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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유산
이명인 지음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스스로 용이 된 사람들
6년전이었던가..
아버지와의 한때가 떠오른다..
코리안 특급 박찬호 선수가 FA 시장으로 나왔을때 텍사스 레인져스와 5년간 6천5백만달러의 대박계약을 터뜨렸더랬다..
당시 환율로 나누어 계산하면 연봉이 150억에 공 하나를 던지는데 4백 몇십만원인 셈이라는 뉴스를 아버지랑 같이보았다..
그때 내가 말했다..
'전 다시 태어나면 박찬호로 태어날래요..' 라고..
내말을 듣고 몇초간 생각에 잠기셨던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박찬호 보다는 박찬호 아부지로 태어나는게 더 좋지않냐?? 박찬호는 힘들게 공 던져야되잖아..'
그 말씀을 듣고 한참이나 웃었던 내 기억 속 어느 아름다운 밤이었다..
박찬호는 스스로 용이 된 사람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스스로 용이 된 사람이 인정받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런 시대에 왠 고리타분한 양반 타령이냐고 되물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들어보시라..
왠만한 헐리우드 반전영화 뺨치는 우리 양반들의 그 은밀한 유산 얘기를..
때는 바야흐로 일제 강점기 시절 앙숙지간인 두 마을이 있었다..
전쟁에서 큰 공을 올려 양반 중에서도 갑족이 된 뼈대있는 고라실의 연암이씨..
큰 벼슬을 한 조상은 없지만 넉넉한 살림과 자식복이 많았던 너븐들의 안동김씨..
로미오와 쥴리엣 처럼 고라실의 종손 정우와 너븐들의 고명딸 난설은 서울 유학중에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가문의 반대를 뛰어넘어 그들의 애잔한 사랑은 이루어 질것인가..
하지만 그 시대가 어떤 시대였던가..
모든것이 불투명하던 그런 시대가 아니었던가..
유관순 열사도 까메오로 출연하면서 펼쳤던 독립운동으로 정우는 옥사하게 되고..
정우의 동생 영우와 정우의 모친인 백씨 부인 마저도 모두 차례로 숨을 거두게 된다..
그리고 대대로 손이 귀했던 고라실의 정우 아버지 연식은 유처취처(아내가 있는 사람이 또 아내를 얻음)하여 들였던 인화와의 관계에서도 대를 잇지 못하고 고라실의 종갓집은 그렇게 끝이난다..
너븐들의 다산의 상징이자 가보였던 목각원앙까지 훔쳐왔는데 말이다..
100년의 세월이 흘러 21세기가 되었다..
작은 게임회사에 다니는 너븐들의 후손 현진과 잘나가는 건설회사의 회장딸인 고라실의 후손 영인..
그들은 현진이 블로그에 올려놓은 족보 이야기로 우연히 만나고 서로에게 점차 호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정계와도 인맥이 너른 모 그룹과 혼인을 몰래 추진하고 있던 영인 아버지에게 철천지 원수지간인 너븐들 후손인 현진의 등장은 달갑지가 않다..
그리하여 현진이 다니는 게임회사를 상대로 사업적 압박을 가하게 되고..
이를 알아차린 현진은 자신으로 인해 두 집안간의 세혐의 역사가 되풀이 될까 점차 불안해진다..
한 세기가 지났지만 끈질기게 이어져 오는 숙명의 끈..
마지막 3부는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줄거리 요약은 생략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경탄을 금하지 못하였다..
그간 잘 보지 못했던 이명인 작가의 전작들을 찾아보기로 마음먹었을 만큼..
왜 제목이 은밀한 유산이었을까 그 이유가 드디어 드러나는 반전이었다..
솔직히 지금 시대에 자기 조상들이 양반이었다고 자랑하는 사람도..
또 그걸 부러워하거나 대단하게 쳐주는 사람도 거의 못 본듯 하다..
하지만 또 다른 이름의 '양반의식' 과 '대동보'는 존재하는것 같다..
그것이 재벌이든 고위 관료든 뭐든 간에..
우리가 살고있는 이 세상..
그리고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줄 이 세상은..
태생이 용이었던 자보다 스스로 용이 된 사람들이 인정받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작가의 말은 참 마음에 들었다..
'나의 조상은 서자였다.
태종이 아직 이방원이었던 시절, 나의 중시조는 태어나셨다.
용은 신성했다. 그건 믿음이었다.
생물학적으로 용은 용을 낳는다.
한때 개천에서 돌연변이 용이 나기도 했으나 개천은 모두 복개되었다.
시멘트 아래 고여 있는 개천에 호스를 박아 썩은 물을 뿜어 올리는 건 TV상자와 신화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
참, 씁쓸한 얘기다.
다시 말하고 싶다.
그러나 세상은 재미있고, 인간은 환상적 존재다.
복개된 하천이 느닷없이 열리면서 똬리를 틀고 있던 용이 날아 오르기도 한다.
지난번 밀봉되었던 청계천이 열리던 밤, 오랫동안 꿈을 잃지 않았던 몇 마리의 용이 하늘로 승천한 걸 나는 보았다.
또 열정의 땀방울로 스스로 웅덩이를 만들어 용이 되었다는 자가 여전히 나타난다.
사실 난 이 희망 때문에 산다. 꿈과 환상은 서자의 후손인 내 발바닥을 달군다.
내 중시조의 할아버지는 스스로 용이 된 사람이었다.'
- 작가의 말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