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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지감의 화살은 늘 최악의 과녁에 가서 꽂힌다.
벼락이 늘 피뢰침으로만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비상들의 초록빛이 얼굴 한쪽을 비췄다. 눈을 뜨고 있었다. 커다랗게 벌어진 눈동자에 분노와 갈망이 펄떡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걸 봤다고 확신한다.
어두운 밤, 머리털을 엮어 열쇠를 창살 밖에 메달아 두었다
“미치광이는 미쳐야 사는데, 못 미치게 하니깐. 미쳐버린 것이다.”
길을 걷는게 아니라 꿈결을 더듬어 가는 기분이었다.
하늘은 미치도록 파랬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혹은 기억이 가져다준 ‘쓸쓸함’
‘안돼’와 ‘안해’사이의 괴리가 한 인간의 성미를 어떤식으로 건드리는가에 대해 설명하라면, 열 시간짜리 강의도 할 수 있다. 그냥 한마디로 하라고? 열받았다.
“고장나 멈춘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는 불멸의 진리.
무력감이 온 몸을 휩쌌다. 분노가 몰밀어왔다. 창살 하나였다. 창틀에 박힌 쇠막대기 하나였다. 그 차갑고 천박한 물건이 한 인간의 모든 것을 움켜쥐고 있었다. 박탈당한 자유로부터 생명까지.
정신병원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어요. 미쳐서 갇힌 자. 갇혀서 미쳐가는 자.
~~ 해석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해석하지 않는다고 의미가 없어지느 건 아니다. 달력을 보지 않아도 세월은 간다. 그 새삼스러운 진리를 승민이 일깨워주었다.
미술요법의 참여자격은 다음과 같았다. 미술을 이해할 수 있는 자. 미술을 이해하려는 자. 미술을 이해 못해도 사랑은 하는 자. 미술을 사랑 안 해도 손가락은 달린 자. 손가락이 없어도 발가락이 있는 자.
남자의 업보는 여자다.
대답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날개 꺾인 독수리의 절망은 오리의 이해 영역 밖이었다.
“가끔 궁금했어. 진짜 네가 누군지. 숨는 놈 말고, 견디는 놈 말고, 네 인생을 상대하는 놈. 있기는 하냐?”
꿈을 꿔요. 창문은 통로죠. 희망은 아편이고요.
해석하면 이런 말이다. 병원 창가에서 세상을 내다보며 퇴원을 꿈꾸고, 퇴원하는 날부터 퇴원을 꿈꿀 수 있는 병원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한다.
사람들이 병원 규칙에 열심히 순응하는 것은 퇴원, 혹은 자유에 대한 갈망 때문이다. 갈망의 궁극에는 삶의 복원이라는 희망이 있다. 그러나 그토록 갈구하던 자유를 얻어 세상에 돌아가면 희망 대신 하나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것 말고는 세상 속에서 이룰 것이 없다는 진실. 그리하여 병원 창가에서 세상을 내다보며 꿈꾸던 희망이 세상 속 진실보다 달콤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은 기억의 땅으로 남을 뿐이다. 옛날, 옛날, 내가 한때 그쪽에 살았을 때 일인데....
나무는 숲에 돌은 채석장에 숨겨라.
외로움이란, 외롭지 않았던 적이 있는 자만이 두려워하는 감정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남자라면 이 비열한 거리를 통과하여 걸어가야 한다. 그 자신은 비열하지도 않고, 물들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면서
나는 혼란에 빠졌다. 승민의 이야기는 충격적이었으나 거기에서 온 혼란은 아니었다. 내 안에서 고개를 드는 혼란이었다. 시계를 주웠을 때부터 나를 괴롭혀온 그 혼란이었다. 땅거미가 질 때 찾아드는 불안감과 비슷한 혼란이었다. 승민 옆으로 한 발짝만 더 움직이면 낯선 세상으로 통하는 문이 와락 열려버릴 것 같은 막연하고도 불길한 육감이었다. 머릿속의 현자가 '삑삑' 호루라기를 불었다. '무조건 정지, 진입 금지, 유턴.' 옳은 충고였다. 불편하고 불안하고 불길한 것들은 거미줄 같은 내 삶에 이미 차고 넘쳤다. 슬픔과 절망, 고통과 두려움, 공포, 뭔가를 더 끌어들이면 거미줄은 끊어져 버릴지도 모른다. 승민의 것은 승민의 것으로 두어야 했다. 거미줄 아래 도사린 성미 사나운 악운들이 깨어나지 않도록, 나는 내 자리에 있어야 했다. - 본문 146쪽 중에서
맥없이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이야, 라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러려면 '그날 밤' 이야기를 꺼내야 했다. 꺼내려면 스스로 잠근 문을 열어야 했다. 문을 열면 죽을 힘을 다해 가둔 기억들이 몰려나와 내 숨통부터 끊어놓을 터였다. 기억은 거기 그대로 있어야 했다. 겨울 뱀처럼 동면해야 했다. 아니, 죽은 자처럼 영면해야 했다. 나는 버틸 수밖에 없었다
숲은 기묘한 빛을 띠었다. 어두우면서도 눈을 시리게 하는 흰빛이었다. 아니다. 흰빛이 아니다. 광휘라 해야 옳을 것이다. 곧게 뻗은 나무들의 수피가 뽑아내는 서늘한 광휘
난 순간과 인생을 맞바꾸려는 게 아냐. 내 시간 속에 나로 존재하는 것, 그게 나한테는 삶이야. 나는 살고 싶어. 살고 싶어서, 죽는 게 무서워서, 살려고 애쓰고 있어. 그뿐이야
"잘 가라고 안 해?" 승민이 물었다. 나는 조명탄을 꺼내 쥐고 절벽 끝을 가리켰다. "저기 가서 할게. 불빛을 보고 곧장 달려와." 승민은 손을 내밀었다. 머뭇머뭇 맞잡았다. 손을 떼자 손바닥에 승민의 시계가 놓여 있었다. "이제 빼앗기지 마."승민의 눈이 고글 속에서 웃고 있었다."네 시간은 네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