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기행 필사북 - 이동진 평론가 추천! 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 역사, 건
김승옥 지음 / 스타북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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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물은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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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 작가의 문장을 읽는다는 것은
오래된 풍경 하나를 다시 바라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분명 한 번 본 적 있는 풍경인데도,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마주하면 전혀 다른 표정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무진기행》을 비롯해 김승옥 작가의 작품들은 이미 한국 현대문학의 대표작으로 오랫동안 읽혀왔다. 나 역시 그의 작품을 ‘한국문학의 고전’이라는 이름으로 먼저 접하게 되지만, 이번 《무진기행 필사북》을 읽고 나니 김승옥의 문장을 읽는 것과 직접 손으로 옮겨 적는 것은 상당히 다른 경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으로 읽을 때는 한 호흡으로 지나갔던 문장이
펜을 들고 한 글자씩 따라가면 이상하리만큼 오래 머무르게 된다.

왜 이 단어였을까. 왜 여기에서 문장이 멈췄을까.
왜 이 장면은 이렇게 건조한데도 마음 한쪽이 서늘해질까.

필사는 문장을 베껴 쓰는 일만이 아니라, 문장을 바라보는 속도를 늦추는 일이 아닐까 싶다. 특히 김승옥 작가의 문장은 그 느린 속도와 잘 어울린다. 화려하게 감정을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인물의 마음을 어느 순간 독자에게 옮겨놓는다.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 풍경 안에는 사람의 마음이 들어 있고, 아무렇지 않은 대화처럼 보이는 문장 속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고독과 불안이 배어 있다.

그래서 《무진기행》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도 역시 ‘안개’다.
작품 속 화자는 무진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무진 Mujin 10km’라는 이정표를 바라본다.

🔖“그것은 옛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길가의 잡초 속에서 튀어나와 있었다.”


이 문장을 읽으며 ‘옛날과 똑같은 모습’이라는 표현 속에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달라지지 않은 장소와, 그곳으로 돌아가는 사람의 마음이 겹쳐 있는 듯했다.

무진은 지명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화자가 잠시 현실에서 벗어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는 공간처럼 느껴진다. 서울에서의 삶에서는 애써 외면했던 감정들이 무진이라는 낯익은 장소에 도착하면서 하나둘 떠오른다. 그래서 무진의 안개는 실제 날씨인 동시에 화자의 마음을 흐릿하게 만드는 감정의 상태처럼 읽힌다.

그런 의미에서 김승옥의 문장은 풍경과 심리를 따로 설명하지 않는다.
풍경을 보여주었는데 어느 순간 그것이 사람의 마음처럼 느껴진다.
이런 문장이야말로 시간이 지나도 쉽게 낡지 않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필사는 직접 펜을 쥐어야 하고, 한 문장을 끝까지 따라가야 하며,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기 위해 기다려야 한다. 마음이 급하면 오히려 잘 써지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필사가 가진 힘이 있는 것 같다.

눈으로 읽을 때는 ‘좋은 문장이네’ 하고 지나쳤던 문장을 손으로 쓰다 보면 단어 하나가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문장의 길이가 느껴지고, 쉼표 하나의 위치가 의식되고, 같은 뜻을 가진 여러 단어 중 작가가 왜 하필 그 단어를 선택했는지 생각하게 된다.

좋은 문장은 빨리 읽을수록 더 많이 얻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읽을수록 더 많이 발견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특히 김승옥의 작품은 문장의 표면만 따라가서는 놓치기 쉬운 감정이 많다.
[서울 1964년 겨울]을 보면 세 사람이 술집과 거리에서 나누는 대화가 특별히 극적인 사건으로 이어지는 것 같지 않으면서도 묘한 공허함을 남긴다.

그중에서도 🔖“우리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라는 안의 말은 오래 생각하게 만든다.

무엇이 거짓말이었는지 정확하게 규정하기 어렵다는 점이 오히려 인상적이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이야기를 건네지만 정작 자신의 진짜 마음은 끝까지 말하지 못한다. 대화하고 있지만 서로에게 닿지 못하는 사람들.

이것이 김승옥 작가가 포착한 인간의 외로움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외롭고,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서로의 마음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상태.
수십 년 전의 작품인데도 이런 감정이 낯설지 않다는 사실이 묘하게 서늘하다.

특히 마음에 오래 남은 부분은 아내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사내의 장면이다.
🔖“아내의 시체를 병원에 팔았습니다. 할 수 없었습니다.”

이 문장은 읽는 순간 오히려 너무 담담해서 더 무겁게 느껴졌다.
사내는 자신이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한다. 하지만 그 설명이 어떤 선택을 정당화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저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현실 앞에서 무너져버린 인간의 모습이 드러날 뿐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 🔖“아내는 어떻게 될까요?”

이 질문은 죽은 사람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지, 가난과 절망 앞에서 인간의 존엄은 어디까지 지켜질 수 있는지,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은 그 모든 일을 어떻게 견뎌야 하는지를 묻는 것처럼 느껴진다.

김승옥의 문장은 이런 장면에서 더욱 무섭다.
울부짖거나 감정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한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건네도록 내버려둔다. 그런데 독자는 그 담담한 말들 사이에서 더 큰 비극을 읽게 된다.

[역사(力士)]에서는 인간에게 주어진 힘과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시대가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서씨는 대대로 힘을 물려받은 역사였지만, 그 힘이 과거와 같은 의미를 갖지는 못한다. 한때 가문의 자랑이자 존재의 이유였던 힘이 이제는 공사장에서 조금 더 많은 임금을 받을 수 있게 해주는 능력으로 축소된다.

🔖“그것으로써 그들은 세상을 평안하게 할 수 있었고 자신들의 영광도 차지할 수 있었다.”

이 문장을 읽으며 ‘능력’이라는 것이 시대에 따라 전혀 다른 가치를 갖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시대에는 가장 중요한 재능이었던 것이 다른 시대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질 수도 있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능력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능력을 인정해주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역사]는 한 힘센 남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시대의 변화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잃어가는 인간에 관한 이야기처럼 다가온다.

[건] 역시 어린 시절의 기억과 전쟁이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게 한다. 특히 가족과 죽음, 두려움과 호기심이 뒤섞이는 장면에서는 어린 화자의 시선이 상황을 더욱 생생하게 만든다. 작가는 한 가족. 몇 명의 사람. 그 작은 세계 안에서 시대의 공기가 느껴지게 만든다.


《무진기행 필사북》에 실린 네 작품을 필사하며 배운 것은 김승옥의 문장을 통해 ‘문장을 바라보는 눈’ 즉,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었다.

평범한 대화에서 고독을 발견하고, 안개에서 인간의 마음을 읽고, 힘을 가진 사람에게서 시대의 아이러니를 바라보고,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전쟁과 죽음을 바라본다. 그래서 필사를 통해 문장을 그대로 따라 쓰는 데서 끝나지 않고, ‘작가는 왜 이것을 보았을까?’라는 질문까지 함께 따라가게 된다.

한 문장을 쓰면서 한 번 더 바라보고,
한 장면을 옮겨 적으면서 한 번 더 생각하는 것.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좋은 글을 쓰는 법 이전에 좋은 문장을 알아보는 눈, 그리고 사람을 조금 더 섬세하게 바라보는 눈이 생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김승옥의 작품에는 ‘젊음’이라는 감각이 있다. 하지만 그 젊음은 마냥 찬란하지 않다. 불안하고, 외롭고, 때로는 무책임하며, 현실과 타협해야 한다. 그래서 지금의 시대에도 낯설지 않다.

《무진기행》을 읽고 난 뒤 마음에 남은 것은 안개가 걷힌 뒤의 선명한 풍경이 아닌, 안개가 걷힌 뒤에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흐릿함이다.

나는 무엇을 피해 살아왔는지,
어떤 순간에는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지금의 삶에 정말 만족하고 있는지.

후반부에 자신과 약속하듯 되뇌는 장면도 오래 남는다.
현실로 돌아가려는 사람의 결심과, 동시에 자신이 무엇을 놓고 가는지
알고 있는 사람의 마음이 함께 들어 있는 듯하다.

어쩌면 누구나 마음속에 하나쯤의 ‘무진’을 가지고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잠시 도망치고 싶은 곳, 과거의 나를 다시 만나게 되는 곳,
현실에서는 외면했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는 곳.
그리고 결국 다시 돌아와야 하는 곳.

이 책의 진가는 필사가 끝난 뒤에 있을 것 같다.
처음에는 작가의 문장을 따라 쓰지만, 마지막 장을 넘길 때쯤에는
그 문장 사이사이에 나의 시간이 함께 들어가 있을 테니까.

같은 문장을 쓰더라도 그날의 기분에 따라 글씨의 속도가 달라지고, 어떤 문장에서는 펜이 잠시 멈출 것이다.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던 한 문장이 어느 날에는 유난히 마음에 걸릴 수도 있다.

그렇게 한 줄 한 줄 써 내려간 시간 자체가 또 하나의 독서가 된다.

눈으로 읽고 지나가는 대신 손으로 한 문장씩 붙잡아 보는 것.
옮겨 적으며, 문장의 리듬뿐 아니라 그 문장이 품고 있는 외로움과 쓸쓸함,
인간에 대한 애정까지 천천히 들여다보는 것.

그리고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책 속 김승옥의 문장과 함께 나 자신의 시간도
한 권의 책 안에 남아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독서가 아닐까.

김승옥 작가의 문장은 읽고 나면 안개처럼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안개처럼 마음 어딘가에 오래 머무는 문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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