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김종현

2차대전이 끝나고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유태인학살문제는 단연 화두였다. 사실 동서유럽을 통틀어 꽤 많은 수의 유태인이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죽었고, 짧은 시간 동안에 대량으로 죽었기 때문에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 외에도 주요한 나치스의 죄목이었던 것이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전쟁광이었다는 사실은 역사를 아는 사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일본의 태평양전쟁도 실은 미국이 일본으로 하여금 미국과 결전을 벌이지 않을 수 없도록 환경을 조성한 다음, 실제 일본이 진주만으로 쳐들어왔을때도 그 사실을 알면서도 진주만 주둔 해군 및 육군(당시 미국은 공군이라는 군종이 없었다. 육군 항공대 및 해군 항공대가 있을 따름이었고, 멤피스벨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미 공군은 실제로는 당시에는 공군이 아니라 미 육군 제 8항공대라는 육군 산하의 부대였다. 미국에 공군이 독립군종으로 창설된 것은 2차대전 후의 일이다. 한국전쟁에는 공군이라는 독립군종으로 투입된다)에게는 알리지 않았다는 설이 있을 정도이다. 이 루즈벨트가 유태인이다. 루즈벨트가 굳이 끼어들지않아도 되었을 전쟁 -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기 전인 1940년에도 미국 구축함과 독일 U-Boat들은 대서양에서 크고 작은 군사충돌을 일으켰고, 이 중에는 미국 구축함이 도발한 경우도 있었다 - 에 끼어든 것은 단 하나, 뉴딜정책으로도 회복이 안된 미국 경제를 되살리기 위함이었다(흔히 착각하기를 뉴딜로 미국의 경제 대공황이 해결되었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지만, 실제로 미국의 경제공황을 해결한 것은 뉴딜 정책이 아니라 2차세계 대전 참전이었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독일공군 총사령관이자, 게쉬타포의 창설자, 총통 아돌프 히틀러의 심복이었던 괴링은 유태인학살을 몰랐다고 대답했다. 많은 국방군(정규군) 및 나치당의 고위 간부들 중에서도 유태인 학살을 몰랐다고 대답한 경우가 많았다. 정말로 몰랐을까, 아니면 알았어도 책임을 회피하려고 했던 것일까. 전자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괴링은 유태인 학살을 전혀 몰랐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 전모에 대해서는 정확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괴링은 1934년 이후에는 독일공군에만 매달렸고, 비밀경찰 게쉬타포에는 손을 떼었다. 게쉬타포를 지휘하면서 비밀경찰의 대명사로 게쉬타포의 악명을 드높인 자는 SS(친위대) 국가지도자 Heinrich Himler. 히믈러는 원래 SS와는 상관이 없이 괴링의 사설경찰이나 다름없던 게쉬타포에 SS를 파견하여 점차 게쉬타포와 SS의 구분을 없애가면서 국가기관화하였다. 이 SS가 유태인학살을 전담하였는데, SS 및 게쉬타포의 철칙 중에는 "알 필요없는 자에게는 알리지 말며, 알 필요가 없는 일에는 관심도 갖지 말라"라는 것이 있다. 괴링은 이에 해당한다. 나치당 초기 멤버인 괴링은 물론 유태인 탄압을 알고 있었지만(하지만 괴링은 1차대전때 리히트호벤전투기편대 소속이었던 유태인을 보호한 적이 있다. 이유는 그의 전우였기 때문이라는 것), 학살은 몰랐다는 괴링의 증언은 진실성이 있다.

95년 2월에 뉴스위크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관한 특집기사가 나왔다. 해당 기사는 유태인 학살로 유명한 아우슈비츠 수용소 해방 50주년을 기념한 특집 기사였다. 그 기사는 유태인 대자본의 영향력 하에 있는 서구 언론치고는 상당히 냉정하게 아우슈비츠를 다루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보통 400만의 유태인이 죽었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그것을 많은 사람들은 진실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처음부터 유태인을 죽이기 위해 건설된 수용소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폴란드군 장교, 지식인들이 잡혀들어왔고, 집시, 유태인, 폴란드 레지스탕스 용사들을 비롯한 숱한 반나치 활동을 했거나, 나치에 의해 '생존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명된 인종들이 끌려들어왔다. 그렇게 끌려들어온 자들은 처음에는 강제노동에 동원되었다. '쉰들러리스트'에 나온 장면은 그 수용소에만 해당된 것은 아니었고, 아우슈비츠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러시아에서 유태인 학살은 '토텐코프'라고 불린 특별행동대(그리고 그들에 의하 훈련받은 우크라이나 민병대 등)에 의해 총살과 배기가스, 기타의 방법으로 학살(러시아에서 학살은 유태인만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소련군 장교, 정치위원, 콤소몰이라고 불린 청년조직의 간부들이 우선대상이었다)이 이루어졌으나, 아우슈비츠에서 가스에 의한 대량살상은 1943년, 히믈러가 '유태인문제에 대한 최종해결'을 지시하면서 이루어졌다. 그 이후 아우슈비츠, 트레블링카, 소비보르, 다하우 등 숱한 악명높은 강제수용소들이 역사에 그 이름이 남게 된 것이다.

문제는, 학살된 유태인 숫자이다. 아우슈비츠에서 죽었다는 400만을 포함해서 60년대까지는 800만이 죽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1970년대 이후 600만으로 하향조정되었다. 왜? 또한 95년 2월자 뉴스위크지의 기사에 따르면, '아우슈비츠는 여섯 개나 되는 나치의 학살 수용소중 가장 큰 것에 불과했을 뿐이고, 사실 그곳이 최악이었다고 생각할 근거도 없다. 그곳이 유명해진 것은 대규모였다는 이유도 있지만, 유대인과 집시들의 죽음의 수용소(정확하게 말하자면 가스실은 근처의 비르케나우 보조수용소에 있었음)이자 유대인, 폴란드정치범, 전쟁포로, 동성연애자, 그리고 보통 범죄자들을 수용하는 여러 강제노동수용소의 본부를 겸했다는 특수역할때문이었다'라고 쓰고 있다.

이어서 이 기사는, ' 과장되고 꾸며낸 이야기 많다. --- 아우슈비츠에 처음 수용된 사람들은 정치범. 사망자도 400만명 아닌 110만∼150만'라고 제목을 달았다. 초기 수용자들은 폴란드인들로서 카톨릭신자였고, 그 이후 독소전이 전개되면서 소련군 포로들이 끌려들어왔다. 이어서 들어온 자들이 유태인들이었던 것이다. 이 기사를 쓴 Andrew Nagorski 뉴스위크 모스크바 지국장은 기사의 말미에 의미심장한 기사를 달았다.

"80년대 말에는 아우슈비츠에 인접한 카르멜 수도원에 관한 카톨릭 교도와 유태교도 사이의 분쟁으로 격렬한 비난전이 촉발됐다. 아우슈비츠가 상대방에 대해 갖는 상징적 의미를 인정하기를 서로 거부한다는 것이었다. 그같은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폴란드신정부는 90년 기독교도와 유태교인으로 구성된수용소 박물과 국제심의위원회를 구성했다. 비판론자들은 그 속도가 너무 느리다고 불만이나 그 이후 아우슈비츠는 놀란 만큼 변했다. 특히 비르케나우 가스실 자리에 있는 안내문은 희생자의 대부분이 유태인이었음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바뀌었다."

이 기사가 암시하는 바는 명백하다. "유태인이 대부분이 아니었다"는 얘기이다.

계산을 다시 해보자. 60년대에 800만이 죽었다는 주장은 넘어가더라도 현재 통용되는 '전설'은 600만명이 죽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400만이 아우슈비츠에서 죽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400만은 무슨 얼어죽을 400만. 많이 잡아야 150만명이 아우슈비츠에서 죽었고, 그것도 유태인이 절대다수가 아닌 것이다. 설사 2/3인 100만명이 유태인이었고, 200만(600만에서 아우슈비츠에서 죽었다는 400만을 뺀 나머지)명의 죽음이 사실이라손 치더라도, 벌써 2배의 뻥튀기를 해왔다는 얘기인 것이다. 도대체, 누가, 무슨 목적으로 왜?

단지 나치가 미워서? 천만에 말씀이다. 800만이나, 600만이니 하는 숫자는 서구 언론이 내뱉어온 말들이다. 서구 언론은 상당수가 유태인의 자본력 지배하에 있다. 그들 스스로 그렇게 만들어왔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왜 유별나게 유태인학살자 수를 뻥튀기했을까? 원래 유태인이라는 인종은 로마제국에 의해 추방된 이후 지금까지 2000여년을 나라없이 떠돌면서 유럽에서는 철저히 박해받아왔다. 나폴레옹전쟁이 끝난 후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시시민들에 의해 유태인 학살이 있었고, 20세기 초 러시아에서도 유태인 학살이 있었다. 러시아 혁명에 유태인들이 대거 가담한 것도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다.

이제 그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2000여년 동안 정착하여 살아오던 팔레스타인 민족을 나치 못지 않은 방식으로 학살하며 몰아내고 그 땅에 정착하여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그들은 나치의 유태인학살을 빌미삼아 서구 세계의 보호와 묵인 하에 팔레스타인 민족을 나치가 했던 방식으로 탄압하고 학살하는데 조금의 주저도 없이 행동할 수 있는 방패막을 나치의 유태인학살로 돌려 서구의 눈을 감게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성공했다.

나치의 범죄를 옹호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역사를 왜곡해서는 안된다. 역사를 왜곡하여 타민족을 침입하며 자신들의 이기주의를 채우는 모습을 우리는 일본에서 보고 있다. 나치-일본-유태인은 한통속이나 다름없다.

(사실 히틀러도 알고보면 괜찮은 놈이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국수주의적 인종주의에 미쳐있었다는 것이 인류사에 커다란 획을 그어놓았던 것이다. 히틀러는 어떻게 보면 2차대전 후에 서독이 민주화를 이룰 수 있는 배경도 만들어놓기까지 했다. 1차대전 이후에도 엄연히 남아있던 구체제적인 신분제도를 전쟁 전과 전쟁 기간 동안 쓸어버렸던 것이다. 또한 히틀러는 전혀 허영심도, 재산축적에도 관심이 없는 희한한 독재자였다. 사진을 보라. 히틀러가 그의 제복을 치장하는데에 어떤 장식을 썼는지를 그의 부하들 및 군 장교들의 제복과 비교해보면 단번에 알 수 있다)

그리고 솔직히, 히틀러의 유태인 탄압은 전혀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것이다. 유럽에는 세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듯이 유태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있어왔고, 실제 수백년 동안 반유태주의 활동이 활발했다. 19세기 말에 있었던 프랑스의 '드레퓌스사건' 역시 반유태주의가 낳은 산물인 것이다. 전혀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건에 대해서 서구인들 스스로가 범죄라고 하는 것에는 솔직히 웃음만 나온다. 스딸린의 소련내 숙청 및 학살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안하는 자들이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그렇게 크게 다루는 이유는 여전히 세계가 유태인의 지배하에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방패삼아 '소나치'라고 불러도 좋을만한 짓을 팔레스타인에 대하여 저질러오고 있는 중이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유태인 600만 학살'이라는 타이틀에 눈이 멀어 있다. 나치식의 경제발전의 혜택(물론 부정적인 면도 동시에 발전했다)을 박정희를 통해서 입은 우리다(박정희는 아돌프 히틀러를 존경했다). 서양인의 관점, 거기에 유태인의 관점에서 나치 독일을 바라보지 말자. 그들에게도 나름대로 참고할 만한 것들이 있다. 쓸데없이 서구인과 유태인의 관점에서 나치 독일을 왜곡하고 있는 현실은 시정되어야 한다. 서구인의 관점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다가 우리 것을 잃어버린 사례를, 당장 우리는 우리 주변의 의식주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당하게 우리의 주체성을 정립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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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6-01-19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홀로코스트 산업이란 책이 생각나는군. ^^

수퍼겜보이 2006-01-19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판다님 요즘 뭐하고 지내시는지~ 글 좀 올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