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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가는 길
이스마엘 베아 지음, 송은주 옮김 / 북스코프(아카넷)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이 책은 구입한지가 꽤 되었는데.. '집으로 가는 길'이란 제목 탓인지.. 꼭 '집으로 갈 때' 보아야지하고 아껴둔 책이었다..
아니.. 솔직히 고백하자면 대충 내용을 알고 있었기에 선뜻 펼치기가 힘들었던거였겠지만..
직접적인 관계도 없는 머나 먼 타국의 소년병들이지만..
뭐랄까..
나또한 제대로 되지 못한 '어른'이기에 그들에게 괜시리 미안한 마음같은것..
어쨌든 난 계획대로 고향집으로 가는 기차안에서 이 책을 보았었다..
매번 KTX를 타고 내려가곤 했었는데..
대구로 가는 두시간 남짓안에 다 못볼것 같아서 다시 새마을호로 바꾸었다..
단위시간당 기차가 나아가는 거리와 운임과의 상관관계를 놓고 계산을 해보면 새마을호가 상당히 비경제적이긴 하나 고향앞으로 3시간 40분은 이 책을 끊김없이 보기에 더없이 적절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새삼 알게 된 사실은 좌석은 새마을호가 오히려 더 편하다는것..
누구에게나 집으로 가는 길은 이렇게 편하다. 내게도 그렇다. 약간은 촌스럽지만 정겨운 풍경이 있고, 혼자사는 자취방보단 훨씬 더 넓고 쾌적하며 안락한 고향의 내 방이 있고, 무엇보다 집에가면.. '제대로 된' 밥이 있고..
그러다 생각해 본다. 그리곤 흠칫한다. 이 책의 저자인 이스마엘에겐 그 '집으로 가는 길'이 편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책 표지에는 바주카포 비스무리한걸 어깨에 둘러메고 대검이 장착된 장총 한자루 또 짊어지고 다 떨어진 쓰레빠를 질질 끌고 무표정하게 걸어가는 깡마른 소년병의 모습이 있다. 다시보니 저 표정은 무표정이라기 보단 뭔가를 체념한듯한 표정에 가까워 보인다.
둘 다 '소년'에게서는 볼 수 없는 표정인것만은 확실하다.
'전쟁이 시작된 그때.. 나는 겨우 열두 살이었다.'
나의 열두살을 돌이켜 본다.
그 땐 1985년 이었고 다가오던 86 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으로 대한민국이 들떠 있었으며.. 남북 상호간의 이산가족 상봉이 있었던 해였던걸로 기억이되며..
우리에겐 프로야구가 여전히 최고의 인기였었고 구창모의 희나리를 흥얼거리던 시절.. 이보희 누나의 어우동을 볼 수 없어 하루빨리 '어른'이 되고팠던 그 시절..
당시엔 흔치 않았던 8비트 애플 컴퓨터를 아버지께서 사주셨을 만큼 우리집도 잘살았고.. 우리나라도 희망찼으며 나 자신 조차도 하루하루가 행복했던 그 시절..
그리고 실제로 그 시절이 내 생에 가장 '뚱뚱'했던 시절이기도 했다..
무려 20년도 더 지난 시절의 이야기인데.. 믿기지 않게도 지금 21세기 아프리카나 동남아등지의 내전지역에서는 그 한창 토실토실하고 희망찰 시기여야 할 열두살 소년들이 소년병이란 이름으로 책 대신 총을 잡고 살아가고 있다니..
이 아이러니와 '뭔가 잘못됨'에 어찌해야하나..
이스마엘은 랩 음악을 따라부르기를 좋아하고 춤추기를 좋아하는 소년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팀을 만들고 그걸로 이웃마을 장기자랑에 참여하러 가던길에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그 이름도 생소한 '시에라리온'이란 나라. 내전이 발발한 것이다. 그리고 그 길로 이스마엘은 기약없는 먼 길을 떠나게 된다. 그에게 있어 다시 집으로 가는 길은 우리의 그것처럼 쉽고 편한것이 될 수 있을까..
지금은 뉴욕에서 제 2의 삶을 살고있다는 이스마엘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새삼 감동을 받으라고 강요하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냥 자신이 겪은 '전쟁'에 대하여, 또 그로인해 고통받는 자기와 같은 전 세계 30만 소년병의 참상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 아픈 기억을 더듬어 써내려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상대적으로 풍족한 열두살을 보냈던 필자에겐 그야말로 '깜짝놀랄 만한 것'들이었다. 또한 나보다 더 풍족한 시절을 보내었을 미국인들에게도 그 충격은 그대로 전해졌었나 보다. 그 해 뉴욕타임스 논픽션 베스트셀러 32주간 1위에 오를 정도로..
이스마엘 일행들은 처음엔 도망치기에 바빴다. 영문도 모른채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걸 목도했으니. 그러던중 이스마엘은 혼자 남겨지게 되고 이제부턴 생존의 시간이 시작된다. 사람이 먹을 수 있는것이라면 뭐든지 먹으면서 버티고, 멧돼지와 같은 짐승의 습격을 피해 평소에는 오르지도 못하던 나무를 손바닥 뒤집듯 쉽게 오르내리는 타잔의 경지에도 이르게 된다. 그러다 자기 또래의 또 다른 소년들의 무리를 만나고 어느날 이스마엘을 포함한 그들은 '소년병'이 되었다. 책 대신 AK-47, G3와 같은 총기를 손에 쥐고 정체모를 하얀 캡슐을 먹으며 그렇게 반군들과의 교전에 투입된 나날들이었다.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던 날.. 군인들은 공포에 떨고 있는 이스마엘에게 수십알의 그 하얀 캡슐을 주고 삼키게 했는데.. 알고보니 그 정체불명의 하얀캡슐은 '브라운-브라운'이라고 불리우는 마약이었다고 한다. (순간 새마을호에서 몸을 부르르 떨었던 필자)
그리고 그렇게 그 소년들은 살인병기로 점점 변모하게 된다. 매일밤 발전기를 돌려 람보와 코만도 같은 전쟁영화를 보고 마리화나를 피우며 총기를 손질하고 마약을 먹으며 아무 스스럼 없이 반군의 목을 대검으로 똑 따버리는.. 가족과 친구들의 죽음을 눈앞에서 겪은 이스마엘에겐 그 때 돌아갈 집도 가족도 없이 오로지 반군에 대한 증오심으로 그런 살인에 몰두하게 되고 사람을 죽이는 일이 물 한 잔 마시는 것처럼 쉬웠다는 경지에 이르렀을때 그는 '꼬마 중위'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대로 유니세프의 차량이 들어오고 이스마엘은 몇명의 소년병들과 함께 차출되어 무장을 해제하고 그들을 따라가게 된다. 그리고는 재활 치료에 참가하게 된다. 이미 살인병기로 변모해버린 소년병들에게 재활은 전쟁만큼이나 힘든 또 하나의 전쟁이었다. 더이상 마약을 구할 수 없어 금단증세에 힘들어 하는 아이들, 습관이 된 폭력은 재활기간중 수많은 사고를 치게 만들지만 그럴때마다 센터의 직원들은 한결같은 말로서 소년병들을 다독였다고 한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오랜 재활끝에 이스마엘은 자기가 랩음악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워크맨까지 선물해준 담당 간호사인 에스더 누나에게 마음을 열게된다. 그리고 기적처럼 자신의 남겨진 유일한 혈육인 삼촌의 가족과도 같이 살게 된다. 하지만 평범한 그 일상의 기쁨도 잠시, 다시 내전이 발발하게 되는데....
지금 이스마엘은 그 시절 유엔에서 내전지역 어린이들의 발표를 위한 회의에 참석했던 인연으로 뉴욕에서 고교과정과 대학을 졸업하고 국제 인권감시기구인 '휴먼 라이츠 워치'의 어린이 인권 분과 자문위원으로 활동중이라고 한다.
앞서 말한 표지의 소년처럼.. 그 표정의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고난의 시간을 건너오고 또 지금도 그런 악몽속에 빠져있는 소년들이지만, 그들도 알하지가 그랬던 것처럼 축구 유니폼에 광분하고 이스마엘이 그랬던 것처럼 최신 댄스가요에 흥겨워하는 평범한 소년들 아니겠는가. 무엇이 그 어린 소년들의 몸에 상흔을 입히고 정신에 지울 수 없는 살인의 추억을 남기고 가족도, 친구도, 또한 마땅히 아름다워야할 유년의 기억까지도 송두리째 앗아가게 만들었는가. 따지고 보면 다 어른들 잘못 아닌가. 무슨 이념이 어쩌네 종교가 어쩌네 이권이 어쩌네 등등..
앞 표지와 달리 뒷표지의 소년은 환하게 웃고 있다. 늦었지만 희망이란걸 알게 된 표정같다.
거기 우리나라 유니세프 친선대사였던 안성기씨의 감상도 적혀있다. 그의 말처럼 이 이야기는 비단 이스마엘 한 개인의 이야기는 아니다. 무려 30만이라고 하지않나.
띠지 맨 밑줄에서 '이 책의 판매 수익 중 일부는 유니세프를 통해 전 세계의 소년병들을 구제하는 데 쓰입니다'란 문구를 우연히 보았다.
오래전 일이지만 그 때 이 책을 안 빌려보고 돈주고 사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로 돌아가면 담배값을 좀 줄이고 소년병들을 도울 수 있는 다른 무언가를 찾아봐야겠다.
그것이 상대적으로 풍족한 열두살을 보내었던 '못난 어른'의 할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