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신치료 입문 - 프로이트와 융을 넘어서
이동식 지음 / 한강수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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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은 참 독특하다. 익숙치 않은 대화체이고, 정신과 의사쯤 되는 이와 의사들, 환자와의 대화가 주다. 그래서일까 이 책은 읽기가 쉽지 않다(?) 아니 읽기가 익숙하지 않다. 왜 그럴까? 문제는 바로 왜 그럴까에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의 한편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익숙한 것에 대해 의심해보라는 메시지가 아닌가 생각된다.

먼저 이 책은 익숙하지 않은(우리가 그동안 연습해오지 않았던, 교육받지 못했던) 체재를 담고 있다. 논설문, 설명문 등등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고 익숙하게 읽고 풀이해나가던 형식이 아닌 대화체, 대화록이 주를 이룬다. 대화를 따라 읽다보니 이야기가 반복되는 느낌도 있고 우리의 대화가 그렇듯 곁가지로 이야기가 흐르는 부분도 있다. 그런데 이런 부분은 이글이 일반적인 논문 스타일이 아닌 대화체라고 한다면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그리고 그 자연스러움 너머에 대화체를 통해 주장을 이야기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대화를 엿듣는다, 청중으로써 참여한다고 생각하면 이 글은 더 없이 쉬워진다. 그러니까 책이라고 하는, 글이라고 하는 기존의 선입견을 없애고 보면 이 책은 그만큼 쉽고, 재미까지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왜 그럴까에 대한 뜻하지 않은 해답이 되는 셈이다.

게다가 여기에는 환자와의 실제 대화가 담겨있다. 환자의 마음, 환자를 상담하고 있는 의사, 치료자의 마음을 그야말로 읽을 수 있다. 이런 방식이 아니면 우리가 환자와 의사와의 이야기를 어떻게 들어볼 수 있겠는가.

서양 정신치료 이론과 도정신치료에 대한 저자와 다른 의사 혹은 제자들과의 질문과 그 대답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환자와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그 대화가 또 참 냉정하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것도 곰곰이 생각하면 치료를 위한 대화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이해가 된다. 환자와의 이야기에 똑같이 맞장구를 쳐서 일희일비한다면 우리와의 대화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래서 제1부의 3장에서는 ‘치료자의 자질’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책은 먼저 치료자를 위한 책인 듯싶다. 그리고 그 치료자들의 상태를 알고 싶은 관계자(치료자를 대면할 환자, 정신과 간판을 한번은 눈여겨보았을 마음 아픈 이들, 심리학과 학생, 정신과 학생 등 관련분야)들이 한번쯤 읽어볼 수 있는 책이 아닌가 싶다.

특히 이 책에서 두드러지는 것, 그리니까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는 서양의 철학이나 사상이 과학적이다, 합리적이다, 이성적이다라고 운운하는 서양 논리에 대해 한 수 아래로 내려보는 저자의 시선이다. 서양 철학자가 동양사상을 이해하는 것과 동양의 정신분석의(철학자)가 동양사상을 이해하고 이야기하는 차이쯤이라고 보면 될까.

그런데 제3부에 ‘도정신치료의 역사적 조망’에서 서양 치료자들의 직접적인 반응을 담고 있어 그냥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식의 긍정으로만 치부하기에도 좀 죄송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초보자인 나보다도 더 뛰어난 전문가들에게 그만큼 인정받을 만한 주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부족한 인식과 의심의 눈초리마저 ‘개념의 감옥’에 갇혀 있던 까닭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 책을 읽어가며 묻고 또 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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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아, 사람아, 그냥 갈 수 없잖아
사석원 지음 / 푸른숲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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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한량을 흠모해 온 나의 인생이 이제 30년도 훨씬 더 되어가던 작년 봄에 이 책이 나왔다. 술이니 대폿집이니 하는 말을 들으면 귀가 번쩍 뜨이는 평소의 성향대로 나는 알라딘에서 이 책의 제목과 내용을 보고 쾌재를 불렀다. “이 책을 사야해!”


그러나 막상 서점에서 실제로 이 책을 들춰봤을 때에는 생각이 좀 달라졌다. 삽화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동화틱했을 뿐만 아니라 책 자체의 밀도도 어딘지 모르게 떨어져 보였다. 그래도 한량을 흠모하는 사람으로서 갖출만한 아이템이라는 생각은 들었으나 돈과의 교환가치를 생각하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결국 나는 한량이라는 정체성이 요구하는 수준의 발뒤꿈치도 따라가지 못하는 나의 지갑 사정에 대한 명상(?)에 잠기게 되었고, 그 결과 이 책은 그날부로 나의 지출 순위에서 제외되었다. 그리고 한동안 나는 이 책을 잊었다.


그러다가 지난 연말, 때는 온 세상이 망년회로 흥청망청 돌아가던 시절이었다. 부디 왕림하셔서 자리를 빛내 주십사 하는 망년회는 별로 없었고 스스로 나서서 술자리를 선동할 주변머리 내지 능력 역시 없었다. 나는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해마다 연말의 퇴폐향락 풍토에 일익을 담당해 왔던 어두운 과거와 결별하고 집에서 독서나 하며 정의사회구현에 이바지해 보자는 의젓한 다짐을 했다. 한량? 난 그냥 정의사회구현에 이바지하는 모범시민이 되기로 했다. 그리고는 방구석에 엎어져 이불을 뒤집어쓰고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책을 펼쳤다. 그때 잡힌 책이 바로 그 몇일 전에 도서관에 빌려다 놓은 이 책이었다. 그러나 아아, 이게 어찌된 일인가. 정의사회구현에 이바지하고자 이 책을 읽기 시작했으나 곧 나는 정의사회구현 따위에나 이바지하고 있는 나 자신이 한심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이 책이 펼쳐보이는 유구한 한량의 세계 때문이었다. 정의사회구현이고 나발이고 간에 나는 한량을 흠모해 왔던 사람이 아닌가. 이불이 널부러진 방바닥을 뒹굴며 나는 스스로의 곤궁한 연말을 변호하느라 30년 이상 흠모해온 한량의 세계를 애써 폄하하고 당치도 않은 “정의사회구현”과 불륜을 저지르려한 자신을 책망했다.


이 책이 펼쳐 보이는 유구한 한량의 세계는 책 소개에서도 잘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전국의 이런저런 대폿집들이다. 대폿집 기행이라고 하면 흔해 빠진 맛집 기행 비스무름한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이 선사하는 대폿집 기행은 격이 다르다.


무엇보다도 이 책이 선사하는 대폿집 기행에는 대폿집과 그곳의 사람들에 대한 “사한량”의 내공 깊은 독해가 담겨있다. 이 책에서는 흔해 빠진 맛집 기행을 접할 때마다 느껴지는 모종의 의심스러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설익은 감정으로 떡칠된 듯한 낭만주의도 보이지 않는다. 해피엔딩을 강요할 수 없는 우리의 삶처럼 우리 인생의 한 무대인 대폿집에 대해서도 “사한량”은 해피엔딩을 강요하지 않는 것 같다. 그 결과 그가 그려내는 대폿집의 세계는 활기차고 신명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쓸쓸하고 고독하기도 하다. 새 아침을 기약할 수 없는 고적한 황혼 속에 잠겨 있는 듯한 “사한량”의 대폿집들은 우리 삶의 기약할 수 없는 미래들도 모두 보듬어 안아줄 것만 같다. 그래서일까. “사한량”의 대폿집에서는 이름 없는 이들의 헤아릴 수 없는 사연들도 무수한 별과 같이 빛난다. “사한량”의 한량 세월이 가져다주었을 그만의 독해가 아니었더라면 대폿집이라는 컨텍스트에 대한 이토록 인상적인 접근이 가능했을까.


뿐만 아니라 화가라는 직업을 의심케 하는 “사한량”의 글솜씨를 음미하는 재미도 무척 쏠쏠하다. 합석한 한 손님의 양복 깃에서 번질거리는 묵은 때와 기울어가는 나루터 주막의 문틈 사이로 들려오는 강바람 소리를 이야기하는 그의 글솜씨는 대상의 이면에 서린 갖은 애환의 속내들까지 생생히 전해주는 듯 하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사한량”은 푸슈킨의 시 구절과 한대수의 노래 가사까지 끌어와 대폿집을 그린 자신의 그림 속으로 능숙하게 쓱쓱 비벼 넣어 버리니, 이만하면 “사한량”의 글솜씨는 기교뿐만 아니라 넉넉함까지 갖추었다고 해도 큰 과찬은 아닐 듯 싶다. 


엄한 소리로 점철된 한심한 이 서평도 끝나가는 마당이니 이제 내가 이 책을 읽던 지난 연말 어느날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보자. 내 기억에 그날 나는 결국 술의 욕망을 이기지 못해 (그러나 여전히 오라는 곳은 없고) 슈퍼에서 막걸리를 사다가 방구석에 혼자 쭈그리고 앉아 마셨다. 그런 마당에 머리 속으로는 이 책에 소개된 이런저런 대폿집들을 떠올리고 있었으니, 그 마음이 하도 절절해 “레드썬”도 필요없이 스스로 최면이라도 걸릴 지경이었다. 한심한 이 서평을 쓰다보니 그날의 절절함이 또 살아나는 것이 술 마시고 싶은 생각이 용솟음친다. 아아, 오늘은 어느 돈 많은 중생이 나를 좀 불러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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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잃어버린 문명 - 사라진 바미얀 대불을 위한 헌사
이주형 지음 / 사회평론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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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에게 아프가니스탄이란 별로 익숙한 나라가 아니다. 대개는 파키스탄,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즈스탄 등과 같은 ‘~스탄’으로 끝나는 나라 가운데 어느 한 나라 정도로 알고 있을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프가니스탄에 대해서 알고 있는 바는 이 정도가 끝일 것이다.

하긴 최근 들어 아프가니스탄은 국제 뉴스의 무대로 자주 등장 한 바 있다. 오사마 빈 라덴이 은신하고 있다고 해서, 미군이 탈레반 정권을 전복시키고 새로운 정권을 새웠다고 해서, 잘랄라바드에서 펼쳐졌던 미군의 대대적인 탈레반 잔당 소탕 작전 등으로 해서 말이다. 국제 뉴스에 대해 오래 전부터 관심 있었던 사람이라면 아프가니스탄의 공산 혁명과 소련군의 침공, 무자헤딘의 저항과 이슬람 정권의 수립, 그리고 내전과 미군의 침공 등 수십년 내지 수년 정도 이전의 아프가니스탄 관련 뉴스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해서 우리들이 갖고 있는 얼마 되지 않는 지식을 끌어 모아 생각해 보면 이 나라에서 어떻게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지 의구심이 생긴다. 변변한 경작지도 충분치 않은 사막 비스무름한 산악 지역에서 먹고 살 궁리만 착실히 해도 부족하겠건만, 이들의 현대사는 정변과 침공과 내란과 학살로 엉망이 되어 있다. 이 와중에 아프가니스탄의 힘없는 백성들은 군벌의 총에 맞아 죽고 이슬람 근본주의의 광풍에 휘말려 죽고 미군의 오폭으로 죽고 눈 먼 지뢰를 밟아 죽는다. 덕분에 ‘아프가니스탄 사람’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에게도 ‘아프가니스탄 사람’의 모습은 고작 빵떡모자를 쓴 초췌하고 음울한 표정을 한 사내의 형상 정도가 고작일 것이다.  

사실 아프가니스탄은 매우 흥미로운 나라이며, 탈레반과 미군의 침공 정도만 갖고 이야기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정보는 그다지 많지 않다. 이 책의 등장을 혜성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도 여기에 있다. 나는 이 책이 아프가니스탄의 속살을 까발려 보고 싶은 나름대로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나는 이 책이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나의 무지를 밝혀줄 빛나는 혜성이 되어주길 바랬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 책은 나의 혜성이 되어주었다. 그 결과 적어도 현재의 내가 가지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호기심은 이 책을 통해 충족되었다.


목차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책은 아프가니스탄을 지역과 역사라는 두 개의 범주로 나누어 소개한다.


먼저 지역적인 접근(1부)은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에 명멸한 여러 문화들을 소재로 하여 이야기를 풀어가는 문화적 지리지이다. 아프가니스탄이라는 국가를 구성하는 다양한 민족들의 존재에서 짐작할 수 있듯, 아프가니스탄의 문화적 지리지에도 여러 민족과 여러 문화들이 날줄과 씨줄로 촘촘히 얽혀 있다. 이 문화적 지리지에는 알렉산더의 동방 원정을 따라왔던 그리이스인들 및 그들의 문자와 문화까지 끼어들고 있으니, (옥수스 강변의 아이 하눔에는 그리이스인들의 원형 극장까지 있다. 놀랍지 않은가, 중앙아시아 한 구석에 그리이스 원형 극장이 짱박혀 있는 황당무개한 사태라니!) 아프가니스탄의 문화적 다양성은 이것만으로도 익히 상상이 될 것이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바로 그저 밖에서 보기에는 접근 불가능한 난마와 같이 보일 이 대상을 독자의 흥미를 유지시키면서 한올 한올 풀어나간다는 데에 있다.


다음으로 역사적인 접근(2부)은 하미드 카르자이의 과도 정부가 이끌어 가고 있는 오늘의 아프가니스탄을 역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해 준다. 책의 분량 상 본격적인 역사적인 접근이라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주어진 한계 안에서는 눈부신 선방을 했다고 생각한다. 지적으로 나태한 나와 같은 사람마저 하미드 카르자이를 반 탈레반 북부 동맹이라는 맥락에서 바라보게 하였으니, 이 책의 교수법은 놀랍다고 밖에 할 수 밖에 없을 듯 하다.


또 하나 꼭 언급해야 할 것은 공들여 장만한 것이 분명한 사진과 도판의 물량공세(?)이다. 이 사진과 도판의 존재가 아프가니스탄의 이해를 위한 여정을 걷는 독자들을 더할 나위 없이 축복해준다. 나는 이 책에서 소개되는 발굴 지도를 역시 이 책에 소개된 그 지역에 대한 사진과 유심히 비교해 보곤 했다. 그러면서 나는 예전에 미처 몰랐던 스스로의 지적인 열정과 부지런함 내지 꼼꼼함까지 발견하는 쾌거(!)를 이룩한 바 있다. 이 또한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니랴!

 

송구스럽긴 하지만 놀라운 일이 하나 더 있다. (이것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 장황한 글을 끝마치려 하니 조금만 더 참아주시기를...) 그것은 내가 이 책을 읽고 ‘삘’을 받은 나머지 마눌님에게 “아프가니스탄 케밥”을 요리해 주겠노라고 공언해 버린 일이다. 아프가니스탄 케밥? 뉴욕에 아프가니스탄 요리 전문점이 있어서 케밥을 판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요리? 난 라면도 겨우 끓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프가니스탄 케밥을 요리해 주겠다고 큰 소리를 쳐 버린 것은 이 책을 읽고 감동을 먹은 나머지 어떻게든 아프가니스탄을 몸소 체험(?)해 보고 싶었던 가련한 소시민의 발버둥이라고 밖에 할 수 없을 듯 하다. 비록 벅찬 가슴으로 저지른 일이긴 하나 실제로 아프가니스탄 케밥을 요리할 길은 막막하기만 하니 이 일을 어쩌면 좋으랴. 남아일언중천금을 우습게 만들어 버릴 지도 모를 아프가니스탄 케밥 사태의 원흉(?)인 저자에게 편지를 보내 나 대신 아프가니스탄 케밥을 만들어서 택배로 부쳐줄 생각은 없는지 물어볼까 말까 진지하게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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