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어루만지다
김사인 엮음, 김정욱 사진 / 비(도서출판b)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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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공간 / 이승훈


블랑쇼에게 문학의 공간은 죽음의 공간이다 언어는 죽음을 운반한다 언어라는 배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으므로 부재의 배이고 부재는 현존이 아니다 현존 너머 현존 너머 죽음이 흐른다 내가 당신이라고 부를 때 당신은 이미 당신이 아니고 당신은 다른 곳에 있고 당신이라는 낱말만 종이 위에 뒹군다 당신은 어디 있는가


나는 염소라고 쓴다 이 염소는 어디서 오고 어디서 온 것도 아니다 갑자기 염소 생각이 나고 염소라고 쓰면 염소는 있지만 염소는 없고 봄날 저녁 염소 한 마리 운다 그러나 우는 소리 들리지 않고 염소는 보이지 않고 염소는 없다 없기 때문에 이 없음을 위해 부재를 위해 당신을 위해 우리는 글을 쓴다 염소가 나를 잡아먹으리라




*문학은 어떤 것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탄생했다. 어떤 것, 어떤 사태, 어떤 마음, 어떤 그대, 당신. 그러나 언어의 불가능성은 문학을 절망하게 만든다. "내가 그대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내가 부른 이름은 그대에게 닿지 못했다. 언어의 불가능성은 그대를 찾지 못해 질문할 뿐이다. 당신은 어디 있는가. 당신은 어디 있는가. 당신이 계시지 않으나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글을 쓰는 것밖에 없어서, 불가피한 절망에 잡아먹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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