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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있었다 - 그리고 다시 한 사람...
김종선 지음 / 해냄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지지리 궁상 또는 천년의 사랑
작년에 두 권의 로맨스 소설을 보았다. 이미나씨의 것과 이도우씨의 것. 두분 다 라디오 작가 출신이었는데 이 책 또한 '지현우의 기쁜 우리 젊은 날'의 작가인 김종선씨의 글이다. 왜 유독 라디오 작가들이 로맨스에 강한 것인가. 그 상관관계를 주제로 한 논문이라도 한 편 쓰고픈 욕망이 불끈 솟아난다. 각설하고 이 책에 소개되는 아흔 아홉개의 에피소드는 작가 자신의 창작의 산물일 수 도 있고 청취자들의 사연이 토대가 된 것일 수 도 있으며 우리 모두가 한번쯤은 겪어봤을 그런 이야기일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사랑이란 감정은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저마다에겐 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경험일테니..
매일 밤마다 우리나라 대한민국 누나들의 로망이라던 지현우씨의 낭랑한 음성을 통해 한반도의 밤하늘을 수놓았던 이 이야기들은 모두가 다 이별에 관한 아픈 이야기들이다. 그러고 보니 책 표지 조차도 백마를 타고 멀리 떨어져 서로를 바라보는 한 쌍의 연인이 보인다. 무표정한 남자의 모습은 그 거리만큼이나 서글프다.
내 헤어짐에 관한 기억들을 문득 더듬어 보았다. 첫번째 이별은 1992년 7월 25일 이었다. 날짜까지 정확히 기억하는 이유는 그날이 우리의 이별일이기 이전에 제25회 바르셀로나 올림픽이었기 때문이다. 불을 붙인 성화봉을 화살로 쏘아 올리고 그 성대한 개막을 알렸을때 세상은 환호하였다. 하지만 그 순간 지구 저편 단 두사람만은 남들처럼 신나게 박수를 칠 수 없었다. 그간 식혜에 밥알갱이 가라앉듯 서서히 균열이 가고있던 둘 사이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기로 한 날이 바로 그날 이었기에. 장소마저 대구광역시 소재의 앞산공원에 위치한 충혼탑이었다. 아아.. 호국선열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는 그 곳. 현충일에만 찾아가곤 하던 그 엄숙한 곳. 나는 그간 못다한 말들을 빽빽하게 적은 편지를 전해주었고 우리는 헤어졌다. 생생한 그 느낌을 살리기 위해 사투리로 서술하는 점을 양해바란다.
'날씨 억수로 덥네.. 팥빙수나 묵고 드가라..'
'아이다.. 됐따.. 니 혼자 마이 무라.. 내 미술학원가께 언니야들이 기다린다..'
'아라따.. 잘 묵고 잘 살아라..'
그래서 난 혼자서 팥빙수를 사먹었다. 그리고 당시에 개봉했던 '미녀와 야수'란 애니메이션을 혼자 보고 들어왔다. 스토리가 좀 복잡해 생략하지만 그 영화가 이별의 발단이 되었던 영화였기에. 수많은 연인들로 빽빽하게 들어찬 극장에서 난 내 생에 가장 '재미없는 영화'로 기억 된 영화를 보았었다. 하루가 지났다. 그런데 슬프지는 않았다. 눈물조차 안났다. 하지만 하루 종일 입안이 바짝바짝 타는 느낌이 들면서 밥을 못먹었다. 그 다음날 배달된 내 편지만큼이나 두툼한 한통의 편지를 끝으로 나의 첫사랑은 끝이났다. 그렇게..
덕분에 그 해 전기학력고사에서 난 대학엘 똑 떨어졌다. 그녀도 똑 떨어졌다. 헤어지고 반년동안 바로 윗동네에 살면서도 한 번도 마주친적 없었는데 하필 후기 시험치러 가서 우연히 마주쳤다. 우린 서로 생깠다. 그녀는 대학엘 가고 난 재수를 택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갔을때 그녀의 단짝친구와 초등학교 동창인 내 친구가 나에게 전해주었다. 'XX 남자친구 생겼다더라.' 그때 난 생각했다. 꽤 빨리 날 잊었는걸 이라고.. 지지리 궁상이랑은 참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은 이유는 이 책을 보았을 때의 첫느낌이 '참 지지리 궁상들이구나'였기 때문이었다. 아마 가까이 있었다면 난 독서와 사색을 권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내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걸 지지리 궁상으로 치부할 이야기인가하고 말이다. 첫 이별의 여파는 우리 둘다 데미지가 미약했으나 난 2년 후 꽤나 오랫동안 이별의 아픔이란것이 어떤거란걸 알게해준 사람을 만나게 되었더랬다. 그녀가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그 후로 난 다른 여자를 만나도 항상 길고 깊게 가지 못하는 관계만 연속되었다. 모든 비밀번호들은 그대로 그녀와 나사이에 관계된 숫자들로 채워졌다. 지금은 10년도 더 지난 일인데 바꾸면 헷갈릴까봐 그대로 그 번호들을 쓰고 있다. 이젠 얼굴도 목소리도 기억이 나지 않을만큼 잊었는데.. 이메일을 확인하러 로그인 할 때마다, 현금인출기에서 현금을 빼려고 비밀번호를 누를 때마다 그녀 특유의 '느낌'이 떠오른다. 웃기는 일이다.
내가하면 로맨스요 남이하면 불륜이라고 했던가. 위와 같은 내 증상을 난 '지지리 궁상'이라고 말하겠는가 아니면 그건 '천년의 사랑'이었다고 거창한 말로 포장하겠는가. 그래서 난 이 책을 보며 들었던 첫느낌인 '지지리 궁상' 이란 생각을 황급히 거두었다. 내 사랑이 아름다우면 그들의 사랑도 아름다운 것이므로..
책 속에서 보여주는 이별에 대처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사람이 다시 돌아오길 빌어보는 이도 있으며, 끝없이 저주하는 사람도 있고, 날 차버린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라며 더 멋진 사람으로 거듭나는 이도 있다. 하지만 전해주는 메세지는 한가지로 요약이 된다. 바로 '있을때 잘하자' 일것이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최선을 다하면 될것이고, 떠나간 사랑에 가슴아파하는 이가 있으면 웅크린 개구리가 더욱 더 멀리뛰듯 과거의 실수를 경험삼아 새로 다가올 사랑에 준비하면 될것이다. 이게 말처럼 쉬운것도 아니겠지만.. 그리고 또 그만큼 사랑이란 감정은 복잡한 것이겠지만..
사족을 하나 덧붙이자면 이 책에서 예전 남자친구를 그리워하는 각각의 대목들 중에 여자친구의 집에와서 에어컨 필터를 청소해 주는 남자가 총 세번 나온다. 난 내 에어컨 필터도 청소 안해봤는데.. 그래서 내게 새 여자친구가 안 생기는 모양인가 보다.. 미니홈피 제목 바꿔야겠다. 에어컨 필터 청소 해드립니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