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을 위한 철학 - 나를 짓누르는 삶의 중력을 거슬러 은총으로 나아가는 길
시몬 베유 지음, 한소희 엮음 / 구텐베르크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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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구텐베르크 출판사로부터 책을 지원받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한병철의 『신에 관하여: 시몬 베유와의 대화』를 읽고, 시몬 베유의 철학을 새로 눈을 뜨며 곧바로 문학과지성사 채석장 시리즈의 『중력과 은총』을 샀다. 내가 공감했던 건 한병철의 글이기도 하겠지만, 시몬 베유의 철학이기도 했으니까 꼭 원전을 읽어보겠다는 마음이었다. 오늘날의 세태를 덧붙여 시몬 베유의 철학과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한병철의 책과 달리 누구 하나 손대지 않은 순수한 상태의 텍스트와 영성적인 것이 어색했기 때문일까. 내게 『중력과 은총』은 다소 알듯 말듯 다가오는 책이었다.


지금 시몬 베유의 철학을 필요로 하는 이는 적지 않을 것이다. 고도로 발달한 소셜미디어와 무언가 놓치는 것을 두려워하는 현대인들의 기질이 바탕이 되어 숏폼과 릴스의 유행을 낳았다. 더 열심히 살아야 하고, 성과와 효율을 중시하는 사회적 흐름에서 누군가는 무기력을 느끼며 홀로 침잠하고 있을 것이다.


프랑스 몽펠리에 3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통계와 진단만으로 해소되지 않는 마음의 문제에 대한 답을 철학에서 찾은 심리치료사 한소희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현대인들의 번아웃 문제에 대한 답을 시몬 베유로 내놓는다. 구텐베르크 출판사를 통해 나온 신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을 위한 철학』이 그 책이다. 시몬 베유의 주요 저작물인 『중력과 은총』, 『신을 기다리며』, 『노동 일기』, 『뿌리내림』를 중심으로 현대 독자들이 쉽게 몰입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엮었다.


파리 최고의 엘리트 교수직을 내려놓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접 겪어보겠다는 신념으로 르노 자동차 공장의 프레스공이 된 철학자 시몬 베유는 약자에 대한 연민과 진리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스페인 내전에는 아나키스트 부대에 합류하여 전선에 뛰어들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투신하며 약자에 대한 연민과 진리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은 시몬 베유는 나치의 집권 하에 고통받는 유대인들과 함께하고자 스스로 음식을 거부하다 34세의 짧은 나이로 일기를 마감했다. 사후에 소설가 알베르 카뮈에 의해 원고가 정리되어 출간되었고, 베유만의 고통받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신비주의적 통찰이 많은 이들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중력'과 '은총'.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으로는 중력[重力]은 물리학 용어로 질량을 가지고 있는 모든 물체가 서로 끌어당기는 힘을 뜻하고, 은총[恩寵]은 높은 사람에게서 받는 특별한 은혜와 사랑을 말한다. 시몬 베유는 이러한 용어들에 더 높은 차원의 개념을 담아 이야기한다. 책을 엮은 심리치료사 한소희는 이러한 용어에 어려움을 겪을 독자를 위해 책 첫머리에 시몬 베유의 용어를 알기 쉽도록 정리한다.

이어지는 본문은 시몬 베유의 철학을 바탕으로 쓴 글들로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다소 어려울 수 있는 개념을 더 자세히 이해할 수 있게 도울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의 풍경과 사물들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엮은이보다는 지은이라고 해도 괜찮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가 세계를 해석할 때 자아가 닫혀있는 한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없다. 판단하려는 의지를 멈추고 내면을 공백으로 만들어 기다릴 때 정답은 찾아온다. 불행은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공포, 사회적 멸시가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총체적 파괴 상태를 낳는다. 시몬 베유는 불행을 통해 '나'를 구성하던 것의 허상을 보고 더 큰 실재를 만나며 영혼이 성숙해진다고 한다. 지적 겸손과 존재의 투명성을 회복하는 순간 진실을 마주할 수 있다. 이러한 시몬 베유의 철학들과 이를 바탕으로 짜인 엮은이의 텍스트는 견고했던 자아를 가졌던 탓에 더 고통스러웠던 순간을 떠올리게 만든다.


철학과 함께하는 심리치료사라는 이력이 눈에 들어온다. 정신병원에 입원하며 최악의 순간을 지낸 적이 있었다. 정신과 약을 한동안 먹었지만 약은 속 쓰림만 남겼고, 정작 정신적으로 성숙해진 것은 약이 아닌 책과 철학이었다. 당신도 치열한 삶을 살며 무기력한 시기를 겪고 있는가. 어쩌면 이 책이 그 고통을 해결하는 하나의 답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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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프루스트 - 삶의 슬픔과 희열, 위로와 예술을 알려준 우리들의 프루스트를 찾아서
김주원 외 지음 / 현암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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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릿터 49호, 『잠의 힘』에서는 10명의 소설가와 시인에게 「자기 전에 읽는 책」을 묻는다. 소설가 문지혁이 꼽은 책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였다. 문지혁은 자기 전에 읽는 책이란 모름지기 ①끝이 나지 않고, ②적당히 지루하며, ③그러다가도 어떤 순간엔 예기치 않게 섬광 같은 영감을 주어야 한다는 세 가지 요소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모두 충족하며, 읽고 있노라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게 아니라 내 시간을 잃어버리고 있다고 느낀다고. 그러면서 글을 읽는 독자에게 한 가지 유의 사항을 남기며 짧은 글을 마친다.


'책은 열세 권이지만, 한 권이면 충분하다.

어차피 당신은 영원히 스완네 집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다.

매일 밤 내가 그렇듯이.'


이 문장은 내겐 어느 정도는 맞고 어느 정도는 틀리다. 무수히 많은 등장인물과 늘어지는 만연체를 가진 이 소설을 나는 한때 꾸역꾸역 붙잡고 10권까진 읽었으니까. 하지만 여전히 13권까진 도착하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고 느꼈을 때 다시 1권으로 돌아와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읽었다. 그때를 떠올리면 뭔가 잡힐 듯 잡히지 않았던 독서 경험이었지만, 그래도 남는 건 있었으니 원전에서 파생된 글이나 프루스트에 관한 글을 마주할 때마다 '이 사람은 어떻게 읽었을까'하고 더 관심 있게 들여다보게 된다는 점이었다.


어느 무더운 여름밤 시작된 기획으로 열 명의 필자가 모여 각자 고유의 시선과 개성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풀어낸 책이 한 권 나왔다. 제목은 『나의 프루스트』.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을 보고 프루스트에 입문해 프루스트와 관련된 여러 저서를 쓴 유예진 교수와 인문학자, 문학연구가, 극작가, 피아니스트, 번역가 등의 전문가들이 함께 프루스트에 대해 이야기한다.


프루스트 읽기에 실패한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반가운 기획이 아닐 수가 없다. 길고 어려운 프루스트의 소설을 읽으며 내가 느낀 것들에 확신이 안 설 때도 종종 있었는데, 『나의 프루스트』 속 글에 공감하며 내가 느낀 모호한 감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 글이 봉준수 교수의 「길이를 화두 삼아」라는 글인데, 프루스트의 소설을 한 번이라도 도전해본 독자라면 '집요하게 내면에 천착하는 긴 소설'이라는 표현에 피식 웃음이 나오다가도, 그 만연체가 가지는 의의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동화인류학자 오선민의 「프루스트에게 배우는 일상의 글쓰기」는 프루스트가 그의 소설에서 일상의 어떤 것을 포착해 글감으로 삼았는지를 이야기한다. 

피아니스트이기도 한 김주원 교수의 「프루스트에게 피아노에 대해 배운 것」은 피아노나 클래식 음악에 문외한인 내가 프루스트의 책에서 피아노에 관한 텍스트가 나올 때 어떻게 읽고 생각하고, 무슨 음악을 들으면 좋은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프루스트를 읽은 지가 오래되었다. 애매한 지점에서 읽기를 중단해, 언제 다시 도전할까 고민이 되던 찰나에 만나게 된 책이다. 『나의 프루스트』 속 프루스트에 관한 십인십색의 다양한 글은 독자에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어볼 용기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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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는 되살아난다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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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사회파 미스터리가 꽤 오래전부터 존재했다지만, 나는 나카야마 시치리라는 작가를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아직 그의 모든 저서를 읽은 것은 아니나, 장기매매(『카인의 오만』), 사이비 종교(『라스푸틴의 정원』), 집단 따돌림(『가시의 집』)  등 사회문제가 들어간 그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현실감이 느껴져 더욱 흥미진진했던 기억이 난다. 특히 『카인의 오만』을 읽을 적에는 밀도 높은 핍진성에 '일본은 만화 그릴 때에도 취재를 열심히 한다던데, 나카야마 시치리도 이런 쪽으로 얼마나 취재를 다녔을까'하고 작가의 작업 과정에 호기심을 품기도 했었다.


그런 작가의 첫 작품은 어떨까? 최초의 작품을 본다는 건 설레기도 하지만 두렵기도 하다. 어쩌면 초기 작품이 꽤나 실망스러울 수도 있으니. 하지만 블루홀은 책 뒤편에 이런 문구를 실었다. '십 년 동안 독자들이 염원하던 전설의 명작!'이라고.


드디어 한국에 소환된 나카야마 시치리의 첫 작품.

출간 2주 만에 증쇄까지 찍은 『마녀는 되살아난다』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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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광경을 눈에 담은 순간, 마키하타 게이스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수사 현장에서 12년을 몸담으면서,
부패하거나 열차에 치여 절단되거나 처참하게 훼손된 시신을 수도 없이 봤지만
이렇게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은 처음이었다.

─ P.9

상상만으로도 눈을 질끈 감게 만드는 처참한 광경을 묘사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폭발이라도 한 것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살점과 뼈들. 피해자는 기류 다카시로 유류품에서 알 수 있는 단서는 그가 스턴버그라는 독일 제약회사의 사원이라는 사실뿐이다.

신원 확인을 위해 시체를 보여달라며 사건 현장으로 찾아온 약학대 3년생 마리무라 미사토라는 여성은 그 이후로 수사현장에서 계속해서 마주치고, 기류가 정기적으로 다니는 후지모리 치과에서는 그가 '그렇다면 저도 마녀의 후예입니다'라는 묘한 말을 했다는 증언을 듣는다. 수사본부의 추가적인 조사 중 드러난 사실은 기류의 가족이 모두 같은 날 사망해 기류가 4억 엔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생명 보험금을 수령했다는 것. 그리고 이미 일본에서 철수한 독일의 스턴버그 제약회사가 시부야와 신주쿠를 중심으로 퍼진 히트라는 새로운 약과 연결되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며 사건은 점점 미궁으로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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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잔인한 범행을 저지른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왜 그랬을까. 공격성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신종 ○약이 이 사건에 어떻게 영향을 미친 걸까. 등장인물들의 너무도 암담한 과거의 트라우마는 어떻게 사건과 연결되는 걸까. 기류가 치과에서 내뱉은 '그렇다면 저도 마녀의 후예입니다'라는 말까지 더해 온갖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하고 잔뜩 끌어안으며 읽었다. 이야기의 끝에 기다리고 있었던 건 의외의, 그러나 누구라도 납득 가능한 진상. 또 시치리 선생에게 당했구나 싶다가도, 마냥 절망적이지만은 않은 결말에 마지막에는 즐거워하며 책을 덮었다.

반전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도 스포일러라는 의견이 종종 보인다. 그런 까닭에 나카야마 시치리에 붙는 '반전의 제왕'이라는 칭호는 살짝 치워보면 어떨까 싶다. 그럼에도 '사회파 미스터리의 대가'라는 또 다른 칭호는 이 최초의 소설에서도 유효하다고 말하고 싶다. ○약과 제약회사의 어두운 이면을 살인사건과 멋지게 엮어냈으니까. '첫 작품이라서'같은 아쉬움 따윈 없이 강렬한 인상을 남긴 책이었다. 나카야마 시치리의 소설을 한 번이라도 즐겁게 읽었다면 『마녀는 되살아난다』 역시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지금의 시치리를 만든 초심을 확인할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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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치 앞의 어둠
사와무라 이치 지음, 김진아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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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저녁마다 친구와 공포영화를 보는 게 일상의 낙이었다. 『곤지암(2018)』으로 시작해 『온다(2018)』, 『악마와의 토크쇼(2024)』 등 국적을 가리지 않고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봤다. 지금은 서로 바빠져서 못 보고 있지만….
그때 봤던 공포영화를 생각하면 호러 장르의 책은 뭔가 아쉬울 때가 많다. 각자의 읽는 속도가 제각각인 탓에 점프 스케어도 무의미하고, 잔혹한 묘사 역시 독자의 상상력이 따라주지 않으면 그저 글일 뿐이다. 효과음은 잘못 쓰면 그저 웃기기만 하다. 물론 공포영화도 어설프면 시시하고 코미디 영화보다 웃기다. 그렇기에 더욱 생각해 볼 만한 질문이 아닐까?

'공포소설로 사람을 오싹하게 만드는 방법은 무엇인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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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보기왕>으로 제22회 일본 호러소설 대상을 수상하며, 'J-호러의 혁신'으로 불리는 사와무라 이치가 처음으로 초단편 괴담집을 출간했다. 21편의 짧은 이야기가 담긴 한 권의 책 제목은 『한 치 앞의 어둠』. 표제작 없이 제목만으로 이 괴담집의 성격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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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소】
'선빌리지 B동' 13층에서 14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중간의 층계참은 투신○살의 명소이다.
이곳에 대해 설명하는 누군가.
나는 설명을 들으며 그곳으로 따라가고 있는데,
이 사람은 이곳에 왜 이렇게 잘 알고 있는 걸까.

【수로】
초등학생 남자아이 세 명이 축구를 하다 그만 축구공을 수로에 빠뜨린다.
속을 들여다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결국 한 아이가 수로 속으로 들어가고….
잠시 후 들린 건 '으아악'하는 단말마와 함께 쑥 하고 떠오른 피투성이 축구공.
이 수로 아래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는 걸까.

【검푸른 죽음의 가면】
그 결혼식은 처음부터 이상했다.
정문은 아무리 애를 써도 열리지 않고,
카메라맨은 넘어져 얼굴 전체가 까졌으며,
요리사는 한 시간 동안 손가락을 세 번이나 베였다.
단순한 불행일까, 아니면 응보일까, 천벌일까.
신부의 죽은 옛 연인 A에 대한 소문이 그 결혼식에 유령처럼 감돌고 있었으니.

한 치란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매우 짧은 거리를 뜻한다. 그 앞에 놓인 어둠 같은 이야기들. 사와무라 이치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도대체 알 수 없는 상태로 독자를 극한으로 몰아붙인다. 꼭 종이에 적힌 대로만 행동해야 한다. 지시는 때론 의미를 알 수 없다. 규율을 어길 시 화자를 잡아먹을 듯한 무언가의 웃음소리와 불안에 떠는 화자의 감정은 거대한 폭의 낙차를 그린다. 정확한 정보는 아무것도 없고 금기나 추측만이 존재하는 불친절한 여백은 텍스트로 사람을 공포에 질리게 하는 방법에 대한 사와무라 이치만의 답변이 아닐까.

2ch 괴담 같은 짧은 괴담류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무조건 취향일 것이다. 한때 그런 글들을 미친 듯이 읽었던 사람으로서 스레드 괴담 특유의 맛이 느껴졌던 책. 텍스트가 주는 공포에 아직 희망은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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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만들기 - 성형외과의의 탄생
린지 피츠해리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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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열린책들로부터 책을 지원받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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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가나 성형외과 광고가 보인 지는 꽤 오래된 현상이다. 쌍꺼풀 수술은 수술 축에도 끼지 못한다는 우스갯소리부터, 요즘은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가볍게 상담도 가능하며, 중국의 성형 인플루언서처럼 되기 위해 중국을 가는 브이로그도 종종 마주칠 수 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어버린 건지 모르겠다. 내가 세상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을 때에는 이미 사회 분위기나 또래 집단에서도 미용 목적의 성형은 뭔가 당연한 느낌이었으니까.


더 완벽한 나를 위해 뼈를 깎고, 무언가 채워 넣는 이 '성형의술'이라는 분야는 처음에도 이런 형태였을까?


『수술의 탄생』이라는 19세기 영국을 중심으로 현대적 외과 수술이 등장하는 과정을 다룬 책을 썼던 저술가 린지 피츠해리스가 이번에는 <성형 수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외과 의사 해럴드 길리스의 삶과 성형 수술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책의 제목은 『얼굴 만들기』이다.


성형 수술에 관심이 있더라도, 해럴드 길리스라는 이름은 다소 생소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성형 수술의 아버지>보다는 당장 내 눈 코 입을 잘 만들어줄 의사가 더 중요할 테니.

19세기 말, 뉴질랜드 더니딘의 팔 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해럴드 길리스는 성형은커녕 리스의 병원에서 편한 보직을 얻고, 골프에 관심이 많았던 외과의였다. 심지어 자신의 인생 최대 업적으로 발레리나의 엉덩이에 박힌 뾰족한 가위를 빼낸 일을 수없이 언급하던 별 볼일 없는 그런 외과의였다.

한창 의사로 지내고 있을 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사이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고, 대공의 암살이 전쟁의 촉매가 되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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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끔찍하고 지독하며 이루 말할 수 없이 혐오스럽다.>


─ 『리버풀 데일리 포스트』


총, 탄환, 포탄만이 아닌 화학 무기까지 동원해가며 치러진 전쟁은 수많은 병사를 죽이고 다치게 했다. 몸통은 흙벽 아래로 숨기고, 머리만 살짝 내밀어 교전하게 되는 참호전의 특성상 많은 사람들은 얼굴에 치명상을 입었다. 초기 헬멧은 병사의 머리를 제대로 지켜주지도 못했다. 손상된 얼굴은 자신을 포함한 모두에게 공포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정신적 충격마저 안겨주었다.


/

팔다리가 절단된 사람들과 달리,

얼굴 특징이 훼손된 이들은 영웅 대접을 받지 못할 때도 있었다.

한쪽 다리를 잃은 사람은 연민과 존경심을 불러일으킬지 모르지만,

얼굴이 훼손된 사람은 거부감과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


대개 우리는 먼저 얼굴을 통해서 상대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린다.

얼굴은 성별, 나이, 인종 등 신원을 알려 주는 모든 중요한 요소들을 나타낼 수 있다.

성격도 드러낼 수 있고 서로 의사소통을 할 때도 도움을 준다.

사람의 한없이 다양하고 미묘한 표정은 그 자체가 감정의 언어이기도 하다.

그러니 얼굴이 지워진다면, 그런 주요 기표들도 사라질 수 있다.


─ P.24-25, 「프롤로그 · <사랑스럽지 않은 대상>」


성형이 아직 유아기에 있는 의학 분야였던 무렵, 길리스는 치과 의사 발라디에와 만나며 얼굴 재건에 치과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우고, 이는 길리스의 삶을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이끈다. 이 만남은 길리스가 얼굴을 그저 되는대로 복원하는 게 아닌, 단지 치료만 하는 게 아닌 눈 코 입의 주요 기능들까지 함께 복원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때마침 전쟁이 터지고, 수많은 얼굴 부상자를 전담하게 되며 성형은 현대 의학의 한 분야로 적법하게 자리 잡게 된다. 책은 그 역사를 담고 있다.


성형 수술에 대해 현대인들이 가지는 견해는 대체로 두 갈래로 나뉘지 않을까? 과하게 집착하거나, 강하게 비판하거나. 개인적으로는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그 답은 오로지 성형뿐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분위기에 부정적이었다. 책은 지금 이런 시기에서 잠시 떨어져 나와 전쟁으로 인한 최악의 상황에서 재건[再建]을 하는 성형 수술에 대해 알려주며, 성형 수술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든다. 무조건적이고 사회가 추구하는 미를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니지만, 인간에게 있어 얼굴은 꽤나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한 편의 영화를 보는듯한 린지 피츠해리스의 스토리텔링 기술 덕분에 <성형>에 대해 잘 모르고 관심이 없더라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다소 보기 힘들지라도 성형 수술을 통해 많이 나아진 병사들의 얼굴을 보며 지금도 성형 수술은 어디선가 누군가의 삶을 유의미하게 개선하고 있지 않을까. 새로운 관점에서 성형을 바라보게 하는 책. 성형이 일상으로 자리 잡은 지금 누구라도 한 번쯤 읽어봐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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