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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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 다섯 소년의 227일 간의 표류일기 

  파이는 평범한 열 다섯의 소년이었다. 하지만 파이의 가족이 캐나다로 이민을 가기 위해 태평양을 항해하던 중 배가 침몰하면서 더 이상 평범할 수 없었다. 파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생동안 단 하루도 겪지 않아도 될 일들을 227일이나 경험해야 했다. 파이의 가족이 타고 가던 침춤호의 사람들은 다 죽었지만 다행히 파이는 구명 보트를 타고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파이가 타고 있던 구명보트에는 얼룩말과 오랑우탄, 하이에나 그리고 벵골 호랑이가 함께 타고 있었던 것이다. 침춤 호가 침몰된지 시일이 지나면서 구명 보트를 타고 있는 승객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하이에나가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잡아먹었고,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크가 그 하이에나를 잡아먹어서 구명보트의 승객은 파이와 리처드 파크 단 둘만 남게 되었다.

   보통 사람들이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으레 보였을 반응을 파이 역시 보인다. 처음에는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잔인하게 잡아먹는 하이에나를 보며 분노했었지만 연민에 대한 감정도 곧 잊고, 리처드 파크에 의해 위협받고 있는 자신의 생명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리처드 파크에게 잡아먹힐 걱정을 하면서도 혹시라도 기적이 일어나서 지나가는 배가 나타나 자신을 구해주길 바랬다. 하지만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그러한 희망을 포기했고, 동시에 이 상황에 적응하고 살아남아야겠다는 의지를 가졌다. 파이는 리처드 파크와 '공존'하기 위해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파이와 리처드 파크의 관계는 파이가 우위를 점하는 일방적인 관계여만 했다. 호랑이의 특성상 자신의 아래에 있는 것은 언제든지 공격하여 먹이로 삼을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파이는 리처드 파크에게 먹이와 물을 주며, 표류했던 227일간 그러한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생존할 수 있었다.

생존의 서바이벌 게임

  <파이 이야기>를 읽는 내내 나는 미국 CBS 방송국의「서바이벌(Survivor)」이라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떠올렸다. 꿈 많고, 무엇이든 잘 믿는 낙천적이었던 고등학생 시절, '최악, 최저'의 상황에서 인간이 어디까지 비열하고, 추해질 수 있는지 '서바이벌'을 보고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굉장히 실망을 한 적이 있었다. 파이가 극한의 상황에서 보였던 행동과 심리는 그때 내가 서바이벌의 보고 충격을 받았었던 그것과 유사했다.   

  서바이벌에 출연하는 16명의 도전자들은 두 부족으로 나누어 경쟁하며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는 무인도에서 아무것도 없이 자연을 이용해 직접 집을 짓고, 먹을 것을 구하며 생활해야 한다. 그리고 한 회마다 도전에서 진 부족은 부족 투표를 통해 부족원 중 한 사람씩 퇴출시키고, 최후에 남은 1인이 승리자로 100만 달러의 상금을 받는다.

1. 약자의 낙오에 초연해지기 ─ 양심은 거추장스러운 장식일 뿐

   서바이벌의 도전자들이 퇴출되는 데는(voted-out)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역시 가장 큰 이유는 약하기 때문이다. 다윈의 적자생존 법칙이 여기서도 적용된다. 게임을 하는데 있어서 약한 존재는 방해가 되기 때문에 최고의 부족을 만들기 위해 약자는 퇴출당한다. 아무리 나와 친한 사람이라도 이 다윈의 규칙에서는 예외가 없다. 개인적인 감정 보다는 팀을 위해 그리고 나의 생존을 위해 약자를 낙오시키고 그에  무덤덤해 질 수 있어야 한다.  파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분노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 점에 대해 솔직해져야겠다. 얼룩말에 대한 연민도 오래가지 않았다. 내 목숨이 위협 받을 때는, 생존을 향한 이기적이고 무시무시한 갈망에 동정심도 가려버린다. 얼룩말이 심한 고통을 겪는 것을 슬펐지만 ─ 몸집이 큰 동물이어서 시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 내가 어떻게 해줄 수가 없었다. 가여웠지만 곧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P.156)"

  처음에는 얼룩말의 죽음이 너무 슬펐고, 하이에나의 비열한 모습에 분노했지만 당장 자신의 생명조차 위협을 받는 상태에서 파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좀 더 정확하고, 좀 더 잔인하게 표현하면 '할 수 없었다'가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승산 없는 게임이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비열하게 얼룩말을 공격하고 있는 하이에나에게 덤벼서 최소한 '방관자'의 위치는 벗어날 수 있었지만 파이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방조자'가 되었다. 직접 죄를 저지른 범인보다는 못할 지 몰라도 살인을 방조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도왔기에 죄책감에 시달려야 하는 방조자. 하지만 그 죄책감도 잠시 뿐  죽음에 대한 공포 앞에서 파이는 얼룩말의 죽음에 대한 기억과 죄책감이라는 감정조차 잊었다. 존재의 위협이라는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양심이란 거추장스러운 장식물일 뿐이었다.

2. 관계 맺기  ─ 공존, 정신적 벗

   서바이벌의 최후 생존자가 되는 방법 중 하나가 '견고한 동맹'을 잘 이용하는 것이다. 도전자들은 마음이 잘 맞는다든가, 남녀 성별로 또는 전략적 이해관계가 잘 맞는 사람들과 서로 '동맹'이라는 것을 맺는다. 과반수의 원칙을 따르는 투표라는 탈락방법은 한 부족 내에서도 다수파와 소수파로 나눠져야만 하는 상황을 만들어 낸다. 그렇기에 부족 내에서도 서로 전략적으로, 수적으로 우위를 점하기 위해 경쟁해야 하는데 '다수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사람들은 서로 더 많은, 더 강한 사람들을 끌어들이려고 하며 그 결과, 부족 내 새로운 집단인 '동맹'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최후에 한 명이 남을 수 밖에 없는 경쟁의 속성상 사람들은 같은 동맹이라고 서로를 전폭적인 신뢰 관계 하에 믿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서로를 의심하면서도 무인도 이전의 사회에서 그랬었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그를 믿고 싶은 마음이 있기에 동맹이라는 불안전하지만 미약하게나마 기댈 곳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서바이벌'은 40일 후에 끝이 나지만 파이가 처한 상황은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언제 끝이 날 지 모르는 싸움을 버텨야 했고, 그 싸움엔 벵골 호랑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파이는 벵골 호랑이를 이길 수 없었다. 물리적인 힘으로도 열세였고, 어쩌다 바다로 몰아낸다고 해도 워낙 수영을 잘하기 때문에 금방 구명 보트로 올라올 것이며, 결정적으로 호랑이를 이길 만한 마땅한 계책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파이는 리처드 파크와 공존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태평양 망망대해에서 지나가는 배에게 구출되기만을 기다리는 파이의 처지에서는 비록 말은 통하지 않더라도 함께해 줄 정신적 벗이 필요했다. 그 벗이 육식 동물인 호랑이였기에 '관계'를 만든 뒤에도 파이는 끊임 없이 리처드 파크를 의심하고, 경계해야 됐다.  하지만 사방이 바다 뿐인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리처드 파크는 자신과 '구출'이라는 목표를 함께하고 있는 하나뿐인 '육지 생물'이였기에 파이에게는 두려우면서도 유일하게 기댈 수 있고, 생명의 의지를 북돋워주는 존재였다.

어느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나요? 어느 쪽이 더 나은 가요?

   파이는 책의 끝 부분에서 우리에게 동물이 나오지 않는 또 하나의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렇게 질문을 던진다. 물론, 더 마음에 드는 이야기는 동물들이 나오는 감동적인 생존 이야기다. 알라딘의 다른 리뷰들 역시 거의 동물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든다고 하며 글을 끝맺고 있다. 모든 것을 긍적으로 생각하고, 쉽게 믿었던 고등학생 때야 그렇게 만족하고 책장을 덮었겠지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좋든, 싫든간에 이제 나는 현실을 알아가는 나이이다. 그래서 만족하며 쉽게 책장을 덮을 수가 없었다.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가 더 낫다는 말에 눈물을 흘리는 파이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내 마음에 든다고 해서 그것이 마냥 사실이고 현실일 순 없다.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책을 읽는 내내 '서바이벌 게임'을 생각했던 나로서는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쉽게 '감동적인 이야기'로 끝낼 수 없었다. 좀 더 '신빙성'이 있는 것은 사람이 나오는 이야기였다. 대부분의 경우, 살고자 하는 인간은 목숨이 위협 받는 상황에서 살인도 불사하지 않으며 그보다 더한 짓도 서슴지 않는다. 일말의 양심의 가책은 느끼겠지만 말이다. 그러한 현실을 알기에 사람이 나오는 이야기가 더 사실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어쩔 수 없으며, 파이의 눈물 또한 감동의 눈물이 아니라 죄책감에서 나오는 눈물로 보인다.

  동물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든다고 답하며 마지막 책장을 덮을지 그리고 파이의 눈물을 어떻게 볼 것인지는 전적으로 책을 읽은 독자에게 달려있다. 그 결론은 독자 개개인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가지고 서로 다른 눈으로 책을 보는 만큼 가지각색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동물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든다며 이야기를 끝내지 못했고, 그것을 넘어서 현실을 운운하는 것을 보니 나 역시  때묻은 현실주의자가 되어 버린 것 같다. 현실을  아는 사람은 현실의 틀에 발목이 잡혀서 기적을 보지 못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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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모와 어둠 속의 기적 1
발터 뫼르스 지음, 이광일 옮김 / 들녘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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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둠 속에 알파벳이 한 글자씩 적혀 있는 서랍들이 있다.  'A… Z' . 우리는 그 중에서 R자가 적힌 서랍을 연다. 루모(Rumo)의 R이다. R자가 적혀있는 서랍이 열리면서 영사기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우리 앞에 있던 투명한 스크린에 루모의 모험이 펼쳐진다.

  루모는 개와 노루가 묘하게 뒤섞여서 전반적으로는 개의 모습이지만 노루처럼 머리에 두 개의 뿔이 달려있는 '볼퍼팅어'이다. 태어나면서 부모들에게 버림을 받는 볼퍼팅어들은 누구에게 주워지느냐에 따라 다양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채찍으로 매일 학대를 일삼는 주인들도 있지만 루모는 다행히 유순한 페르하헨들의 손에서 자라며 금지옥엽 대접을 받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살아있고, 움직이는 생물들은 모든 잡아먹는 외눈박이들에게 잡혀가면서 드디어 루모의 모험이 시작된다. 타고난 싸움 실력으로 외눈박이들에게서 탈출한 루모는 모든 볼퍼팅어들이 보게 되는 은띠를 따라 볼퍼팅에 도착한다. 볼퍼팅은 볼퍼팅어들만이 들어올 수 있는 볼퍼팅어들만의 도시이다. 이 곳에서 볼퍼팅어들은 도시를 위해 공공의 의무를 수행하고, 그 대가로 볼퍼팅어의 역사, 글쓰기 그리고 싸움 기술을 배운다. 모든 볼퍼팅어들은 매우 호전적이고 싸움을 잘하기 때문에 볼퍼팅어가 싸움을 잘 한다는 것은 자랑거리가 아니라 평범한 '사실'일 뿐이다. 다만 학교를 다니면서 싸움의 기술에 대해 더 정교한 교육을 받고, 자신이 더 잘 싸울 수 있는 분야가 어느 것인지 계발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볼퍼팅에서 싸움 실력을 늘려가면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며 일상에 안주하고 있던 루모와 다른 볼퍼팅어들에게 위기가 닥치고, 루모는 그 위기에서 동족들을 구해낸다.

  사실, 루모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혹은 우리가 바라는 영웅의 모습이 아니다. 루모는 '주몽'처럼 비열한 경쟁자에 비해 딱히 선하다고 할 수 없으며, 특출나게 지략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리포터'처럼 선택받은 자로써 사람들을 휘어잡을 수 있는 극적인 쇼맨쉽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루모가 그의 세계를 구하는 영웅이 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단지 ''  덕분이었다. 꼭 루모가 아니더라도 선천적으로 싸움을 잘하는 기술을 타고나는 볼퍼팅어라면 누구나가 루모처럼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루모는 볼퍼팅 시의 모든 볼퍼팅어들이 위험에 처한 그 순간 우연히 시의 외부에 있었고, 다른 모든 이가 겪어야 했던 동족의 위기을 비껴나갈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구할 수 있는 위치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영웅이 될 수 있는 전제'를 가졌다고 해서 무조건 '영웅이라는 결론'이 나올 수는 없다. '평양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는 말처럼 영웅이 될 수 있는 기회를 가졌고, 적으로부터 동족을 구해낼 수 있는 역량을 가졌다고 해도 저 싫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루모는 그가 사랑하는 볼퍼팅어인 랄라를 위해 누르넨이라는 거미 괴물을 무찌르고, 발터 뫼르스가 창조해낸 기상천외한 생물들로 가득찬 지하세계로 뛰어든다.

  루모가 볼퍼팅어들을 구해내고 난 뒤 다른 볼퍼팅어들은 루모가 겪은 모험과 그가 지하세계의 괴물들을 물리쳤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 워낙 말주변이 없는 데다가 옆에서 루모의 모험에 대해 간간이 과장 섞인 뻥과 함께 침 튀겨가며 설명해줄 '보조자'가 없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 보조자가 루모와 텔레파시로 의사소통을 하고, 직접 말을 할 수 없는 루모의 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모는 다른 볼퍼팅어들이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아도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인정받지 못해도 그 자신이 만족할 만한 모험을 했고, 그 속에서 성장할 수 있었으며,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시 행복을 되찾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R자가 적혀있는 서랍이 닫힌다

  루모의 모험을 다른 볼퍼팅어들이 알아주어 그 뒤 모든 볼퍼팅어들의 영웅으로 후세에 길이길이 남을 전설이 되었는지, 아니면 동족의 위기를 함께했던 평범한 볼퍼팅어로 기억에서 잊혀졌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R자가 적힌서랍이 닫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루모와 어둠 속의 기적' 두 권을 함께 한 우리는 루모가 겪은 모든 일들을 알고 있기에 빙그레 웃으며 마지막 책장을 덮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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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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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은 집이 사람에게 해주는 일을 동물들에게 해준다. 야생의 영역에서는 뚝뚝 떨어져 있지만, 동물원에서는 우리라는 좁은 공간에 모여 있다. 우리에 들어오기 전에는 동굴이 여기 있고, 강이 저기 있고, 한참 떨어진 곳에 사냥터가 있고, 그 옆에 언덕이 있고, 산딸기는 저 멀리 있었다 ─ 언제나 사자, 뱀, 개미, 거머리, 덩굴, 옻나무에 시달려야 했지만, 이제 손이 닿는 곳에 있는 수도꼭지에서 강이 흐르고, 잠자리 바로 옆에서 몸을 씻고, 요리한 곳에서 식사하며, 집에 담장을 쌓을 수 있고, 깨끗하고 따듯하게 보존할 수 있다.

사람의 집은 기본 욕구를 가까이서 안전하게 해결해주는 영역 안에 있다. 동물원은동물에게 마찬가지 역할을 해준다. 그 안에 필요한 곳이 다 있다 ─ 쉴 곳, 먹고 마실 곳, 목욕할 곳, 털을 가다듬을 곳 등등. 사냥할 필요가 없고, 먹이가 일주일에 엿새 동안 생기는 것을 알면, 동물은 동물원에 자리를 마련한다.

…(중략)… 갇혔다는 느낌은 더더욱 없다. 오히려 주인이 된 기분을 느끼며, 동물원 안에서도 야생 그대로 행동한다. 침범 받으면 사력을 다해 영역을 지킨다. 그렇게 동물원에 가두는 것이 야생으로 사는 것보다 객관적으로 더 나을 것도 나쁠 것도 없다. 동물의 욕구만 충족된다면, 대자연이든 인공 환경이든 영역은 기정사실이 되어버린다.

표범의 점박이 무늬처럼, 가치판단을 할 필요가 없다. 동물이 지성이 있어 선택할 수 있다면, 동물원의 삶을 선택할 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동물원과 야생의 차이는 동물원에는 기생충과 적이 없고 먹이가 풍부한데, 야생의 서식지에는 기생충과 적이 많고 먹이가 드물다는 것이라나. 생각할 나름이다. '리츠' 같은 고급 호텔에서 무료로 룸서비스를 해주고 무제한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쪽을 택하겠는가? 아니면 돌봐줄 사람 하나 없는 노숙자가 되겠는가? 하지만 동물에겐 그런 분별력이 없다. 본성의 범위 안에서 갖고 있는 것으로 살 뿐.-31~32쪽

달아나고 싶은 이유가 뭐든, 미쳤든 아니든, 동물원을 곱지 않게 보는 사람들이 알아야 할 점이 있다. 동물은 '다른 곳으로'가 아니라 '뭔가로부터' 달아난다는 사실이다. 자기 영역 안에 두려움을 주는 게 있으면 ─ 적의 침입, 우두머리인 동물의 공격, 놀라게 하는 소음 ─ 도망칠 태세를 취한다.-59쪽

서늘함이 입속에 박하를 깨문 것처럼 신선하게 느껴졌다.-71쪽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분위기보다는, 그가 거기 있다는 ─ 열린 마음으로 인내심 있게 ─ 사실이 본능적으로 이해된다는 점이었다. 누군가 그와 대화하고 싶을 경우에 대비해서 거기 있다는 것. 영혼의 문제든, 무거운 마음이든, 어두운 양심이든, 무슨 말을 해도 그가 사랑으로 들어주리라는 것. 그가 맡은 일은 사랑하는 일이었고, 그가 최선을 다해서 위로해주고 길잡이가 되어줄 터였다.-72~73쪽

"간디께서는 '모든 종교는 진실하다'고 말씀하셨어요. 저는 신을 사랑하고 싶을 뿐이에요."-94쪽

분노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 점에 대해 솔직해져야겠다. 얼룩말에 대한 연민도 오래가지 않았다. 내 목숨이 위협 받을 때는, 생존을 향한 이기적이고 무시무시한 갈망에 도정심도 가려버린다. 얼룩말이 심한 고통을 겪는 것을 슬펐지만 ─ 몸집이 큰 동물이어서 시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 내가 어떻게 해줄 수가 없었다. 가여웠지만 곧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무슨 자랑이 아닌 것은 안다. 내가 너무 냉담했던 것이 미안하기도 하다. 불쌍한 얼룩말과 녀석이 겪었던 일을 잊지 못한다. 그 생각을 할 때마다 기도를 하게 된다.-156쪽

자랑은 아니지만, 난 그 순간 살려는 강렬한 의지를 갖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 경험으로 보면 누구나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한숨지으며 생명을 포기한다. 또 어떤 이들은 약간 싸우다가 희망을 놓아버린다. 그래도 어떤 이들은 ─ 나도 거기 속한다 ─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운다. 어떤 대가를 치르든 싸우고, 빼앗기며, 성공의 불확실성도 받아들인다. 우리는 끝까지 싸운다. 그것은 용기의 문제가 아니다. 놓아버리지 않는 것은 타고난것이다. 그것은 생에 대한 허기로 뭉쳐진 아둔함에 불과할지도 모른다.-188~189쪽

근본을 흔드는 공포, 생명의 끝에 다가서서 느끼는 진짜 공포는 욕창처럼 기억에 둥지를 튼다. 그것은 모든 것을 썩게 한다. 그것에 대한 말까지도 썩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힘껏 싸워야 한다. 거기에 말의 빛이 비추도록 열심히 싸워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가 피하려 하고 심지어는 잊으려 하는 고요한 어둠으로 다가오면 우리는 더 심한 공포의 공격에 노출된다. 우리를 패배시킨 적과 진정으로 싸우지 않았으므로.-2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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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1 - 황제 사냥꾼
이영도 지음 / 황금가지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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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에 네 마리의 형제 새가 있었어요. 네 마리의 식성은 모두 달랐지요. 한 마리는 눈물을, 한 마리는 피를, 한 마리는 물을, 그리고 한 마리는 독을 마셨어요. 그중 가장 빨리 죽는 것은 눈물을 마시는 새였대요. 눈물은 도저히 몸 안에 둘 수 없어서 밖으로 흘려보내는 것이니까. 그런 해로운 것을 마시기 때문에 눈물을 마시는 새는 가장 빨리 죽지요. 그렇다면 가장 오래 사는 건 어떤 새일까요?"

"피를 마시는 새. 아무도 흘리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마시니까요. 하지만 그 피비린내 때문에 아무도 피를 마시는 새에겐 가까이 가지 않아요."

"…… 피는 누구도 흘리고 싶어하지 않는 귀중한 것인데, 왜 몸 밖으로 나오면 누구도 좋아하기 힘든 피비린내를 풍기냐고. ……"


// 해로운 눈물을 가장 많이 마시는 자는 '왕'이다. 왕국의 백성들을 다스리는 지배자로서 백성들이 눈물을 흘릴 만한 상황을 만들지 않게끔 선정을 베풀고, 혹시라도 잘못된 정치로 인해 고통 받는 백성들이 있을 경우, 그들의 눈물을 마시고 잘못을 시정하여 웃음을 되찾게 해주는 것이 왕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왕정이 폐지되고, '다스림'의 의미가 종속적인 관계에서 쌍방향적 관계로 변한 지금도 이 임무는 유효하다. 임무의 주체만 '왕'에서 대통령, 국회의원으로 대표되는 '대의원'들에게 계승되었을 뿐이다. 수해지역에 가서 골프나 치고, 국민이 아니라 대기업을 위해 일하는 이들도 있지만 블로그를 통해 대중들과 소통하며, 민심대장정을 하며 직접 국민들의 삶 속으로 뛰어들어 체험해보는 이들도 있다. 조금이라도 더 국민들과 소통하려하고, 그 속에서 국민들의 눈물을 어루만질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국민의 대표가 가져야 하는 자세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대표들이 많이 가진 나라일수록 국민의 눈물이 적은 행복한 나라가 될 것이다. //


// 그렇다면 '피'는? … 아직 고민중. //

-342~3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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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표류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박연정 옮김 / 예문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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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도록 안개 속에 표류하고 있는 청춘.

  '청춘표류'. 앞으로 뭘 해먹고 살아가야 할지, 당장 오늘 하루를 어떻게 끝맞쳐야 할 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내 삶에 대해 말하는 것 같아서 제목부터 심상치않았다. 그래서 혹시 이 책을 보면 '나와 같은 고민을 가진 사람들의 얘기를 통해서 나 또한 지금의 불투명한 인생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하는 희망을 가지고 책의 첫 장을 폈다.

 

하류 인생에서의 표류를 벗어나기 위해

  이 책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간 사람들, 아직 '성공'이라 함부로 이름 붙일 수는 없지만 자기가 선택한 그 길에서 나름의 일가견을 이루어낸 사람들을 일본의 유명 저널리스트인 다치바나 다카시가 인터뷰하고 신문에 연재했던 글들을 책으로 만들어 출간한 것이다. 

  책 속에 나오는 11명의 청년들이 걸어온 길을 보면 누구하나 순탄했던 인생이 없었다. '좋은 학교를 나와서 안정된 직장에 취직'하려는 일반 사람들의 그저 그렇게 무난하고, 편안한 인생과는 다른 길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이 가는 길을 사람들이 지지해 준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미쳤다고 비웃는 사람들이 더 많았었다. 이들에게 실패는 '어려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TV 드라마 속의 캔디 이야기'가 아니라 인생의 기반을 뒤흔들어버린 충격이었고, 청춘이 그리 아름다운 것만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은 해냈다. 와인, 자전거, 나이프, 매 등 각자 자기가 하는 일에서 일가견을 이루어냈다.  

  땡전 한 푼 없이 인생의 기반 자체가 막막한 상황에서 이들에게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살기 위해, 그야말로 먹고 살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이것저것 일을 하며 '하류인생'을 살고 있었던 이들은 그 과정에서 '좋아하는 일'을 찾았다. 휴식시간이 화장실 갈 시간뿐이더라도, 고급 와인을 맛보기 위해 프랑스에 갔는데 차를 타고 다닐 돈이 없어 하루 종일 걸어 다녀야 해도 '그냥 좋았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데 아무 이유가 없는 것처럼 아무리 몸이 힘들어도 가끔은 절망하게되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정진했고 결국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었다. 

 

좋아하는 일이 해야하는 일이 될 수 있다면

  강인선 기자의 책에 나오는 말인데 아마도 '청춘표류'의 주인공들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말인 것 같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문제아"였던 그들은 청춘시대에 표류하는 동안 '자기 자신이 원하고 좋아하는 일'을 찾았고 그것을 '자신이 해야하는 일' 즉, 직업으로 삶아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좋아하는 일이 해야하는 일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즐겁게 일할 수 있을까. 그리고 즐겁게 일하는 만큼 일의 효율성도 매우 높을 것이다. 
  '청춘'이라는 시기를 겪으면서 우리는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자신의 '꿈'을 찾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따뜻한 집을 떠나 모험을 할 용기가 없어서 또는 당장의 생활고 때문에 꿈을 찾는 일을 포기한다. 그렇게 청춘을 떠나보내고 청년 시절에 찾아헤매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던 시절을 '왕년의 추억'으로 그리워하며 현실에 안주하며 살아간다. 그렇지만 어쩌면 우리는 물이 끓는 온도인 100도에 이르기가 너무 힘들다고 포기했는데 사실 99.9도에서 그만 둬버리는건지도 모른다. 내가 원하고, 진정으로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면 따뜻한 부모님의 품에서 벗어나 우리의 청춘 시대에 정신 없이 표류하며 험난한 파도에 휩쓸려 상처투성이가 되더라도 아픔을  이겨내고 다양한 경험을 해봐야 그것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작가는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망설임과 방황의 시간, 열정과 패기만큼 그로 인한 실패와 부끄러움이 당당할 수 있는 것이 청춘의 특권이라는 그의 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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