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들의 혼잣말 - 일러스트레이터의 섬세한 시선으로 찾아낸 일상의 예쁨들, 그 따뜻하고 몽글몽글한 이야기
조선진 지음 / 니들북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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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또 하루에게 보내는 혼잣말

역시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는 다른 것일까?
언어의 형태 조차도 그림으로 보일때가 있다고 말합니다.

특히 접해보지 못한 언어일수록 문자보다는 그림에 가깝게 보이는데 외국인들이 한글의 'ㅇ'을 문자 말고 그림으로 인식해서 한글은 동글동글 귀영누 그림 같아요, 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일거라고 말합니다.

그러고보면 아랍어를 보면서... 지렁이 밖에 생각하지 못했던 저로서는 저자의 이 감성이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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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들의 혼잣말 - 일러스트레이터의 섬세한 시선으로 찾아낸 일상의 예쁨들, 그 따뜻하고 몽글몽글한 이야기
조선진 지음 / 니들북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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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누군가에게 보내는 세번째 혼잣말.
이번에도 그녀의 교토 여행을 함께 하고 홍콩 여행을 함께 하며 도란 도란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봅니다.

그리고 그림과 관련된 이야기하나
아빠가 자신이 태어날 때 그린 그림 ...
별거 아니 그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가 부여되는 순간 그 그림은 모나리자와도 바꿀 수 없는 그림이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 하루는 "작은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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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 1 - 조선 백성들, 참다못해 일어서다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 1
이이화 지음 / 교유서가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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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화약에 따라 농민군이 해산한 뒤 조정이 풀어야 할 시급한 과제였던 청나라와 일본 두 나라의 군사들이 물러나는 것! 그리고 호남의 평온함을 만들어야 할 전라감사에 김학진이 임명됩니다. "편의종사"를 요구한 김학진
여기서 편의종사란 수령이나 장수가 현지 사정에 따라 임금의 결재를 받지 않고 먼저 일을 처리할 수 잇는 권한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전주에서 해산한 농민군은 각자 살던 고장으로 돌아가 차분한 마음으로 지역의 폐단을 바로잡는 일에 앞장서게 됩니다.
전봉준은 농민군이 고을 단위로 폐정의일을처리할 대도소, 곧 집강소 설치를 독려하며 여러 마을을 돌아다닙니다.

집강소를 아시나요?

군현단위로 설치된 집강소. 이를 통해 농민군은 면, 리를 넘어 읍 단위 고을의 행정력까지 장악합니다. 전라감사 김학진과의 바른 의견 조율로 의견 일치를 보여가던 관군과 농민군. 김학진은 "함께 국나에 대처하기 위해 감사는 도인을 거느리고 힘을 합해 전주를 지키기로 약속하자"고 제의합니다.
김학진과의 유대를 바탕으로 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전개된 집강소는 수령들을 보조 또는 협조자로 끌어들인 농민통치기구였고, 반봉건운동에 초점을 맞추어 활동합니다. 이러한 집강소가 설치된 곳으로 김개남이 남원에 자리하면서 운봉과 금산 등지를 석권하였고, 손화중이 광주, 최경선이 나주에서 집강소를 운영합니다. 김인배는 순철을 김덕명은 금구의 집강소를 원평에 설치합니다.

평화롭게 잘 진행되면 좋았을 것을... 남원을 중심으로 임실, 장수, 무주, 운봉, 금산을 관할하던 김개남. 김개남은 노비, 백정, 승려, 장인, 재인 등이 중심인 "천민 부대"가 잇었는데 이들이 "양반과 상놈"의 구분을 없애는 데 있어 과격한 운동을 전개하게 됩니다. 지나가는 양반의 갓을 찢거나 폭력을 행사합니다. 완강한 반봉건 의지를 가지고 있던 김개남은 전라감사 김학진과의 타협도 거부하고 현직 수령들과도 마찰을 일으킵니다.


본디 집강소는 동학 교주 최시형이 포덕을 하면서 육임제를 만들어 각기 역할을 맡긴 데서 비롯된 것으로 종교 활동을 위한 일종의 점조직입니다. 농민군이 이를 변혁운동을 펼치는 곳으로 활용한 것인데 기층 민중에 의한 직접 통치기구로 성격이 바뀌게 됩니다. 농민군 집강소는 지방관의 역할을 대행하기도 하는데 조세, 공물, 군비 등 국가 수추의 징수를 수령 대신 담당했고, 형벌권을 행하였으며, 덕화를 펴고, 풍속을 장려하는 등의 일을 수행합니다.

농민군 집강소 기간 동안 도집강인 전봉준은 감사 역할을, 고을 집강들은 수령 역할을 대행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집강소의 농민군은 종, 상전, 백정, 양반, 남년노소 모두 예외 없이 서로 접장이라 부르며 만나면 맞절을 했습니다. 서로 동등한 호칭사용과 같은 자세의 절은 그들이 추구한 신분 해방과 평등의식의 진정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동등한 호칭을 통해 평등을 실현하고자 한 시도는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동무(토바리시)'를 사용한 것을 처음올 꼽는데 실제 동학과 동학농민군은 러시아보다 최소 20년 앞서 평등의 호칭을 사용한 것입니다.

이렇게 순조로와 보이는 집강소 활동에도 점점 먹구름이 드리우는데 그 원흉은 바로 일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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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 1 - 조선 백성들, 참다못해 일어서다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 1
이이화 지음 / 교유서가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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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의 첫 횃불이 시작된 곳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폭정에 대한 항거입니다. 1894년 1월 10일 밤, 예동의 공터에 농민군과 고을민 수천 명이 모여들어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죽창을 꼬나들며 임시 깃발인 석기를 들고 고부관아로 진격!! 군중심리는 계기가 생기면 한순간에 흥분해 발동하기에 이들은 전봉준의 지휘 아래 하나로 뭉쳐 11일 새벽 고부관아 동헌을 장악합니다. 잽싸게 도망간 조병갑.

전봉준은 고부 봉기를 발판으로 삼아 호남뿐 아니라 전국 전역으로 봉기를 확대하려는 구상을 세웁니다. 이어 무장에서 농민군 훈련장을 만들고 전면적 봉기를 결행하기로 합니다. 3월 20일 창의소라는 이름을 내걸고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순으로 서명하고 포고문을 발표한 농민군. 이 포고문은 민씨 정권을 향한 전면적 선전포고였고, 벼슬을 독점하고 특권을 누리는 양반 유림을 향한 질타였습니다. 무장읍성을 점령하고 4대 명의라는 행동 강령을 공포한 지도부! 이들이 세운 4대 명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고 가축을 멋대로 잡아먹지 말라.
둘째, 충효의 마음을 다하여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라.
셋째, 왜의 오랑캐를 섬멸하고 성스러운 길을 맑게 하라.
넷째, 군사를 몰아 서울로 들어가 세도가를 깡그리 없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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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 1 - 조선 백성들, 참다못해 일어서다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 1
이이화 지음 / 교유서가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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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은 1860년 몰락 지식인인 최제우가 "사람이 한울이다"라는 가치를 내걸고 창도한 종교입니다.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되 인간중심적 사화종교이며 나라와 시대의 모순을 고민하고 돕는 보국 종교라고 저자는 설명합니다. 신분계층의 차별과 민중의 고통을 너무나 잘 이해한 최제우가 제시한 기도문으로서의 주문은 다음입니다.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뜻은 "한울님을 모셔 조화가 정해짐을 길이 잊지 아니하면 온갖 일을 알게 되니라"라는 뜻으로 동학도들은 이 주문을 외워 마음의 안정을 찾고 주술적 힘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 주문은 최제우가 살아 있을 때 경주를 중심으로 경상도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누구나 함께 평등한 세상, 즉 '개벽 사상'을 제시했던 최제우는 "이단"으로 유교의 가르침을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1864년 대구에서 처형당하게 됩니다.

3월에 열린 원평 집회에서는 강경파인 남접의 지도자들이 주도하는데 그 중심에 녹두장군 전봉준이 있습니다. 원평집회에는 영광 불갑사, 장성 백양사, 고창 선운사 등 남도의 유명의 유명한 사찰의 승려들이 참여합니다. 유교사회에서 천대를 받았던 불교 세력도 함께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두 집회에 대해 정부는 미봉책으로 일관할 뿐 정세를 읽지 못합니다. 오히려 정세를 정화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은 일본입니다. 일본은 보은 집회를 보고 "동요는 1893년에 시작되었다"라고 외칩니다. 이들은 약장수, 유학생으로 위장한 첩자를 보냄으로써 민심의 동향을 더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왜 정부는 민심 동향 파악에 실패하고 오히려 외세가 더 정확하게 민심을 파악할 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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