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갓 끝나고 애써 폐허를 감추려는 잉글랜드 북부 매캐한 탄광 마을의 지리한 일상을 빠져나온
열여섯의 소년 로버트 애플야드가 우연히 발견한 덤불 바깥 길목에 자리한 오두막에서
자유로이 살아가는 덜시 파이퍼를 만나면서 소년의 인생은 달라진다.
인생의 초여름을 지나는 수줍고 순진무구하지만 잠재력을 지닌 소년과
인생의 늦가을쯤을 지나고 있는 박학다식하고 뭔가 아픔을 숨기고 있는 듯한 중년 여성의
우연한 만남과 우정이 뭔가 뻔한 복선인 것 같았지만,
기대 이상으로 아름다운 만남이었다.

우연한 만남에 따뜻한 음식을 대접받고 간만에 편하게 잠도 하조
먹여주고 재워줘서 너무 감사한 마음에 폐를 끼치기 싫어 설거지라고 하고 가겠다는
로버트에게 인생엔 훨씬 더 중요한 일이 많다며, 필요한 것 이상은 절대로 하지 말라며
적당한 것을 빼고 모든 것을 적당히 하라며 쿨하게 답하는 덜시는 좋은 어른이었다.
누군가는 좀 돌았다고 했지만 자기 방식대로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사는 사람이었다.
평생 이렇게 대접받으며 잘 먹어본 적이 없어, 일을 해서라고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예의 바르고 성실한 소년에게 좋은 식사는 무엇의 대가가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해 하늘이 내린 권리라고 말해주는 어른이 나쁠 수가 없다.
탄광 사람들은 고등교육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대학에 어울리는 옷도 있어야 하고 적절한 말투도 필요한데 자신은 그럴 수 없다 여기는
로버트에게 필요한 건 배우려는 마음이라며 로버트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줬다.
그리고 시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혼자는 아니라는 점을 일어 주는 인류의 표현 방식이며,
시대를 초월해 공명하는 위로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려준 덕분에,
로버트는 비슷한 영혼을 지닌 작가들의 책을 읽게 되었다.
덜시가 로미로 하여금 첫 시집을 쓰게 했듯,
덜시는 잠재된 가능성을 발견하고 일깨우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창작을 돕고 독려하는 완벽한 후원자.
덜시는 로미 란다우에게 완벽한 동반자였다.
덕분에 로미는 문학계의 어린 여자 신인으로 찬양받았지만,
안타깝게도 찬란한 시절은 정말 짧게 막을 내렸다.
민족주의는 전염병이고 기생충 같아서 잠시 추앙받던 로미는 눈
깜짝할 새에 양쪽 진영에서 모두 거부당하기 시작했다.
칭찬을 쏟아붓다 애국자라는 소리를 듣기 위해 쉼표 하나하나까지 의심하는
비열한 영국 비평가들, 애초에 로미의 목소리가 들릴 자리조차 없던 조국 독일에서도,
독자들도 출판사들도 모두 침묵했고, 목소리를 잃어버린 시인은 세상에서 버텨내지 못했다.
로버트 덕분에 덜시는 로미 란다우의 시를 다시 마주할 수 있게 되었고,
사랑을 담아 떠나며,
"웃음으로 무장하고,
사랑으로 소생하여,
나는 영원히
당신의 분자들 속에 있어."
라는 단 네 줄의 편지도 발견하게 되고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된다.
로버트 덕분에 덜시 또한 삶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고, 로미의 시집이 세상에 무사히 나올 수 있게 된다.
물론 로버트 역시 삶은 짧고 우리는 단 한 번만 살 수 있음을 깨닫고,
다르게 행동하지 않으면 평생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열일곱 살에 탄광촌을 빠져나온다.
인생은 자기 언어로 쓰일 때 가차 없이 아름다운 것임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고,
로버트와 덜시의 우정은 덜시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는 그야말로 영화 같은 이야기였다.
그래도 아버지가 그랬고, 그 아버지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운명을 바꿀 수 없다 생각했던
소년을 알아보고 그 잠재력을 일깨워 주는 덜시 같은 어른들이 많은
동화 같은 세상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