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평순 PD의 다큐를 기회가 될 때마다 지인들에게 소개한다.
<하나뿐인 지구>, <인류세>, <여섯 번째 대멸종> 등을 통해
기후 위기의 심각성이 많이 알려졌지만,
여전히 '에라, 모르겠다!'라며 그냥 외면하기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은 게
슬픈 현실이다. 기후 위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생존이 달린 위기가 아니라
다른 여러 문제 중 하나로 인지되고 있는 이유는 자기중심성 때문이다.
알고리즘으로 더욱 견고해지는 확증편향은
기후 위기는 다른 나라의 일이나 내가 죽을 때까지는 벌어지지 않을
먼 미래의 일로 치부해버리게 된다.
그러나 2014년 <하나뿐인 지구>에서 경고한 빙하 홍수의 쓰나미는
7년 후 2021년 히말라야에서 진짜 현실이 되었다.
빙하가 녹으며 생기는 물로 인해 없던 빙하 호수가 생기고
있던 빙하 호수는 거대해지면서 그 압력을 이기지 못해 터져버려
호수의 물과 흙이 쓰나미가 되는 빙하 홍수(GLOF, Glacial Lake Outburst Flood)는
인간이 만들어 낸 새로운 재해다.
제3의 극지라 불리는 히말라야는 인류세 현장이 이미 되어 버린 것이다.
기후 위기는 과학계의 기우가 아니라, 현실이고
당장 변하지 않으면 인류는 물론 지구 생태계 자체가 무너질 위험에 직면한 것이다.
착한 소비로 해결될 간단한 문제였다면 수십 년째 전 세계 기후과학자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장기간에 걸쳐 IPCC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을 필요도 없다.
2022년 '기후 변화 대응 지수'에서 우리나라는 63개국 중 60위를 차지했다.
K부심이 그 어느 때보다 치솟은 현재 우리나라의 불편한 민낯이 아닐까?
착한 소비자 운동으로 외면하기에 낯 뜨거운 순위이다.
대참사를 직면하면서도 마주 보기를 거부하는 위기감의 만성화.
이에 대해 도나 해러웨이는 <트러블과 함께하기>에서
생각하기를 포기함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지적한다.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사유 무능력에 관한 한나 아렌트의 그 유명한
'악의 평범성'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홀로코스트에 비견될 인류세 재앙에 맞서려면
악의 평범성에 비견될 만성화된 위기감을 타개하기 위해
우리는 사유해야만 하는 것이다.
인류세 시대는 인간의 산업화의 결과로, 재난의 전조를 방기한 사회의 공동 책임이다.
무감각하기에 기후 재앙의 속도가 너무나 빠르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인류세 사전을 만드는 '언어현실사무국'에서
'지루한 재앙 Ennuipocalypse'이란 신조어를 만들었다.
세상의 종말이 드라마틱 하지 않고 일상적이고 평범할지도 모른다는
단어에 소름이 돋았다. 그래도 코로나19를 겪으며 지구적 수준의 생태 위기의 심각성을
절실하게 인식하게 되었으니, 인간의 활동이 비인간 생명에 가하는 가해를 지각하고,
인간이 환경에 가하는 유해에 대해 윤리적 의식을 계속 일깨워야만 한다.
기후 위기, 에너지, 인구, 쓰레기, 식량 문제는 지금 당장 해결하지 않으면 답이 없다.
인류세라는 거친 세상을 헤쳐나가기 위해
자기중심성을 버리는 포스트휴머니즘의 감수성을 가져야 한다.
지구는 단순히 우리가 사는 땅이 아니라
항상성이라는 자기조절 능력을 가진 가이아이며,
그 가이아와 생명체 인류와 비인간들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존재한다.
마음이 많이 불편했는데 정치적으로, 세대로도, 젠더적으로도 분열이 심한 한국 사회에
지구의 위기가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해서 희망적이었다.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무해한 삶의 태도와 실천적 연대가 함께한다면 가능하다니 다행이다.
미세 플라스틱 문제가 이슈화되었기에 일회용 컵 보증금 제도가 논의되었고,
제로 웨이스트를 실천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지구적 위기를 인지하고 몸으로 실천하는 감수성이 짧게 끝나고 작은 규모로 이뤄지더라도
감수성이 바뀌었다는 것은 지구의 위기를 외면하지 않는 사회적 연대로 이어질 수 있다.
에드워드 윌슨 교수님께서 DMZ를 세계적인 공원, 보전 지역으로 만들면
미국 최고의 국립공원인 엘로스톤과 미국 역사를 상징하는 게티스버그의 조합
같은 곳이 될 거라고 하셨는데, 그 기회를 K부심 가득한 대한민국 국민들이
제발 놓치지 않길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