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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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무엇인지, 쳇, 개나 물어가라고 그래.

 
'소크라테스'라는 그리스의 고대 철학자가 있다. 서양 철학의 시조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소크라테스는 여러 말을 남겨 현대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너 자신을 알라', '악법도 법이다'(사실 이 말 모두 소크라테스가 직접 한 말은 아니다. 다만 이와 비슷한 의미로 쓰인 문장들이 있는데, 이를 후대인들이 알기 쉽게 표현한 것이다.) 등등이 그렇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격언처럼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중요한 격언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음미하지 않는 삶은 가치가 없다'이다. 이 또한 소크라테스가 직접 언급했다기보다는 소크라테스의 말 중에서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말한 것을 보기 좋게 한 문장으로 정리한 것이다. 어떤 이는 이를 '반성하지 않는 삶은 의미가 없다'라고 이해하기도 한다. 어쨌든.

소크라테스가 말한 '음미하지 않는 삶은 가치가 없다.'는 격언의 의미는 본능대로, 감정대로, 습관처럼, 주어진대로 살아가는 삶을 경계하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끊임없이 반성하고 고려하고 따져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항상 내가 왜 살아야 하는 것인지,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 어떻게 살아야 도덕적인 삶인지 등에 대해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는 소크라테스의 이 주장은 우리의 삶을 짐승의 삶과 구분해주는 문제 제기였다. 물론.

당장 먹고 살기 급한 사람들에게 이런 소리는 헛소리처럼 들릴 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장 먹고 사는 것이 급한 사람들에게도 삶이란 단지 주어진대로 먹고 싸고 자고 섹스하고 놀고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은 있다. 다만 지금 그것을 깊이 반성하고 더 나은 삶을 계획하는 것이 쉽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배부른 자들이 고민이라고 무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뭔가 더 나은 삶, 목표가 주어진 삶, 계획된 삶을 살고자 한다. 더 나은 삶, 목표가 주어진 삶, 계획된 삶,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고 해도 그렇게 살고 싶어한다. 그런데.

이렇게 현재의 삶에 대해 반성하고 더 나은 삶을 계획한다는 것은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현재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지 못하고 뭔가 더 나은, 대단한 어떤 것을 추구하는 것은 많은 것을 희생하게 만든다. 이렇게 살면 안 된다. 저렇게 살아야 한다. 이런 문장들은 이렇게 살 수도 있는 것을 희생하게 한다. 물론 희생된 것은 앞으로 다가올 삶에 비하면 보잘 것 없거나 무의미한 것이므로 희생된들 안타까울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심한 경우 우리는 앞으로 다가올 삶에 비추어 현재의 삶에 채찍질을 하고 나무라고 스스로를 괴롭힌다. 현재의 삶은 다가올 삶을 위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삶이 다가올 삶을 위한 준비로써 만족스럽지 못할 경우 극단적으로 자살을 선택하기도 한다. 

이것이 지난 만여 년간 우리 인류가 살아온 방식이다.  

그런데 우리가 희생시킨 삶 속에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본능적이고 감각적인 삶, 현재에 충실하며 즐기는 삶이다. 우리는 이것을 악마의 속삭임이라고 하면서 단호히 거부하려고 했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을 악마의 자식이라고 하며 사회에서 퇴출시켰다. 진리의 막대기를 저 멀리 이성의 북극에 꽂으려고 했던 인간들은 자신이 밟아온 아름다운 대지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바로, 거기에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스승과도 같은 친구, 그리스인 조르바가 엉덩이를 실룩실룩 흔들고 산투르를 튕기며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에게 소리친다.

"삶이 무엇냐고? 쳇, 그 따위 소리 개나 물어가라고 그래."

실제 인물인 조르바는 이성적인 눈으로 보며 뒷골목 왈패에다 사기꾼이며 수많은 여자들과 섹스를 즐기는 바람둥이에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사는 방랑자이다. 그런데 온갖 경험을 통해 잔뼈가 굵은 60대의 조르바에게 삶이란 현재적인 욕망 충족,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현재에 충실하게 살아가며 본능적인 욕망을 만족시키는 삶을 즐긴다. 그 앞에서 어줍잖게 이성이니, 도덕이니, 신이니 말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그는 맛있는 고기를 뜯으며 라키술을 들이키고 풍만한 여자의 가슴을 애무하느라 정신이 없다가 문득 이렇게 소리칠 것이다. 

"멍청하긴, 무슨 고민이 그렇게 많아. 여자를 사랑하지 않으면 신도 화를 낼 거라구. 저렇게 여자가 엉덩이 실룩거리며 들어오라고 하는데 거부하는 건 죄악이야."

그러나 조르바는 단순히 바람둥이에 왈패는 아니다. 그는 나름대로 삶에 충실하고 자신의 일에 열정을 다한다. 자신이 한 말은 최선을 다해 책임을 지고 행동으로 옮긴다. 조르바의 삶에는 무엇 때문에 못하고, 무엇 때문에 망설이고, 무엇 때문에 뒤돌아보는 것이 없다. 그야말로 조르바는 열정적으로 살.아.간.다.

현대인들은 도덕적인 이유로, 관습적인 이유로, 법적인 이유로 혹은 철학적 이상을 이유로 들어 자신의 삶을 통제한다. 그 모두가 현재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다. 그러나 조르바는 현재보다 더 나은 삶이 아닌 현재의 삶 그 자체를 위해 산다. 그렇기에 어떠한 이유로도 현재의 삶을 만족시킬 행위를 저지하지 못한다. 이러한.

조르바의 삶이 위대하다고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말한다. 왜 카잔차키스는 조르바의 삶을 위대한 삶이라고 생각했을까?

그 자세한 이유를 말하기는 어렵지만, 카잔차키스가 붓다에 빠져 있었고, 니체를 공부했다는 사실을 미루어볼 때 그는 현대인의 삶은 뭔가에 얽매여 사는 삶으로 판단했고 조르바의 삶은 굴레를 벗어던진 자유로운 삶으로 파악했기 때문에 위대한 삶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붓다는 인간이 삶의 욕망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붓다가 생각한 욕망으로부터의 해방은 조르바의 삶과는 좀 다르다. 조르바는 욕망 그 자체를 즐긴다. 그럼에도 이 둘은 통하는 데가 있다. 그것은 바로 욕망을 하나의 틀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붓다가 생각한 욕망으로부터의 해방은 욕망을 제거한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는 삶의 주인 자리를 욕망에 빼앗기지 않기 위함이다. 조르바도 욕망에게 삶의 주인 자리를 내준 것은 아니다. 욕망을 즐기지만 결코 욕망의 노예가 아닌 욕망의 주인으로 살기 때문이다. 조르바의 삶은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디오니소스의 삶과도 같다. 욕망을 마음껏 즐기되 욕망의 노예가 아닌 삶. 어쩌면 붓다의 부정적인 자세보다는 조르바의 긍정적 자세가 더 위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카잔차키스는 여기서 조르바의 위대함을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를 외치며, 인간의 삶을 보편적 윤리로 묶어버리려는 자들을 비난했다. 인간에게는 각자의 삶이 있고 각자의 도덕적 법칙이 있다. 그들 각자는 각각의 도덕적 법칙에 의해 살아가면 된다. 왜 그들을 하나의 보편적 윤리로 묶으려고 하는가? 만약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보편적 윤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초인의 윤리일 뿐이다. 초인의 윤리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각 개인마다 각자의 삶을 살게 놔두는 것이다. 보편적 윤리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윤리를 창조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조르바는 바로 이러한 윤리에 입각한 사람이었다. 조르바는 세상의 그 누구의 윤리보다도 자신이 생각한 윤리가 옳다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에 맞게 살아갔다. 카잔차키스는 바로 이러한 조르바의 삶은 초인의 삶으로, 위대한 삶으로 본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러한 카잔차키스의 생각에 온전히 찬성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쓸데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자신의 삶에 주인이 아닌 노예로 살고 있으며, 보편적 윤리라는 틀에 다른 사람들을 가두려고 하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따라서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난 후에, 아마도 독자들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될 것이며,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삶과는 너무나 다른 삶을 산 조르바에게 매력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자유로운 삶을 말이다. 그러나 과연 어떤 삶이 더 나은 삶일까? 아, 조르바의 목소리가 들려 온다.

"또 시작이우 두목! 그냥 저질러 버리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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