다. 그와 있으면 행복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천생연분인 듯 보이지만, 극단의 기질적 차이를 보이기도 하는 두 사람이다. 

이 두 사람 사이에 있는 그들의 자녀들. 쌍둥이 남매 티트와 하랄 또한 각기 다른 성향을 지니고 있다. 해박한 지식과 좋은 기억력을 지닌 하랄과 한 없이 다정하나 늘 반전멘트를 날리는 티트. 독자가 대면한 이들 가족의 첫 인상은 그야말로 콩가루 집안 그 자체이다.

불륜 상대인 젊은 남자애인에게 이별을 고하다 강간 위기에 처한 수잔은 그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25년 형을 선고 받게 되고, 그녀 못지 않게 라반은 마하라자의 열여덟 딸과 함께 도망을 치다 남인도 마피아에게 쫓기는 중이고, 하랄은 골동품 밀수 혐의로 80년 형을, 티트는 콜카타 칼리 사원의 승려와 도주를 하는 중이고. 어떻게 하나 같이 이런 큰 문제를 일으키고 철저히 흩어질 수 있는지 정말 대단한 가족이다.

이야기는 총 3부로 나뉘어져 있으며, 첫 시작은 이렇게 뿔뿔이 흩어진 가족이 다시 재회하면서 시작된다. 노벨문학상을 탄 이들만 연이 있을 법한 칼스버그 재단 명예저택에서 그 주인인 '안드레아'와의 연으로 그녀를 만나러 가게 된 수잔은 최강 국가기구 그 자체인 듯으로 보이는 '토르킬 하인'을 만나게 된다. 수잔이 수감되어 있을 때 처음 만났고, 가족이 모두 평온하게 다시 모일 수 있을 방법을 제시한다. 그녀의 능력을 발휘하여 주요 문건을 가져와주길 바라는 것이다. 그 징검다리 역할을 해준 안드레아는 수잔의 젊은 시절부터 연이 닿아 있는 사람으로 그녀의 물리학에 대한 애정을 더 커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지원한 사람이다. 여러가지 불가해한 일들로 엮여 있기도 한 것이다.

집에 다시 모인 이 가족은 앞엔 산 넘어 산인 일들만 발생된다. 그들이 찾아야 할 중요한 서류는 미래위원회의 마지막 보고서. 위원회의 존재 자체에 무지했던 이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알아 가게 되며 그 존재를 알게 되고 진실을 파악하게 되며 서서히 죽음의 위기 속으로 발을 들여놓게 되고, 운좋게 잘 빠져 나가기도 한다.

실감 넘치고 세세한 묘사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반면 생생한 긴장감을 더한다. 위험을 함께 헤쳐나가며 동지애를 키우게 된 것인지, 이들은 서로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속내를 드러내게 되고 진정한 대화와 소통을 하게 된다. 그토록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있는 진귀한 재능을 지닌 유능한 사람들이 서로에게는 그런 능력이 전혀 통하지 않았던 것일까. 

피로 엮인 혈연들, 가족이란, 이상하게도 남에게 말했던 것들도 쉽게 말을 못 꺼낼 때도 있고, 가까이 있으면서도 상처 주기 싫고 받기 싫어 큰 거짓말로 포장하기도 한다. 이 묘한 특성을 수잔의 가족에게서도 느낄 수 있었다. 

덴마크의 위대한 가정으로 타임지의 표지모델이 되기도 했던 이 가족은 완벽한 가면 뒤에 어떤 얼굴로 하고 서서히 틀어지고 있었는지도, 이들이 미래위원회의 진실을 알아가는 과정 중에 자연스레 밝혀진다. 

주인공 수잔의 시점에서 모든 사건들이 전개되며, 말하는 방식 또한 매우 독특하다. 단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녀가 물리학을 무지막지하게 사랑한다는 것이다. 또한 여자로서의 재능을 한껏 잘 뽑내는 동시에 강한 모성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을 쌍둥이를 대하는 태도에서 엿볼 수 있다. 

미래위원회의 사람들이 한 명씩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들의 재능과 상냥한 이웃의 도움으로 주요 보고서를 읽게 되면서 이들 뒤에 숨겨진 거대한 음모와 계획들이 암시하고 있는 것은 역시 이기심으로 보인다. 인간은 그렇게 이기적인 동물인 것이다. 그 큰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선택한 자들끼리 혹은 소수 선택받은 자들끼리 누리면서 타인은 완벽히 무시하거나 배제시키는 이기심. 극강의 이기심이다. 이 소설은 그 이기심에 대해 세기말적 상상력을 동원해 시원하게 한 소리 하고 있는 것이다. 특유의 시크하고 건조한 문체로 말이다.

수잔이 찾은 미래위원회 보고서는 1년 반, 다섯 번의 회의 기록을 세 개의 범주로 나눠 요약 정리한 것이었다.

작은 사건들의 예측이 첫 번째,
집단적 의미가 있는 중소 규모의 제한적 현상의 예측이 두 번째,
경향의 예측이 세 번째,
각 범주에서 시기가 얼마나 정확하게 예측됐는지, 빗나간 예측과 비교해놓은 것도 포함해서. 위원회의 구성인들 역시 각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자들이었다. 

미래위원회의 구성과 기획 단계, 그리고 구성원들의 이기심과 누려왔던 것들, 자만에 빠져 생긴 위기들, 그 위기 뒤에 숨은 거대세력들과 진실과의 조우. 연달아 터지는 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어마무시했다. 그만큼 잘 짜여진 소설이다. 완급 조절이 좋은 소설이다. 멀리 뛰어 갔으면 잠시 쉬어가고, 쉬어가면 사이 해소의 방식이 곁들여지고, 다시 달려나가고 멈칫했다 움직이는. 끊임없이 내달리는 소설은 아니지만 끝까지 완주했다는 쾌감은 쥐어주는 소설인 것.

재밌는 건 한결같은 수잔의 과학적 비유이다. 과학적인 동시에 철학적이다. 매우 심도 있는 문장들이다. 수잔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하려 했고, 미래위원회의 주축 인물로 보이는 마그레테 스폴리드를 만났을 때, 마그레테가 연습을 하고 있던 그 원반의 무게처럼. 너무 길게 주절거렸지만, 내가 느끼기로는 그렇다. 단순히 스릴러 소설이겠지 접근했다가는 큰 코 다칠 수도 있단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은 스릴러의 가면을 쓴 과학철학서이다. 과학철학서인 동시에 삶을 다루고 있다.

빵 하나 굽는 데에 거치는 과정을 모두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식사하기 전 그 음식을 소개하는 말 또한 온통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비유로 뒤덮여있다. 수잔의 물리학에 대한 애정과 양자역학에 대한 이야기들은 마치 과학사전이나 전문과학서적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사이 사이 들어간 위트가 없었더라면 이 낯설기만한 방식이 어렵게만 다가왔을 것이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건조하지만 사유가 담긴 문체로 거대한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 신선했다. 모든 게 신선함 그 자체인 소설이다. 작가의 상상력에 놀랍고 그 해박한 지식에 놀랍다. 작가의 위대한 속성을 느끼게 해주었다. 작가가 겪고 행했던 다양하고 특이한 경험들이 모두 녹여들 수 있는 걸 보면, 역시 소설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것 같다. 

역자의 말로는 행갈이도 독특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역자의 말처럼 이 소설의 완결의 방식의 신선하다. 그토록 물리학과 삶의 철학 사이에서 전전하던 소설이 로맨스로 끝을 맺는다고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또한, 이들 가족 앞에 다시 어떤 위기가 처해질 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전보다는 나은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다소 낙천적 전망을 가질 수 있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진실을 고백하게 하는 수잔의 능력 속에서도, 가장 깊은 내면에 깃든 건 타인이라 말할 정도로, 사람 사이의 관계성이 가지는 의미와 그 존재감이 얼마나 큰 지 실감할 수 있었다. 더불어 살아간다고 말해야 할까.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혼자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타인의 존재를 결코 무시하거나 배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삶이란 아직 무엇이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한 단면에는 이런 마음을 가지는 게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난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러니 이 얼마나 묵직하고 심도 있는 소설인 것인가, 라고 수잔 이펙트를 통해 고백해본다.







        (이 리뷰는 현대문학 출판사 '문학독후'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우리의 하루는 온갖 맛과 향, 사람들, 희망과 두려움의 순간들로 넘쳐난다. 그래서 가끔은 이렇게 순수한 박하 향이 필요하다. 그리고 밤의 초입에 찾아드는 고요, 달빛이 하얀 벽에 만들어내는 기하학적 무늬도. /88쪽

순간 한 줄기 빛이 스치는 것 같았고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이해할 것 같았다. 그것은 솔직함이 가진 가능성 중 하나였다. 누군가 거울이 되어 우리의 참모습을 비춰주는 것. /415쪽

"지난 몇 달간 알아낸 게 있어요." 내가 말했다. "그동안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거예요. 사람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그리고 이 효과의 가장 깊은 곳에 존재하는 게 뭔지 아세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타인이에요. 사람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사는 건 바로 타인이에요." /4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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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 아름다운 삶을 위한 철학의 기술
빌헬름 슈미트 지음, 장영태 옮김 / 책세상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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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름다운 삶 위한, 삶의 기술이란 무엇일까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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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라고 하면 언제나 낯선 학문에 비하지 않았다. 그 세계는 실로 방대하며, 거칠게 말하면 어렵고 딱딱한 개념과 이론들에 섣불리 다가서기 어려운 장벽 같은 게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내가 내 삶에 던지는 여러 질문들과 고민에 대한 답을 찾아 방황할 때 찾게 되었다. 


이는 요즘 '자존감' 이라는 게 주요 화두가 되는 것처럼, 척박한 현실에 곤궁한 삶을 살아갈수록, 지치고 피로함에 무엇 때문에 이렇게 살아가는가에 대한 의문이 지속될수록 '나'와 나의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힘든 나날이 지속되어 회의와 무력감, 공허가 동시에 스며들게 되는 것이다. 


이에 영혼의 치유사라 불리는 독일의 한 철학자의 삶의 기술에 대해 우연히 알게 되었을 때, 호기심과 기대가 일었다. 저자인 빌헬름 슈미트는 고대 철학에서 비롯한 삶의 기술을 현대에 끌고 들어와 말한다. 고대 철학에서 비롯되었듯이 철학은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었음을, 근대에 들어 탐구와 이론 연구에 몰두하여 멀어진 철학은 실은 삶을 더 잘, 그리고 아름답게 가꿔나가기 위해 접목되었던 것들이었음을 말이다.


이 책은 저자의 이전의 저서『삶의 기술 철학』의 요약본과 같은 책이라 볼 수 있겠다. 일종의 입문서 역할을 해주는 게 아닐까 싶다. 삶의 기술에 대한 그의 저서가 당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니 그것도 놀랍고 신기하기도 했다. 


삶의 기술을 새롭게 정초하려는 노력과 더불어 전제 역시 중요한데, 선택의 여지와 가능성들을 열어주며 소망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하며, 단순히 내용을 확인하는 게 아닌 가능성을 밝혀내는 게 중요하다고 한다. 


일어난 일을 이해하고, 한 개별자가 어떤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지 또는 가지고 있지 않는지 이해하는 데는 철학적 행위가 도움이 되는 것이다. 이는 의식적인 삶의 운영을 위해 근거와 논증을 탐구하고, 개념들을 해명하고, 구조와 그것에 근본적으로 연관된 사항들도 발견하고, 조건과 가능성을 분석하는 것 등의 행위를 이른다.


바쁜 삶을 살아가다 보면 사유하는 것이 사치로 느껴질 때가 있다. 진정한 사유를 해보는 시도도 극히 드물며, 그러한 사유라는 것을 잘 알지도 못한 상태로 말이다. 그러기에 더더욱 고요히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도를 해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저자가 시도에 대해 말했듯이. 근본적인 것에 대한 물음이 해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의 혼란에 이른 게 아닐까 싶다.


아름다움에 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아직도 잘 해소되지 않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름다운' 삶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실존에 개입하고, 실존을 의식적으로 수련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개인의 삶은 물론 타자들과의 사회적 공생에 힘쓰게 한다.  


호퍼는 한 작품 안에 얼마나 많은 사상과 자극이 들어가 자리를 잡는 지에 말했다. 때문에 그의 그림은 삶의 문제를 제시하기 위한 공간 같은 것을 제공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들어가는 글부터 등장하는 호퍼의 그림은 저자가 삶의 기술에 대한 초입을 다지는, 왜 삶의 기술이 필요한가, 어떻게 철학과 접목되어 왔는가, 그 기본 바탕에 무엇이 있는가를 설명하는데 좋은 예시가 되어주는 듯 하다. 덕분에 호퍼의 그림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나에게도 새로 그 매력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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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쾌락과 고통의 모순을 포함하고 있다. 쾌락은 고통이 있기에 존재할 수 있다고 한다.

이에 고통의 기능이랄까, 피력되는 것들이 흥미로웠다. 고통을 겪음으로써 관계 혹은 상실에 대한 염려를 하게 되고, 조심하게 된다는 것이다. 고통에 점령된 탓에 외부세계는 무의미로 가라앉아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됨으로써 파괴적인 작용을 하고, 내면세계가 새롭게 생성될 수 있기 때문에 생산적으로 작용된다 볼 수 있다. 고통으로 인해 넘치게 된 상상력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꿈꾸는 걸 살아있는 동안 실현해내려 한다. 이를 위해선 한계 설정이 필수 요소인 것이다. 죽음이 있기에 삶을 살아가기를, 그것도 실속 있게 살아가기를 종용하게 된다. 이렇듯 삶의 한계는 삶의 가능성에 대한 조건이 되어주는 것이다. 

또한, 죽음에 대해 반복적으로 생각함으로써 공포심을 버리게 되고, 후회 없는 살아가게 되면 홀가분한 죽음을 통해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나는 내 삶을 어떻게 이끌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통해 고유의 삶을 살게 된다. 


시간의 가위라는 비유에서, 시간의 가위가 닫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시간을 이용함으로써 최선의 가능성이 파괴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수많은 가능성들과 과거가 되어버린 낡은 현실들이 쌓이게 되는데, 현재는 변화를 꾀할 수 있는 시간인 동시에 큰 난관이라고 한다. 가능성에 비해 기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시간을 유용하게 쓰기 위한 분할 및 배분을 잘 해야 한다. 당장 할 수 없는 것들은 나중에 올 기회를 위해 유예하고, 지나가 버린 시간의 고통을 인식하여 앞으로의 시간을 잘 쓰기 위해 노력할 수 있게 된다. 앞서 말한 시간이 충만한 시간이라면 빈 시간도 존재하는데, 이는 그냥 흘러 보내는 시간을 말한다. 나태할 수 있는 시간, 산책, 사유 혹은 좋아하는 취미를 하는 시간이라든지, 아니면 미래를 위해 투자할만한 것들을 하는 시간이라든지.  


분노, 내지 격정과 감정 요소 하나 하나 삶의 기술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분노에 대한 여러 요령들이 있는데, 사전 숙고, 분할, 유예, 분산, 유도, 다른 쪽으로 돌리기, 보상, 승화 등이 있다. 분노를 결코 얕잡아 봐선 안된다. 분노는 선량한 것을 방해하는 가시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부정적으로 사고하는 것은 실망을 낳지만, 그렇지 않았을 경우에는 긍정을 낳게 된다. 가장 좋지 않을 경우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정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에는 긍정적 사유 방식을 이미 포함하고 있다.


고대에 말했던 행복에 대한 것들은 현재에 적용하기에 맞지 않는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 방법을 찾아 나서야 한다. 실존의 해석학 작업이 필수적인데, 자기 자신과의 대화, 타자들,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해 시도해보게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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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읽는 이로 하여금 많은 인내심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앞서 사유하던 문장들이 끊임없이 전복하며 진행되는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느낀 어려움을 떠나 매우 유익한 책이었다. 실존에 대한 의문이 들었던 사람이라면, 나의 삶을 점검하고 사유하고 잘 살아가고픈 사람이라면, 일말의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무심히 흘러 보내고 생각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사유함으로써 내 것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포함한다. 여러 시도들을 통해 경험이 쌓이면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 있게 된다. 


더불어 역자의 세심한 각주는 나와 같은 초보자들이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나라 별 언어의 뉘앙스가 다르듯 어떤 개념을 말할 때의 용어를 어떤 것들로 대체하였고, 왜 그렇게 해야 했는지, 배경지식 부가 설명 같은 것들도 덧붙여서 친절한 안내를 더해 주었다. 


저자의 글은 잊고 지냈던 요소 요소들을 하나하나 삶의 기술로서 복원시키는 작업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시 같이 아름다운 문장들도 많았다.


삶의 기술의 목적은 결국, 지극히 난관으로 가득찬 이 삶을 바르게 끌고 가기 위한 스스로의 역량을 키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내 삶에 던지는 미로 같은 질문들의 답은, 나를 잘 알아가고 삶의 기술을 터득함으로써 얻어지는 것들에서 찾아가는 것 같다. 


본래 생각해왔던 것들과 비슷한 지점도 있었고, 전혀 낯설게 보는 방식에 놀랍고 신기한 부분도 있었다. 일회성이 아닌 반복해서 좋은 습관으로 활용하여, 삶의 기술을 하나씩 배워나갈 수 있는 사유 또한 이어나가야 겠다. 


개인이 삶의 무대에서 퇴장하는 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실존을 외부의 시선으로 보게 된다는 점에 희극이 존재한다. p 26 


우리가 먼 미래에도 살 수 있다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 지금 이 삶을 살아야 하는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하는가? p 44


성찰적인 삶의 기술을 위해서는 안정과 유동성 사이 폭을 새롭고 철저하게 이용하기 위해 무엇을 새롭게 시험할 수 있는지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p 67


고통은 자기가 감당해야 할 가장 고유한 것으로 보인다. 그 고통은 그의 고통이며 그의 소유물이기 때문이다. p 84


한계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죽음과 친밀해지는 것은 무엇보다 삶을 위해 자유로워지고, 죽음을 가볍게 해주는 방식으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p 105


삶 전체를 되돌아보는 시선, 미리 죽음을 향하는 시선, 그리고 그것 너머로 향하는 시선, 죽은 자의 유산으로서 살아 있는 자의 내면에 생동하면서 살아 있는 자가 바라보는 이 이중의 시선. 이제부터 그는 죽어가는 자의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고, 자기 자신의 삶을 음미하고 어쩌면 변화시킬 것이다. p 108-109


풍부한 상상력을 가진 자기가 성찰적 삶의 기술을 위한 표본이 될 수 있다. p 132


삶의 기술의 전략은 불쾌한 우연들을 개연성이 덜한 것으로 만들고, 적어도 그 우연들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들을 숙고하여 가능한 답변을 준비하는 방향을 취할 수 있다. 

p 139


철학적으로 성찰된 삶의 기술은 지나치지 않은 육체 문화의 확장에 기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스포츠도 이 육체 문화의 테두리 안에서 한몫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영혼의 돌봄을 목적으로 하는 육체의 훈련으로서의 스포츠 그러니까 물리적 요법으로서의 스포츠는 사실상 심리요법인 것이다. p 242


쾌활함의 기본은 균형 잡히고 잘 조직되고 평형이 이루어진 자가, '폭풍 한가운데에서도' 한결같음을 보존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많은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확고부동한 영혼이다. 즉 쾌활함의 기본은 자기강화의 달성인 것이다. p 253






( 이 리뷰는 책세상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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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라이어티 - 오쿠다 히데오 스페셜 작품집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해용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일곱 개의 단편과 두 개의 대담까지 한데 묶인 책
읽고 나면 당신도 쿠다파가 될 수도,





『버라이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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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다 히데오의 신작 소설집엔 그동안 뿔뿔이 흩어져 있던 단편들을 한데 모였다. 창작 배경도 각기 다르고 숨겨진 사정들도 다르다. 여러 색채를 지닌 이야기들이 살아 숨 쉬는 듯한 인물들의 개성과 더불어 생동감이 넘친다.

작가 후기에서 엄살을 부리며 작가의 생명이라든지 엉뚱하게도 통계학적으로 살펴볼 때, 자신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무려 16년이나 남았다. 게다가 문학상을 받은 작가들에 한에서 얻은 통계치이다. 

이 엉뚱하고 익살 맞은 작가에게 솔직히 난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이전에 몇 번 접해본 소설 두어 권이 전부다. 안타깝게도 나의 취향에는 맞지 않았다. 맞지 않으면 잘 찾지 않게 된다. 그야말로 무관심. 그래서 한쪽으로만 치중된 독서를 이어 왔는데, 이번에는 꼭 열심히 읽겠다는 사명감으로, 이 습관을 고치기 위해 열독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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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장이다> / 2007.12


이 소설은 다음에 이어질 단편과 맞닿아 있는 소설이다. 원래는 한 권의 책으로 묶을 기획에서 비롯되었으나, 결국 별개의 작품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나타이 가즈히로, 38세의 준대기업인 광고기획사의 프로듀서로 활약한 지 10년 차, 아무리 큰 수익을 내도 처우는 한결같은 회사의 태도에 실망한 가즈히로는 독립하여 창업을 하기로 결심한다.

(이 소설이 실린 시기는 2007년이지만,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창업이란 게 쉬운 게 아니다.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가 홀로 덩그러니 떨어져 시작해야 하고, 책임감과 부담감은 배가 된다. 거기에 쉽게 속내를 드러낼 수 없는 입장이기에 고독까지 더하게 된다.)

가즈히로는 자신의 일에 긍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올곧고 정직한 편이다. 그만큼 고집도 자존심도 센 인물이다. 그냥 무작정 시작한 것도 아니었고, 제대로 된 계획도 세워 놨으나, 도중에 모두 어그러지고 만다. 능력 있는 직속 후배인 오가와를 스카웃 하려다 직속 상사인 하라다 부장에게 들통나 큰 방해를 받게 되기 때문.

하라다는 유능한 부하 직원들에 의존하는 소심한 상사였으나, 자신의 체면을 구기게 한 가즈히로에게 앙심을 품고서 그가 퇴사 전에 제출한 기획서로 일을 진행시킨 것. 안타깝게도 퇴사 결심 후, 그걸 모두 오가와에게 모두 털어놓은 게 큰 실수였던 것이다.

가즈히로는 사무직으로 들어온 아내의 사촌인 유카와  스카웃 해달라 청한 젊은 영업 직원인 오카자키와 함께 열심히 위기 극복에 나선다. 여유는 없었지만, 다행히 문을 닫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영업을 뛰고 또 뛴다. 

전에는 그냥 넘겼을 법한 것도 사장의 위치가 되자 직원의 생계 뿐 아니라 협력 업체와의 신뢰를 위해서라도 굽히고 들어가는 태도로 변화를 이루게 된다. 마지막 창업 멤버로 원래 오가와와 함께 스카웃 제의를 했던 자유분방한 성격의 계약 직원 모치즈키까지 합류하며, 본격 '나카이 에이전시'의 앞날은 어떻게 될지, 궁금증을 유발하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이야기의 구성도 탄탄했고, 무엇보다 조사는 하되 취재는 잘 하지 않는다는 오쿠다 히데오는 역시 타고났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물을 잘 그려낸다. 가즈히로의 아내 구미코의 성정, 그의 자녀들까지. 한 권의 책으로 묶으려 했던 기획만큼 이야기와 인물들이 잘 그려진다. 업계 상황도 리얼하게 전개되어 더욱 신뢰가 간다. 

이로 인해 오쿠다 히데오에 대한 불호가 호로 점차 변화를 맞이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첫 신호탄이 매우 좋았다. 



<매번 고맙습니다> / 2008. 8


앞 단편과 이어지는 나카이 에이전시의 이야기. 이야기는 크게 두 줄기로 나눠 교차되며 진행된다. 그의 큰 딸인 초등학생 유키의 사회 숙제의 인터뷰를 하는 것과 나름 사업 기반을 잘 다질 수 있는 초석이 되어 줄 사업이 진행되는 과정 속 갈등을 보여주는 이야기.

그동안의 영업 결과 미나토 부동산에서 아오야마 건물 1층 운영을 맡게 되고, 이를 일정 기간 대여해주는 기간 한정 안테나숍으로 활용할 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인테리어 회사인 '가네코 플래닝' 대표 가네코와 연이어 부딪히게 된다. 

오사카 사람인 가네코 대표는 회사 규모는 작지만 나름 성공의 궤도에 오른 사람이며, 인맥이나 처세술이 대단하다.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한 신출내기 가즈히로는 그와 상성이 잘 맞지 않는다. 예산을 부풀려 잇속을 챙기는 것도 모자라, 와하하하 웃으며 넉살로 대충 넘어가려고 하는 게 맘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회사원 생활과 다르게 예산 측정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기 때문이다. 다른 상황에서 그는 올곧게도 필요한 만큼만의 합리적인 추정을 하고, 협력 업자들에게도 회사를 다닐 때만큼 후하게 쳐준다. 가네코의 뻔뻔스러운 처사에 분개하는 가즈히로도 시간이 지날수록 한 푼이라도 더 벌고, 아끼기 위해 무조건 깎고 보게 된다. 

이런 사업이 진행 중에 딸 유키의 인터뷰는 적재적소의 유머 포인트가 되어준다. 그날의 상황과 어찌나 적절하게 잘 맞아 떨어지는지 허세로 일관하던 답변이 당혹스럽게 바뀌는 게 우습다. 고로 나카이 에이전시의 다른 이야기도 너무 궁금해진다.

작가님, 더 써주시면 안 될까요?



<드라이브 인 서머> / 2006


신인시절 썼던 단편이라고 하는데, 진짜 환장할 스토리다. 서른 중후반이 되어 뒤늦게 소개로 결혼한 노리오와 히로코는 일본의 명절인 오본에 히로코의 친정에 가게 된다. 노리오는 운전면허가 없기에 운전석에는 히로코가 앉아 있다. 능력도 있고 미인인데다 육감적인 바디까지 가졌다고 묘사되어 있는 인물. 

교통 체증이 이어지는 가운데 히치하이킹을 하고 있는 청년 사이토를 흔쾌히 태워주는 히로코 때문에 노리오의 수난기가 시작된다. 그 뒤로도 차 안에는 계속해서 새로운 인물들이 추가로 탑승하기 때문이다.

휴게소에서는 하와이로 여행을 떠난 자식 내외 때문에 홀로 관광을 하는 노인, 미야자키
도로 위에서는 추돌 사고를 일으킨 뒤차가 에어컨이 고장 났다며 태우게 된 아이들,
손에 식칼을 들고 자신을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한 남성까지. 

정말이지 골 때리는 이야기이다. 이런 걸 총체적난국이라 하는 것인가.
나아질 것 없이 악화되는 상황 속에서 정말 상식은 쥐톨 만큼도 없는 사이토가 히로코의 가슴을 만지며, 노리오의 분노가 극에 달하게 된다. 식칼까지 빼앗아 휘두르다 마지막까지 진상 짓 하는 사이토를 쫒아 내리던 노리오가 범인으로 오인돼 체포되기에 이른다. 

실감 넘쳐 짜증 유발한 이야기, 그러나 지금은 히치하이킹 자체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크로아티아 VS 일본> / 2006. 8. 12


쇼트 쇼트 스토리라고 하는데, 이건 그냥 그랬다. 실제로 열린 이 축구 경기를 바탕으로, 경기를 보는 크로아티아 사람의 입장에서 쓴 글인데, 잘 와 닿지 않았다. 그냥 작가의 목소리처럼 느껴졌다. 다만, 그 사이에서도 묘하게 풍자적인 요소가 보이는 게 있어 그 부분만 흥미로웠다. 그 외엔 조금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정말 짧은 이야기.



<더부살이 가능> / 2012. 3


아타미 역 앞에 위치한 식당 미쿠리야. 고전적인 외관과 온천 부근이라는 좋은 입지 덕에 번창하고 있으나, 맛과 서비스가 그저 그런 곳이다. 우에무라 에이코는 폭력 남편과 빚을 피해 두 살 배기 아들과 함께 이곳으로 도망오게 된다. 아직 스물 여섯이라는 젊은 나이기에 대우를 보고 고를 수 있었던 그녀는 직원 아파트를 따로 구해주겠다는 미쿠리야에서 일을 하기로 한다. 홀 서빙만 한 지 1 년째, 여전히 불안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에이코.

미쿠리야에는 종업원 중 우두머리 격인 60대 도시코가 있다. 이 역시 상식도 뭣도 없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자신에게 걸린 한 사람만 계속 혼내는 것이다. 최근 표적이 된 스즈키 교코는 얌전하고 미인이지만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는 직원이다. 또래이기에 친해지려 노력을 해보는 에이코지만, 뜻대로 잘 되진 않고, 퇴근길 도시락을 사 들고 가는 그녀를 관찰하기만 한다. 외로움에 주말에 같이 외출하기를 권하게 된 에이코는 쿄코의 집에서 동거인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형사들이 찾아와 움진리교 특별수배범을 숨겨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때문에 직원 전체가 사정 정취를 받게 되자, 다시금 도주를 생각하는 에이코. 사기와 공갈 전과가 있는 부모 때문에 눈치 보며 자란 자신의 신세를 탓하다, 식당의 돈을 훔쳐 달아날 생각이 이어지고,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면 하는 씁쓸한 바람을 남기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비릿하게 씁쓸한 뒷맛을 가진 이야기. 움진리교 사건이 화제가 되자 이에 영감을 받고 썼다고 하는데, 그보다는 다른 곳에 더 치중된 이야기 같기도.




<세븐틴> /2009


유미코는 딸 아키나가 크리스마스 이브 날 친구집에서 자고 오겠다고 통보를 해오자, 첫 경험의 디데이임을 눈치 챈다. 이때부터 시작되는 유미코의 고뇌가 이 이야기의 주축을 이루게 된다. 남편에게 외식을 하자고 말해보았으나, 회사 일로 거절 당하고, 대학 시절 친구를 만나 고민을 토로해보았으나, 막을 수 없으니 피임이나 잘하게 하라는 이야기만 듣게 된다. 

문득 지난 시절을 회상하게 되는 유미코는 처음으로 동경했던 남자아이, 첫 고백, 첫 키스와 첫 데이트 등 수줍은 마음으로 처음 해 보았던 추억들을 꺼내 본다. 졸업 앨범 속 앳된 얼굴들을 보며.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지금. 성숙해진 여인의 얼굴을 한 딸이 먼저 주도하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짐작으로, 상대아이의 사진까지 찾아보게 된다. 

이내 마음 속 어느 곳에서는 딸을 막으려고 했던 것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아키나의 친구 아이의 엄마에게서 전화가 오고 이를 능숙한 거짓말로 넘겼을 때 비로소. 

이브 날, 문을 나서는 딸이 뒷모습을 보며 유미코는 마음 속으로 조용히 읊조린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거라, 이해심 많은 부모에게 감사하고, 좋은 여자가 되거라, 후회 없는 청춘을 보내거라.

/ 293쪽



<여름의 앨범> / 2012


초등학교 2학년 남자아이 니시다 마사오는 아직 보조 바퀴를 단 채 자전거를 타고 있다. 친구들은 모두 떼어버리고 자유롭게 타고 있는 모습을, 부럽고도 초조한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매일 같이 신사의 경내에서 연습을 하면서 천진하게 놀고 있다. 한편, 어머니와 각별했던 센주도의 큰 이모의 병세가 깊어져 간다. 어머니는 매일같이 큰 이모를 보러 가며, 갔다 와서는 게이코 짱과 요시코 짱이 얼마나 어른스럽게 대처하고 있는 지를 연신 칭찬한다. 
어린 아이의 순수한 시선과 이모의 병환의 안타까운 상황이 교차되며 이야기는 진행된다.

다정했던 큰 이모는 곧 세상을 떠나고, 홀로 남은 아이들은 성숙한 얼굴을 하려 노력하지만, 마사오의 보조 바퀴를 떼는 연습을 돕던 와중에 추억으로 되살아난 엄마가 그리워 울음을 터뜨린다. 

읽는 이로 하여금 잔잔하고 따뜻한 온기를 전해주는 이야기 같다. 순수한 아이의 시선, 말과 행동들이 귀엽고, 여름의 싱그로움과 그 생명력이 넘치는 분위기마저 잘 녹여 표현하고 있다. 작가 또한 자신의 단편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작품이라고 하였는데, 나 역시 오쿠다 히데오의 작품들 중 가장 좋은 단편 소설이라 느꼈다(읽은게 몇 안 되지만). 여운이 남는 소설이라 더욱 그런 것 같다. 잘 표현하지 못하겠지만 두고 두고 읽고 싶은 이야기이다.



**



대담1. 오쿠다 히데오 X 잇세 오가타  - '웃음의 달인' 뒷 이야기

대담2. 
오쿠다 히데오 X 야마다 다이치 - 모든 사람이 '인생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다


첫 번째 대담은 일인극의 대가로 불리는 배우 잇세 오가타와 함께 한 것이다. 잘 모르는 배우이지만 그의 극은 신비로운 전개와 지적 스릴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는 웃음에 대한 생각들을 나누면서 오쿠다 히데오가 작가로서 가지고 있는 신념이나 생각들을 풀어놓았다. 원고를 쓸 땐, 어떤 상황이나 배경에 인물을 던져두고 일단 그대로 진행시키며, 이야기가 나아가는 방향을 따라간다는 것. 결국은 이야기를 맞추는 형식이 되어버리지만, 어떻게 완결을 난다고 한다. 야매같은 방식이다.

조사는 하지만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를 듣는 취재는 하지 않는다는 것. 취재를 하면 자신이 창조한 인물이 자유롭지 못하고 어느 틀에 갇혀버리게 되는 것을 염려하는 것 같았다. 그저 외부의 시선으로 관찰하는 것만 즐긴다고 한다.

보통은 거리로 잘 나가지 않기 때문에 한 번 나갔을 때, 여러가지를 흡수해오려 한다는 것.
창작의 근원은 위화감에 있다고 하였다. 위화감을 느끼는 설정에서 창작이 시작되는 방식인 것이다.

또한, 등장인물에 감정이입 하지 않으며, 어떤 인물이든 똑같은 거리를 둔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줄곧 자신은 늘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걸 좋아했고, 튀고 싶어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고 자주 도망친다고 고백한다. 정말 웃기는 사람이다.


두 번째 대담은 원래 인터뷰 형식이었는데 자신이 문학상을 수상한 뒤, 들뜬 분위기로 인해 대담 형식이 되었다고 말한다. 역시 상대는 잘 모르는 인물이다. 야마다 다이치는 작가이자 소설가라고 한다. 확실한 건 오쿠다 히데오가 열렬한 팬심을 가지고 있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대담이 진행되는 내내 열의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주로 오쿠다가 질문을 던지고 야마다가 답을 하는 형식. 오쿠다의 뜨거운 팬심을 진솔하게 느낄 수 있는 대목.



**




야마다 다이치라는 사람과의 대담 중 오쿠다 히데오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은 인간의 애매함, 해학 같은 디테일들 상세하게,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리는 소설을 쓰려고 한다고 말이다. 그는 스펙트럼이 넓은 작가인 듯하다. 진지하게 말하다가, 우스꽝스럽게 넘어질 줄 아는. 그래서 다양한 이야기 속에서 여러 인물들이 살아 숨 쉬게 한다. 아직은 오쿠다 월드의 극히 일부분인 깃털 마냥 가벼운 일면만 보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세계의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버라이어티』는 그 첫 걸음을 뗄 수 있도록 도와준 고맙고도 좋은 소설집이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난 오쿠다 히데오의 작품을 더 찾아보지 않았을 것이다. 좋은 이야기꾼 한 사람을 놓치게 됐을 것이다. 가끔은 아슬아슬한 수위를 넘나드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어쨌든 이런 좋은 단편들을 만나게 된 것은 한없이 즐거운 일이다. 내가 그랬듯이, 이 소설집을 읽게 되는 누군가 역시 오쿠다파가 될 지도 모르겠다. 

고로, 흩어져 있던 좋은 단편들을 한데 모을 수 있도록 노력해주신 편집자분께도 감사를 전하고 싶다. 




(이 리뷰는 현대문학 출판사 '문학독후'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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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 대하여
아리요시 사와코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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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개의 시선이 엇갈리는 미스터리, 

도미노코지 기미코 그녀는 과연 '악녀'일까,





『악녀에 대하여』






**

 


 



이 소설은 전후 격변의 시대의 일본을 배경으로 한 여성 사업가의 수수께끼 같은 죽음, 그리고 그녀와 관련된 27명의 인물들의 인터뷰로 구성된 작품이다. 


어느 화창한 날, 도쿄 빌딩가 뒷골목에 미모의 여성 사업가가 마치 새빨간 꽃 한 송이가 떨어진 듯한 모습으로 추락하여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젊은 나이에 막대한 부를 축적한 ‘사업의 여왕’ 도미노코지 기미코의 돌연한 죽음에 언론에서는 일제히 ‘자살인가 타살인가’, ‘허식虛飾의 여왕, 수수께끼 같은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한다. 온갖 억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한 작가가 그녀의 삶을 추적하기 위해 관련자들을 찾아 나선다. 27인의 중요한 관련자들이 각자의 시점에서 풀어놓는 이야기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도미노코지 기미코의 실체를 점점 더 미궁으로 몰아넣는다. 그녀가 뒤틀어놓은 순수와 허식의 꼬리는 쉽게 잡히지 않고 진실은 갈수록 모호해진다. ('책소개' 참고)


소설 속에서는 인터뷰의 주제가 되는 기미코의 목소리를 직접 들려주진 않는다. 27개의 에피소드 전부, 그녀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만 등장하고 있다. 차례대로 한 인물씩 인터뷰가 나열돼 있으며, 서로 모르는 사이 얽혀 있는 관계 속 인물들간의 시간도 묘하게 겹쳐 있기에 퍼즐조각을 맞춰가듯 읽는 재미도 있다. 실로 치밀한 구성으로 계획하지 않는 한 개연성 확보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개연성을 가질 수 있었던 건 이야기가 가지는 힘이 탄탄한 것은 물론, 뛰어난 흡입력으로 책을 놓지 못하게 하는 작가의 내공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싶다.


문장이 장황하게 늘어지는 것도 없으며, 소설 내 정확한 사실을 전달할 때와 인물 심리를 묘사할 때의 완력 조절이 잘 되어 있다. 드라마같은 서사와 27인의 인물 설정 또한 각각의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기에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




27개의 시선, 한 사람의 생에서 마주한 인물들


스즈키 기미코, 그녀는 채소가게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전후시절, 어려운 시대적 상황 속에서 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사정이 어려워진 모녀는 귀족 출신인 비토 가의 식객으로 얹혀 살게 된다. 기미코는 중학교 의무과정을 마치고 야간대학을 다니며, 비토 가에서는 가정부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며 살아간다. 낮엔 보석점에서 저녁엔 중화식당에서 야간엔 부기학원까지. 잠깐의 짬내기도 힘든 일정 속에서 그녀는 참으로 다양한 관계를 쌓아간다.


결혼과 출산, 이혼, 레스토랑 사업과 보석, 여성들을 위한 사교클럽에 방송까지, 굴곡을 넘어 화려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만큼, 그녀를 기억하는 27명의 시선 또한 천차만별로 다르다. 부정적인 시선과 긍정적인 시선, 적당한 관심에서 나오는 시선도 있었다. 하지만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이 과반수 이상이었다.


어떤 마음에서 그녀를 바라보던 간에 하나같이 가지는 첫인상은 대체로 비슷했다. 대단한 미인은 아니나 예쁜 얼굴을 가졌으며, 고귀한 언품을 구사하고, 차분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가진 여자라는 것이다.


사람을 홀리는 듯한 매혹적인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었음에 분명한 듯한 진술들이 이어진다. 자신만이 그녀의 진정한 사랑이었음을 고백하는 남자들의 말들은 모두 한결같다. 비슷한 색채를 지녔거나 그보다 더 못한 인물 유형만 빼고. 


차분한 말투에 화려한 언변으로 신뢰도를 높였기에, 있어 보이거나 허술해 보이는 인물들을 이용해 잇속을 챙기기도 하지만, 고용한 사람들에겐 함부로 대하지 않았으며, 이해관계 또한 확실히 했다. 때문에 일반적으로 그녀가 부렸던 인물들에게서는 놀랍게도 부정적인 평가가 하나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했던 여러 사업들을 키워가는 과정은 다양한 술수가 섞여 있었다.  보석 매매와 부동산 매매에서 또한 그러하다. 


이렇듯 기미코는 해내고자 했던 일들에 대한 열의와 천부적인 사업가 기질, 타고난 감으로 이뤄낸 것들도 많았다.


같은 시기 비슷한 관계로 겹쳐 있는 인물들의 증언을 읽다 보면, 어떻게 이렇게 하나같이 서로를 엇갈리게 관계를 이어 갔을까 싶을 정도로 대단했고, 한편으론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러한 활동력과 계획성에 혀를 내두를 정도다.


이렇게 다양한 인물들에게 한결같은 이미지로 비춰졌음에도 불구하고, 극과 극을 오가는 기억을 남기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무엇이 이토록 많은 성과를 더불어 많은 관계를 낳게 했던 것일까.


한 사람이 살아가는데 만나는 인물, 인연, 형성된 관계들은 또 어떠한가.



스스로를 속이는 인물, 생화보다 생명력 있는 조화


기미코가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이 하는 거짓말이 하나 있는데, 바로 출생에 관한 것이다.

바로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자신이 사실은 귀한 집의 자식일 가능성이 있는 업둥이라는 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출생과 도벽이 있는 어머니의 기질을 부끄러워 하며, 그 혈연을 감추고 싶어 스스로부터 속이려던 게 아닐까 싶다. 거짓말이 힘을 가질 때는 그 속에 일말의 진실이 있어야 한다는 것처럼, 그녀는 올바른 삶을 지향하고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는 사람처럼 보여지게끔 행동한다. 그 스스로 자신을 그렇게 그리고 인식하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의 이상적 자아를 만들어내고, 그를 연기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때문에 그녀를 대하는 이들의 기억의 일부에선 그녀가 원했던 방향으로 기억할 수 있게 돕게 된다. 그렇게 믿고 행동하는 힘의 결과가 놀랍다. 


그러한 자아는 본래의 자아보다 더욱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자신을 포장하는 기술도 남다르다. 예를 들어 방송을 출연하게 된 그녀가, 실제로는 온갖 고생을 해왔으면서도 자신은 고생 한 번 한 적 없음을 강조할 때 더욱 그러하다. 모든 게 신뢰에서 얻어진 사랑을 통해 이뤄진 것이라니. 실로 이상적인 발언이 아닌가 싶다. 현실의 지지부진한 비루함은 모두 걷어낸 채, 힘든 일 하나 없이 순탄하게 흘러온 삶, 귀하게 살아온 사람인 것마냥 꾸며대는 태도. 이는 뜻밖에도 현실의 척박함 속에서 아름다운 희망을 그려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보는 이로 하여금 열광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녀가 옷에 달았던 많은 조화들. 생화보다 조화를 좋아했던 것처럼, 살아있는 '진짜' 꽃보다, 만들어진 '가짜' 꽃에 담긴 향기는 그녀 자체를 형상화한 것처럼 보인다.


― 나는 죄가 없어요. 그저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을 추구했을 뿐이랍니다.




일본의 '여성'에 대한 시선, 왜 '악녀'라고 지칭되는 것일까


한편 이 소설은 그 시대의 여성에 대한 시선을 엿볼 수 있다. 지금과 크게 다르진 않는 듯 하다. 정조를 강조하며, 남자는 되지만 여자는 용납해줄 수 없는 것들. 어떤 재능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어떤 방향으로 쓸 지는 전적으로 본인에게 달린 것이지만, 도미노코지 기미코는 이를 자신이 가진 매력에 더불어 배가 되도록 활용한 인물이기도 하다. 올바른 삶을 살고자 하면서 그 방식은 올바르지 않는 모순을 보여준다. 어떤 측면에선 기발하고 영리한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꽃뱀이라 불리는 데는 그런 요소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자신이 바라는 이상적 관계를 강박적으로 밀어붙이기도 한다. 그러한 시도는 번번이 실패에 이르고, 너저분한 관계들만 이어가게 된다. 그래서 과연 그녀의 진의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실은 그녀 자체도 모르게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일본에서는 어떤 여성들을 대할 때 붙이는 수식어로 '악녀'라는 단어를 많이 쓰는 듯 하다. 그러나 악녀란 무엇인가. 그게 붙여질 만큼의 일들을 행한 것일까. 일부에서는 여성을 아래로 보는 듯한, 깎아내리는 듯한 말이 아닐까. 언론이 간과하는 듯한 말의 힘은 실로 대단한 게 아닌가. 작정하고 몰아가면 정말 그렇게 보이는 경우가 다반사다. 기미코의 행실이, 그 삶이 마냥 옳고 타당했다고 주장할 수 만은 없을 테지만. 하루 만에 열광했다 하루 만에 식고 마는 세태. 한 사람을 공격할 때 쓰이는 말들 중에 좋지 않은 여파를 지닌 단어들을 사용할 땐 극히 주의해서 써야 한다. 그저 궁금했다. 왜 악녀라는 불리는 것일까. 지금도 마찬가지다. 가해자를 말하건 피해자들 말하건, '-녀'라고 붙여지는 것들의 습성에 대해 늘 의문이 든다. 




**



미스터리라고 수식됐지만, 그것과는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는 소설이다. 꽤 심도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기미코라는 인물의 죽음의 성질이 타살인가, 자살인가에 대해서 궁금하여 읽게 된 독자에게 깔끔한 결말이 주어지진 않는다. 그저 한 사람의 생에서 마주한 인물들의 여러 관계 속에서 문득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 것인가. 나와 관련한 사람들 속에서 나는 과연 어떻게 비춰지고 있는 것일까. 흐릿한 존재감으로 누구에게도 민폐를 끼치기 싫어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더 민폐를 끼치게 된 경우도 있지 않을까, 누구에겐 좋은 사람이지만 누구에겐 싫고 불편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사람은 보통 한결같이 지니는 본래의 기질이나 속성과 다르게 여러 얼굴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또한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경향이 있다. 흔히 행하는 오류이다. 쉽게 고쳐지지 않는 습관이기도 하다. 때문에 편견과 선입견이 생겨나기도 한다.


기미코에 대한 여러 인터뷰 중에서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과 또 다른 인터뷰이가 말하는 그 사람의 얼굴은 다른 것이기에 흥미롭다. 직접적으로 연결된 관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서로에 대한 평가가 각기 다른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단순한 오락성에 더불어 또 하나의 힘이 여기서 형성된 게 아닐까 싶다. 인간관계와 상대에 대한 평가, 보여지는 것들에 대한 생각과 의문.


그러나 후반부의 인물들 인터뷰 중 몇 개는 되레 개연성이 떨여져 보이기도 했다. 순서대로 창작했을지는 알 수가 없으나, 다소 긴장이 풀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특히 친어머니와 큰 아들의 증언들이 그러했다. 아무리 드라마식 서사라 해도 그렇지 알랭 들롱같은 인물이 카운터에 있다니 소설 속이라고 해도 과한 게 아닌가. 


아리요시 사요코는 남성 중심의 일본 문단에서 당당하게 본인의 자리를 만들어가는 작가라고 한다. 애초에 문학에서조차 여성의 언어, 목소리를 가지게 된 게 얼마 되지 않았다. 그저 남성의 시선에서 여류라고 폄하되었을 뿐이다. 우위에 서서 일컫는 말이다. 여자치고는 잘 쓰네, 하는 시선이 담긴 말.


직설적인 성품으로 문단에 도전을 했다는 이 작가는 글에 대한 집중도가 대단했다고 한다. 글을 쓸 때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않아 얼굴이 새파래지기도 했으며, 한 작품이 끝나면 탈진하여 입원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가독성이 좋았고 힘 있는 문장 덕분에 단숨에 읽어나가게 됐다. 당연히 다음 작품 또한 기대가 된다. 오히려 거창한 것이 아닌, 지적 받았던 드라마식 서사가 가지는 통속성이 더 맘에 들었다. 과감한 도전의 시도처럼 느껴졌다. 작가의 또다른 작품을 국내에서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길 바라본다. 








(이 리뷰는 현대문학 출판사 '문학독후'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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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담꾼의 죽음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 1
M. C. 비턴 지음, 지여울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7월
평점 :
절판


로맨스소설에서 추리소설까지 아우르는 작가, 메리 채스니의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






『험담꾼의 죽음』은 해미시 맥베스 시리즈 첫 번째 신호탄을 알리는 소설이다. 이 소설이 창작된 시기는 아마도 작가가 스코틀랜드 최북단 서덜랜드를 여행 중에 구상했다고 하니 80년대 시대성이 담겨져 있기도 하다. 주요 무대는 스코틀랜드 북부의 산자락에 자리한 가상의 시골 마을 로흐두이다. 우리의 주인공 해미시 맥베스 순경은 붉은 머리, 녹갈색의 눈동자, 훤칠한 키, 낡은 정복을 입었지만 멀쩡한 의복을 갖춘 뒤엔 미남자가 되는 놀라운 매력을 가지고 있으며, 직업은 승진을 기대할 수 없는 시골 순경에 각종 대회 및 출제에서 치뤄지는 스포츠 경기나 우승 상금으로 가외 소득을 올리거나 밀렵을 일삼으며 작은 농장 일을 한다.


뿔뿔이 흩어져 있는 친척 덕을 톡톡히 보는 해미시 순경은 전통에 따라 가난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동생들과 부모를 부양하기 위해 애쓰는 인물이기도 하다. 


뭐든 아껴야 하기에 이 집 저 집 들러 차를 얻어 마시며 순찰을 돌지만, 재치와 지성을 갖춘 다정다감한 남자이기도 하다. 소설의 구조는 비교적 단순하다. 중심축이 되는 사건 속에 여러 인물이 등장하는데, 여기에는 꼭 밉상, 진상에 민폐를 일삼는 죽어도 마땅할 법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 자는 곧 피해자가 되고 만다. 권선징악의 프레임이 뚜렷하다. 모두에게 동기가 주어지기에 그중 어떤 인물이 범인에 더 가까울까 추측하는 재미가 주어진다. 


여기에는 꼭 못되고 막돼먹은 상사도 등장해주는데, 바로 블레어 경감이다. 허술한 듯 보이는 해미시 순경이 위기 대처 능력을 발휘하며 넘어갈 때는 블레어 경감을 대할 때이다. 번잡한 도시보다 슬로우 라이프 스타일로 인간관계에선 적당한 관심과 거리를 두며, 부 수입까지 챙길 수 있는, 별다른 모험이 없는 시골 생활이 퍽 맘에 들기에, 사건 해결의 공을 블레어에게 돌린다. 


그러나 읽는 독자가 알고, 사건 속 인물들 또한 모두 알테지만. 홈즈가 사건을 푸는 과정을 순수한 쾌락으로 즐겼듯이, 해미시 역시 그 과정에 호기심을 갖고 탐구하는 듯 하다. 직업적인 부분에서는 자기 할 일은 제대로 하는 인물이기에, 허술한 평상시와 다르게 사건을 대처하는 자세는 프로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이와 더불어 소소한 러브 라인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마을 지주의 딸인 프리실라이다. 외동딸인 그녀에게 부모님은 남편감이 될만한 사람일 고이 갖다 바치지만 프리실라는 낡고 허름하며 괴상한 해미시의 공간에서 되레 편안함을 느낀다.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하지만, 썸인 듯 아닌 듯 아리송하다. 여하튼 그런 묘한 러브 라인까지 있으니, 이야기만 훌륭하다면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독서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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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험담꾼의 죽음』은 휴가철이 되어 각각의 사람들이 방문한 마을 로흐두. 이야기는 그들이 낚시를 안내 받으면서 시작된다. 다양한 직업군과 성별이 모여 낚시를 하는데, 불평 불만을 일삼고 다른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는 한 인물이 얼마 안돼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다. 하지만 모두 한결같이 그 사람은 죽어 마땅할 만큼 끔찍한 사람이었다는 평을 한다. 또한 범인을 밝혀가는 과정이 꽤 적극적이고 활동적이다. 각 인물들의 동선을 따라가며 숨겨진 사실을 알아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게 재밌다. 읽다 보면 어느새 이 순경의 수더분함과 의외의 지성과 대범함 등이 눈에 잘 들어오게 된다. 흥미로운 인물로서 일단 이 이야기를 읽어나가는데 큰 동력이 되어준다. 시점 또한 각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변화한다. 시선을 주고 받으며 옮겨가는데, 그 지점에서 생각과 심리적 관점을 잘 보여준다. 첫 스타트로 나쁘진 않다. 오락성은 평타를 치는 정도다. 가볍게 읽기에 참 좋다.

2편 『무뢰한의 죽음』 해미시의 애간장을 태우던 처자 프리실라가 런던 기자생활 중에 만난 헨리라는 극작가와 약혼을 하여 그 파티를 자신의 고향의 저택에서 열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여기서 지칭되는 무뢰한은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으면서 끔찍한 언행을 일삼는 피터 버틀릿 대위이다. 인간말종같은 이 인간에겐 얽히고 설킨 여자관계, 내기, 재산적 피해를 얻은 사람, 취미 활동 등등 역시 모두에게 마땅한 동기가 있었다는 것. 허둥지둥 대다 또 한번의 사건이 발생하고 이 지점에선 혹시, 했던 인물이 역시 범인이었다. 알기 쉬웠지만 재미가 있는 소설이다. 궁금하고 재밌어서 계속 읽게 만드는 힘이 분명히 있다. 확실히 1편보단 2편의 사건이 더 흥미롭고 재밌게 풀려나간다. 프리실라와의 관계도 눈여겨 볼만 하다.

3편 『외지인의 죽음』 안락한 삶을 지향하는 해미시는 석 달간 시노선에 차출돼 생활하게 된다. 이 마을은 광신도적인 종교 분위기가 가득한 곳이며, 멀리 떠난 프리실라를 볼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마을에서 우두머리 역할을 하고 싶어 그런 행세를 하고 다니는 잉글랜드인 윌리엄 메인워링은 누구에게나 참견을 하는 인물이다. 자신의 아내가 괴롭힘을 당했다며 신고를 했던 이 자는 하룻밤 사이 바닷가재로 가득한 물탱크 속에서 뼈만 남고 모든 게 사라지고 만다. 뒤늦게 수습하기 위해 애썼던 순경은 원한을 먹고 산 피해자를 둘러싼 인물들을 두고 힘겹게 정보를 얻어가며 수사에 임한다. 

3편에선 런던에 있는 프리실라를 대신해서 등장한 듯한 인물인 화가 제니가 있다. 역시 해미시와 엮이는 인물. 그래서 이 시리즈의 흥미로운 요소 중 하나는 그래서 프리실라와 해미시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에 대한 궁금증에 있다. 

전체적으로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추리소설 같다. 드라마적 서사와 인물의 개성이 각기 잘 살아 있어서 읽기에도 수월하다. 연극처럼 느껴지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지만, 이야기가 가진 힘, 그 흡입력이 대단한 소설임은 분명하다. 영국인 특유의 비꼬는 식의 대화, 유머가 그 재미를 더한다.

피로한 일상 중 쉬는 시간, 차와 함께 즐기기에 좋은 작품들이다. 벌써 다음 편이 궁금해진다. 이런 흥미로운 작품이 앞으로도 이십여 편 이상 남아있다니,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을 알게 되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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