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표류기 - Castaway on the Moo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한 남자가 한강 다리의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서있다. 갚을 빚이 2억이 넘는다는 안내 전화를 끊으며 결심을 굳힌 남자 김씨, 다리에서 뛰어내린다. 그런데 이 남자,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다시 살아난다.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는 남자 김씨가 표류한 곳은 바로 한강의 밤섬. 생태보호구역으로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일명 '무인도'다. 바로 위 다리에는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고, 한강에는 유람선이 지나가며, 강 건너 편에는 63빌딩을 비롯한 하늘 높이 치솟은 빌딩숲이 있건만 그 누구도 절박한 그의 외침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분명 도시 안에 있지만 그 누구도 없는, 그곳은 무인도다.

절망에 빠져 다시 자살을 시도하려던 남자 김씨는 극심한 복통과 설사, 배고픔, 그 상황에서 느껴지는 샐비어(사루비아)의 달콤함 등 동시다발적으로 밀려드는 상황과 감정 속에 목놓아 운다. 그러다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죽는 일'을 조금 미루고 일단 살아보기로 결심한다. 한강물로 갈증을 이기고(바닷물이 아닌 게 천만다행!) 먹을 것을 찾아 밤섬 곳곳을 탐험한다. 시행착오 끝에 물고기나 새 등을 잡아 오랫만에 단백질도 보충하고 강물에 떠밀려 온 온갖 쓰레기들을 재활용하는 센스를 보이는가 하면, 부서진 오리배로 오랜 내집 마련의 꿈을 대체한다. 아무도 없는 밤섬에서의 '완벽하게 심심한' 생활에 적응하던 남자 김씨에게 어느날 한 줄의 메시지가 날아온다. 'HELLO'


한 여자가 컴컴한 방구석에서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마우스는 여러 개의 미니홈피를 순례하며 '모니터속 그녀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그것들을 자신의 미니홈피에 올리며 리플을 살핀다. 하루종일 싸이질에 여념이 없는 그녀, 여자 김씨다. 현실의 그녀는 3년 째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은둔형 외톨이다. 그러나 온라인에서는 다르다. 몇 번의 클릭만으로도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바꿀 수 있다. 미니홈피 메인에는 얼짱녀의 사진이 걸려있고 미니홈피 순례에서 발견한 명품 쇼핑 사진으로 순식간에 신상녀로 변신한다. 자신을 감출 수 있는 온라인은 여자 김씨에게 환상의 세계이자 또다른 현실이다.

미니홈피를 꾸미고 달사진을 찍는 일이 전부인 여자 김씨도 세상 구경을 할 때가 있다. 일 년에 딱 두 번, 사람들이 사라지고 온전히 조용해지는 그때, 바로 민방위 훈련 경보가 울리는 20분간이다. 경보가 시작되면 꼭꼭 닫아두었던 커튼과 창문을 열고 망원렌즈로 세상을 엿본다. 한산해진 길거리와 운동장, 한강 다리 등을 살피다 밤섬 어귀에 새겨져 있는 'HELP'를 발견하곤 화들짝 놀란다. 외계 생명체가 보내는 신호라고 생각한 여자 김씨는 조심스레 밤섬을 관찰하기 시작하고, 그곳에서 혼자 꼬물거리는 '변태' 외계인의 메시지가 'HELP'에서 'HELLO'로 바뀌던 날 그에게 리플을 달아주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녀로선 큰 용기가 필요한 오랜만의 외출을 감행한다.


이해준 감독이 돌아왔다. 그것도 아주 괜찮은 영화 한 편을 들고서. 사회적 약자들의 이야기를 유쾌한 웃음에 찡한 감동으로 버무려낸 <천하장사 마돈나>를 첫 데뷔작으로 내놓으면 관심을 한몸에 받았던 이해영, 이해준 감독. 이름도 비슷한 이 두 젊은 감독은 이후 각자의 영화를 준비했었다. 이해영 감독은 강풀의 인기 연재 만화 <26년>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를 준비중이라길래 언제 완성될까 궁금해하고 있었는데 얼마전 우익단체들의 압력으로 자금난에 빠져 촬영이 중단되기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전해져 참 안타까웠다. 다행히 이해준 감독은 자신의 새로운 영화를 들고 나타났다. 그것도 꽤나 참신하고 가슴 찌릿한, 남 이야기 같으나 사실은 우리들의 이야기인 그런 영화를 들고 말이다.

처음 <김씨표류기>의 시놉시스를 접했을 때 자연스레 톰 행크스의 주연의 <캐스트 어웨이 : Cast Away>가 떠올랐다. 무인도에 표류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두 영화는 꽤나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두 영화는 비슷한 듯 다르다. <캐스트 어웨이>의 척 놀랜드가 예기치 않은 비행기의 추락으로 문명과는 동떨어진 남태평양의 무인도에 떨어진다. 그저 망망대해만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와 달리 <김씨 표류기>의 남자 김씨는 냉혹한 사회에 등떠밀린 채 자살을 시도하다 도심 한가운데 존재하는 무인도 밤섬에 표류한다. 돌아갈 방법이 없는 무인도이긴 하지만 바로 눈 앞에 도시의 그것이 그대로 펼쳐져 있다. 안 보여서 못 돌아가는 것과 눈 앞에 보이지만 돌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 두 영화는 분명 다르다.

또한 척은 무인도를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벗어나야 할 공간으로 여기지만, 남자 김씨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밤섬에 머물기를 원한다. 산더미 같은 빚과 떠난 애인과 점점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로 여기게 만드는 강 건너 세상에서 벗어나 완전한 심심함 그 자체인 밤섬에서의 느린 삶에 남자 김씨는 점점 적응해가며 행복을 느낀다. 물론 외롭기는 둘 다 마찬가지지만. 그러나 머물고 싶든 그렇지 않든, 자의든 타의든 결국 그들은 다시 자신들의 자리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척과 김씨 모두 예전의 그들이 아니다.


'도심 무인도라이프'를 표방하는 <김씨표류기>는 도심 한가운데 있는 무인도라는 기발한 소재에서 시작한다. 이해준 감독은 한강 다리 밑의 밤섬을 내려다보다 이 영화를 구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서울 시민이 아닌, 그래서 아직 한강 주변을 제대로 돌아본 적이 없던 나는 한강에 '밤섬'이라는 생태보전지구 무인도가 존재하는지 이 영화를 통해 처음 알았다. 도심 한 가운데 있는 무인도라니. 영화를 보면서도 참 절묘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도심에 존재하고는 있으나 더이상 다가갈 수 없는 곳, 누가 있는지 알지도 관심을 갖지도 않는 곳. 무인도는 남자 김씨가 표류한 곳이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가 제각각 표류하고 있는 장소인 셈이다.

마냥 웃기는 영화일 거라 생각했는데 <김씨표류기>는 웃음과 함께 반성과 공감과 감동을 함께 버무려 주는 영화였다. 남자 김씨를 한강 다리의 끝으로 밀어낸 것은 무엇일까. 회사의 파산과 퇴직, 감당할 수 없는 빚과 대출 이자, 학력만 따지는 좁은 취업문 등 바로 우리 사회인 것이다. 이런 비정한 사회가 김씨로 대표되는 우리들을 하나씩 하나씩 벼랑 끝으로 몰아내고 있다. 한강 다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자신의 대출 빚을 듣거나 물에 빠져 허우적 거리면서 애인의 이별 통고를 듣는 남자 김씨의 처절한 모습 위에 우리들의 모습이 겹쳐지는 것은 그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밀려나 무인도 밤섬에 표류한 남자 김씨와 사회에서 따돌려져 온라인이라는 가상 세계를 표류하는 여자 김씨. 타인과의 소통을 포기하거나 거부하는 두 김씨가 조금씩 서로에게 접근해 소통을 시도한다. 그리고 짜파게티의 짜장 소스가 전해준 짜장면이라는 이름의 희망이 남자 김씨를 일으킬 때 그 희망의 바이러스가 여자 김씨에게도 전해진다. 그리고 여자 김씨는 남자 김씨를 만나기 위해 드디어 세상으로 발을 내딛는다. 세상에서 밀려나거나 거부당한 두 김씨가 서로를 향해 손을 내미는 장면을 통해 그들의 희망이 암울한 시대에 사는 스크린 밖의 우리들에게도 전해져 온다.

전작 <천하장사 마돈나>처럼 이해준 감독은 <김씨 표류기>에서도 사회적 약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우리 삶의 아픈 면을 건드리면서도 웃음과 배려를 잃지 않는다. 벼랑 끝에 몰려 자살을 택하지만 도심 속의 무인도 밤섬에 표류된 채 격리된 삶을 살게 된 남자 김씨를 온몸으로 열연한 정재영은 이 영화의 거의 모든 것이다. 웃음과 눈물, 감동과 희망을 그만의 색깔로 녹여낸다. 은둔자 여자 김씨를 연기한 려원 또한 특유의 환자 포스를 제대로 발휘하며 제몫을 해낸다.


<김씨표류기>는 도심 속의 무인도와 가상 세계에서 표류하는 두 김씨를 통해 우리 시대의 문제점과 아픔을 집어내면서도 끝까지 두 주인공들을 통해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리고 감독은 두 김씨를 통해 이 시대를 표류하는 우리들에게 힘을 내라고, 그래도 세상은 살만하다고 살며시 어깨를 두드려준다. 기발하고 참신하며 웃기면서도 감동적인 따듯하고 착한 영화, 그게 바로 <김씨표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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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io 2009-07-01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봤는데 님의 리뷰를 보니 다시 그 때 생각이 나네요. 무척 즐거웠었는데 이 글 역시 무척 재미있습니다. 좋은 시선으로 리뷰를 완성하셨네요. 리뷰 당첨 축하드립니다.

simple 2009-07-20 01:20   좋아요 0 | URL
부족한 글인데 재미있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답댓글이 너무 늦어버렸네요. ^^;
영화 무척 재미있었는데 의외로 흥행이 크게 안 되서 아쉽더라구요.
7급 공무원의 코믹함과 박쥐의 화제성에 조금 처지긴 해도 작품성은 못지 않은 영화인데..
보다 많은 이들과 만나지 못한 점이 내내 아쉬워요.
아, 그리고 축하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