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모양의 얼룩 - 개정판 시작시인선 54
김이듬 지음 / 천년의시작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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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언니네 이발소 / 김이듬


 내리막길에서 급정거를 한 건 순전히 한 사내 때문이었죠 흙먼지 뒤집어쓴 머리를 쑥 내밀며 막 땅 속에서 솟아오르는 죽순 같았어요 나는 도로 묻히려는 그 사내를 다독거려 백일홍 가지에 약속을 걸어두고 맞은 편 이발소로 데려 갔어요 육계 머리칼을 뜯어 비눗물에 담그고 문질렀지요 뻣뻣했던 머리칼이 파래처럼 부드러워졌어요 의자에 누워 있던 사내의 튀어나온 눈이 따가울까 봐 나는 출렁이는 젖가슴으로 닦아냈지요 매일 머리를 감겨 달래면 어쩌나 화를 내면 어쩌지 내가 도로 사내의 팔을 부축해서 밖으로 나왔을 땐 어느새 노을지고 백일홍 꿈결같이 졌네요 
 어디쯤이었을까 
 나는 사내를 끌어올린 구덩이를 찾지 못하고 두꺼운 이불을 걷어내듯 도로를 헤집는데 사내는 일을 마친 성기처럼 안으로 쑤욱 들어가 얼굴만 내민 석인상이 되었네요

 나의 기억에 반쯤 묻힌 당신을 꺼내 
 하루에도 몇 번씩 닦아드려요 
 어디쯤에서 잘못되었나 고민하다가 
 광한루 지나 
 만복사지 옆 비탈길에서 
 비뚤하게 다시 만나면 안될까요


‪#‎시읽는_신학도‬


*이런 시를 만나면 기분이 좋다. 나같은 남자는 쓸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럴지도. 누군가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듯한 짜릿함과 죄책감이 동시에 드는 묘한 쾌감. 애닲은 사랑에 대한 공감과 측은한 마음이 거기에 더해져 지나는 길에 살짝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싶어 진다. 설레는 이를 만났을 때 여자는 이런 마음이고, 나는 그 마음에 설렌다.


작은 에피소드를 겪었을 뿐인 남자지만, 시인은 천진하고 유쾌하고 아스라한 고백을 한다. "삐뚤하게 다시 만나면 안될까요" 도발적이고 수줍은 바람이다. "나의 기억에 반쯤 묻힌 당신을 꺼내 하루에도 몇 번씩 닦아드려요"라는 고백은 진하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은 애절함 묻어낸다. 첫 연의 수다같은 묘사는 이웃집 언니네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시인의 노골적이고 대담한 섹시함은 시의 맛을 돋우는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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