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아, 사람아, 그냥 갈 수 없잖아
사석원 지음 / 푸른숲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한량을 흠모해 온 나의 인생이 이제 30년도 훨씬 더 되어가던 작년 봄에 이 책이 나왔다. 술이니 대폿집이니 하는 말을 들으면 귀가 번쩍 뜨이는 평소의 성향대로 나는 알라딘에서 이 책의 제목과 내용을 보고 쾌재를 불렀다. “이 책을 사야해!”


그러나 막상 서점에서 실제로 이 책을 들춰봤을 때에는 생각이 좀 달라졌다. 삽화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동화틱했을 뿐만 아니라 책 자체의 밀도도 어딘지 모르게 떨어져 보였다. 그래도 한량을 흠모하는 사람으로서 갖출만한 아이템이라는 생각은 들었으나 돈과의 교환가치를 생각하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결국 나는 한량이라는 정체성이 요구하는 수준의 발뒤꿈치도 따라가지 못하는 나의 지갑 사정에 대한 명상(?)에 잠기게 되었고, 그 결과 이 책은 그날부로 나의 지출 순위에서 제외되었다. 그리고 한동안 나는 이 책을 잊었다.


그러다가 지난 연말, 때는 온 세상이 망년회로 흥청망청 돌아가던 시절이었다. 부디 왕림하셔서 자리를 빛내 주십사 하는 망년회는 별로 없었고 스스로 나서서 술자리를 선동할 주변머리 내지 능력 역시 없었다. 나는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해마다 연말의 퇴폐향락 풍토에 일익을 담당해 왔던 어두운 과거와 결별하고 집에서 독서나 하며 정의사회구현에 이바지해 보자는 의젓한 다짐을 했다. 한량? 난 그냥 정의사회구현에 이바지하는 모범시민이 되기로 했다. 그리고는 방구석에 엎어져 이불을 뒤집어쓰고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책을 펼쳤다. 그때 잡힌 책이 바로 그 몇일 전에 도서관에 빌려다 놓은 이 책이었다. 그러나 아아, 이게 어찌된 일인가. 정의사회구현에 이바지하고자 이 책을 읽기 시작했으나 곧 나는 정의사회구현 따위에나 이바지하고 있는 나 자신이 한심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이 책이 펼쳐보이는 유구한 한량의 세계 때문이었다. 정의사회구현이고 나발이고 간에 나는 한량을 흠모해 왔던 사람이 아닌가. 이불이 널부러진 방바닥을 뒹굴며 나는 스스로의 곤궁한 연말을 변호하느라 30년 이상 흠모해온 한량의 세계를 애써 폄하하고 당치도 않은 “정의사회구현”과 불륜을 저지르려한 자신을 책망했다.


이 책이 펼쳐 보이는 유구한 한량의 세계는 책 소개에서도 잘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전국의 이런저런 대폿집들이다. 대폿집 기행이라고 하면 흔해 빠진 맛집 기행 비스무름한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이 선사하는 대폿집 기행은 격이 다르다.


무엇보다도 이 책이 선사하는 대폿집 기행에는 대폿집과 그곳의 사람들에 대한 “사한량”의 내공 깊은 독해가 담겨있다. 이 책에서는 흔해 빠진 맛집 기행을 접할 때마다 느껴지는 모종의 의심스러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설익은 감정으로 떡칠된 듯한 낭만주의도 보이지 않는다. 해피엔딩을 강요할 수 없는 우리의 삶처럼 우리 인생의 한 무대인 대폿집에 대해서도 “사한량”은 해피엔딩을 강요하지 않는 것 같다. 그 결과 그가 그려내는 대폿집의 세계는 활기차고 신명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쓸쓸하고 고독하기도 하다. 새 아침을 기약할 수 없는 고적한 황혼 속에 잠겨 있는 듯한 “사한량”의 대폿집들은 우리 삶의 기약할 수 없는 미래들도 모두 보듬어 안아줄 것만 같다. 그래서일까. “사한량”의 대폿집에서는 이름 없는 이들의 헤아릴 수 없는 사연들도 무수한 별과 같이 빛난다. “사한량”의 한량 세월이 가져다주었을 그만의 독해가 아니었더라면 대폿집이라는 컨텍스트에 대한 이토록 인상적인 접근이 가능했을까.


뿐만 아니라 화가라는 직업을 의심케 하는 “사한량”의 글솜씨를 음미하는 재미도 무척 쏠쏠하다. 합석한 한 손님의 양복 깃에서 번질거리는 묵은 때와 기울어가는 나루터 주막의 문틈 사이로 들려오는 강바람 소리를 이야기하는 그의 글솜씨는 대상의 이면에 서린 갖은 애환의 속내들까지 생생히 전해주는 듯 하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사한량”은 푸슈킨의 시 구절과 한대수의 노래 가사까지 끌어와 대폿집을 그린 자신의 그림 속으로 능숙하게 쓱쓱 비벼 넣어 버리니, 이만하면 “사한량”의 글솜씨는 기교뿐만 아니라 넉넉함까지 갖추었다고 해도 큰 과찬은 아닐 듯 싶다. 


엄한 소리로 점철된 한심한 이 서평도 끝나가는 마당이니 이제 내가 이 책을 읽던 지난 연말 어느날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보자. 내 기억에 그날 나는 결국 술의 욕망을 이기지 못해 (그러나 여전히 오라는 곳은 없고) 슈퍼에서 막걸리를 사다가 방구석에 혼자 쭈그리고 앉아 마셨다. 그런 마당에 머리 속으로는 이 책에 소개된 이런저런 대폿집들을 떠올리고 있었으니, 그 마음이 하도 절절해 “레드썬”도 필요없이 스스로 최면이라도 걸릴 지경이었다. 한심한 이 서평을 쓰다보니 그날의 절절함이 또 살아나는 것이 술 마시고 싶은 생각이 용솟음친다. 아아, 오늘은 어느 돈 많은 중생이 나를 좀 불러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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