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라는 뼈 문학과지성 시인선 369
김소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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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른다 / 김소연


꽃들이 지는 것은
안 보는 편이 좋다
궁둥이에 꽃가루를 묻힌
나비들의 노고가 다했으므로
외로운 것이 나비임을
알 필요는 없으므로


하늘에서 비가 오면
돌들도 운다
꽃잎이 진다고
시끄럽게 운다


대화는 잊는 편이 좋다
대화의 너머를 기억하기 위해서는
외롭다고 발화할 때
그 말이 어디에서 발성되는지를
알아채기 위해서는


시는 모른다
계절 너머에서 준비 중인
폭풍의 위험수치생성값을
모르니까 쓴다
아는 것을 쓰는 것은
시가 아니므로


‪#‎시읽는_신학도‬


*이 시는 시론을 담고 있다. 시란 무엇인가. 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로 우리를 데려간다. 황진이가 동지날 기나긴 밤을 잘라내 그리운 님이 오시는 날 펴서 긴 밤을 님과 함께 보내겠다고 노래했을 때, 그녀는 세계를 극복한 시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시인은 밤도 잘라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시는 조선 후기에나 나타나는데, 그제서야 사람들은 자연의 지배를 벗어나 세계를 자신의 상상력으로 극복하는 사상을 갖게 된다. 황진이는 몇 백년 뒤의 사람들이 가질 생각을 미리 가졌던 것이다. 그녀는 조선 중기 사람이지만, 조선 후기를 산 것이나 마찬가지다. 시란 무엇인가. 아직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세상, 우리가 알 수 없는 사상을 시인이 자신의 언어를 유혹하고, 비틀고, 고문하고, 학대하고, 간청하고, 호소해서 얻어내는 새로운 세계이다. 그러니까 이 시인의 말대로 모르는 걸 쓰는 게 시가 맞다.


-
동짓달 기나긴 밤을 / 황진이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어
봄바람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더디게 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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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모양의 얼룩 - 개정판 시작시인선 54
김이듬 지음 / 천년의시작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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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네 이발소 / 김이듬


 내리막길에서 급정거를 한 건 순전히 한 사내 때문이었죠 흙먼지 뒤집어쓴 머리를 쑥 내밀며 막 땅 속에서 솟아오르는 죽순 같았어요 나는 도로 묻히려는 그 사내를 다독거려 백일홍 가지에 약속을 걸어두고 맞은 편 이발소로 데려 갔어요 육계 머리칼을 뜯어 비눗물에 담그고 문질렀지요 뻣뻣했던 머리칼이 파래처럼 부드러워졌어요 의자에 누워 있던 사내의 튀어나온 눈이 따가울까 봐 나는 출렁이는 젖가슴으로 닦아냈지요 매일 머리를 감겨 달래면 어쩌나 화를 내면 어쩌지 내가 도로 사내의 팔을 부축해서 밖으로 나왔을 땐 어느새 노을지고 백일홍 꿈결같이 졌네요 
 어디쯤이었을까 
 나는 사내를 끌어올린 구덩이를 찾지 못하고 두꺼운 이불을 걷어내듯 도로를 헤집는데 사내는 일을 마친 성기처럼 안으로 쑤욱 들어가 얼굴만 내민 석인상이 되었네요

 나의 기억에 반쯤 묻힌 당신을 꺼내 
 하루에도 몇 번씩 닦아드려요 
 어디쯤에서 잘못되었나 고민하다가 
 광한루 지나 
 만복사지 옆 비탈길에서 
 비뚤하게 다시 만나면 안될까요


‪#‎시읽는_신학도‬


*이런 시를 만나면 기분이 좋다. 나같은 남자는 쓸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럴지도. 누군가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듯한 짜릿함과 죄책감이 동시에 드는 묘한 쾌감. 애닲은 사랑에 대한 공감과 측은한 마음이 거기에 더해져 지나는 길에 살짝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싶어 진다. 설레는 이를 만났을 때 여자는 이런 마음이고, 나는 그 마음에 설렌다.


작은 에피소드를 겪었을 뿐인 남자지만, 시인은 천진하고 유쾌하고 아스라한 고백을 한다. "삐뚤하게 다시 만나면 안될까요" 도발적이고 수줍은 바람이다. "나의 기억에 반쯤 묻힌 당신을 꺼내 하루에도 몇 번씩 닦아드려요"라는 고백은 진하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은 애절함 묻어낸다. 첫 연의 수다같은 묘사는 이웃집 언니네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시인의 노골적이고 대담한 섹시함은 시의 맛을 돋우는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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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버거에 대한 명상 민음 오늘의 시인 총서 22
장정일 지음 / 민음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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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도로 숨다 / 장정일


공습같이 하늘의 피 같은 소낙비가 쏟아진다.
그러자 민방위 훈련하듯 우산 없는 행인들이
마구잡이로 뛰어 달리며 비 그칠 자리를 찾는다.
나는 오래 생각하며 마땅한 장소를 물색할 여유도 없이
가까운 지하도로 내려가 몇 분쯤 비를 피하기로 했다.
계단에서부터 달싹한 무드음악이 내리깔리는 지하도
비 한 방울 스며들지 않는 지하도가 믿음직스럽다.
언젠가 그 날이 와서 몇 십만 메가톤의 중성자탄을 터트린다 해도
사십일간의 홍수가 다시 진다해도 끄덕하지 않을 지하도
나는 느긋하게 지하도의 끝과 끝을 거닌다.
검둥개라도 한 마리 끌고 다녔으면 그 참 멋진 산보일 것인데.
슬금슬금 윈도우를 훔쳐보는 나에게 어린 점원들이
들어와 구경하시라고도 하고 어떤 걸 찾으세요 묻기도 한다.
각종 의류며 생활용품 그리고 식당에서 화장실까지 거의 완벽한 지하도
그러면 이런 공상을 해보기도 한다. 이곳에서 여자 만나
연애하고 아이 낳고 평생 여기 살 수도 있을 것이라고......
바깥에서 비가 그쳤는지 어떠한지 도무지 여기서는 알 수가 없다.
도무지 바깥의 기상을 알 수 없는 여기는 무덤인가
장신구며 말이며 몸종과 비단 옷감이며 씨앗단지들
그 많은 부장품을 함께 매장한 여기는 고대인의 무덤인가
지하도의 끝에서 끝으로 한 번 더 걸으며 윈도우에 비친 얼굴을
쳐다본다. 창백해진 얼굴, 아아 내가 이 무덤의 주인인가?
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아무 점원도 나를 불러 세우거나 묻지 않는다.
그래 나는 유령 이제는 비가 그쳤기도 하련만 지상으로 올라가기가 싫다
이렇게 할 일없이 걷다가 방금 내려온 친한 친구라도 만나면
반갑게 악수하면서 모르는 지상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아니 감쪽같이 숨어 있고 싶다 사흘을 여기 숨었다가
계단을 밟고 집으로 돌아가 보는 재미도 괜찮으리라
전화도 전보도 없이 사흘간을 아무 연락 없이 잠적해 버리면
어머니는 얼마나 슬퍼하시련가 두 번이나 나를 체포하고 고문한
내가 가장 싫어하는 파출소 같은데다 실종신고를 내시지는 않을까.
하지만 나는 유유히 돌아가리라 그리고 나는 부활했다
휘황찬란한 100촉 전구가 불 밝히고 늘어선 문명의 무덤을 걷어차고
나는 솟아올랐다. 들어라 나는 재림예수라고 소리치면
사람들은 믿을 것이다 안 믿을 것이다 아마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안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아 믿거나 말거나
비를 피해 나는 지하도로 숨은 적이 있는 것이다


‪#‎시읽는_신학도‬


*비를 피해 지하도로 들어간 시인은 자신이 피한 비가 마치 전쟁터의 총알들처럼 느꼈다. 시인은 현실을 전쟁터로 느끼고 있다. 전쟁 같은 현실을 보내고 나니, 잠시 피안처 삼은 지하도가 편안했다. 한 사흘 숨었다가 올라가고 싶어진다. 이 편안함은 역설적으로 죽음을 상기시킨다. 지하도가 무덤 같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지하도 밖으로 나온 시인은 예수처럼 부활해서는 자신이 재림 예수라고 소리치며, 사람들이 자신이 믿게 될 것을 (믿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 확신한다.


이 시는 어두운 앞 부분과 유쾌한 뒷 부분이 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마르크스가 헤겔을 인용하면서 덧붙인 말이 있다. 역사는 필연적으로 두 번 반복하는데,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으로 희극으로." 슬라보예 지젝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시인은 현실을 피한 자신의 모습을 앞부분에서 비극적으로 그리고 있다. 편안하지만 무덤 속에서 죽어버린 인간의 비극적인 삶의 상실을 묘사한다. 뒷부분에서 희극적으로 그린다. 무덤에서 부활한 예수라니. 시를 읽다가 "들어라 나는 재림예수라고 소리치면"에서 웃음이 터지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그러면 무엇이 반복되었을까? 현실에서 도피하는 인간의 삶이 반복되었다. 처음에는 무덤 속으로, 다음에는 종교로.


한편 뜬금없이, 이 시는 이런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시 속의 화자가 만약 예수라면, 그래서 예수가 무덤 속에 있었을 때의 마음을 시인이 표현한 것이라면, 예수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예수는 어쩌면 무덤 속에서 나오고 싶지 않았을지 모른다. 시인처럼. 예수도 속세의 시끄러운 일들이 못 마땅해서 무덤에 그냥 있고 싶었을 것이다. 배신한 제자들과 터무니 없이 자신을 죽인 종교인들과 정치인들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편안히 무덤 속에 있고 싶었을 것이다. 다행이다. 예수는 그러지 않았다. 예수는 무덤을 나왔고, 우리에게 부활의 기적을 보여주었다. 감사하자. 그리고 예수와 함께 현실을 단단히 붙잡자. 그가 혹시 다시 지하도에 숨고 싶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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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서 내리고 싶은 날
박후기 글.사진 / 문학세계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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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물리학 
- 상대성 원리 / 박후기


나는 정류장에 서 있고
정작 내가 
떠나보내지 못한 것은 
내 마음이었다
안녕이라고 말하던
당신의 일 분이
내겐 한 시간 같았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생의 어느 지점에서 다시
만나게 되더라도 당신은
날 알아볼 수 없으리라 
늙고 지친 사랑
이 빠진 턱 우물거리며
폐지 같은 기억들 
차곡차곡 저녁 살강에 
모으고 있을 것이다
하필,
지구라는 정류장에서 만나
사랑을 하고
한 시절 
지지 않는 얼룩처럼
불편하게 살다가
어느 순간 
내가 울게 되었듯이,
밤의 정전 같은
이별은 그렇게
느닷없이 찾아온다


‪#‎시읽는_신학도‬


*사랑에도 물리학처럼 법칙이 있다고 누가 믿을까. 시인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사랑에 적용하는 엉뚱한 발상을 한다.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 복잡한 상대성 이론을 알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시간과 공간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로 묶어서 생각한다는 것. 이 시는 시간과 사랑을 묶어서 생각한다. 당신에겐 일 분인데 내겐 한 시간이다. 내가 가진 사랑은 "늙고 지친 사랑"이다. 사랑도 시간의 흐름(늙음)에 지배를 받는다는 거다. 사랑 앞에 "늙고 지친"이라는 형용사가 붙어있는 것을 보니 갸우뚱한다. 사랑도 늙고 지칠 수도 있는 건가. 시간의 지배를 받는 사랑, 정말 그런가. 정말 그렇단다. 이 시가 슬픈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랑이 물리학이라는 것을 받아드려야 하니까. 물리 법칙에 사로 잡힌 내 사랑이 애처로웠을 것이니까. 그래서 "어느 순간 내가 울게 되었"을 것이니까. 그래서 이런 시를 썼을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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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달래는 순서 창비시선 296
김경미 지음 / 창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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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채사(野菜史) / 김경미


고구마, 가지 같은 야채들도 애초에는 
꽃이었다 한다
잎이나 줄기가 유독 인간 입에 달디단 바람에
꽃에서 야채가 되었다 한다
달지 않았으면 오늘날 호박이며 양파꽃들도
장미꽃처럼 꽃가게를 채우고 세레나데가 되고
검은 영정 앞 국화꽃 대신 감자 수북했겠다


사막도 애초에는 오아시스였다고 한다
아니 오아시스가 원래 사막이었다던가
그게 아니라 낙타가 원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사람이 원래 낙타였는데 팔다리가 워낙 맛있다 보니 
사람이 되었다는 학설도 있다


여하튼 당신도 애초에는 나였다
내가 원래 당신에게서 갈라져 나왔든가


‪#‎시읽는_신학도‬


*시인은 진화론을 이렇게 읽는다. 진화론은 시인에게 이렇게 읽힌다, 가 맞을까. 시는 진화의 산물일까. 어쩌면, 진화가 시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내가 사는 세상은 진화만 된게 아니다. 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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