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린맨
채영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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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기억은 가슴 한 켠에 얼마쯤의 통증을 동반한다. 그 때가 그리워지는 것은 풍요롭고 넉넉한 시간들 때문이 아니라, 어린 몸을 구석으로 내몰던 그늘의 서늘함 때문이다. 햇볕 한 줌 들지 않던 그늘에서 만났던 세상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곳과 별로 다르지 않음을 실감할 때마다 나는 어릴 적 내가 서 있던 그늘이 그리워진다. 그 그늘 속에서 눈을 내리 깔고 세상과 대면할 용기를 얻었음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 시절, 내가 서 있던 그늘 밖에도 바이올린맨과 윤주 누나와 같은 착한 사람들이 존재했었는지 나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도무지 현실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순박한 마음씨로 사랑을 하고, 세상을 살았던 사람들. 어린 나이의 화자가 경험해야 할 삶의 고단함을 품어줄만큼 넉넉한 마음을 가졌던 사람들. 그리고 그 마음이 만들어내는 착한 시간들. 생각해 보면 내 그늘의 밖에도 그렇게 착한 사람들이 살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은 그들의 마음과는 달라서 보험사기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삼촌이 있고, 윤주의 삶을 각박하게 하는 술집의 손님들이 있다.

그 부딪힘의 사이에서 어린 동우는 주머니칼을 쓰는 연습을 해야 하고, 동우의 첫사랑 시은은 자신을 괴롭히는 형태와 이른 결혼을 해야 한다. 동우의 마음 속에 쓰라림이 어린 손에 상처를 만들어가고, 주머니칼의 날카로운 칼날이 만든 상처가 동우의 마음에 날을 세울 때, 문득문득 어린 동우는 깨달을 것이다. 그의 삶이 삼촌의 삶과 다르지 않음을. 바이올린맨이 유언처럼 남긴,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음을. 다만 악몽처럼 기억되는 그 날의 그 방 앞에서 옛날 옛적에 살았던 착한 사람의 존재만을 어렴풋하게 느낄 것이다.

어쩌면 그 동안 읽어왔던 다른 성장 소설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유년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문득문득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에 휘둘리게 되었던 건, 긴 장마 때문일까, 혹은 때 이른 작가의 죽음 때문일까. 죽음을 앞에 두고 착한 사람이 되라던 유언을 남긴 바이올린맨의 얼굴에서 나는 착하게 살았던 작가의 모습을 얼핏 본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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