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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타랜드
양기연 지음 / 열림원 / 2025년 8월
평점 :
#도서협찬
-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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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껍데기 아래, 노동·몸·돌봄의 맨얼굴을 들춰 보이는 연작.
유희의 가면을 쓴 노동의 얼굴, 축제의 조명 아래 반짝이는 파편—양기연은 20대 여성 청년들의 ‘살아낸 하루’를 가장 정확한 언어로 기록합니다.
《펜타랜드》는 “너희는 왜 이 세계를 이렇게 만들었니?” 대신 반복해서, 낮고 단단하게 되묻습니다. ⁉️“그럼, 나는 내 몸과 시간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사과를 거부하는 입술, 하루를 요구하는 메시지, ‘펜지타’ 영상 앞에서 휴대폰을 내리는 손. 이 작은 행위들이야말로 엔딩의 사이렌 이후에도 계속 울릴 현실의 신호입니다. 테마파크는 문을 닫아도, 우리는 돌아가야 합니다. 각자의 현장으로.
《펜타랜드》는 화려한 조명 아래 가려진 청춘의 그림자를 드러내는 소설입니다.
읽고 나면, 우리는 이렇게 질문하게 됩니다.
⁉️“나는 지금, 어떤 얼굴로 펜타랜드의 탈을 쓰고 살아가고 있는가?”
양기연 작가는 2022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문단에 데뷔했습니다. 심사위원들은 그의 작품에서 “남루하고 구차한 삶을 살아 내야 하는 사람들의 애잔한 하루를 절제된 감정과 소품의 배치로 잘 담아냈다"라고 평했습니다. 《펜타랜드》는 등단 이후 처음으로 선보이는 연작소설집으로, 현실보다 잔혹한 테마파크라는 공간을 무대로,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는 20대 여성들의 내밀한 목소리를 다룹니다.
‘펜타랜드’는 게임 '펜타월드 : 구원받은 세계'의 세계관을 구현한 테마파크입니다. 겉으로는 꿈과 유희의 공간이지만, 이곳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들에게는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일터이기도 합니다.
현실의 테마파크가 ‘환상의 세계’를 표방하면서도 노동자에게는 고된 육체노동과 불안정한 삶의 현장인 것처럼, 작품은 “환상과 현실, 놀이와 노동, 주체성과 객체성”이 충돌하는 아이러니한 공간을 정교하게 구축합니다.
작가는 테마파크라는 상징적 무대를 통해 젊은 여성들이 겪는 사회적 불안과 몸의 문제, 관계의 위계, 그리고 생존의 고단함을 조명합니다. ‘펜지타’ 사건처럼 놀이가 폭력으로 전도되는 장면은, 즐거움과 소비 뒤편에서 희생을 감내해야 하는 누군가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결국 《펜타랜드》는 독자에게 묻습니다. ⁉️“여성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고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테마파크는 원래 탈것과 불꽃, 음악과 셀카의 세계입니다.
양기연의 《펜타랜드》는 이 ‘유희의 공장’을 뒤집어 내부 배선을 보여줍니다. 번개를 다루는 요정의 나라부터 증기기관의 반도, 사막의 사이버 오아시스까지 화려하게 세계관을 확장하지만, 이 소설들이 끝내 내보이는 것은 세계관이 아니라 월간 근무표, 냄새 밴 탈, 뜨거운 인형 옷의 체온입니다.
작가는 누구의 어린 시절을 구원했던 게임 〈펜타월드: 구원받은 세계〉의 테마송 위에, 구원받지 못한 20대 여성 청년들의 ‘생존 소음’을 덧입힙니다.
펜타랜드는 “놀이”가 아니라 “일”입니다. 땅위에서 꿈을 굴리는 사람들은 인형 탈을 쓰고, 튤립 미로에서 끝없이 길을 설명하고, 매표창구에서 신분증을 확인하고, 워터 파크에서 익사 사고를 막습니다. 화자는 늘 ‘나’이되 매번 다른 ‘나’—인형 탈 알바, 매표소 직원, 라이프가드, 돌봄과 생계 사이를 오가는 딸—로 전환됩니다.
그들의 시간은 이벤트 일정표와 관객 동선에 맞춰 쪼개집니다. 익명성(탈)은 놀이의 조건이면서 동시에 폭력의 방패입니다. 코스튬의 익명성을 빌린 관람객이 NPC 아르바이트생을 때리고 달아나는 ‘펜지타’ 밈이 폭발하듯 유통되는 순간, 우리는 플랫폼 시대의 잔혹한 메커니즘을 봅니다—폭력이 유희가 될 때, 피해는 곧 콘텐츠가 됩니다.
작품은 이 폭력의 배후에 “믿고 싶은 사실만 고르는 심리”를 놓습니다. 천진우에 대한 ‘펜지타 범인설’이 번질 때, 화자는 다음 문장을 떠올립니다.
📌“천진우의 이야기는 단순하고 명확했다. 그러나 그건 그들이 원하는 사실이 아니었다.”
사실보다 ‘서사’가 빠르게 유통되는 시대, 진실은 타인의 욕망과 접속될 때만 힘을 얻는다. 이 가장 단단한 통찰은 테마파크라는 장치 위에서 놀랍도록 선명해집니다.
《펜타랜드》는 사과의 언어를 집요하게 묻습니다.
📌“고객은 항상 옳다”는 규율이 일상인 현장에서, 사과는 종종 생존의 문장입니다. 하지만 사과가 만성화될수록 자기 존중감은 침식됩니다. 동료 재상의 말은 소설의 축을 비트는 선언처럼 들립니다.
📌“죄송하지 않은데 왜 죄송하다고 말해야 해? 난 그런 취급 받을 사람 아냐.”화자는 그 말을 불편함과 부끄러움으로 받아 적습니다—
“그럼 나는 어떤 사람이기에?” 사과의 자동응답이 노동의 에티켓을 넘어 존엄의 경계를 무너뜨릴 때, 우리는 어디서 다시 선을 그을 수 있을까.
작가는 답을 서둘러 제시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경계에서 주저하는 몸의 감각을, 아주 세밀한 문장으로 오래 붙잡습니다.
연작의 중반부는 명료하게 여성의 몸과 결정권으로 이동합니다. 라이프가드 화자는 자궁 경부 손상 진단 직후에도 파트너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합니다. 불꽃놀이의 절정에서, 그녀는 난데없이 튄 📌“먼지라기엔 크고 딱딱한” 파편을 본다—보았지만 보지 못했던 것들의 돌출. 이후 문장은 묵직해집니다.
나는 누구에게, 어떤 권리로, 어떤 언어로 “아니오”를 말할 수 있는가.
폭죽이 하늘에서 터질수록, 화자는 ‘자기 몸의 서사’를 되찾기 시작합니다.
그 깨달음은 선언이 아니라, 아주 작은 감각에서 시작되는 자기 결정을 향한 회귀입니다.
이 책의 가장 잔잔하고도 아픈 악장은 모녀의 이야기입니다. 보육원-재혼-이부동생—생애의 조건들은 화자들을 계속해서 ‘가장 약한 연결 고리’ 쪽으로 밀어 넣습니다. 그럼에도 화자는, 성장하며 엄마의 말수가 줄어드는 이유를 이해해 버립니다.
📌“언제나 대답과 함께 한숨이 섞여 나왔고… 설거지를 하다가 그릇을 내려놓는 소리에 스스로 움찔할 만큼.”
돌봄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지만, 생계의 언어 위에 얹히면 쉽게 죄책과 눈치로 변질됩니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제안하는 여행지는 ‘펜타랜드’입니다. 그곳은 과거에 모녀를 이어 주던 게임의 실물 세계. 그러나 이 ‘순례’가 되돌려주는 것은 눈부신 구원이 아니라, 끝내 각자 감당해야 할 현실의 무게입니다. 그래서 더 설득력 있습니다. 구원은 없지만, 서로에게 마지막으로 건네는 정직한 정이 남습니다.
심사평이 지적했듯, 이 책의 미덕은 “화자의 절제된 감정, 삽화와 소품의 적절한 배치”입니다. 인형 탈의 열, 미로의 동선, 목공방의 유약, 매표창구의 이름표, 워터 파크의 사이렌—소품은 서사의 도구가 아니라 감정의 증거로 재배치됩니다.
연작 구조는 ‘다른 직군·다른 여성·다른 자리’의 시선을 겹겹이 포개며, 테마파크라는 단일 공간을 노동의 단면들로 쪼갭니다. 장면 전환은 빠르지만 감정은 절제되어 남습니다. 바로 그 절제가, ‘남루하고 구차한 삶’의 애잔함을 과장 없이 설득합니다.
작품 전반에 걸쳐 반복되는 전기·번개·불꽃의 모티프(감전사, 요정의 번개, 폭죽 파편)는 의미심장합니다. 누군가를 즐겁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빛은, 그 빛을 켜는 이들의 몸을 언제든 태울 수 있습니다. 《펜타랜드》의 빛은 그래서 아름답고 위험합니다.
결국 소설은 독자에게 되묻습니다.
⁉️“여성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펜타랜드》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보이지 않던 파편의 존재를 잊지 않는 것—그리고 언젠가는 그것을 피해 걷거나, 가리키거나, 치우거나, 최소한 ‘맞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독자에게는 “당연한 이야기”로 보일 수 있지만,
이 소설의 장점은 그 ‘당연함’을 삶의 실감으로 복구한다는 데 있습니다.
유희의 최전선에서, 여성의 몸·시간·존엄이 어떻게 가격표를 붙인 상품이 되는지 보여주는 소설. 절제된 문장과 정교한 설정으로, 당신의 ‘놀이’가 누구의 ‘노동’ 위에 서 있는지 끝까지 묻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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