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저편, 길을 나서다 -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여행이야기
안홍기 지음 / 부표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가끔 그럴 때가 있다. 나의 기억이 책이나 영화의 특정 장면과 우연처럼 겹쳐지는 경험. 물론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으로 서로가 공통점을 갖는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그러한 상호작용으로 그 경험은 더욱 특별한 추억이 되어 기억창고에 저장된다. 그리고 그 조각들을 들춰낼 때마다 기억과 영화 속 장면은 연쇄반응을 일으켜 쌍둥이처럼 함께 떠오른다.

철없던 내 스무살 시절, 별도 보고 청춘의 시름도 달랠 겸 밤산행을 자주 했었다. 보름달이 뜨던 밤 산에 올랐을 때, 손전등이 무색할 정도로 밝게 비추던 달빛 아래 마른 억새가 너무도 새하얗게 빛났었다. 그 정경을 보고 있자니 문득 이효석의 단편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라는 그 유명한 표현이 떠올랐다. 새하얀 억새밭은 정말 소금을 뿌린 것 같았고, 그걸 내리비추던 달빛은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래서 지금도 그날의 밤산행을 떠올리면 한 폭의 그림같던 정경과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 함께 떠오른다. 나의 추억이 소설 속 장면과 이란성 쌍둥이가 된 것이다.


처음 이 책을 펼쳐들었을 땐 영화 속 장소를 찾아다니는 여행길의 이야기들을 담아둔 책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건 나의 오해일 뿐, 이 책은 애초에 영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영화 속의 장소를 찾아다닐 마음 따윈 품지 않는다. 영화는 그저 추억을 환기하는 하나의 매개일 뿐이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제시되는 영화와 별 상관없는 장소에서 시작되고 전개된다. 그러나 그 속에서 일어나는 상황들은 어느새 영화의 그것과 흡사해진다. 그래서 영화는 그녀의 기억이 되고, 그녀의 추억은 영화 속 장면이 된다.

이 책에는 꽤 다양한 영화들이 나온다. <비포 선라이즈>, <쇼생크 탈출>처럼 무척 재미있게 봤거나 <화양연화>처럼 사뭇 심드렁했던 영화도 있고(물론 감명깊게 본 분들도 많으시겠지만;;), <바그다드 카페>처럼 너무나 유명하지만 아직 못 본 영화나 <화이트 마사이>처럼 제목조차 생소한 영화들도 끼여있다. 다행히 책에 나오는 영화의 절반 이상은 이미 본 영화여서 기억의 저편에서 떠올리는 영화에 대한 그녀의 느낌을 함께 공감하기에 크게 부족함은 없었다. 사실 영화의 내용을 몰라도 글을 이해하는데 큰 지장은 없다. 친절한 저자가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꽤 자세히 해주니까. 이야기의 끝엔 따로 지면을 마련해 간략한 영화 소개도 싣고 있다. 그녀의 글을 읽다보니 미처 몰랐던 영화들을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불쑥 고개를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은 제목부터 구성까지 '영화'와 '여행'이란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의지를 나타내지만 결과적으로 영화나 여행 중 어디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어중간하게 머물고 만다. 영화는 그 자체로 큰 비중을 차지하기 보다는 추억을 재구성하기 위한 매개로 작용하고, 여행은 뚜렷한 여행지와 동선를 통해 이야기를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영화와 연결되는 기억의 토막들을 끄집어 내어 나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글의 중심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 그래서 전체적인 밑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더불어 전체적으로 한 편의 시가 생각나는 감성적인 문체는 여행의 감상을 잘 살려주지만 때때로 너무 개인적인 감상에 젖어들어 추상적인 글로 변질되기도 한다. 영화를 여행에 녹이려는 시도는 좋았지만 곳곳에 아쉬움이 남는다.


<영화 저편, 길을 나서다>는 위에서 언급한 내 특별한 추억처럼 여행과 영화에 대한 저자만의 각별한 기억들을 담은 책이다. 저자가 여행길에서 만난 인연들에 대한 기억의 편린들은 영화와 겹쳐지면서 그녀만의 특별한 추억으로 거듭난다. 영화 속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그녀의 기억들이 너무 공감되어 푹 빠져들어 함께 가슴 설레거나 눈물 지은 글도 있고, 영화와 관련지으려는 에피소드가 조금은 억지스러워 보여 전혀 공감하지 못한 글도 있었지만 그녀의 여행 속 영화 이야기는 대체로 재미있었다. 영화와 여행, 두 가지 모두에 너무 욕심내지 않고 그저 조금씩 맛보겠다는 자세를 견지한다면 나름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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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1 19: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7-08-23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선정 축하드려요~~
여행 많이 다니시나봐요
저도 여유가 있을때 혼자 여행가고 싶네요^^
리뷰 잘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