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꽃 1
조정래 지음 / 해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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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_

- "사랑한다는 것은 함께 우는 것이다."

조정래 작가의 이름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사와 시대의 무게였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처럼 한 시대를 관통하는 작품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역사의 굴곡을 그려온 작가이기에, 그의 신작이 ‘사랑’을 정면으로 이야기한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그런데 《서리꽃》 1. 2권을 읽고 나니 오히려 그 낯섦이 이 작품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이 소설에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받아들이고, 상대가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의 것을 내어주며, 끝내 자신이 원하는 미래와 다른 결말까지 받아들여야 하는 감정으로 이야기된다.

사랑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대학 시절 시화전에서 이재이가 쓴 시와 윤소인이 그 시를 읽고 그려낸 그림.
두 사람 사이에는 그 짧은 순간에 이미 특별한 감정이 싹튼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윤소인이 이재이의 시를 읽는 데서 끝내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그림으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그때 선배님 시는 잊을 수가 없어요. 시에 사로잡혀 그 그림을 단숨에 그렸으니까요.”

이 문장은 두 사람의 관계를 상징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시와 그림은 서로 다른 예술이지만 하나의 감정을 향해 만난다.
그리고 그 만남이 훗날 두 사람을 다시 연결하는 기억이 된다.

5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왔지만, 과거의 한순간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사랑은 처음부터 현실적인 관계라기보다 기억과 감정이 오랜 시간을 견뎌낸 사랑에 가까워 보였다.

사랑은 함께 보낸 시간의 길이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짧은 순간이라도 마음 깊숙이 들어온 사람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을 수 있으니까.


《서리꽃》에서 사랑을 더욱 선명하게 만드는 것은 이재이 가족이 가진 가치관이다. 이재이의 아버지와 가족에게 돈과 사회적 지위는 매우 중요한 가치다. 사랑이나 꿈보다 경제적 조건과 가문, 후계와 상속 같은 현실적인 문제가 먼저 놓인다. 그런 환경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려는 이재이는 가족에게는 답답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다.

이재이는 자신에게 주어질 수 있는 재산과 미래를 포기하면서까지 윤소이. 그녀를 돕는다. 여기서 인상적인 것은 돈 자체가 아니라 돈에 대한 두 사람의 가치관이 정반대로 충돌한다는 점이다.

🔖“형은 상속권을 마구 포기하는 나를 바보라고 생각하고 있고, 난 인생의 목적을 돈 많이 버는 것으로 세우고 있는 형을 바보라고 생각하고 있지. 이건 영원한 평행선이야.”

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두 사람의 인생관 자체가 충돌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재산은 미래를 지켜주는 가장 확실한 수단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현재가 그 무엇보다 중요할 수 있다. 어느 쪽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가진 것 중 정말 끝까지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재이는 윤소인을 살리고 싶어 한다. 빚 때문에 무너진 그녀의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병을 치료하고, 좋은 환경에서 지낼 수 있도록 하고,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해주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해주는 것이 정말 사랑의 완성일까.
아니면 상대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곁에 있어주는 것이 사랑일까.

이재이는 윤소인을 ‘구해주려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윤소인 역시 그 사랑을 받으면서 변화한다. 처음에는 자신의 삶에 대한 희망을 거의 놓아버린 듯했던 사람이 다시 살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된다.

사랑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일방적으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주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윤소인은 화가이고 반 고흐를 좋아한다. 그녀에게 그의 작품은 예술적 동경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삶과 창작을 돌아보게 만드는 거울이다.
특히 반 고흐의 삶을 따라가며 작품을 바라보는 과정은 윤소인의 내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장치처럼 느껴졌다.

뛰어난 재능을 지녔음에도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예술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화가.

그의 삶을 바라보며 윤소인이 자신의 작품과 삶을 비교하고 절망하는 모습은 예술가가 가진 고독을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여기서 이재이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그는 그녀에게 재촉하지 않으며, 그저 그녀의 마음을 받아준다.
사랑하는 사람이 반드시 성공해야만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재능을 인정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존재하는 것 자체를 인정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서리꽃은 오래 피어 있는 꽃이 아니다.
차가운 밤, 유리창이나 주변에 아름답게 피어나지만 햇빛이 닿으면 사라진다.
그래서 이 제목은 작품의 사랑과 묘하게 닮아 있다.

아름답기 때문에 더 불안하고, 찬란하기 때문에 더욱 사라질 것 같은 사랑.

두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의 의미를 알고 읽게 되면서부터는 평범한 장면조차 다르게 보였다.

함께 밥을 먹고, 함께 걷고, 시를 나누고, 여행을 하고, 절에 가서 기도하는 일.
평범해 보이는 순간들이 사실은 가장 소중한 순간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2권에서 윤소인이 자신의 사랑을 바라보는 마음은 제목의 의미를 더욱 깊게 만든다.

🔖“오빠, 우리의 사랑은 밤 추위에 피어났다가 햇살이 비치면 금세 사라지고 마는 서리꽃처럼 짧았습니다. 그러나 짧은 만큼 진하고 뜨거웠습니다.”

평생을 함께해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관계가 있는 반면,
짧은 시간 동안에도 한 사람의 삶 전체를 바꾸어놓는 사랑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서리꽃은 덧없음의 상징인 동시에 짧기에 더욱 찬란한 사랑의 상징으로 읽혔다.


2권으로 갈수록 이야기는 사랑의 설렘보다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으로 깊어진다.

윤소인의 상황이 두 사람의 미래를 계속 위협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정말 괜찮은 걸까?’
불안감 때문에 두 사람이 함께 보내는 순간들이 더 애틋해진다.

살리고 싶은 마음과 상처를 남기고 싶지 않은 마음.
그 두 마음이 계속 부딪힌다.
그래서 이 소설의 사랑은 달콤하기보다 아프다.
행복한 장면이 많을수록 그 행복이 영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더 마음이 저려온다.


책의 뒷표지에 놓인 “사랑한다는 것은 함께 우는 것이다”라는 문장은 작품을 읽고 난 뒤 훨씬 무겁게 다가왔다.

두 사람의 사랑은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을 찾는 사랑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내가 행복하지 않더라도 당신의 행복을 생각하는 마음.
그리고 그 마음이 서로에게 되돌아오는 관계.

그것이 이 작품이 말하는 사랑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조정래 작가의 작품 세계를 생각하면 《서리꽃》의 사랑은 의외의 선택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연스러운 확장이기도 하다.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는 소설에서 결국 중심에 놓이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이 무엇을 믿고,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위해 희생하고,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문학이라면,
이번 작품에서 작가가 선택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 ‘사랑’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서리꽃》은 한 사람의 삶을 통해 인간이 무엇으로 살아가는가를 묻는 작품에 가깝게 다가왔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지만,
책을 덮고 난 뒤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삶이었다.


🔖“그 누구도 세월을 이기는 자는 없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있는 것들은 세월이라는 배에 실려 왔다가 세월이라는 배에 실려 떠나간다.”

이 문장은 《서리꽃》을 읽으며 느꼈던 감정을 오래 붙잡아주었다.

주어진 시간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지금 곁에 있는 사람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더 많이 갖는 것보다 누구와 어떤 마음으로 시간을 보내느냐가
더 중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도 오늘을 살아가는 것처럼,
사랑 역시 언젠가 끝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을 내어주는 것이다.

이재이와 윤소인의 사랑은 영원을 알 수 없는 인간이 어떻게 누군가를 사랑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남았다.

_

인생도 서리꽃과 비슷한 것은 아닐까.
어느 순간에는 너무나 아름답게 피어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사라진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피어 있었느냐가 아니라,
피어 있는 동안 얼마나 진실하게 사랑했느냐일 것이다.

사랑은 함께 웃는 것만이 아니라 함께 울어주는 것.
상대의 삶을 대신 살아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을 때까지 곁을 지켜주는 것.
그리고 언젠가 헤어질 운명을 알고도 오늘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이 소설이 말하는 사랑의 가장 깊은 얼굴인지도 모르겠다.

_

차가운 밤에 피어나 햇살 앞에서 사라지는 서리꽃처럼,
짧아서 더 찬란하고, 사라지기에 더욱 오래 기억되는 사랑.

《서리꽃》을 읽고 난 뒤 남은 것은 바로 그 사랑의 잔상이다.

언젠가 모두 세월이라는 배에서 내리게 될 텐데,
그 배를 타고 있는 동안 누구의 손을 잡고 살아갈 것인가.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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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꽃 세트 - 전2권 (한정판 케이스 + 조정래 작가노트)
조정래 지음 / 해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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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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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한다는 것은 함께 우는 것이다."

조정래 작가의 이름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사와 시대의 무게였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처럼 한 시대를 관통하는 작품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역사의 굴곡을 그려온 작가이기에, 그의 신작이 ‘사랑’을 정면으로 이야기한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그런데 《서리꽃》 1. 2권을 읽고 나니 오히려 그 낯섦이 이 작품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이 소설에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받아들이고, 상대가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의 것을 내어주며, 끝내 자신이 원하는 미래와 다른 결말까지 받아들여야 하는 감정으로 이야기된다.

사랑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대학 시절 시화전에서 이재이가 쓴 시와 윤소인이 그 시를 읽고 그려낸 그림.
두 사람 사이에는 그 짧은 순간에 이미 특별한 감정이 싹튼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윤소인이 이재이의 시를 읽는 데서 끝내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그림으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그때 선배님 시는 잊을 수가 없어요. 시에 사로잡혀 그 그림을 단숨에 그렸으니까요.”

이 문장은 두 사람의 관계를 상징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시와 그림은 서로 다른 예술이지만 하나의 감정을 향해 만난다.
그리고 그 만남이 훗날 두 사람을 다시 연결하는 기억이 된다.

5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왔지만, 과거의 한순간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사랑은 처음부터 현실적인 관계라기보다 기억과 감정이 오랜 시간을 견뎌낸 사랑에 가까워 보였다.

사랑은 함께 보낸 시간의 길이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짧은 순간이라도 마음 깊숙이 들어온 사람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을 수 있으니까.


《서리꽃》에서 사랑을 더욱 선명하게 만드는 것은 이재이 가족이 가진 가치관이다. 이재이의 아버지와 가족에게 돈과 사회적 지위는 매우 중요한 가치다. 사랑이나 꿈보다 경제적 조건과 가문, 후계와 상속 같은 현실적인 문제가 먼저 놓인다. 그런 환경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려는 이재이는 가족에게는 답답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다.

이재이는 자신에게 주어질 수 있는 재산과 미래를 포기하면서까지 윤소이. 그녀를 돕는다. 여기서 인상적인 것은 돈 자체가 아니라 돈에 대한 두 사람의 가치관이 정반대로 충돌한다는 점이다.

🔖“형은 상속권을 마구 포기하는 나를 바보라고 생각하고 있고, 난 인생의 목적을 돈 많이 버는 것으로 세우고 있는 형을 바보라고 생각하고 있지. 이건 영원한 평행선이야.”

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두 사람의 인생관 자체가 충돌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재산은 미래를 지켜주는 가장 확실한 수단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현재가 그 무엇보다 중요할 수 있다. 어느 쪽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가진 것 중 정말 끝까지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재이는 윤소인을 살리고 싶어 한다. 빚 때문에 무너진 그녀의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병을 치료하고, 좋은 환경에서 지낼 수 있도록 하고,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해주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해주는 것이 정말 사랑의 완성일까.
아니면 상대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곁에 있어주는 것이 사랑일까.

이재이는 윤소인을 ‘구해주려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윤소인 역시 그 사랑을 받으면서 변화한다. 처음에는 자신의 삶에 대한 희망을 거의 놓아버린 듯했던 사람이 다시 살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된다.

사랑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일방적으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주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윤소인은 화가이고 반 고흐를 좋아한다. 그녀에게 그의 작품은 예술적 동경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삶과 창작을 돌아보게 만드는 거울이다.
특히 반 고흐의 삶을 따라가며 작품을 바라보는 과정은 윤소인의 내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장치처럼 느껴졌다.

뛰어난 재능을 지녔음에도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예술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화가.

그의 삶을 바라보며 윤소인이 자신의 작품과 삶을 비교하고 절망하는 모습은 예술가가 가진 고독을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여기서 이재이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그는 그녀에게 재촉하지 않으며, 그저 그녀의 마음을 받아준다.
사랑하는 사람이 반드시 성공해야만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재능을 인정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존재하는 것 자체를 인정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서리꽃은 오래 피어 있는 꽃이 아니다.
차가운 밤, 유리창이나 주변에 아름답게 피어나지만 햇빛이 닿으면 사라진다.
그래서 이 제목은 작품의 사랑과 묘하게 닮아 있다.

아름답기 때문에 더 불안하고, 찬란하기 때문에 더욱 사라질 것 같은 사랑.

두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의 의미를 알고 읽게 되면서부터는 평범한 장면조차 다르게 보였다.

함께 밥을 먹고, 함께 걷고, 시를 나누고, 여행을 하고, 절에 가서 기도하는 일.
평범해 보이는 순간들이 사실은 가장 소중한 순간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2권에서 윤소인이 자신의 사랑을 바라보는 마음은 제목의 의미를 더욱 깊게 만든다.

🔖“오빠, 우리의 사랑은 밤 추위에 피어났다가 햇살이 비치면 금세 사라지고 마는 서리꽃처럼 짧았습니다. 그러나 짧은 만큼 진하고 뜨거웠습니다.”

평생을 함께해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관계가 있는 반면,
짧은 시간 동안에도 한 사람의 삶 전체를 바꾸어놓는 사랑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서리꽃은 덧없음의 상징인 동시에 짧기에 더욱 찬란한 사랑의 상징으로 읽혔다.


2권으로 갈수록 이야기는 사랑의 설렘보다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으로 깊어진다.

윤소인의 상황이 두 사람의 미래를 계속 위협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정말 괜찮은 걸까?’
불안감 때문에 두 사람이 함께 보내는 순간들이 더 애틋해진다.

살리고 싶은 마음과 상처를 남기고 싶지 않은 마음.
그 두 마음이 계속 부딪힌다.
그래서 이 소설의 사랑은 달콤하기보다 아프다.
행복한 장면이 많을수록 그 행복이 영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더 마음이 저려온다.


책의 뒷표지에 놓인 “사랑한다는 것은 함께 우는 것이다”라는 문장은 작품을 읽고 난 뒤 훨씬 무겁게 다가왔다.

두 사람의 사랑은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을 찾는 사랑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내가 행복하지 않더라도 당신의 행복을 생각하는 마음.
그리고 그 마음이 서로에게 되돌아오는 관계.

그것이 이 작품이 말하는 사랑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조정래 작가의 작품 세계를 생각하면 《서리꽃》의 사랑은 의외의 선택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연스러운 확장이기도 하다.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는 소설에서 결국 중심에 놓이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이 무엇을 믿고,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위해 희생하고,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문학이라면,
이번 작품에서 작가가 선택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 ‘사랑’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서리꽃》은 한 사람의 삶을 통해 인간이 무엇으로 살아가는가를 묻는 작품에 가깝게 다가왔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지만,
책을 덮고 난 뒤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삶이었다.


🔖“그 누구도 세월을 이기는 자는 없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있는 것들은 세월이라는 배에 실려 왔다가 세월이라는 배에 실려 떠나간다.”

이 문장은 《서리꽃》을 읽으며 느꼈던 감정을 오래 붙잡아주었다.

주어진 시간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지금 곁에 있는 사람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더 많이 갖는 것보다 누구와 어떤 마음으로 시간을 보내느냐가
더 중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도 오늘을 살아가는 것처럼,
사랑 역시 언젠가 끝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을 내어주는 것이다.

이재이와 윤소인의 사랑은 영원을 알 수 없는 인간이 어떻게 누군가를 사랑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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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도 서리꽃과 비슷한 것은 아닐까.
어느 순간에는 너무나 아름답게 피어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사라진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피어 있었느냐가 아니라,
피어 있는 동안 얼마나 진실하게 사랑했느냐일 것이다.

사랑은 함께 웃는 것만이 아니라 함께 울어주는 것.
상대의 삶을 대신 살아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을 때까지 곁을 지켜주는 것.
그리고 언젠가 헤어질 운명을 알고도 오늘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이 소설이 말하는 사랑의 가장 깊은 얼굴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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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밤에 피어나 햇살 앞에서 사라지는 서리꽃처럼,
짧아서 더 찬란하고, 사라지기에 더욱 오래 기억되는 사랑.

《서리꽃》을 읽고 난 뒤 남은 것은 바로 그 사랑의 잔상이다.

언젠가 모두 세월이라는 배에서 내리게 될 텐데,
그 배를 타고 있는 동안 누구의 손을 잡고 살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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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7 대한민국 트렌드 - 과연 그 트렌드는 진짜 트렌드가 됐을까? AI와 인간이 함께 읽어낸 사람·소비·일의 8가지 키워드
조성호 지음 / 길벗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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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PDF 샘플 원고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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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새로운 트렌드 전망서가 쏟아진다.
올해는 무엇이 뜨고, 내년에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책들이다. 하지만 트렌드 책을 읽을 때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곤 했다.

🤔“이게 정말 오래 갈 변화일까, 아니면 잠깐 사람들의 시선을 끈 유행일까?”

《2027 대한민국 트렌드》는 트렌드를 ‘요즘 사람들이 많이 하는 것’으로만 정의하지 않고, 사회와 사람들의 행동에 축적되는 중장기적인 변화의 흐름으로 바라본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이 책의 독특한 점은 AI 트렌드 분석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것이다.
저자는 ChatGPT, Gemini, Claude라는 생성형 AI를 활용해 방대한 자료를 살펴보고, 서로 다른 데이터와 현상을 연결하면서 2027년 대한민국의 변화를 읽어낸다.

2027년에는 도대체 무엇이 달라질까?
그리고 그 변화는 이미 우리의 일상 속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책을 읽으며 오래 생각하게 된 부분은 ‘진짜 트렌드는 눈에 띄는 현상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관점이었다. 보통 뉴스에 많이 나오거나 검색량이 급증한 것을 트렌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이 잠깐 폭발했다고 해서 그것이 사회의 방향을 바꾸는 변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책에서 소개하는 ‘미인박명의 오류’가 흥미로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명인의 비극처럼 기억에 강하게 남는 사례는 실제보다 훨씬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가용성 휴리스틱과 연결되는 이야기다. 쉽게 떠오르는 사례를 실제 빈도나 확률보다 중요하게 받아들이는 인간의 판단 오류다.

이런 오류는 트렌드를 바라볼 때도 생길 수 있다.
눈에 확 띄는 인기 검색어, 갑자기 폭발한 콘텐츠, SNS에서 화제가 된 상품은 쉽게 우리의 시선을 빼앗는다. 하지만 정작 세상을 조금씩 바꾸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매일 반복하는 평범한 행동일 수도 있다.

그래서 책을 읽고 나니 주변을 보는 방식도 조금 달라졌다.

요즘 사람들이 무엇을 검색하는지보다 무엇을 반복하고 있는지,
무엇을 한 번 사고 끝내는지보다 무엇에 계속 돈과 시간을 쓰는지,
무엇을 좋아한다고 말하는지보다 실제로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가
더 궁금해진다.

트렌드는 현재 사람들이 남기고 있는 작은 발자국을 읽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책에서 제시한 2026년의 주요 흐름 가운데 특히 눈에 들어온 것은 자산 이동, AI 일상화, 코리아 러시, N잡, 마이크로트렌드, 가성비의 재정의, 저속노화, 오프라인 회귀, 취향 중심주의, 시니어 창업이었다.

각각 따로 보면 서로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하나씩 들여다보면 공통된 흐름이 느껴진다.

사람들이 자신의 돈과 시간, 경험을 이전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자산을 돈이나 부동산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시간과 경험, 건강, 관계, 데이터와 같은 것까지 미래를 위한 자산으로 바라보는 ‘자산전환’이라는 2027 트렌드 키워드가 그래서 더욱 인상적이었다.

특히 소비와 투자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는 설명이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무언가를 구매할 때에도 ‘갖고 싶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어떤 경험을 남기는지, 건강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앞으로의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앞으로의 소비는 얼마나 많이 소비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나에게 남기느냐의 문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워드 가운데 가장 현실적으로 다가온 것은 Shiftism, 자산전환이었다.

자산이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돈, 주식, 부동산부터 떠올린다.
그런데 이 책은 자산이라는 개념을 훨씬 넓게 바라본다.
시간, 경험, 기술, 건강, 관계, 취미처럼 당장 가격표를 붙이기 어려운 것들까지도 미래의 나를 만들어가는 자산으로 볼 수 있다는 관점이다.
이 생각이 흥미로운 이유는 매일 하는 선택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책 한 권을 읽는 것은 소비일까?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시간은 ‘여가’일까?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기록하고 경험을 쌓는 것은 그저 취미일까?
Shiftism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답은 달라질 수 있다.

오늘의 시간이 내일의 실력으로 연결되고, 지금의 경험이 새로운 기회로 이어지고, 내가 쌓은 관계와 신뢰가 미래의 가능성이 된다면 그것 역시 나만의 자산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이 키워드는 ‘지금 무엇을 쌓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확장된다.

돈을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돈만 바라보다 보면 정작 돈을 만들어낼 수 있는 나 자신의 능력이나 경험을 놓칠 수도 있다. 미래를 준비한다는 것은 통장 잔고만 늘리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나에게 도움이 될 것들을 조금씩 축적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Personal Venture, 자기경영 역시 오래 생각하게 만든 키워드였다.
한 직장에 들어가 정해진 일을 하고 정년까지 다니는 모습은 점점 보편적인 삶의 공식에서 멀어지고 있다. 한 사람이 하나의 직업만 갖는 것이 아니라 여러 역할을 수행하고, 자신의 경험과 전문성을 활용해 새로운 일을 만들어가는 시대가 되고 있다. 이 변화는 N잡이 늘어난다는 의미만은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는 누구인가’를 하나의 직장이나 직함으로 설명하기 어려워지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직장이라는 소속이 나를 설명하는 시대에서, 내가 가진 능력과 경험, 관심사와 취향이 나를 설명하는 시대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하나의 비즈니스처럼 경영한다’는 표현이 꽤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알고, 무엇을 계속 배우고 싶은지 정하고,
어떤 경험을 쌓을지 선택하는 것.

창업이 아니더라도 이미 각자의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관리하고 성장시키고 있다. 자기경영은 변화가 빠른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누구에게나 필요한 자기 설계에 가까운 개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대로 Human Touch, 인간가치는 조금 다른 종류의 생각을 불러왔다.
AI가 점점 더 자연스러운 글을 쓰고, 사람처럼 대화하고, 그럴듯한 이미지와 영상을 만들어내는 시대다. 그렇다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책이 이야기하는 인간다움은 직접 경험한 이야기, 진짜 관계에서 만들어진 신뢰, 누군가를 배려하는 마음처럼 데이터만으로 완전히 대체하기 어려운 가치에 주목한다.

기술이 인간의 영역을 넓게 침범할수록 오히려 인간적인 경험을 더 귀하게 여기게 되는 것은 아닐까.

완벽하게 만들어진 콘텐츠가 넘쳐날수록 조금 서툴더라도 실제 사람이 살아온 흔적이 담긴 이야기에 마음이 움직이고, 무엇이든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 시대일수록 천천히 만나 대화하는 시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미래의 경쟁력은 기술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기술을 얼마나 잘 사용하는가와 함께 사람에게 어떤 감정을 남길 수 있는가도 중요해질 것이다.


트렌드는 변화의 방향을 알려주는 지도에 가깝다.
그리고 지도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어디에 있고,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 것인지 판단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027 대한민국 트렌드》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는 변화들을 한 발 떨어져 바라보게 만드는 책으로 읽혔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미래를 생각할 때 ‘무엇이 뜰까?’라는 질문을 먼저 떠올렸다면, 책을 읽고 난 뒤 품게 된 질문은 조금 달라졌다.

“나는 지금 어떤 변화를 이미 경험하고 있는가?”

미래를 준비한다는 것은 변화가 왔을 때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2027 대한민국 트렌드》는 AI가 일과 소비, 콘텐츠와 비즈니스에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는지 궁금한 사람, 시장과 소비자의 변화를 읽어야 하는 직장인과 마케터, 새로운 사업 아이디어를 찾는 사람, 앞으로의 삶의 방향을 고민하는 사람에게 유용할 것 같다.

무엇보다 트렌드 전망서를 어렵고 거창한 이야기로 느꼈던 사람에게도 권하고 싶다. 이 책은 AI와 데이터라는 소재를 가지고 있지만, 이야기하는 대상은 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다.

우리가 무엇을 사고, 무엇을 검색하고, 어디에 시간을 쓰고,
누구와 관계를 맺고, 무엇을 믿고 의심하는지.

그 작은 선택들이 모여 사회의 방향을 바꾸게 될 것이다.

미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의 일상 속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것이다.

AI도, N잡도, 자산에 대한 관심도, 오프라인 경험에 대한 욕구도, 취향을 중심으로 소비하는 방식도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미래의 모습이 아니다.

이미 우리 주변에서 진행되고 있는 변화다.
다만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의 흐름으로 바라보지 못했을 뿐이다.

그래서 트렌드를 읽는다는 것은 현재를 낯설게 바라보는 능력에 더 가까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변화가 시작된 지금, 무엇을 보고 있고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일 것이다.

어쩌면 미래는 이미 곁에 와 있고,
아직 그것에 이름을 붙이지 못했을 뿐일 테니까.

'AI가 세상을 더 빠르게 바꾸는 시대, 중요한 것은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믿으며, 어떤 인간으로 살아갈 것인가이다.'

이것이 내가 이 책에서 발견한 가장 큰 2027 트렌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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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전망 #트렌드책 #AI트렌드 #신간도서 #책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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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리치가 세상을 구한다는 헛소리, 그런데 우리는 왜 그들을 숭배하는가
달리아 나미앙 지음, 조민영 옮김 / 원더박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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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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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평범한 사람이 엄청난 부를 일구고, 혁신적인 기술을 만들어내고,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미래를 이야기하면 자연스럽게 귀를 기울인다. 특히 수천억, 수조 원의 재산을 가진 기업가가 “인류를 위해”, “미래를 위해”, “지구를 위해” 무언가를 하겠다고 말하면 그 말 자체에 권위가 실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정말 그들이 우리를 구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우리는 왜 그들의 부와 선택을 그렇게 쉽게 믿고 동경하는 걸까?

누군가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는 사실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그 부가 만들어진 과정과 그 부를 바라보는 사회의 태도를 얼마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가에 있는 것은 아닐까.

대개 부를 능력의 증거로 생각한다. 많이 벌었다는 것은 그만큼 뛰어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거대한 기업을 일군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 ‘혁신가’, ‘천재’, ‘미래를 보는 사람’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하지만 부가 커질수록 그 부를 가능하게 만든 사회적 조건과 노동, 제도, 공공 인프라에 대해서는 잘 보지 않게 된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슈퍼리치의 ‘부’ 자체보다 ‘부의 과시’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책에서는 로맹 가리의 개념을 빌려 ‘도발 사회’라는 현상을 이야기한다. 부유한 사람들이 자신의 막대한 부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사회는 그것을 문제 삼기보다 성공의 상징처럼 소비한다는 것이다.

책 속의 이 문장이 그 개념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도발 사회에서는 특권이 지나치게 비대해져 끊임없는 힘의 과시로 변질된다.”

이 문장을 읽고 한동안 생각이 멈췄다.
요즘은 SNS를 통해 다른 사람의 소비와 삶을 실시간으로 구경한다. 고급 자동차, 명품, 대저택, 요트, 전용기, 초호화 여행…. 과거에는 직접 볼 수 없었던 극단적인 부의 모습까지 손바닥 위에서 쉽게 접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장면을 바라보며 “왜 저렇게 많은 것을 한 사람이 가져야 하지?”라고 생각하기보다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먼저 생기기도 한다. 바로 그 순간 불평등은 단순한 사회적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욕망으로 바뀐다.

책이 말하는 ‘도발’은 그래서 무섭다. 가진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자신의 부를 보여주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없는 사람에게조차 그 삶을 욕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부와 부가 상징하는 모든 것을 숭배한다.”

사람들은 돈을 숭배한다고 직접 말하지 않는다. 대신 성공을 숭배한다고 말하고, 능력을 존중한다고 말하고, 혁신을 응원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성공과 능력과 혁신의 최종적인 척도가 결국 얼마나 많은 부를 만들어냈는지로 귀결되는 순간이 많다.

그래서 책을 읽고 나니 ‘성공한 사람을 존경하는 것’과 ‘부유한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숭배하는 것’은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성취를 인정하는 것과 그 사람이 가진 막대한 권력까지 정당하다고 인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자선과 기술에 관한 이야기는 생각할 거리가 많았다.
엄청난 부를 축적한 사람이 거액을 기부하면 쉽게 그 사람을 선한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물론 실제로 사회에 도움이 되는 기부와 자선 활동도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이 책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묻고 있다.

✔️왜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권한이 국가와 시민사회가 아니라
개인의 재산에 따라 움직이는가?
✔️문제를 만들어낸 구조를 그대로 둔 채 일부를 기부하는 것만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책에서는 자선자본주의를 바라보며 이런 문제의식을 제기한다.
🔖“이 슈퍼리치들에게는 그들의 부를 가능하게 하는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변혁하기보다 막대한 재산의 극히 일부를 내놓고 평등과 연민이라는 수식어로 포장하는 편이 더 이익이기 때문이다.”

이 문장을 읽으며 ‘기부의 선악’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기부가 실제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준다면 그 자체의 가치는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동시에 생각해야 할 질문은 그 돈이 왜 그렇게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는가, 그리고 그 구조 자체를 바꾸는 일은 왜 더 어려운가라는 문제일 것이다.

책이 말하는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의 말에 지나치게 큰 권위를 부여하지 말자는 이야기처럼 읽혔다.

특히 기술에 대한 믿음은 오늘날 더욱 생각해볼 문제다.
기술이 발전하면 언젠가 기후위기도 해결되고, 식량 문제도 해결되고, 인간은 지구를 넘어 우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접한다.
과학과 기술은 인류의 삶을 크게 바꿔왔다. 앞으로도 중요한 해결책이 될 것이다. 그러나 기술이 모든 사회적 문제를 자동으로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다.

누가 기술을 소유하는가.
그 기술의 혜택은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기술 발전의 비용은 누가 부담하는가.

이 질문이 함께 따라와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화성이나 우주 개발을 바라보는 방식도 흥미로웠다. 지구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새로운 공간으로 탈출하는 상상은 굉장히 매력적이지만, 지구를 살아갈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탈출구’가 아니라 지금 살고 있는 사회를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일일지도 모른다.


🔖"특권의 부당함을 보고도 분노할 줄 모르는 사회는 결국 그 특권에 굴복하게 되기 때문이다.”

분노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감각,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다시 질문하는 태도, 누군가에게 주어진 특권이 정말 정당한 것인지 살펴보는 힘에 가까울 것이다. 어쩌면 너무 많은 것을 ‘원래 그런 것’이라고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평생 일해도 집 한 채 마련하기 어렵고, 누군가는 하루에도 상상하기 힘든 금액을 소비한다. 누군가는 기후위기로 삶의 터전을 잃어가는데, 누군가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기후위기를 피해갈 수 있는 공간을 준비한다.

그런 장면을 보면서도 때때로 이렇게 생각하기도 한다.
‘저 사람은 능력이 있으니까.’

하지만 능력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그 사람이 성장할 수 있었던 교육과 인프라, 노동자들의 노동, 국가의 법과 제도, 사회가 제공한 수많은 기반은 어디에 포함되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비용을 누가 부담했는가?

이 질문을 함께 생각한다면 ‘개인의 성공’으로만 보였던 장면이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좋았던 이유는 슈퍼리치만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을 바라보는 자신도 함께 돌아보게 한다.

억만장자의 요트 사진을 클릭하고, 그들의 일상을 구경하고, 그들이 만드는 제품을 소비하고, 그들의 성공담을 공유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불평등을 걱정한다. 이 모순을 책은 외면하지 않는다.

‘나는 부를 가진 사람을 존경하는 걸까, 아니면 부 자체를 숭배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또 하나.
‘내가 성공이라고 믿어온 기준은 과연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까?’

이 책은 너무 익숙하게 받아들였던 성공, 혁신, 자선, 기술, 자유라는 단어를 다시 들여다보게 한다. 돈이 많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의 말이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자신을 인류의 구원자라고 말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이야기를 믿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누가 무엇을 말하든 한 번 더 질문할 수 있는 시민의 감각인지도 모르겠다.

“왜 그것을 부러워하는가?”

누군가의 엄청난 부를 바라보며 부러워하는 마음은 자연스러운 감정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부가 만들어진 구조까지 생각해보는 순간, 부러움은 질문으로 바뀐다.
그리고 질문이 시작되는 순간, 더 이상 구경꾼으로만 머물지 않을 것이다.


세상을 구하겠다는 약속을 믿기 전에,
지금 이 세상을 이렇게 만든 구조부터 바라보라고 말하는 책이었다.

“그들을 숭배하는 동안,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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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필사북 - 이동진 평론가 추천! 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 역사, 건
김승옥 지음 / 스타북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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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물은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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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 작가의 문장을 읽는다는 것은
오래된 풍경 하나를 다시 바라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분명 한 번 본 적 있는 풍경인데도,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마주하면 전혀 다른 표정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무진기행》을 비롯해 김승옥 작가의 작품들은 이미 한국 현대문학의 대표작으로 오랫동안 읽혀왔다. 나 역시 그의 작품을 ‘한국문학의 고전’이라는 이름으로 먼저 접하게 되지만, 이번 《무진기행 필사북》을 읽고 나니 김승옥의 문장을 읽는 것과 직접 손으로 옮겨 적는 것은 상당히 다른 경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으로 읽을 때는 한 호흡으로 지나갔던 문장이
펜을 들고 한 글자씩 따라가면 이상하리만큼 오래 머무르게 된다.

왜 이 단어였을까. 왜 여기에서 문장이 멈췄을까.
왜 이 장면은 이렇게 건조한데도 마음 한쪽이 서늘해질까.

필사는 문장을 베껴 쓰는 일만이 아니라, 문장을 바라보는 속도를 늦추는 일이 아닐까 싶다. 특히 김승옥 작가의 문장은 그 느린 속도와 잘 어울린다. 화려하게 감정을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인물의 마음을 어느 순간 독자에게 옮겨놓는다.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 풍경 안에는 사람의 마음이 들어 있고, 아무렇지 않은 대화처럼 보이는 문장 속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고독과 불안이 배어 있다.

그래서 《무진기행》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도 역시 ‘안개’다.
작품 속 화자는 무진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무진 Mujin 10km’라는 이정표를 바라본다.

🔖“그것은 옛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길가의 잡초 속에서 튀어나와 있었다.”


이 문장을 읽으며 ‘옛날과 똑같은 모습’이라는 표현 속에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달라지지 않은 장소와, 그곳으로 돌아가는 사람의 마음이 겹쳐 있는 듯했다.

무진은 지명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화자가 잠시 현실에서 벗어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는 공간처럼 느껴진다. 서울에서의 삶에서는 애써 외면했던 감정들이 무진이라는 낯익은 장소에 도착하면서 하나둘 떠오른다. 그래서 무진의 안개는 실제 날씨인 동시에 화자의 마음을 흐릿하게 만드는 감정의 상태처럼 읽힌다.

그런 의미에서 김승옥의 문장은 풍경과 심리를 따로 설명하지 않는다.
풍경을 보여주었는데 어느 순간 그것이 사람의 마음처럼 느껴진다.
이런 문장이야말로 시간이 지나도 쉽게 낡지 않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필사는 직접 펜을 쥐어야 하고, 한 문장을 끝까지 따라가야 하며,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기 위해 기다려야 한다. 마음이 급하면 오히려 잘 써지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필사가 가진 힘이 있는 것 같다.

눈으로 읽을 때는 ‘좋은 문장이네’ 하고 지나쳤던 문장을 손으로 쓰다 보면 단어 하나가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문장의 길이가 느껴지고, 쉼표 하나의 위치가 의식되고, 같은 뜻을 가진 여러 단어 중 작가가 왜 하필 그 단어를 선택했는지 생각하게 된다.

좋은 문장은 빨리 읽을수록 더 많이 얻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읽을수록 더 많이 발견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특히 김승옥의 작품은 문장의 표면만 따라가서는 놓치기 쉬운 감정이 많다.
[서울 1964년 겨울]을 보면 세 사람이 술집과 거리에서 나누는 대화가 특별히 극적인 사건으로 이어지는 것 같지 않으면서도 묘한 공허함을 남긴다.

그중에서도 🔖“우리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라는 안의 말은 오래 생각하게 만든다.

무엇이 거짓말이었는지 정확하게 규정하기 어렵다는 점이 오히려 인상적이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이야기를 건네지만 정작 자신의 진짜 마음은 끝까지 말하지 못한다. 대화하고 있지만 서로에게 닿지 못하는 사람들.

이것이 김승옥 작가가 포착한 인간의 외로움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외롭고,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서로의 마음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상태.
수십 년 전의 작품인데도 이런 감정이 낯설지 않다는 사실이 묘하게 서늘하다.

특히 마음에 오래 남은 부분은 아내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사내의 장면이다.
🔖“아내의 시체를 병원에 팔았습니다. 할 수 없었습니다.”

이 문장은 읽는 순간 오히려 너무 담담해서 더 무겁게 느껴졌다.
사내는 자신이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한다. 하지만 그 설명이 어떤 선택을 정당화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저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현실 앞에서 무너져버린 인간의 모습이 드러날 뿐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 🔖“아내는 어떻게 될까요?”

이 질문은 죽은 사람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지, 가난과 절망 앞에서 인간의 존엄은 어디까지 지켜질 수 있는지,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은 그 모든 일을 어떻게 견뎌야 하는지를 묻는 것처럼 느껴진다.

김승옥의 문장은 이런 장면에서 더욱 무섭다.
울부짖거나 감정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한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건네도록 내버려둔다. 그런데 독자는 그 담담한 말들 사이에서 더 큰 비극을 읽게 된다.

[역사(力士)]에서는 인간에게 주어진 힘과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시대가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서씨는 대대로 힘을 물려받은 역사였지만, 그 힘이 과거와 같은 의미를 갖지는 못한다. 한때 가문의 자랑이자 존재의 이유였던 힘이 이제는 공사장에서 조금 더 많은 임금을 받을 수 있게 해주는 능력으로 축소된다.

🔖“그것으로써 그들은 세상을 평안하게 할 수 있었고 자신들의 영광도 차지할 수 있었다.”

이 문장을 읽으며 ‘능력’이라는 것이 시대에 따라 전혀 다른 가치를 갖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시대에는 가장 중요한 재능이었던 것이 다른 시대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질 수도 있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능력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능력을 인정해주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역사]는 한 힘센 남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시대의 변화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잃어가는 인간에 관한 이야기처럼 다가온다.

[건] 역시 어린 시절의 기억과 전쟁이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게 한다. 특히 가족과 죽음, 두려움과 호기심이 뒤섞이는 장면에서는 어린 화자의 시선이 상황을 더욱 생생하게 만든다. 작가는 한 가족. 몇 명의 사람. 그 작은 세계 안에서 시대의 공기가 느껴지게 만든다.


《무진기행 필사북》에 실린 네 작품을 필사하며 배운 것은 김승옥의 문장을 통해 ‘문장을 바라보는 눈’ 즉,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었다.

평범한 대화에서 고독을 발견하고, 안개에서 인간의 마음을 읽고, 힘을 가진 사람에게서 시대의 아이러니를 바라보고,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전쟁과 죽음을 바라본다. 그래서 필사를 통해 문장을 그대로 따라 쓰는 데서 끝나지 않고, ‘작가는 왜 이것을 보았을까?’라는 질문까지 함께 따라가게 된다.

한 문장을 쓰면서 한 번 더 바라보고,
한 장면을 옮겨 적으면서 한 번 더 생각하는 것.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좋은 글을 쓰는 법 이전에 좋은 문장을 알아보는 눈, 그리고 사람을 조금 더 섬세하게 바라보는 눈이 생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김승옥의 작품에는 ‘젊음’이라는 감각이 있다. 하지만 그 젊음은 마냥 찬란하지 않다. 불안하고, 외롭고, 때로는 무책임하며, 현실과 타협해야 한다. 그래서 지금의 시대에도 낯설지 않다.

《무진기행》을 읽고 난 뒤 마음에 남은 것은 안개가 걷힌 뒤의 선명한 풍경이 아닌, 안개가 걷힌 뒤에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흐릿함이다.

나는 무엇을 피해 살아왔는지,
어떤 순간에는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지금의 삶에 정말 만족하고 있는지.

후반부에 자신과 약속하듯 되뇌는 장면도 오래 남는다.
현실로 돌아가려는 사람의 결심과, 동시에 자신이 무엇을 놓고 가는지
알고 있는 사람의 마음이 함께 들어 있는 듯하다.

어쩌면 누구나 마음속에 하나쯤의 ‘무진’을 가지고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잠시 도망치고 싶은 곳, 과거의 나를 다시 만나게 되는 곳,
현실에서는 외면했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는 곳.
그리고 결국 다시 돌아와야 하는 곳.

이 책의 진가는 필사가 끝난 뒤에 있을 것 같다.
처음에는 작가의 문장을 따라 쓰지만, 마지막 장을 넘길 때쯤에는
그 문장 사이사이에 나의 시간이 함께 들어가 있을 테니까.

같은 문장을 쓰더라도 그날의 기분에 따라 글씨의 속도가 달라지고, 어떤 문장에서는 펜이 잠시 멈출 것이다.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던 한 문장이 어느 날에는 유난히 마음에 걸릴 수도 있다.

그렇게 한 줄 한 줄 써 내려간 시간 자체가 또 하나의 독서가 된다.

눈으로 읽고 지나가는 대신 손으로 한 문장씩 붙잡아 보는 것.
옮겨 적으며, 문장의 리듬뿐 아니라 그 문장이 품고 있는 외로움과 쓸쓸함,
인간에 대한 애정까지 천천히 들여다보는 것.

그리고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책 속 김승옥의 문장과 함께 나 자신의 시간도
한 권의 책 안에 남아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독서가 아닐까.

김승옥 작가의 문장은 읽고 나면 안개처럼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안개처럼 마음 어딘가에 오래 머무는 문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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