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과 문명 - 숲이 물러난 자리에 새겨진 5,000년의 기록
존 펄린 지음, 안진이 옮김 / 더퀘스트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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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물은 더퀘스트 출판사로부터 #오퀘스트라 4기로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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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숲의 주인일까. 숲에 기대어 살아온 손님에 가까웠던 것은 아닐까."

역사를 배울 때 대개 인간을 중심에 놓는다. 누가 나라를 세웠고, 어떤 왕이 전쟁에서 승리했으며, 어떤 기술과 산업이 등장하면서 문명이 발전했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존 펄린의 《숲과 문명》은 그동안 배워왔던 역사의 무대에서 한 걸음 물러나 전혀 다른 질문을 한다.

그 문명이 살아갈 수 있도록 발밑에서 무엇이 타오르고 있었는가.
그 질문의 답은 ‘나무’다.

집을 짓고, 배를 만들고, 불을 피우고, 금속을 제련하고,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나무는 너무나 당연하게 사용되어 왔다. 너무 당연했기 때문에 역사에서 잘 보이지 않았던 존재이기도 하다. 문명의 눈부신 발전을 이야기하면서 그 발전을 가능하게 했던 숲의 소모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덜 이야기해왔던 것이다.

《숲과 문명》은 바로 그 보이지 않던 나무의 흔적을 따라간다.
중국과 인도,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해 크레타와 그리스, 로마, 아프리카, 지중해 세계, 베네치아와 잉글랜드를 지나 신세계의 아메리카까지.
서로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 등장한 문명들이 어떻게 숲을 이용했고, 그 숲의 변화가 다시 사회와 경제, 정치와 산업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연결해 보여준다.

읽다 보면 역사의 배경에 불과했던 숲이 어느 순간 역사의 중심으로 걸어 나온다.
그리고 그때부터 우리가 알고 있던 문명의 모습이 조금씩 달라 보이기 시작한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인류가 자연을 파괴하기 시작한 역사가 생각보다 훨씬 오래되었다는 사실이다. 흔히 환경 파괴를 현대 산업사회가 만들어낸 문제라고 생각하기 쉽다. 공장과 자동차, 대규모 산업과 자본주의가 자연을 무분별하게 이용하면서 지구의 균형이 깨졌다고 말이다.

하지만 책이 보여주는 역사는 훨씬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책의 초반부, 점토판에 새겨진 〈길가메시 서사시〉 대목을 읽으며 서늘한 깨달음을 얻었다. 우리는 흔히 자연을 무자비하게 수탈하고 파괴하는 행위를 현대 자본주의나 산업혁명 이후의 병폐로 치부하곤 한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문명의 시작점부터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평소 우리는 기후위기나 환경 파괴를 근대 자본주의나 산업혁명 이후의 부작용으로만 국한해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이 책은 그 통념을 단숨에 깨뜨린다.

영웅이라 불린 길가메시가 도끼를 들어 숲을 지키던 훔바바를 넘어뜨리고 거대한 나무를 쓰러뜨린 그 순간, 인류와 숲의 긴 전쟁은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나는 저 거대한 숲을 베어버릴 것이다”라는 구호는 지중해와 대륙 전체를 잿빛으로 물들인 탐욕의 선언문이었다. 메소포타미아부터 크레타, 키프로스, 로마, 그리고 잉글랜드에 이르기까지 문명의 부흥은 예외 없이 숲의 소멸과 궤를 같이했다.

이후 전개되는 청동기 및 고대 지중해 세계의 역사는 인간의 번영이 어떻게 숲을 먹어 치우는 '괴물'로 변해갔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키프로스섬의 구리 제련 광풍이나 로마가 은을 얻기 위해 이베리아반도에서 벌인 대규모 벌목 이야기를 읽을 때면 섬뜩함마저 느껴진다. 은 제련소를 돌리기 위해 400년 동안 무려 5억 그루 이상의 나무를 베어 넘겼다는 대목은, 인간의 부(富)라는 것이 결국 숲의 목숨을 담보로 한 거대한 물물교환이었음을 깨닫게 한다.

책의 절반 지점까지 읽어 내려가며 깨달은 것은 🤔"사회가 쇠퇴하면 숲은 되살아나고, 숲이 되살아나면 인간은 어김없이 다시 도끼를 들고 돌아왔다"는 잔인한 순환이다.

키프로스가 구리 생산 감소와 인구 줄어듦으로 쇠퇴했을 때 숲은 비로소 숨을 쉬며 되살아났다. 그러나 그 소나무 숲을 눈여겨본 로마는 다시 그곳을 제국의 자원 기지로 삼아 숲을 쥐어짜 냈다. 인류는 단 한 번도 숲과의 상생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적이 없었다. 숲이 고갈되어 문명이 무너지거나, 외세의 침략으로 생산이 멈췄을 때야 비로소 자연에게 '휴식'이라는 부작용적인 은혜가 내려졌을 뿐이다.

흔히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이겨냈다고 오만하게 말하지만, 역사 속 진실은 참담하다. 인간은 단 한 번도 자연을 전복한 적이 없다. 단지 "숲이 허락한 한계선까지 전진했다가, 숲을 말려 죽인 후 스스로 무너졌을 뿐"이다. 문명의 주인이 인간인 줄 알았으나, 실상 문명을 움직인 진짜 동력원은 그들의 발밑에서 타고 있던 나무였다.

중반부까지 읽어 내려가며 가장 오랫동안 가슴에 남아 묵직한 여운을 준 장면은 바로 미케네 문명의 쇠퇴에 관한 이야기였다. 신화 속 제우스가 대지를 쇠약하게 만든 인간들의 폭력에 분노하여 🔖"수많은 죽음으로 세상을 비우고" 지구를 회복시키기 위해 트로이전쟁을 일으켰다는 대목은 섬뜩한 경고로 다가온다. 비단 고대 그리스 전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숲이라는 울타리를 무너뜨린 현대 인류가 기후 이상과 바이러스의 역습을 받으며 스러져가는 현재의 모습과 너무나 똑 닮아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이 ‘문명을 발전시켰다’는 말에는 숲을 끊임없이 소비했다는 사실도 함께 들어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책을 읽으며 문명의 발전이라는 단어가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발전은 누구에게나 좋은 일이었을까.
인간에게는 발전이었지만,
그 발전의 밑바닥에서 사라진 숲에게도 과연 같은 의미였을까.


가장 무서운 것은 ‘숲이 사라지는 순간’보다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순간이다.
크레타, 키프로스, 로마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반복적으로 발견하게 되는 패턴이 있다.

처음에는 숲이 풍부하다.
풍부한 숲은 배와 집과 도구를 만들 수 있게 하고, 연료를 제공하며, 산업을 발전시킨다. 풍부한 자원은 경제적 번영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번영이 계속될수록 자원에 대한 수요가 증가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인간이 숲을 이용하는 속도가 숲이 회복되는 속도를 넘어선다.
처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숲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숲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줄어든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문명이 의존하고 있던 기반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숲의 감소는 산업의 쇠퇴와 자원의 부족, 경제의 변화, 정치적 영향력의 이동과도 연결됐다. 특히 키프로스의 사례는 오래 기억에 남았다. 숲이 산업을 키우는 원천이 되기도 하고, 그 산업이 다시 숲을 소모하면서 미래의 가능성을 좁히기도 한다. 그리고 산업과 인구가 줄어들면 숲이 다시 회복되기도 한다. 이 흐름을 보고 있으면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인간이 자연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문명도 자연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만 지속될 수 있다는 것.


책 속에서 특히 흥미로웠던 부분은 나무가 한 사회의 기술 수준과 경제력, 심지어 국가의 힘을 결정하는 자원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배를 만들려면 나무가 필요했다.
더 좋은 배를 만들면 더 멀리 항해할 수 있었다.
더 멀리 항해할 수 있다는 것은 더 많은 교역을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교역이 활발해지면 도시와 국가가 성장했다.

즉, 나무 한 그루가 배가 되고, 배가 무역이 되고, 무역이 다시 한 국가의 힘이 되는 연결고리가 만들어진다.
이렇게 생각하면 숲은 문명의 인프라였다.

잉글랜드의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왕과 국가의 권력, 목재 가격, 산업과 연료 문제가 서로 얽혀 있고, 숲을 둘러싼 정책이 정치적 갈등과도 연결된다. 나무가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경제적·정치적 자원이었던 것이다.

책 속에 소개된 다음 문장은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 얼마나 달랐는지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묘한 불편함을 남긴다.

🔖“참나무가 말끔히 없어진 것은 (…) 왕국의 발전이고, 목재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은 (…) 나라가 발전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다.”

숲이 사라지는 것을 발전의 증거라고 생각했다니. 상당히 충격적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지금 시대에도 완전히 사라진 사고방식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개발된 땅, 새로 생긴 도로, 늘어난 건물, 확장된 도시를 우리는 여전히 ‘발전’이라고 부른다. 그 과정에서 사라진 녹지나 훼손된 생태계는 발전의 비용이라는 이름으로 뒤로 밀려나기도 한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인간이 무엇을 '발전'이라고 부르는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나무를 아낌없이 써버리고 (…) 나무를 심는 데는 무관심한 것”이 “뭔가를 허물어버리려는 보편적인 충동”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보다 없애는 일에 더 빠르게 익숙해질 때가 있다. 오래 걸려 자란 것을 베어내는 일은 순간이지만, 그것이 다시 자라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숲도 그렇다.
한 그루의 나무가 자라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만,
그것을 몇 분, 몇 시간 만에 베어낼 수 있다.
그래서 숲을 보존한다는 것은 시간을 존중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당장의 편리함과 이익을 계산하지만,
나무는 인간의 계산 속도에 맞춰 자라주지 않는다.
그 차이가 숲과 인간 사이의 가장 큰 비대칭이 아닐까.

과거의 이야기를 읽는데 이상하게 ‘지금’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이 책의 가장 묵직한 부분은 고대 문명의 이야기가 끝난 뒤 찾아왔다.
과거의 문명이 숲을 소모했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처음에는 역사책을 읽는 기분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이야기가 현재의 이야기로 바뀐다.

기후위기, 산림 훼손, 생물다양성 감소, 물 부족과 같은 문제들은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오늘날의 환경 문제를 고대 문명의 산림 파괴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
현대 사회는 에너지 구조와 산업 규모, 인구 규모 자체가 과거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반복해서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지금 우리는 과거의 문명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데, 과연 그 지식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가?

과거의 사람들은 숲이 사라진 뒤에야 그 결과를 체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나무가 탄소순환과 물순환, 토양과 생태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 산림 훼손이 다양한 환경 문제와 연결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알고도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의 문제일 것이다.

《숲과 문명》을 읽으며 달라진 것은 ‘숲’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숲은 언제나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해주는 자원으로 여겨졌다.
목재를 주고, 연료를 주고, 배를 만들 수 있게 해주고, 농경과 정착을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이 책은 그 반대편을 보여준다.

- '숲이 사라졌을 때 인간이 무엇을 잃게 되는가.'

그 생각을 하다 보면 숲의 가치는 목재의 가격만으로 계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무 한 그루를 베어 얼마를 벌 수 있는가를 계산하는 것과 그 나무가 살아 있는 동안 만들어내는 환경적 가치를 계산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어쩌면 오랫동안 숲을 ‘자원’으로만 바라보면서 숲의 진짜 가치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계산해왔는지도 모른다.

숲은 인간에게 무언가를 제공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조건 자체를 만들어주기 때문에 중요한 것일 수 있다.


《숲과 문명》은
문명의 탄생과 성장, 산업의 발전, 교역과 전쟁, 국가의 흥망성쇠를 모두 숲이라는 하나의 연결고리로 바라본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나면 역사책에서 보이지 않던 빈칸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한다.

'도시, 배, 산업, 금속 등은 어떻게 만들 수 있었을까?'
그리고 결국,
‘그 에너지를 얻기 위해 무엇이 사라졌을까?'라는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이 질문 하나만으로도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꽤 달라진다.
역사의 주인공이 인간이었다면,
그 인간을 움직이게 한 보이지 않는 기반에는 숲이 있었다.

책을 읽고 남은 생각은 ‘숲의 경고’였다.
그리고 처음의 문장으로 다시 돌아가 본다.

문명의 역사를 인간의 성취로만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그 성취가 가능하도록 오랫동안 자신의 자원을 내어준 숲의 역사까지 함께 바라볼 것인가.

나는 후자의 시선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문명이 숲을 정복하면서 발전했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문명은 숲이 허락한 만큼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숲을 무한한 자원처럼 생각하는 순간 인간의 문명도 지속 가능성을 잃기 시작한다.
그래서 책을 읽고 오래 남는 감정은 거대한 경고 앞에 서 있는 듯한 묘한 불안감이었다.

과거의 문명들이 숲을 소모하고 그 결과를 겪었다는 사실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 역사를 알고 있는 우리가 같은 방향으로 걸어갈 가능성이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만 반드시 반복되어서는 안될 것들이 있다.
어쩌면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도 과거의 결말을 그대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얼마나 많은 것을 만들었는지보다,
무엇을 희생하며 그것을 만들었는지를 묻게 하는 책이었다.
그리고 문명의 진정한 발전이란
자연을 얼마나 많이 소비했느냐가 아니라
자연과 함께 얼마나 오래 살아갈 수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만든다.

책을 덮은 뒤 숲을 바라보는 눈이 조금 달라졌다.
예전에는 숲에 있는 나무 한 그루를 그저 나무 한 그루로 보았다면,
이제는 그 나무가 지나온 긴 시간과 그것을 둘러싼 수많은 생명,
그리고 인간 문명의 역사까지 함께 떠올리게 될 것 같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 지켜야 하는 것은
숲이 사라진 뒤에도 계속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던 인간의 오래된 착각인지도 모르겠다.

과연 역사의 반복되는 굴레를 끊어내고,
숲이 허락하는 한계 안에서 동존하는 지혜를 발휘할 수 있을까?

발밑의 나무를 모두 태워버린 뒤 뒤늦게 후회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지금이야말로 인류 전체가 숲의 목소리에 겸허히 귀를 기울여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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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ㅣ 네오 클래식
루이스 캐럴 지음, 보탬 옮김 / (주)열림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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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물은 열림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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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정해진 길을 따라 바쁘게 흘러가는 세상에서 벗어나, 어디론가 아득히 길을 잃고 싶어진다. 째깍거리는 시계 바늘 소리가 삶을 독촉할 때, 어릴 적 꿈속에서 만났던 비밀스러운 숲과 기묘한 토끼굴의 기억은 잊고 있던 순수한 호기심을 부드럽게 깨운다. 단단하고 단조로운 현실의 벽에 작은 균열을 내고, 상상이 법칙이 되는 아늑한 환상의 품으로 빠져드는 순간—그곳에서 우리는 익숙했던 모든 것이 새로워지는 아주 특별한 다정함을 마주하게 된다.

어릴 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그저 신기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토끼굴로 떨어진 앨리스가 몸의 크기를 마음대로 바꾸고, 말을 하는 동물들을 만나고, 이상한 다과회에 참석하고, 하트 여왕의 황당한 명령을 마주하는 모습은 어린아이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 다시 바라본 앨리스의 세계는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이번에는 이상한 것이 앨리스가 아니라, 오히려 앨리스가 살아온 ‘정상적인 세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오랫동안 고전으로 살아남은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이 작품은 환상의 세계를 통해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던 현실의 규칙을 뒤집어 보여준다.

앨리스가 처음 이상한 나라로 들어가는 계기도 재미있다. 언니가 읽고 있는 책을 바라보며 🔖“그림도 대화도 없는 책을 뭐 하러 보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앨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익숙한 세계의 바깥으로 한 걸음 나아간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상식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이 앨리스 이야기의 출발점인지도 모르겠다.
‘당연한 것은 정말 당연한 것인가?’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에서 끊임없이 질문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왜 저 사람은 저렇게 행동하는지, 왜 말은 말한 대로 이해되지 않는지 계속해서 묻는다. 그런데 이상한 나라의 인물들은 질문에 명확한 답을 주기보다 또 다른 질문이나 말장난으로 앨리스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특히 애벌레가 앨리스에게 🔖“너는 누구니?”라고 묻는 장면.
앨리스는 🔖“지금은 제가 누군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한다.

어릴 때는 몸의 크기가 계속 바뀌기 때문에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말처럼 읽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이 문장은 성장이라는 것 자체에 대한 질문처럼 느껴진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계속 변한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르고, 어떤 경험을 겪고 난 뒤에는 이전의 나로 완전히 돌아갈 수 없기도 하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얼마나 확실하게 답할 수 있을까.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에서 몸의 크기만 변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의 기준과 가치관, 언어에 대한 감각까지 끊임없이 흔들린다.
그래서 앨리스의 모험은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처럼도 읽힌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어린이를 위한 환상동화이면서 동시에 꽤나 철학적인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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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는 체셔 고양이다.
앨리스가 어디로 가야 할지 묻자 고양이는 어느 방향으로 가든 미친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말한다. 앨리스가 미친 사람들 틈에는 가고 싶지 않다고 하자 돌아오는 대답이 인상적이다.

🔖“여기 있는 우리는 모두 미쳤으니까.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처음에는 그저 재미있는 말장난처럼 느껴지지만, 곱씹을수록 묘하게 현실적인 문장이다. 흔히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고, 옳고 그름을 나누고, 다수의 기준에 맞는 것을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기준은 누가 정한 것일까.

이상한 나라에서는 오히려 우리가 현실에서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기준들이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혹시 내가 정상이라고 믿고 있는 것 역시 누군가에게는 이상한 것이 아닐까?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에서 느끼는 혼란은 결국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의 혼란과 닮아 있다. 회사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인간관계에서 우리는 수많은 규칙을 마주한다. 그런데 그 규칙들이 언제나 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원래 그런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받아들이곤 한다.
앨리스는 그것을 그냥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상하다고 느끼면 이상하다고 말하고, 이해되지 않으면 질문한다.
그 태도가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힘처럼 느껴졌다.

체셔 고양이가 사라지는 장면 역시 오래 기억에 남는다.
몸이 꼬리부터 사라지고 마지막에는 웃는 입만 남는다.
앨리스는 고양이는 없는데 웃음만 남아 있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참 이상하고 우스운 장면인데,
이상하게도 이 장면은 책을 덮은 뒤에도 계속 생각났다.

우리는 사람을 무엇으로 기억할까.
모습일까, 목소리일까, 함께했던 시간일까.
아니면 그 사람이 남겨 놓은 어떤 감정일까.
사람은 떠나고도 흔적을 남긴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오래 기억되기도 하고, 함께 웃었던 순간 하나가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마음에 남기도 한다.
그래서 ‘몸은 사라졌는데 웃음만 남는다’는 기묘한 이미지가 난센스 이상의 의미로 다가왔다.

사라진다는 것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때로는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
그 사람이 남긴 표정이나 말, 기억과 감정이 남는다.

앨리스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말장난이다.
🔖“까마귀는 왜 책상이랑 비슷하게?”
이 질문은 유명한 수수께끼처럼 등장하지만,
중요한 것은 정답이 존재할 것이라고 믿게 만드는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질문을 받으면 자연스럽게 답을 찾으려고 한다.
질문에는 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는
질문을 했는데 답이 없고, 답을 찾았다고 생각하면 또 다른 말장난이 기다리고 있다. 논리적으로 생각할수록 더 깊은 혼란에 빠지는 순간도 많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에서 이 작품의 매력이 생긴다.

모든 질문에 반드시 정답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때로는 질문 그 자체가 우리의 사고방식을 흔드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것.
사람들은 너무 자주 정답을 찾는 데 익숙해져 있다.
시험에서도, 일에서도, 인간관계에서도 ‘무엇이 맞는가’를 찾으려 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정답을 하나로 정할 수 없는 문제도 많다.
앨리스의 세계는 그런 사실을 아주 유쾌하게 알려준다.

하트 여왕이 등장하면서 이상한 나라는 더욱 난장판이 된다.
“저 애의 목을 쳐라!”라고 소리치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장면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묘하게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큰소리로 명령한다고 해서 그 명령이 반드시 정당해지는 것은 아니다.

작품 속 여왕은 끊임없이 명령하고 화를 내며 자신의 권위를 과시한다.
하지만 그 권위는 어딘가 허술하다. 명령은 무시되기도 하고, 재판은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않으며, 배심원들은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자기 이름을 잊을까 봐 이름을 적고 있다.

이 장면들은 웃기지만 그냥 웃고 지나가기에는 묘한 불편함이 있다.
사람 역시 현실에서 형식만 남은 규칙이나,
권위를 위한 권위와 마주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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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읽고 나면
‘이상하다’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상하다는 것은 반드시 틀렸다는 뜻이 아니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도 잘못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익숙한 규칙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힘이 될 수 있다.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에서 수많은 황당한 상황을 겪지만 그때마다 그냥 주저앉지 않는다. 끊임없이 묻고, 반박하고, 스스로 판단한다.
마지막에는 자신을 압도하던 이상한 세계의 권위에 맞서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그래서 앨리스의 모험을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한 아이의 성장 이야기로 읽고 싶다. 그리고 어쩌면 어른에게 더 필요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살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질문하는 것이 귀찮아진다.
‘원래 그런 거야.’ ‘다들 그렇게 해.’ ‘그게 사회의 규칙이야.’
이런 말에 익숙해지면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묻는 일을 멈추게 된다.
그런 우리에게 앨리스는 말없이 토끼굴을 가리키는 것 같다.

한 번쯤 익숙한 세계에서 벗어나 보라고.
그리고 내가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들을 다시 바라보라고.

우리는 얼마나 자주 ‘당연하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어쩌면 앨리스가 떨어진 토끼굴은 익숙한 사고방식에서 잠시 빠져나오는 통로인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 읽었을 때는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에서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다시 읽는다면 오히려 반대로 보인다.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에서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의 틀을 잃어버림으로써 새로운 시선을 얻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고.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난 앨리스는 어린 시절의 나에게는 없었던 질문을 남겨주었다.
이상한 것은 어쩌면 앨리스가 아니라, 너무 익숙해져서 더 이상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지금의 세계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책을 덮은 뒤에도 한동안 그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 남았다.
사라진 체셔 고양이의 웃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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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만난 소년
임홍순 지음 / 클래식북스(클북)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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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물은 #단맘 (@gbb_mom ) 님의 #르온서평단 을 통해
클북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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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홍순 작가의 《그림과 만난 소년》은 바로 그 말 이전의 마음에 다가가 가만히 손을 얹는 소설이다. 42년간 교직을 지키고 여든이 넘은 작가가 써 내려간 이 서사는, 기술과 효율이 인간을 앞지르는 현대사회에 '곁을 지키는 일'의 묵묵한 가치를 일깨워 준다.

이 소설은 42년간 교단에 섰던 노교사 이진석과, 상처를 품고 마음의 문을 닫은 소년 진영의 만남을 다룬다. 진영이는 학교에서는 따돌림을 당하고 집에서는 부모의 불화로 조용히 무너져가던 아이였다. 말이 거의 없는 아이가 상담실에서 늘 그리던 뿌리 없는 나무, 그 가느다란 연필 선은 아이의 외롭고 위태로운 내면을 그대로 투영한다.



​보통의 어른들은 그런 아이를 보면 조급하게 질문을 던지거나 문제를 ‘교정’하려 든다. 그러나 이진석 교사는 아이를 진단하거나 다그치지 않았다. 그저 곁에 앉아 색이 번지고 종이 위에 마음이 새어 나오기를 함께 기다렸다. 미술이라는 매개체는 말이 되기 전의 어두운 마음을 밖으로 꺼내어 세상과 연결하는 따뜻한 통로가 되어준다.

​학창 시절 그림 그리기를 싫어했던 교사 자신 또한 미술 치료를 통해 아이들의 내적인 치유와 잠재력을 발견하며 삶의 기쁨을 알아간다. 교사 역시 완벽한 구원자가 아니라 제자와 함께 성장하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세월이 흘러 빵 굽는 사람이 된 소년이 스승에게 전화를 걸어오는 구조는, 한 어른의 다정한 시선이 한 아이의 절망적인 새벽을 밝히는 온기가 되었음을 나직하게 증언한다.

​효율성과 성과가 중시되는 사회에서 우리는 상처받은 사람에게 너무 쉽게 '빠른 회복'을 요구하곤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사람의 마음이 아물기 위해서는 그저 아무 말 없이 옆에 머물러주는 단 한 사람의 온기, 그리고 스스로 싹을 틔울 때까지 기다려주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진리를 일깨워준다.


🔖"자기 마음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은, 한 사람의 바깥 세계와 안쪽 세계가 만나는 자리다. 그림은 가장 단순하면서도 풍부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이며, 그린 사람의 진솔한 고백의 언어다."라는 문장처럼, 그림은 소년이 세상과 다시 소통하는 통로이자 스스로를 치유하는 온전한 언어가 된다.

소설을 읽는 내내 마음을 울린 것은 '노교사의 시선'이 지닌 다정함이었다.
스승의 날 걸려 온 한 통의 전화로 20년 전 기억을 포개어 가는 화자의 회상은,
한 사람의 저녁이 어떻게 다른 한 아이의 새벽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 삶의 궤적을 그리며 살아간다. 때로는 타인과의 비교 속에 스스로를 무가치하다고 느끼거나 곁길로 새어 방황하기도 한다.

작가는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저마다 다른 길을 걷는다. 걷다가 머뭇거리기도 하고, 방황하며 곁길로 새기도 한다. 그러나 그 길은 내가 선택한 길이다. 걷다 보면 그 길이 세상 사는 이치를 가르쳐 줄 때가 있다. 이 세상에 무의미한 인생은 없다. 잠시 변방으로 벗어나 있을 뿐이다. 모든 꽃이 봄에만 피는 것이 아니다. 여름에도, 가을에도, 겨울에도 피는 꽃이 있다."라는 고백을 통해 늦게 피는 꽃의 고귀함을 나직이 읊조린다.

남들과 비교하며 조급해지기 쉬운 삶의 순간마다 마음을 가라앉혀주는 문장이다. 우리 사회는 너무 일찍 꽃을 피우라고 강요하지만, 변방으로 벗어나 방황하는 시간조차 인생의 이치를 배우는 과정임을 알려준다. 더디게 피어나는 꽃이 가진 귀함과 가치를 따뜻하게 감싸안아 준다. 소년 진영이가 끝내 뿌리 없는 나무 발치에 씨앗을 그리고, 훗날 빵을 굽는 따뜻한 어른으로 자라난 것처럼, 누군가의 묵묵한 믿음과 기다림은 한 생명을 구원하는 힘이 될 수 있다.


이 책의 문장들은 관념적이지 않고 자연과 사물에 닿아 있어 그 울림이 더욱 그윽하다.🔖"사랑도 비록 눈에 안 보여도, 한번 맺어지면 분명한 자리를 남겨요. 못을 박은 자리에 못 자국이 남듯이요. 이루지 못한 사랑도 그 자리는 남아요. 상처가 아물 때까지요."

상처도 사랑도 결국엔 선명한 자국을 남긴다는 이 문장을 읽으며, 마음속에 새겨진 숱한 흉터들을 가만히 쓸어내려 보게 된다. 치유라는 것은 상처가 없던 일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아픔의 자리를 온전한 사랑과 이해로 채워 마침내 아물게 하는 과정임을 깨닫게 한다.

🔖"사람과 집과 나무는 우리가 어릴 때부터 가장 가까운 대상이며 친밀감을 준다. 이들과 멀어질수록 우리는 무기력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것은 곧 사랑을 잃는 일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이 느끼는 만성적인 무기력과 외로움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날카롭게 짚어내는 대목이다. 가장 근본적인 관계와 안식처를 잃어버린 시대에, 다시금 사람과 자연, 그리고 '집'이라는 온기 속으로 돌아가야 함을 일러준다.


《그림과 만난 소년》을 읽고 난 뒤, 📌'뿌리 없던 나무 밑에 조용히 그려진 작은 씨앗 하나'의 잔상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연필 선조차 거미줄처럼 가늘었던 상처 투성이 소년이, 곁을 지켜준 한 어른 덕분에 스스로 희망의 씨앗을 그려 넣기까지 걸렸을 수많은 계절이 손에 잡힐 듯 떠오른다.


서두르고 가벼워진 세상 속에서 참된 사람과의 관계와 진정한 교육, 그리고 치유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금 짚어보게 만드는 다정한 안내서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다른 사람의 인생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지켜봐 줄 때, 뿌리 없던 나무 밑에도 마침내 작은 씨앗 하나가 움터 커다란 나무가 될 수 있음을 이 책은 증명한다.

한 사람의 저녁이 다른 이의 새벽을 밝혀주는 일.
가만히 이 문장을 여러번 입안에 웅얼거려 본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가슴속에 뿌리가 내리지 못한 채 흔들리는, 힘없는 나무 한 그루씩을 안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세상의 속도가 너무 빨라 마음의 겨울옷조차 채 벗지 못하고 휘청일 때, 필요한 건 그저 곁에 가만히 앉아 온기를 나눠주는 누군가의 무던한 기다림일 것이다.

살다 보면 말이 끝내 도달하지 못하는 깊은 마음에 다다를 때가 있다.
상처가 깊어 외마디 비명조차 내지 못할 때, 언어는 힘을 잃고 흩어진다.

​여든의 작가가 나직이 건네는 이 진심 어린 고백은, 제 계절을 찾지 못해 불안해하던 내 안의 작은 소년을 어루만져 주었다. 남들보다 조금 더디게 피어나도 괜찮다고, 길을 잃고 변방을 헤매는 시간조차 나만의 아름다운 원을 그려나가는 과정일 뿐이라고 말이다.

​언젠가 마음이 지치고 세상이 너무 눈부셔 숨고 싶어지는 날이 오면, 희뿌연 창호지 틈으로 번지던 그 은은하고 따스한 햇살을 다시 떠올릴 것 같다. 도화지 구석에 작게 틔워낸 그 씨앗처럼, 하루를 견뎌내는 각자의 가슴속에도 나직하고 다정한 새벽이 가만히 밀려오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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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다 거짓이야
대니얼 나예리 지음, 김래경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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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물은 해피북스투유 출판사의 #해북이 '2'기 로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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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때로 비극적인 현실에 맞서는 가장 고결한 무기가 된다.
대니얼 나예리의 《슬픔은 다 거짓이야》는 참혹한 상실과 망명의 길 위에서 자신의 존엄을 지켜낸 한 소년이 고대 페르시아의 신화와 개인의 기억을 엮어 쏘아 올린 경이로운 서사시다. 이 작품은 20세기 후반 이란이라는 격동의 역사적 현장과 고대 페르시아의 찬란한 신화적 상상력이 만나 빚어낸, 참혹한 현실을 돌파하는 가장 숭고한 문학적 투쟁이다.


소설을 관통하는 가장 비극적인 동인은 1979년 이웃한 이란 이슬람 혁명 이후 들어선 신정 체제의 엄혹함이다. 왕정 시대의 유복함과 학문적 자부심을 누리던 호스로의 가문은, 어머니 '시마'가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한순간에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 신정 통치하의 이란에서 이슬람을 버리는 배교 행위는 교리 위반 뿐 아니라, 국가에 대한 반역이자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중범죄였다.


이란을 탈출한 가족은 두바이와 이탈리아의 YMCA 난민 수용소를 거쳐 미국 오클라호마의 낯선 시골 마을에 불시착한다.
1980~9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과 정치적 탄압을 피해 고국을 떠나야 했던 무수한 망명객들의 디아스포라(Diaspora)가 주인공 호스로의 어린 발걸음에 그래도 축적된다.

미국의 교실 맨 앞줄에 선 열두 살 난민 소년에게 가해지는 시선은 냉담하다. 아이들에게 호스로는 그저 냄새나고 이상한 외모를 지닌 차별의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소년은 낙담하는 대신 고대 페르시아의 '다스탄(이야기, 전설)' 전통을 불러낸다.

뉴스나 통계로 접하는 '난민'이라는 단어는 한 개인의 개성과 수천 년의 문화적 맥락을 쉽게 삭제해 버리곤 한다. 하지만 작가는 천일야화의 전통처럼 과거와 현재, 상상과 현실을 번갈아 직조해 낸다. 이 과정에서 한 아이의 초라한 소외는 수 세대를 거쳐 내려온 페르시아의 매혹적인 다스탄(전설)과 맞물리며, 그 무엇으로도 훼손할 수 없는 찬란한 존엄성을 획득한다.

[천일야화]의 셰에라자드가 왕의 폭력 앞에서 밤마다 이야기를 엮어 생명을 연명했듯, 호스로 역시 자신의 존재가 통계 속 '난민'이라는 무미건조한 단어로 지워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가족의 역사와 페르시아 신화를 교실 안에 흩뿌린다.
스스로 🔖"조각보 같은 이야기는 난민의 수치다"라고 자조하지만, 이 파편화된 기억의 조각보는 낯선 이방인의 편견을 깨부수고,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 짓밟힌 개인의 진실을 증명하는 무기가 된다.

독자의 눈에 그 헝겊 조각들은 역설적이게도 이 세상에서 가장 찬란하고 촘촘한 문학적 직물이 되어 다가온다. 파편화된 삶을 꿰매어 타인에게 건네는 행위야말로 소년이 난민이라는 단편적인 라벨에 갇히지 않고 온전한 한 인간으로 존재를 증명해 내는 방식이다.

이 작품이 전하는 울림은 고통을 일차원적인 동정이나 슬픔으로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상처를 서늘하고도 감각적인 시적 언어로 승화시킨다는 점에 있다. 🔖"아바스의 눈물이 뜨거운 물처럼 오븐을 데웠고 아바스의 떨리는 손이 수의처럼 가볍게 페이스트리 크림을 저었다고 하지"라는 문장처럼, 슬픔과 비극은 달콤한 페이스트리의 향기, 끓어오르는 눈물, 고대의 전설과 뒤섞여 깊은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낸다. 상처를 부정하기보다 감싸 안는 이 은유적 언어들은 비극 속에서도 결코 잃지 않은 인간 삶의 온기를 증명한다.


작품 속에서 호스로의 가족이 정든 고향 재스민 향기의 도시 이스파한을 뒤로하고 밤중에 이란을 탈출해야 했던 이유는 거창한 정치적 야망 때문이 아니었다.
오직 자신의 양심과 신념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당신이 믿는 것에 삶을 쏟지 않으면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다는 거지? 살 이유가 뭐지?"라는 고백은, 제국의 강제된 율법과 국가의 폭력 앞에 목숨을 걸고 자신의 존엄을 선언한 한 인간의 서늘하고도 위대한 해방의 궤적을 그대로 보여준다.

압제와 위험 속에서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한밤중에 이란을 탈출해야 했던 어머니의 결단은 신념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된다. 우리가 타성에 젖어 외면하던 마음속 깊은 구멍을 직시하게 만들며, 안락함에 안주하는 현대인에게 진정 가치 있는 삶의 이유가 무엇인지 무겁게 되묻게 만든다.


​어떤 이야기는 한 개인의 생존기를 넘어 타인의 차가운 편견을 뒤흔드는 거대한 파도가 된다. 가혹한 비극과 상실은 분명 잔혹한 현실이지만, 기억과 이야기로 직조해 낸 인간의 존엄과 사랑 앞에서는 그 슬픔조차 영원한 승자가 될 수 없다. 거대한 역사와 기억의 흐름 속에서 슬픔이란 결국 지나가는 환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상실로 점철된 현실을 “슬픔은 다 거짓”이라고 거두어내는 힘은, 고통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자신만의 신화를 가슴속에 품고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거룩한 연금술이다. 작가는 비극이라는 잿더미 위에 신화라는 견고한 성을 쌓아 올림으로써, 한 인간의 서사가 어떻게 압제와 소외를 뚫고 찬란한 자유에 도달하는지 증명해 냈다.

​책장을 덮으며 밀려드는 강렬한 카타르시스는 역사라는 폭력 앞에서도 꺾이지 않은 한 가족의 결연한 의지, 그리고 슬픔을 기어이 아름다운 신화로 재조립해 낸 문학적 구원에 대한 깊은 경외감이었다. 소년 호스로가 쏘아 올린 눈부신 신화의 파편들은 이제 우리의 기억 속에서 오래도록 스러지지 않는 빛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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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의 시대 - EBS 다큐프라임
EBS 다큐프라임 〈주식의 시대〉 제작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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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물은 위즈덤하우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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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자는 결국 차가운 숫자가 아니라, 뜨겁고 부서지기 쉬운 인간의 심리 싸움’
- '역사는 늘 반복되었고, 무지한 광기 속에서 희생되는 것은 언제나 개인들이었다.'
- '1,500만 ‘개미’의 시대, 우리는 왜 여전히 불안한가.'


시대가 달라졌다. 과거 주식 투자가 일부 자산가나 전업 투자자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다면, 이제 주식은 대한민국 성인 3명 중 1명이 참여하는 보편적 일상이자 생존을 위한 교양으로 자리 잡았다. 지수가 거침없이 상승하고 AI라는 거대한 기술적 파도가 시장을 덮치는 한편, 여전히 수많은 개인 투자자는 "주가는 오르는데 왜 내 계좌만 파란불일까?"라는 서글픈 질문을 던진다.

EBS 다큐프라임 제작진이 엮어낸 《주식의 시대》는 냉철한 행동경제학 실험과 아픈 금융 역사의 기록을 통해, 우리 스스로의 투자 심리와 시장의 본질을 거울처럼 비춰준다.


책을 읽으며 가장 깊은 탄식과 함께 커다란 공감을 자아낸 대목은 1부에서 다루는 투자자들의 행동 패턴이다. 우리는 늘 스스로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투자자라고 착각하지만, 시장 앞에 서면 감정에 휘둘리는 취약한 존재일 뿐이다.
자본시장연구원의 분석 결과처럼 국내 개인 투자자들의 연 회전율이 1600퍼센트에 달하고 손실 종목은 붙잡은 채 이익 종목만 다급하게 팔아치운다는 사실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수익이 난 종목은 불안해서 단며칠 만에 팔아치우고, 손실이 난 종목은 '팔지 않으면 손해가 아니다'라는 자기합리화 속에서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현상.

책 속에서 하스경영대학원 테런스 오딘 교수가 지적하듯,
🔖"손실을 보고 팔면 기분이 나쁘지만, 갖고 있으면 '아직 손해를 본 게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는 강력한 심리적 동기가 돼요. 그게 핵심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익의 기쁨보다 손실의 고통을 2배 이상 크게 느끼기에, 손실을 확정 짓지 않으려 위험한 도박(물타기와 버티기)을 강행한다는 ‘손실 회피 편향’을 비로소 객관적으로 직시하게 되었다. 인간의 본성 자체가 주식시장에서 손실을 보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비정한 진실을 마주할 때, 서늘한 깨달음이 밀려온다.

또한, 주변의 핫한 정보나 커뮤니티의 소문에 솔깃해 주식을 샀던 경험에 대해서도 서늘한 경각심을 준다. 이관휘 교수의 실험 소개에서 언급되었듯 🔖"초과 수익을 얻으려면 15초가 아니라 2초 안에 사고팔아야 한다" 는 지적은, 이른바 '정보'라는 것이 이미 시장에 완전히 반영된 '뒤늦은 소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깨닫게 해준다. 단타와 소문, 커뮤니티의 정보에 의존해 매매 단추를 누르는 행위가 얼마나 승률 낮은 게임인지 통렬하게 깨닫게 된다.


책의 2부는 현재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AI 열풍과 기술주 과열 현상을 역사적 지평으로 확장한다. 17세기 네덜란드의 튤립 파동부터 19세기 영국의 철도 버블, 그리고 2000년대 닷컴 버블까지, 역사는 기술의 혁신과 인간의 광기가 결합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똑똑히 보여준다.

특히 19세기 영국 철도 버블을 다룬 에드워드 챈슬러의 지적은 인상적이었다. 런던과 피터버러 사이에 무려 세 개의 철도 노선이 깔리는 과잉 투자가 발생했고, 결과적으로 영국의 교통 인프라는 발전했을지언정 무수한 개인 투자자들은 파산했다.

🔖"사회 전체엔 이로운 결과가 나오지만, 몇몇은 돈을 벌고 많은 사람은 돈을 잃는다"는 닷컴 버블의 교훈은 오늘날 AI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AI라는 기술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명제는 참일지 몰라도, 그 혁신의 파도 위에서 '내 투자 계좌의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기술에 환호하되, 거품의 끝자락에서 남들이 폭탄을 돌릴 때 마지막 손님이 되지 않으려면 냉정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가슴 깊이 남는다.

책의 에필로그를 덮고 난 후에도 가장 오랫동안 가슴을 맴돌았던 구절은 마지막 장에 등장한 경고였다.
🔖"역사는 늘 '기술은 성공하지만, 성급한 투자는 실패할 수 있다'고 경고해왔다는 것을요. 기술에 환호하되 냉정함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버블의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투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어느 종목을, 언제 사느냐'라는 예측의 기술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 책이 전하는 진정한 지혜는 📌"투자란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 '보유'하는 것이며, 자신의 심리를 통제하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동기들과 커피를 마시다 주식으로 돈을 벌었다는 자랑에 🔖“어느새 제가 흔히 말하는 ‘벼락거지’가 돼 있더라고요. ‘내가 피땀 흘려서 번 돈만이 진짜 부富’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동기들과 커피를 마시는데 한 친구가 ‘주식 하나로 몇십만 원 벌었으니까 오늘 커피는 내가 살게’ 이러는 거예요. 그때 느꼈죠. ‘내가 너무 우직하게만 살았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주식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하고 느꼈다던 책 속 참가자의 고백처럼, 우리를 가장 흔드는 것은 시장의 변동성보다 남과 비교하며 생기는 포모(FOMO, 소외 불안) 현상이다.

열심히 노동하며 성실히 살아온 이들이 시장의 광기 속에서 자괴감을 느끼고, 결국 등 떠밀리듯 투기판으로 내몰리는 이 현실이 서글프게 다가왔다. 불안과 비교의 심리가 어떻게 보통의 사람들을 자본의 최전선으로 내모는지 보여주는 씁쓸한 단면이었다. 나 혼자 뒤처지는 것 같은 불안감에 등 떠밀려 들어간 투자는 결국 손실 회피의 늪에 빠지고 만다.


​이 책은 "당신은 왜 그 종목을 사려고 하는가?",
"당신의 마음속에 소외에 대한 공포(FOMO)와 헛된 희망이 있지는 않은가?"를 묻는다.

​투자의 세계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시장을 예측하려는 오만을 버리고, 내 안의 욕망과 공포라는 감정을 마주하는 것임을 말해준다. "이번엔 다르다"라는 거품의 유혹에 휩쓸리지 않고, 차분하게 거리를 두며 내 자산과 영혼을 지켜내는 지혜—이 책이 선물하는 가장 큰 교양이자 여운이다.

시장의 소음에 흔들릴 때마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서 탐욕과 공포가 솟구칠 때마다 이 책을 나침반 삼아 다시 꺼내 읽게 될 것 같다. 자신의 매매 패턴에 의문이 드는 초보 투자자부터, 요동치는 AI 장세 속에서 중심을 잃고 고심하는 베테랑 투자자까지, 이 책은 시장을 직시하고 나 자신의 심리를 제어할 수 있는 훌륭한 경제적 교양을 선사해 줄 것이다.

거품에 휩쓸려 잃는 자가 될 것인가,
시대를 읽고 내 자산을 지키는 현명한 주주가 될 것인가?
그 갈림길에 선 모든 분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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