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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 열 다섯 소년의 227일 간의 표류일기
파이는 평범한 열 다섯의 소년이었다. 하지만 파이의 가족이 캐나다로 이민을 가기 위해 태평양을 항해하던 중 배가 침몰하면서 더 이상 평범할 수 없었다. 파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생동안 단 하루도 겪지 않아도 될 일들을 227일이나 경험해야 했다. 파이의 가족이 타고 가던 침춤호의 사람들은 다 죽었지만 다행히 파이는 구명 보트를 타고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파이가 타고 있던 구명보트에는 얼룩말과 오랑우탄, 하이에나 그리고 벵골 호랑이가 함께 타고 있었던 것이다. 침춤 호가 침몰된지 시일이 지나면서 구명 보트를 타고 있는 승객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하이에나가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잡아먹었고,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크가 그 하이에나를 잡아먹어서 구명보트의 승객은 파이와 리처드 파크 단 둘만 남게 되었다.
보통 사람들이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으레 보였을 반응을 파이 역시 보인다. 처음에는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잔인하게 잡아먹는 하이에나를 보며 분노했었지만 연민에 대한 감정도 곧 잊고, 리처드 파크에 의해 위협받고 있는 자신의 생명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리처드 파크에게 잡아먹힐 걱정을 하면서도 혹시라도 기적이 일어나서 지나가는 배가 나타나 자신을 구해주길 바랬다. 하지만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그러한 희망을 포기했고, 동시에 이 상황에 적응하고 살아남아야겠다는 의지를 가졌다. 파이는 리처드 파크와 '공존'하기 위해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파이와 리처드 파크의 관계는 파이가 우위를 점하는 일방적인 관계여만 했다. 호랑이의 특성상 자신의 아래에 있는 것은 언제든지 공격하여 먹이로 삼을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파이는 리처드 파크에게 먹이와 물을 주며, 표류했던 227일간 그러한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생존할 수 있었다.
■ 생존의 서바이벌 게임
<파이 이야기>를 읽는 내내 나는 미국 CBS 방송국의「서바이벌(Survivor)」이라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떠올렸다. 꿈 많고, 무엇이든 잘 믿는 낙천적이었던 고등학생 시절, '최악, 최저'의 상황에서 인간이 어디까지 비열하고, 추해질 수 있는지 '서바이벌'을 보고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굉장히 실망을 한 적이 있었다. 파이가 극한의 상황에서 보였던 행동과 심리는 그때 내가 서바이벌의 보고 충격을 받았었던 그것과 유사했다.
서바이벌에 출연하는 16명의 도전자들은 두 부족으로 나누어 경쟁하며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는 무인도에서 아무것도 없이 자연을 이용해 직접 집을 짓고, 먹을 것을 구하며 생활해야 한다. 그리고 한 회마다 도전에서 진 부족은 부족 투표를 통해 부족원 중 한 사람씩 퇴출시키고, 최후에 남은 1인이 승리자로 100만 달러의 상금을 받는다.
1. 약자의 낙오에 초연해지기 ─ 양심은 거추장스러운 장식일 뿐
서바이벌의 도전자들이 퇴출되는 데는(voted-out)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역시 가장 큰 이유는 약하기 때문이다. 다윈의 적자생존 법칙이 여기서도 적용된다. 게임을 하는데 있어서 약한 존재는 방해가 되기 때문에 최고의 부족을 만들기 위해 약자는 퇴출당한다. 아무리 나와 친한 사람이라도 이 다윈의 규칙에서는 예외가 없다. 개인적인 감정 보다는 팀을 위해 그리고 나의 생존을 위해 약자를 낙오시키고 그에 무덤덤해 질 수 있어야 한다. 파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분노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 점에 대해 솔직해져야겠다. 얼룩말에 대한 연민도 오래가지 않았다. 내 목숨이 위협 받을 때는, 생존을 향한 이기적이고 무시무시한 갈망에 동정심도 가려버린다. 얼룩말이 심한 고통을 겪는 것을 슬펐지만 ─ 몸집이 큰 동물이어서 시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 내가 어떻게 해줄 수가 없었다. 가여웠지만 곧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P.156)"
처음에는 얼룩말의 죽음이 너무 슬펐고, 하이에나의 비열한 모습에 분노했지만 당장 자신의 생명조차 위협을 받는 상태에서 파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좀 더 정확하고, 좀 더 잔인하게 표현하면 '할 수 없었다'가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승산 없는 게임이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비열하게 얼룩말을 공격하고 있는 하이에나에게 덤벼서 최소한 '방관자'의 위치는 벗어날 수 있었지만 파이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방조자'가 되었다. 직접 죄를 저지른 범인보다는 못할 지 몰라도 살인을 방조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도왔기에 죄책감에 시달려야 하는 방조자. 하지만 그 죄책감도 잠시 뿐 죽음에 대한 공포 앞에서 파이는 얼룩말의 죽음에 대한 기억과 죄책감이라는 감정조차 잊었다. 존재의 위협이라는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양심이란 거추장스러운 장식물일 뿐이었다.
2. 관계 맺기 ─ 공존, 정신적 벗
서바이벌의 최후 생존자가 되는 방법 중 하나가 '견고한 동맹'을 잘 이용하는 것이다. 도전자들은 마음이 잘 맞는다든가, 남녀 성별로 또는 전략적 이해관계가 잘 맞는 사람들과 서로 '동맹'이라는 것을 맺는다. 과반수의 원칙을 따르는 투표라는 탈락방법은 한 부족 내에서도 다수파와 소수파로 나눠져야만 하는 상황을 만들어 낸다. 그렇기에 부족 내에서도 서로 전략적으로, 수적으로 우위를 점하기 위해 경쟁해야 하는데 '다수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사람들은 서로 더 많은, 더 강한 사람들을 끌어들이려고 하며 그 결과, 부족 내 새로운 집단인 '동맹'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최후에 한 명이 남을 수 밖에 없는 경쟁의 속성상 사람들은 같은 동맹이라고 서로를 전폭적인 신뢰 관계 하에 믿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서로를 의심하면서도 무인도 이전의 사회에서 그랬었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그를 믿고 싶은 마음이 있기에 동맹이라는 불안전하지만 미약하게나마 기댈 곳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서바이벌'은 40일 후에 끝이 나지만 파이가 처한 상황은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언제 끝이 날 지 모르는 싸움을 버텨야 했고, 그 싸움엔 벵골 호랑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파이는 벵골 호랑이를 이길 수 없었다. 물리적인 힘으로도 열세였고, 어쩌다 바다로 몰아낸다고 해도 워낙 수영을 잘하기 때문에 금방 구명 보트로 올라올 것이며, 결정적으로 호랑이를 이길 만한 마땅한 계책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파이는 리처드 파크와 공존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태평양 망망대해에서 지나가는 배에게 구출되기만을 기다리는 파이의 처지에서는 비록 말은 통하지 않더라도 함께해 줄 정신적 벗이 필요했다. 그 벗이 육식 동물인 호랑이였기에 '관계'를 만든 뒤에도 파이는 끊임 없이 리처드 파크를 의심하고, 경계해야 됐다. 하지만 사방이 바다 뿐인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리처드 파크는 자신과 '구출'이라는 목표를 함께하고 있는 하나뿐인 '육지 생물'이였기에 파이에게는 두려우면서도 유일하게 기댈 수 있고, 생명의 의지를 북돋워주는 존재였다.
■ 어느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나요? 어느 쪽이 더 나은 가요?
파이는 책의 끝 부분에서 우리에게 동물이 나오지 않는 또 하나의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렇게 질문을 던진다. 물론, 더 마음에 드는 이야기는 동물들이 나오는 감동적인 생존 이야기다. 알라딘의 다른 리뷰들 역시 거의 동물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든다고 하며 글을 끝맺고 있다. 모든 것을 긍적으로 생각하고, 쉽게 믿었던 고등학생 때야 그렇게 만족하고 책장을 덮었겠지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좋든, 싫든간에 이제 나는 현실을 알아가는 나이이다. 그래서 만족하며 쉽게 책장을 덮을 수가 없었다.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가 더 낫다는 말에 눈물을 흘리는 파이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내 마음에 든다고 해서 그것이 마냥 사실이고 현실일 순 없다.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책을 읽는 내내 '서바이벌 게임'을 생각했던 나로서는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쉽게 '감동적인 이야기'로 끝낼 수 없었다. 좀 더 '신빙성'이 있는 것은 사람이 나오는 이야기였다. 대부분의 경우, 살고자 하는 인간은 목숨이 위협 받는 상황에서 살인도 불사하지 않으며 그보다 더한 짓도 서슴지 않는다. 일말의 양심의 가책은 느끼겠지만 말이다. 그러한 현실을 알기에 사람이 나오는 이야기가 더 사실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어쩔 수 없으며, 파이의 눈물 또한 감동의 눈물이 아니라 죄책감에서 나오는 눈물로 보인다.
동물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든다고 답하며 마지막 책장을 덮을지 그리고 파이의 눈물을 어떻게 볼 것인지는 전적으로 책을 읽은 독자에게 달려있다. 그 결론은 독자 개개인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가지고 서로 다른 눈으로 책을 보는 만큼 가지각색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동물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든다며 이야기를 끝내지 못했고, 그것을 넘어서 현실을 운운하는 것을 보니 나 역시 때묻은 현실주의자가 되어 버린 것 같다. 현실을 아는 사람은 현실의 틀에 발목이 잡혀서 기적을 보지 못하는 법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