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 의사의 죽음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 13
M. C. 비턴 지음, 문은실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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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 의사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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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으로 그렇게 지겨웠던 더위가 가고 선선하다 못해 쌀쌀한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반갑게도 우리의 붉은 머리 순경 해미시의 세계에도 가을이 찾아온 듯 하다. 격렬한 치통에 눈을 뜬 해미시는 브로디 선생의 항생제 덕에 통증을 잠시 가라 앉혀보지만, 근처에 있는 치과라곤 제대로 된 치료보단 일단 뽑고 보는 브레이키 마을의 길크리스트 치과 뿐이고, 그 와중에 관할 구역 내 스코츠먼 호텔에서 발생한 금고 절도 사건으로 정신이 없다. 수사에 집중하며 애써 참아보려 하지만, 맹렬한 기세로 올라오는 통증에 해미시는 결국 가까운 길크리스트 치과라도 가려 예약 방문하게 된다. 하지만, 그를 맞이한 건 진료 의자에 누워 사망한 길크리스트였다. 그것도 치아에 온통 드릴 구멍이 뚫린 채로 말이다. 


너무도 느닷없이 세상을 떠 버린 자신의 개 타우저가 그리웠다. 타우저가 살아 있었다면 침대 끝에 누워 꼬리를 흔들고 있었을 테고,  해미시는 이 드넓은 세상에서 자신의 고통에 신경을 써 주는 존재가 있음을 느꼈을 것이다. 프리실라 할버턴스마이스, 한때 그에게 필생의 사랑이었던 여자는 친구들과 지낸다고 런던으로 가 버렸고, 그녀가 떠난 자리를 메워 줄 다른 어떤 여자도 아직 그의 인생에 나타나지 않았다.  12쪽


변덕스럽고 거칠게 몰아치는 바람과 파도가 스코틀랜드 고지의 분위기를 표현하듯, 사건이 발생한 브레이키 마을엔 생기라곤 없다. 노동보단 실업수당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하루 종일 펍에서 시간을 죽이기 일쑤고, 상점은 오전 10시만 되어도 제기능을 못한다. 문명이 발전한 시대에, 불법적인 일이 불법적인 일이 아닌 일상인 형태. 그런 특유의 분위기가 아주 잘 그려졌다. 


해미시는 전처럼 열심히 사건을 해결하고자 하지만, 사건의 실마리는커녕 오리무중 상태에 빠져 답답함만 토로할 뿐이다. 



스케일링도 있고, 치실도 있고, 치과 기술이 이렇게 발전해봤자 뭐 하나, 해미시는 생각했다. 이곳은 여전히 스코틀랜드였다. 이를 몽땅 봅아 버리고 멋진 틀니 한 쌍을 끼우면 그만인 곳이었다. 93쪽


(…) 경찰서로 돌아가 형사 소설이나 들고 불 앞에 앉아 있으면 안 될 게 뭔가? 되도록 미국 형사 이야기, 더 폭력적인 이야기, 주인공이 해미시를 대신해서 그의 답답함을 풀어줄 수 있는 이야기면 더 좋겠다. 사람들은 벽에다 메어꽂고 두들겨 패서 자백을 받아 내는 것 같은.  97쪽


해미시는 스마일리 형제의 술이 자자하게 알려져 있다는 사실에도 나서서 신고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게 놀랍지도 않았다. 영국의 다른 어느 곳이라면 범죄로 여겨졌을 일이 하일랜드에서는 더러 남부끄럽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다. 남획을 하지 않는 선에서 연어나 사슴을 밀렵하는 건 하일랜드에서는 불법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모든 하일랜드인들에게 언덕에서 사슴을 잡고, 강에서 물고기를 잡는 건 태어날 때부터 얻은 권리, 즉 생득권이었다. 147쪽


이번 에피소드의 핵심 키워드로 나열해보자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젊은 여자와 허영심 가득한 중년 남성, 욕망, 실패한 결혼, 옛 연인, 치정, 돈, 밀주, 엉터리 점성술사, 미적지근한 로맨스, 타우저의 빈자리, 다시금 홀로 남겨진 해미시. 


가을날의 쓸쓸함인가, 우리의 주인공 해미시를 따라 사건을 읽어나가는 과정이 이번 에피소드에서 유독 잘 풀리지 않고 자꾸만 멈칫하는 느낌이 들었다. 의욕도 없고, 쓸쓸하고, 자꾸만 실패하게 되는 것 같은. 타우저의 빈 자리도 크게 느껴진다. 


그런 와중에 해미시의 천적인 블레어의 속내가 잠깐 등장하는데, 그게 조금 의외였다. 무작정 해미시의 공로를 가로채는 뻔뻔함만 있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 속엔 대놓고 드러낼 순 없지만, 해미시의 사건 해결 능력에 대한 인정이 바탕이 되었다. 하긴 누가 그 공을 가져가든 해미시의 능력을 익히 알고 있는 총경은 그가 해결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결론적으로는 나름 서로가 윈윈하는 결과를 얻게 되는 게 흥미로운 지점이라고 볼 수 있겠다.

 

전만 해도 컴맹이면서 기기를 사용하는 데 어색함이 있었는데, 이제는 보고서 작성도 거뜬히 해치우는 걸 보니 신기하기도 했다. 해미시가 기대하는 새로운 로맨스 상대인 세라는 어떤 사연을 감추고 있는 인물로 보여지며, 여지를 주지 않는 듯 하지만, 외로움에 몸부림 치는 해매시에게는 설렘과 수줍음의 상대로 비춰지는 데에 안타까운 상황이 전개되었다. 


여전히 직관에 의한 수사로 사건 해결에 힘쓰는 해미시. 발로 뛰는 것과 별개로 정보를 얻기 위한 수단이 다소 불법적인 것으로, 블레어의 비밀번호를 엿보는 재미를 주긴 했다. 물론 이전에는 철저한 인맥과 처세술로 얻어낸 정보로 추론하는 것이었지만, 이번 사건에서는 유독 해미시의 자조가 많이 느껴졌다. 마치 슬럼프에 빠진 인물처럼. 사건을 꿰뚫어 보지 못한 데서 오는 답답함을 자주 토로한다. 또한, 그의 심리를 대변하듯'외로움'으로 자주 표현된, 홀로 남겨진 채로 늙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해미시의 마음이 자주 드러난다. 마치 이별 직후 실감하지 못하다가, 시간이 흐른 뒤 지난 사랑을 추억하며 가슴 아파하는 후회로 보여진다.


전반적으로 거칠게 표효하는 날씨와는 다르게, 고요하게 침전된 듯한 해미시의 심리는 차분하게 묘사되며, 이전이라면 빠졌을 법한 함정에도 무던히 피해간다. 수사의 함정, 죽음의 위기는 늘 도사리고 있지만, 주인공의 생사는 기막힌 타이밍으로 구제되기 마련이다. 무고한 죽음에 마음 아팠고, 다소 불편한 관계도 있었지만, 이번 에피소드는 계절과 맞물려, 쓸쓸하게 남겨지는 여운이 무척 좋았다. 여름날의 열기처럼 정신없이 피로했던 날들이 가고, 여전히 피로한 일들은 많지만 이 '외로움'을 벗 삼아 더 열심히 읽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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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전히 눈에 선명히 그려질 듯한 풍경 묘사의 섬세함과 좋은 부분들을 옮겨본다. 


비가 창을 후드득 때리기 시작했고, 바람이 점점 더 사나워지며 날뛰었다. 서덜랜드의 바람이 습관대로 돌풍으로 변해갔다.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다가는 결국에는 천국의 끝에서 끝까지를 온통 휘덮는 단발마의 비명을 내질렀다. 이 동네 사람들이 미신에 빠져 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97쪽


어쩌면 어른들 세계의 눈에 순수하다고 증명되기 전까지 모든 아이들이 죄인이었던 저 형편없는 옛날이 다시 추구해 볼 만한 시절일지도 몰랐다. 299쪽


차를 몰고 가면서 해미시는 이 사건에서 자신이 이토록 헤맨 이유가 그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건은 속물근성, 아마추어리즘, 순전한 운의 조합이었다. 325쪽


긴 한순간, 해미시 맥베스와 프리실라 할버턴 스마이스는 해안 저쪽과 이쪽에 서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교회에서 아이들이 노래했다. "'참 반가운 성도여.'"

프리실라가 발걸음을 돌리더니, 차에 올라타고 떠나 버렸다.

해미시 맥베스는 용서받지 못했다. 328-329쪽




(이 리뷰는 현대문학의 '해미시 맥베스 순경 독자단 3기' 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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