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라는 생활
김혜진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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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의 견고함과 관계의 연약함이 너와 나를 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라는 생활을 단념할 수 없다. 너는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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깻잎 투쟁기 - 캄보디아 이주노동자들과 함께한 1500일
우춘희 지음 / 교양인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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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게 읽었다. 답답하고 속상하고 화가 나서 책장을 넘기기가 어려웠다. 한숨 쉬어가며 읽은 책이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다 알기는 어렵지만, 내가 관심을 두지 않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나 몰랐었구나 싶은 자책이 들었다. 책을 통해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을 떠올리고 알게 되고 생각하게 되어 저자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과거 뉴스로 접한 사건 하나가 떠올랐다. 공사현장에서 일하던 이주노동자가 출입국사무소의 단속을 피하려다 추락해 사망한 사건이었다. 그는 미얀마 국적의 20대 청년이었다. 뇌사 상태에서 한국인 4명에게 장기를 기증하고 영면했다. 책을 통해 그를 떠올릴 수 있었고, '불법체류자'라는 말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그는 '불법인 사람'이 아니라 '미등록 이주노동자'였다.

이전까지 이주노동자라고 하면 공장이나 공사현장, 배에서 일하는 남성 노동자를 쉽게 떠올렸다. 농촌에는 결혼이주여성들이 많은 줄로만 알았다. 결혼이 아니라 밭일을 하러 오는 여성이주노동자들이 있는 줄은 몰랐다. 또한 외국인고용법의 내용도 몰랐다. 나라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관리한다고만 생각했지 법과 제도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외국인 노동자들 때문에 한국인들 일자리가 줄어든다고 불평하는데 사실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고용허가제는 정부에서 사용자가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도록 허가해주는 제도이다. 그런데 사용자가 구인공고를 낸 뒤 기준일까지 내국인 고용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에 외국인을 고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즉, 이주노동자는 내국인이 가지 않는 일자리를 채워 생산의 일부를 담당하는 우리 사회의 구성원인 것이다.

책을 보면 법과 제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주노동자가 겪는 부당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사업주의 그릇된 인식과 태도도 원인이지만 더 중요한 원인은 잘못된 법에 있었다. 가장 문제가 되는 조항은 사업장 변경 권한이 사업주에게 있다는 점인데 쉽게 말해 사업주가 동의해야 이직할 수 있다는 뜻이다. 계약 기간 만료나 해고되는 경우, 휴업이나 폐업을 하는 경우 이직할 수 있지만, 임금 체불이나 괴롭힘 등 부당한 일을 당해도 사업주가 동의해주지 않으면 그만둘 수가 없다. 동의하도록 피해를 입증해야 하는데 그게 어려워 참고 버텨야 한다. 노예와 다를 바가 없다. 뿐만 아니라 체류 기간 관련 법, 기숙사 관련 법, 건강보험 관련 법도 터무니없다. 모두 한국과 사업주에게 유리하도록 되어 있다. 법과 제도를 통해 이주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난한 나라의 국민이라고 그들의 인권을 무시해도 되는가? 내 나라가 부끄러워 숨고만 싶었다.

여성이주노동자들의 주된 일터인 농업 현장의 열악함은 믿기 힘들 정도였다. 주거 환경과 임금 체불은 눈물 없이 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게다가 성폭력의 피해와 위협도 있다. 가슴 아픈 현실이었다. 한편으로는 농촌의 어려움을 떠올리게 된다. 노령인구가 많다 보니 아무래도 인권의식이 미비할 것이고 습관과 관행이 작용하기 쉬울 것이다. 악의적인 농장주도 있지만 구조적인 문제도 있기에 정부의 책임과 개입이 더욱 필요하다.

깻잎은 싸다. 여러 쌈채소 중에 제일 싸다. 깻잎이 싼 이유가 여성이주노동자들을 착취해서일까? 나는 깻잎을 무척 좋아하는데 앞으로 먹을 때마다 밭고랑에 쪼그려 앉아 깻잎을 따는 이국의 젊은 여성을 떠올릴 것 같다. 눈물이 난다. 누군들 편히 일하고 잘 쉬고 싶지 않을까. 가난한 나라의 딸인 이유로 무심한 땅에 와서 고되게 일하고 정당한 대가도 받지 못하는 그들에게 내가 전할 위로가 없다. 그저 하루빨리 그들의 상황이 나아지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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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독자를 위한 금강경 인문학 독자를 위한 불교 경전 1
김성옥 지음 / 불광출판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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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가르침에 관심이 생긴다. 마음은 ‘꿈‘ 같은 것 머무름이 없어야 한다, ‘나‘는 없는 것이다 - 기억해야겠다. 머무르는 마음이 없어야 자유롭고 내가 없는 것이라면 집착할 무엇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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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 영의 악의 기원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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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으로 지은 아버지 세계의 진화를 본 듯.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은 계급사회인가? 가부장제인가? 가족이기주의인가? 욕망인가? 기원이 있다면 진화도 있을 것. 악이 진화하고 있다. 사랑이 악을 이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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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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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왜 경청일까? 읽는 동안 말에 대한 이야기라 생각했는데 다 읽고 보니 제목이 경청이다. ‘세이’라는 발음을 영어로 하면 say, 말하다라는 뜻이다. 주요 등장인물의 이름을 ‘세이’라고 지은 것을 보면 말에 대한 이야기가 확실해 보이는데 제목이 왜 경청이지?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말은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듣는 것이기도 하다는 걸. ‘말’과 ‘말하다’를 동일시하는 인식이 내게 있었다.

주인공 해수의 직업은 상담사이다. 상담사는 말을 하기보다 말을 듣는 사람이다. 누구보다 해수가 잘 아는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해수는 말을 함으로써 과오를 저질렀다. 그것도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상대의 말을 듣지 않고서는 상대를 알 수 없다. 해수는 자신이 알 수 없었던 사람에 대해 말하기로 선택하는 경솔한 행동을 했다. 해수의 말이 상대를 죽게 한 것은 아니지만 경솔은 해수의 실수가 분명하고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었다면 사과해야 마땅하다. 해수의 말에 피해 입은 사람은 망자의 가족일 것이다. 망자의 죽음에 일조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경솔을 사과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를 알지 못하면서 경솔한 말로 상처를 드려 죄송합니다.” 해수의 사과는 이 한 문장이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과를 하기에 때는 늦어버렸고 해수가 하려고 했던 말들은 소용없어졌다. 비록 사과와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해수가 사건으로부터 고요해질 수 있었던 결말은 스스로 과오를 깨달았고 대가를 치렀기 때문일 것이다. 직장을 잃었고 남편과 헤어졌으며 가장 가까웠던 친구와 멀어졌다. 가혹한 대가이다. 어쩌면 해수는 그 대가가 억울했을지도 모른다. 잘못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잘못보다 과한 대가여서 억울했다면 이해된다. 해수도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쓰다만 편지들이 쌓이는 만큼.

순무와 세이 덕에 해수는 고통의 시간에서 한동안 물러날 수 있었다. 때로는 문제에 몰두하기보다 문제에서 빠져나와 멀찍이 있는 것이 도움 된다. 길고양이 구조하기가 해수에게 그런 시간을 주었다. 실패하는 편지를 반복하며 해수가 느낀 건 무엇일까. 어떤 말로도 전할 수 없는 심정이 있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말로 설명되지 않는 감정을 편지에 담을 수는 없다. 설령 말로 할 수 있어도 상대가 듣지 못한다면 혹은 듣지 않는다면 그 말은 소용없다. 그래서일까. 해수는 문제에서 빠져나온 시간 동안 말하기를 멈추었다. 고양이와는 인간의 말로 소통할 수 없고 어린이와는 어른의 말로 소통할 수 없다. 해수는 순무와도 세이와도 말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소통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순무는 무엇 때문에 해수를 향한 경계를 거두었을까. 세이는 무엇 때문에 해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선택했을까. 해수의 말없는 태도가 그들의 마음을 연 것 같다. 말로 하지 않아도 우리는 상대에게 어떤 태도를 보여줄 수 있다. 순무와 세이를 향한 해수의 관심과 온정은 말로 전달된 것이 아니라 태도로 전달된 것이다. 그들이 마음을 열 때까지 최소한의 개입으로 지켜보고 기다리는 태도. 실패한 편지들은 실패가 아니었다. 해수에게 새로운 소통을 열어주었다. 새로운 소통은 고양이만 구조한 것이 아니라 세이와 해수도 구조했다. 구조는 말로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태도로서 이루어졌고 그 태도는 경청이었다.

경청의 사전적 의미는 ‘남의 말을 귀 기울여 주의 깊게 들음’인데 나는 단어 하나를 바꾸고 싶다. ‘남의 마음을 귀 기울여 주의 깊게 들음’이라고. 그들이 들은 것은 서로의 말이 아니었다. 말하지 못해도 혹은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존재 자체에 귀 기울였기 때문에 소통이 가능했다. 그들이 서로 들은 것은 말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더 이상 못 버티겠으니 도와달라는 순무의 마음, 자신의 어려움을 알아달라는 세이의 마음, 문제를 말하고 싶지 않은 해수의 마음. 그 마음에 말로써 다가가지 않고 상대가 다가오도록 귀 기울이는 태도. 그들의 관계는 경청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관계가 서로를 구조했다.

상대의 마음을 듣는다는 것이 경청이라면 이 얼마나 어려울까. 상대의 말을 온전히 듣는 것도 힘이 드는데 말 뒤에 자리한 마음까지 들어야 한다면. 그래서 우리는 어려운 듣기보다 쉬운 말하기를 소통으로 착각하며 살아온 것 아닐까? 누군가를 다 알지 못하면서 그에 대한 대본을 쓰고 씌진 대본이 사실인지 알지 못하면서 그대로 전달하고 한정된 앎으로 말을 보태고 듣는 이들은 사실로 믿고 또 말을 보태고...... 해수도 시청자와 소통하기 위해 방송에 출연했을 것이고 시청자도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방송을 보았을 것이다. 여기에 경청은 없다. 정작 대본 속 인물의 말을 듣겠다는 태도는 없다. 그 인물의 마음은 궁금해하지 않는다. 방송을 통한 소통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을까?

일상 속 대화도 마찬가지다.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아도 말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은 그보다 적다. 상대의 말을 들을 때도 그의 마음을 듣기는커녕 내가 말할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듣는다. 내가 말하는 것이 소통하는 것이라 착각한다. 흔히 소통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말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듣지 않아서이다. 대화는 말하기가 아니라 듣기인 것을. 듣기 위해 질문하고 들은 말에 말을 잇는 대화를 한다면 상대에게 집중되고 관계는 깊어질 것이다. ‘경청’이라는 간단한 제목의 이 소설이 내게 준 깨달음이다.

제목은 간단하지만 깨달음은 간단치가 않다. 경청은 어렵다. 자신의 내면에 불화가 있으면 더 어렵다. 타인을 지향하는 일은 성숙한 자아가 할 수 있는 일이다. 해수가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없이 순무를 구조하겠다고 결심할 수 있었던 까닭이 뭘까? 그녀는 성장하는 중이었을 것이다. 사건을 겪고 사건 뒤의 고통을 겪고 부치지 못하는 편지를 쓰며 고독을 견디는 동안 마음의 힘이 자라났을 것이다. 나였다면 그럴 수 있었을까? 나의 깨달음이 간단치 않은 건 나의 자아가 성숙하지 못해서이다. 성숙하지 못한 자아는 대화와 관계의 만족감을 갈망하지만 이를 위한 경청에는 이르지 못한다. 해수는 경청에 이르렀고 새로운 관계를 시작했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타인의 마음을 듣기 위해 나는 더 아파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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