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가는 것들 잊혀져가는 것들 - 그때가 더 행복했네 사라져가는 것들 잊혀져가는 것들 1
이호준 지음 / 다할미디어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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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가 더 행복했네

 

 

 

상경해서 처음으로 맞이했던 명절인 어느해의 추석이었다. 고향에 내려간다고 회사 어른들께 인사를 하는데 그 분들이 한결같이 건네던 인사는 '시골 내려가는구나'였었다. 그때마다 난 힘주어 대답하곤 했다. 대구는 시골이 아니라 광역시입니다라고. 그렇게 광역시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었던 필자이기에 내가 건네는 추억이라는 이름의 명함은 그다지 대단한 것이 못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조차도 훨씬 살기좋은 지금 보다는 '그때가 더 행복했네'라는 말에 공감하는 이유는 누구나 다 저마다의 가슴속에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두 글자 '고향' 때문이리라.

 


이 책은 기자 출신인 이호준씨가 그런 고향에 갈 때마다 '다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하나씩 늘어가는 걸 확인하면서 그 아쉬움을 기록으로 남겨둔 것이다.

 


'모두가 앞으로 나갈 때, 손끝이 닳도록 더듬거리며 뒤를 향해 걸었습니다. 빛의 속도에 적응해야 남들 꽁무니라도 따라간다는 시대에, 과거로 가는 끈을 잡고 있다는 건 고속열차에 앉아 우마차의 낭만을 꿈꾸는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양쪽의 괴리 사이에서 혼돈스럽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야금야금 맛보는 느림의 미학은 달콤했습니다. 마차의 삐거덕거리는 소리, 쇠똥 냄새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건 혼자만 누리는 행복이었습니다.'

(들어가는 글 中)

 


책을 펼치면 제일 먼저 제목처럼 이젠 사라져가는 것들인 원두막과 섶다리의 광경이 펼쳐진다. 그리고 저자의 참외서리에 관한 일화 한토막도 소개된다. 하지만 이제는 그 애교스러운 서리를 감행할 어린이들도 시골에는 남아있지가 않다. 그리고 그 참외나 수박들도 모두다 비닐하우스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렇기에 그걸 감시할 원두막도 이젠 점점 사라져 가고있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참 헛헛해지는 일이다. 언제였던가.. 25년은 족히 넘었을것 같다. 초등학교 시절 여름방학때 막내고모의 시댁어른들이 사시던 시골로 놀러간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원두막에서 먹었던 수박맛이 생각났다. 그 후로 난 그렇게 시원하고 맛난 수박을 먹어본 적이 없는것 같다. 길가던 나그네들도 잠시 머물러 수박 한조각 베어 먹으며 더위를 식히곤 했다던 그 원두막들. 그리고 사방이 탁 트인 곳으로 불어드는 청명한 바람. 냉 난방이 절묘하게 잘 이루어지는 구조인 초가지붕과 못을 사용하지 않아도 견고한 섶다리의 구조까지 우리 조상들의 생활 속 지혜를 곳곳에서 엿 볼 수 있는 것들이라 새삼 놀랍다.

 


그리고 보리밭과 물레방아에서의 로맨스, 자신만의 논을 갖기 위해 우직하게 산을 갈고 돌을 쌓아 다랑논을 만들었던 장부자댁 행랑아범인 한 촌부의 집념과 눈물, 학교도 가지않고 대장장이 수업을 받아야 했던 대장장이 조씨의 아들 만복이는 지금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며 살고있을까에 이르기까지 가슴 먹먹하고 애잔한 지나간 고향의 기억들이다.

 


두번재 장에서는 보다 필자의 기억에 또렷한 것들과 만날 수 있어 느낌이 남달랐던 장이었다. 달동네, 고무신, 시민아파트, 연탄, 손재봉틀, 도시락, 이발사 등등.. 겨울철이면 난로위에 올려놓던 양은 도시락통. 급식제로 바뀐 요즘 학교의 학생들은 그 '맛'을 못보고 지나쳐버린 슬픈 세대가 되어버렸다. 그 양은도시락에 계란후라이랑 김치, 밑반찬을 넣고 흔들어 먹는거라며 요즘 술집에서 안주로 팔더라만은.. 그러고 보니 미용실이 아닌 이발소도 요즘은 통 볼 수가 없다. 어릴때면 매번 그 깊은 이발소 의자에 푹 파묻혀 항상 이발사 아저씨께서 빨래판을 의자위에 얹어주시던 기억. 그리고 그 곳에서 처음 만났던 '썬데이 서울'의 그 강렬함.. 연탄을 가장 마지막으로 갈아 본 것은 군대 시절이었다. 필자가 근무하던 휴전선에는 당시에 보일러가 없었다. 큰 솥에 큼직한 연탄으로 물을 끓여 그걸로 씻곤 했었는데 맨 처음 밑불을 붙여 각 소대로 나눠주며 했던 인사계님(행정보급관)의 말이 떠오른다. '이 불이 꺼지면 너희들의 목숨도 꺼진다.'라던..

 


그 외 세번째 장에서는 전통혼례, 전통장례, 줄타기, 서커스, 굿 등의 잊혀져가는 무형문화에 관한 이야기들로 이루어져있다. 요즘같이 결혼식이 많은 계절에는 매번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저렇게 후딱 해치워버리는 식으로하는 결혼식이 '경건한 의식'으로서의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절차가 번거롭고 까다롭기는 하지만 하나하나 다 이유가 있고 경건함이 묻어 나오는 전통 혼례, 제례는 그 의식과 함께 그 정신마저 퇴색될까 사뭇 두려운 것들이었다.

 

 

그리고 네 번째 장에서는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오래된 얼룩처럼 지워지지 않는 것들에 대한 단상이다. 완행열차, 구멍가게, 옛날극장 등등.. 그 이름만 들어도 아스라함이 묻어 나는 것들.. 난 아직도 친구들과 마음껏 떠들며 여행할 수 있던 완행열차가 KTX보다 좋았다고 생각하고 덤하나 더 쥐어주는 동네 구멍가게가 생각나며 맨 앞자리에 앉아 하루에 몇번이나 같은 영화를 보아도 아무도 나가라고 말하지 않던 그 옛날극장이 그립기만한데..

 


누군가는 말했다. 추억은 녹지않는 사탕이라고. 보기만 해도 눈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자연의 정취를 담은 사진과 글들은 잠시 쉬어가는 여유를 전해주기에 충분했다. 항상 비슷한 또래들을 처음 만나 서먹할때면 옛날 얘기들을 하곤 했었다. 그것만큼 모두를 빨리 친해지게 만드는 것도 없었던것 같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가슴속에 지금은 사라져 가지만 결코 잊고 싶지는 않은 것들. 그 추억이란 녹지않는 달콤한 사탕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오늘은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물안개가 자욱히 피어오르는 그 원두막 사진이 그래서 더 아름답게 보였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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