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199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초자아가 지배하는 세계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이제 그 이름만 들어도 그에 대한 소개가 충분한 작가. 1990년대 한국의 젊은 작가들에게 '하루키 문체'라는 문제를 안겨준 작가. 그럼에도 그에 대한 평가가 때로는 무시당하는 수준으로까지 격하되는 작가. 문제적인 이름의 작가.

  하루키가 쓴 작품은 장편, 단편, 에세이 등 정말 많은 것이 우리 나라에 소개되었다. 그만큼 우리 나라 독자들은 하루키를 사랑하는 듯하다. 최근에 나온 소설 『1Q84』도 이미 베스트셀러다. 그러나 나는 이 작가와 그다지 친하지 않다. 그의 작품이라곤 『상실의 시대』와 『태엽감는 새』밖에는 읽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토록 사랑받는 작가를 나는 왜 읽지 않았을까? 역설적으로 나는 그가 너무나 많이 사랑받기 때문에 읽지 않았다. 대중에게 사랑받는 작가의 작품은 어쩐지 싸구려일 것 같다는 나의 아주 나쁜 편견이 작용했다.(이제 와서야 조금씩 그 편견을 지우고 있다.) 

  조금씩 나의 나쁜 편견을 지우려고 하던 중 지인의 추천으로 하루키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읽게 되었다.『태엽감는 새』4부를 읽은 것이 1996년도 쯤이니까 어느새 13년 이상이 흘러서야 다시 하루키를 만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나의 못된 편견 때문에 그냥 덥어버릴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제 그런 편견은 떨쳐버려야 한다는 생각에 약간은 무심한 듯, 약간은 겸연쩍게 책장을 펼쳐 읽었다. 첫장을 넘기자마자 약간은 낯설게 느껴지던 하루키의 문체가 오래 전 기억을 되살리면서 '여전하구나, 하루키는'라는 생각을 만들어 냈다. 물론 이 작품은 『태엽감는 새』보다 먼저 쓰여진 작품이므로 '여전하다'는 평가는 우습지만, 하루키의 냄새가 이때부터 이미 만들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조금은 급하게 책을 다 읽고 난 후, 나의 첫 느낌은 '역시 하루키'라는 것이었다. '하루키'하면 재기발랄하고 독특한 그의 문체가 떠오른다. 하루키의 문체는 정말 기발하면서 기묘한 묘사와 낭만적인 196,70년대 미국의 도시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각종 소품들(째즈, 향이 좋은 커피, 와인, 예술적 취향이 잔뜩 묻은 고전적 영화 등)에 대한 묘사가  중요한 특징이다. 역시 이 작품에서도 바로 그런 하루키의 문체를 만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드보일드와 원더랜드"라는 이야기가 스릴러로서 긴장감과 모험 등을 그려내는 작품을 하루키가 썼다는 점에서 내가 알던 하루키와는 조금 다르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스릴러로서의 점수는 높게 줄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주인공인 '나'나 주인공이 소속된 '조직'과 그 조직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공장' 그리고 '나'를 위기에 몰아넣은 박사와 그의 손녀딸 모두가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 그다지 심각하게 반응하지 않고 있어서 긴장감을 떨어뜨리기 때문이었다. 또한 하루키적인 문체 때문에 이야기가 스피드 있게 전개가 되지 않은 점도 긴장감을 떨어뜨려 스릴러로서의 면모를 약화시켰다. 그나마 어두운 땅 속 깊숙이 산다는 괴물같은 '야미쿠로'의 등장(하루키는 야미쿠로를 매우 위험한 듯 묘사했지만, 구체적인 어떤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다지 위험하게 느껴지지 않았다)이 긴장감을 느끼게 해주었지만 그야말로 '그나마' 정도의 수준이었다.  

  또 다른 이야기인 "세계의 끝"은 지금까지 내가 읽어 본 하루키의 작품의 특징, 즉 하루키의 문체가 만들어내는 독특한 분위기와 자아 정체성에 대한 탐구를 거의 그대로 담아내고 있었다. 이는 하루키 소설을 평가할 때 매우 좋은 점수를 주는 요인이다. 작품의 미적 아름다움과 철학적인 깊이가 이 하루키적인 문체와 주제에서 드러난다. 이미 하루키는 초기 작품인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내가 읽었던 그 후의 소설 『상실의 시대』나 『태엽감는 새』에서 볼 수 있었던 특징들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후 하루키는 계속 이러한 자세를 이어간다. 때문에 하루키를 미친 듯이 좋아하는 골수팬도 있지만 그의 변화하지 않는 모습에 실망하는 사람도 생기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이런 까닭에 초기 작품으로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하루키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의미있는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이후 '하루키적'이라는 특징들이 총체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만약 하루키를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작품은 놓쳐서는 안 될 것 같다.

  두 가지 세계에서 일어나는 두 가지 이야기. 그리고 그 두 가지 이야기가 결국 한 점에서 만나게 되는 구성.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 "세계의 끝"이라는 두 세계의 씨실과 날실의 교차적 구성(이런 구성이 최근작 『1Q84』에도 나타난다. 음...과연 이래도 될까요 하루키여!)과도 같은 이 작품은 결말에 이르러서 하나의 작품을 완성할 것 같은 기대감을 독자에게 준다. 그 기대감으로 인해 이 작품은 흥미진진해질 요소를 갖춘다. 마치 2008년에 개봉했던 허리우드 영화 <밴티지 포인트>처럼 하나의 사건을 다각적인 관점에서 보여주다가 마침내 다시 하나의 사건으로 모아질 때 일어나는 인식의 충격을 보여줄 것 같은 느낌이 진하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아쉽게도 흥미진진함을 있었지만 인식의 충격은 없었다. 옳다구나, 이렇게 되는구나 하는 희열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퍼즐을 맞춘 것과 같은 것일뿐 지적인 충만감을 주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영화 <밴티지 포인트>처럼, '와 이렇게 작은 사건들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사건을 이루는 구나' 등의 인식적 충격은 없고 단지 '그래 그럴 줄 알았어'가 되었다.

  왜 두 개의 이야기가 교차되어 나타난 것일까? 굳이 이런 방식을 취한 의미는 무엇일까? 보통은 이야기의 흥미진진함을 위해서, 즉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결과를 숨겨 독자의 호기심을 유발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된다. 그러나 그 대단한 하루키가 그 정도의 생각만 가지고 썼을까? 어쩐지 하루키는 뭔가 더 대단한 것을 감추었을 것 같다. 

  내 생각에 하루키가 진정 말하고 싶었던 것은 "세계의 끝"이라는 이야기에 담겨져 있는데, 이 이야기가 다소 건조하고 흥미가 떨어지기 때문에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라는 흥미로운 세계를 창조해던 것 같다. 즉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쓴 약을 독자가 제대로 먹도로 하기 위한 사탕의 역할을 한 것이다. SF적인 요소와 스릴러적인 요소 거기다가 <007> 시리즈에서나 볼 수 있는 얄팍한 눈요깃거리인 섹스 등 구미를 당길만한 요소를 모두다 끌어들여 썼다. 그리고는 은근슬쩍 주인공에게 '세계의 끝'을 심어놓는다. 핵심 이야기인 "세계의 끝"의 존재론적 근거를 마련해 놓은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의 의식이 세계의 끝으로 교체되는 사건을 아무런 고민도 없이 그냥 바라보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한다. 이는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주인공은 그 역할을 다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거칠지만(하드보일드) 꿈같은 세계(원더랜드)를 통해 독자들을 앞에 앉혀 놓고 세계의 끝을 펼쳐놓았으니 그 임무를 확실하게 다한 것이다.  혹자는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노박사와 주인공의 대화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들은 꽤나 전문적이고 심각한 듯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그들이 말한 것은 '세계의 끝'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그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앞에서도 말해지만 그들의 대화는 '세계의 끝'의 존재론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핵심은 "세계의 끝"인데, 그렇다면 "세계의 끝"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일까?  

  '세계의 끝'은 만들어진 세계다. 그 세계는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주인공의 무의식 세계이지만, 그가 만든 세계는 아니다. 그 세계는 노박사가 과학자의 호기심 때문에 무질서한 주인공의 무의식 세계를 질서정연하게 재편집한 세계다. 다시 말해서 주인공의 무의식 세계이지만 타인의 욕망으로 재편집된 세계인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의 끝'은 누구의 세계일까? 편집자는 노박사이지만 세계에 대한 영상을 찍은 사람은 주인공이다. 답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는 이렇게 '세계의 끝'의 존재론적 근거를 마련하고는 주인공이 가지고 있었던 원래 무의식을 사라지게 하고 그 자리에 '세계의 끝'을 놓는다. 이로써 주인공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될 것이라는 암시를 한다. 그 사람은 아마도 타인의 욕망에 의해 재편집된 무의식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타인의 욕망에 의해 재편집된 무의식을 가지게 된 그는 "세계의 끝"이라는 이야기 속에 등장한다. 그는 자신이 왜 '세계의 끝'이라는 곳에 와 있는지, 이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를 전혀 알지 못한다. 그는 그저 그곳에 들어와 그곳 세계의 규칙에 따라 행동한다. 처음에는 문지기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그림자'를 자신에서 분리시킨다.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이야기를 통해 추리해보건데 '그림자'는 아마도 타인의 욕망에 의해 재편집된 무의식이 되기 전의 원래 있었던 무의식 세계를 의미하는 것 같다. 그런데 왜 원래 있었던 무의식의 세계를 '그림자'로 표현했던 것일까? 이는 원래 있었던 것이 핵심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무의식의 핵심은 타인의 욕망에 의해 재편집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야기는 결국 그림자의 욕망이 아닌 그림자와 분리된 주인공 나의 욕망대로 끝을 맺음으로써 무의식의 핵심인 타인의 욕망에 의해 재편집된 것임을 재확인한다.

  '세계의 끝'은 결국 타인의 욕망에 의해 재편집된 세계이면서 동시에 바로 진정한 무의식의 세계다. 이 세계는 의식의 세계보다 강하고("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주인공의 의식 소멸), 원래 가지고 있던 무의식의 세계-개인적인 욕망으로 만들어진 이드의 세계-보다 강하다(그림자를 분리하기). 이 세계는 프로이드 식으로 말하자면 초자아의 세계다. 

  "세계의 끝"에서 하려 했던 이야기 즉  초자아의 세계의 승리는, 결국『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가 개개인의 의식이나 욕망의 세계(개인의 무의식, 이드)가 아닌 보편 윤리(초자아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하루키는 이 작품을 통해 보편 윤리가 지배하는 세계를 보여준다. 이 세계는 절대적인 윤리 법칙이 존재하며, 언뜻 보기에 갈등과 고통이 없는 행복한 세계로 보인다. 왜냐하면 초자아는 욕망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욕망이 없다면 갈등이 존재할 수 없고 고통도 존재할 수가 없다. 그야말로 유토피아적 세계인 것이다. 그러나 하루키가 완전해 보이는 이 세계를 마냥 긍정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림자를 떼어버리면서도 여전히 주인공은 다른 세계를 욕망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완벽한 세계에도 무섭고 위험한 숲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확실히 의미있는 글을 쓴다. 나름 재미도 있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다. 정신분석학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는 점이 흥미롭기도 하다. 내가 하루키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작품을 통해 그 점이 다소 희석됐다. 여전히 비슷한 글을 쓰고 있다는 점이 작가에게 높은 평가를 주는데 망설이게 만드는 요소지만 소설읽기의 즐거움을 느껴보고 싶다면 하루키를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이 소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무의식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쓰고 있기 때문에 정신분석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하루키가 묘사한 것처럼 무의식적인 초자아가 지배하는 세계는 평화로울까? 의식의 세계는 갈등과 고통만이 있는 것일까? 타인의 욕망에 의해 재편집된 초자아의 세계에 나를 맡겨도 되는 걸까? 이런 의문들에 대한 심심치 않은 사고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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