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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함께 : 저승편 세트 - 전3권
주호민 지음 / 애니북스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니체는 말했다, “신은 죽었다”고. 나 역시 니체의 말에 동의한다. 종교전쟁과 마녀사냥, 이교도 처단 등 역사 속에서 신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무고하게 죽어갔던가. 아니 멀리 역사를 볼 것도 없이 당장 우리 주위에 넘쳐나는 헐벗고 굶주린 자들을 왜 신은 구제해주지 않는가. 이외에도 복잡다단한 여러 이유로 신을 눈곱만치도 믿지 않았던 나였지만, 최근 어떤 만화를 보며 생각이 좀 변했다. 이런 신들이 있다면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다고. 어떤 만화기에 그러냐고? 바로 《신과 함께-저승편》이다. 
 

1) 웹툰 <신과 함께> vs 단행본 《신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겠지만 《신과 함께-저승편》은 네이버에서 인기리에 연재됐던 웹툰이다. 웹상에서 연재됐던 만화를 모아 단행본에 맞게 수정, 편집한 것이 《신과 함께-저승편》이다. 주호민 작가와 웹툰 <신과 함께>의 애독자라면 당연히 단행본을 구입하겠지만,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르겠다. 인터넷에서 클릭 몇 번만 하면 볼 수 있는 웹툰을 뭐하러 돈을 주고 사서 책으로 보냐고. 그렇지만 나는 단행본에도 충분한 매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신과 함께-저승편》는 소장가치가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2) 《신과 함께-저승편》은 어떤 이야기?

 《신과 함께-저승편》은 제목 그대로 사후 세계에 대한 만화다. 서른아홉의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던 김자홍 씨는 과도한 접대업무로 생긴 간 질환 때문에 어느 날 요절한다. 그는 저승차사들을 따라 간 염라국에서 진기한이라는 국선 변호사를 만나는데, 변호사의 말에 따르면 이승에서 49재를 지내는 동안 염라국의 다섯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고 한다. 저승시왕(十王)이 지키는 각 관문에서는 효, 언행, 자선, 범죄 등 이승에서의 행적을 기준으로 벌을 줄 지 다음 관문으로 보내줄 지 판결을 내린다. 모든 관문을 무사히 넘기면 망자는 다시 이승에서 환생할 수 있다. 과연 우리의 김자홍 씨는 모든 관문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까?  

3) 전통+현대+만화적 상상력=‘달콤 살벌한 염라국’의 탄생

 네이버 웹툰으로도 연재됐었던 《신과 함께-저승편》의 최대 강점은 바로 스토리에 있다. 저승차사, 저승시왕, 염라국 등은 한국 전통의 사후 세계관이 반영된 설정이다. 한복 대신 양복을 입은 저승차사, 지하철을 이용해 망자를 염라국까지 수송한다는 설정 등은 전통을 현대에 맞춰 각색한 구성으로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또한, 죽음이라는 소재를 다루면서도 만화라는 형식을 십분 활용해 지나치게 무거워지지 않고 정도를 지킬 줄 아는 작가의 탁월한 능력은 이제까지 본 적 없는 ‘달콤 살벌한 염라국’을 탄생시켰다. 일단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달콤 살벌한 염라국에서 독자들은 웃음과 감동의 향연을 맞보게 된다. 


마지막으로 내 개인적인 얘기를 조금 해볼까 한다.

전 스물세 살이라는 조금 이른 나이에 아버지를 저 세상으로 보내드렸습니다. 전혀 예측지 못한 상황에서 돌아가신 거라 그 뒤 3년이 지났어도 그때의 충격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네이버 웹툰으로 <신과 함께>를 봤는데, 참으로 마음에 위안이 되었습니다. 저승에 대한 따뜻한 묘사와 스토리를 따라가다 보니 실제로 그런 곳이 정말 어딘가에 존재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아빠도 이런 곳을 지났을까, 심사를 받을 때 지금 나의 삶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현재에서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라고 다짐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신과 함께-저승편》 리뷰단을 신청할 때 썼던 사연인데, 마음과 달리 리뷰가 늦어져 애니북스 출판사에게 죄송하다. 현재 네이버에서 새롭게 연재 중인 <신과 함께-이승편>도 재밌게 보고 있는데 다음 단행본은 언제 나올 지 기대된다.

<신과 함께>의 감동을 주변 지인들과 나누고 싶은 분들, 너무 힘들어 잠깐이지만 삶을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이라도 해본 분들, 사랑하는 누군가를 먼저 떠나본 경험이 있는 분들께 《신과 함께-저승편》을 강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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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 개정판
홍세화 지음 / 창비 / 2006년 11월
절판


'한 사회와 다른 사회의 만남'은 그 만남으로 또는 눈물로 그쳐선 안될 일이었다. 만남도 눈물도 사랑에서 오고 또 사랑을 요구한다. 또한 그 사랑은 사회 안에서 반드시 앙가주망(참여)을 요구한다. -54쪽

쿠바에서 반혁명죄로 기소당한 어느 수학교수를 위한 빠리 과학아카데미 원장의 탄원서 중,,,
"당신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자유롭고자 하는 사람을 제거함으로써 '자유'를 없앨 수 없다는 것을."
"인류가 나타나기까지 수억년의 시간이 필요했으며 또 하나의 인간이 탄생하기 위하여 아홉 달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인간을 죽이는 데는 단 한순간으로 족하며 또한 아주 간단한 족쇄로 그 인간의 존엄성을 빼앗을 수 있습니다."-210쪽

다시 굴러떨어질 줄 알면서도 그 바위를 꼭대기로 밀어올리는 시지프스의 비극은 처절한 것이었지만 저항이었고 철저한 삶이었다.-231쪽

자신의 진실된 모습도 알지 못하고 사는 삶, 자신이 단지 반쪽일 뿐이라는 것도 모른채, 게다가 그 나머지 반쪽을 마음껏 증오하면서 사는 삶, 그것은 실로 무서운 일이었다.-2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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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짱 2008-01-10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밀짚모자님, 아직은 낯선 얼굴이지만

불쑥 아침부터 찾아와서 새해인사드립니다. 꾸벅!

새해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올 한해는 님을 천천히 알아가는 기쁨을 맛볼 수 있겠지요. ^-^
 
레오 스트라우스 - 부활하는 네오콘의 대부
박성래 지음 / 김영사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신은 죽었다.

그럼 세상은 누가 지키지? .... 독수리 오형제?

걱정마, 우리에게는 네오콘이 있잖아.

 

신은 죽었다.

  신은 죽었다,고 니체는 말했다. 중세 유럽의 학문들은 '신학의 시녀' 역할을 수행하며 카톨릭을 위해 존재했었고, 중세 유럽인들의 삶 역시도 카톨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카톨릭의 헤게모니는 '근대이성'이 등장하며 깨졌다. 신은 버림받았다. 단순히 버려진 것이 아니라 신의 존재까지 부정되기 시작했다. 인간을 여타의 동물들과 구분지을 수 있게 만든 우리의 만능해결사 '이성'을 가지고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은 먼 옛날에 씌어졌던 '기적'인지, 후손들에 의해 '뻥튀기된 약간 비범했던 사람의 이야기'인지 확인할 길이 없는 성서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라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할 뿐이었다. 이성주의자들의 사회에서 진실로 신은 죽은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전까지 도덕이 지향해야 하는 아웃라인을 제시해주며 사회 질서를 유지해 오던 종교가 힘을 잃으면서 사회에 공백이 생긴 것이다. 거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성주의자들이 신봉하는 자유주의는 상대주의, 허무주의 그리고 무책임한 방종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자유주의는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개인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보장해주려 했고 그에 따라 '너도 옳을 수 있고, 나도 옳을 수 있다'는 상대주의가 사회의 미덕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상대주의는 진리의 불확실성에서 기인하는 '허무주의'를, 제한이 없는 절대적 자유는 권리만 존재하고 책임은 지지 않는 '방종'이라는 문제를 만들어냈다. 사회는 질서와 도덕을 잃었고 혼란스러워졌다. 

 

세상을 지킬 자는 누구?

   한국전쟁 때 목사 14명이 체포되었다. 그 중 12명은 처형됐으나 2명은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목사 중 한 명은 미쳐버리는 바람에 살아남았고, 주인공 신 목사만 온전하게 살아남았다. 신도들은 신 목사가 신앙을 배반한 대가로 살아남았다며 욕을 해댔지만 진실은 신도들의 추측과는 달랐다. 12명의 순교자들은 살려달라 아우성을 치면서 신을 부정하고 비참하게 죽어갔고, 자신의 신앙을 지킨 사람은 신 목사 한 사람 뿐이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신앙을 지켜냈던 신 목사는 사실 신을 믿지 않았다. 모진 고문으로 괴로워하던 한 목사에게 사실은 신이 없다는 자신의 신앙의 비밀을 털어놓는 순간 한 목사는 미쳐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신 목사는 자신이 예수를 배신한 가리옷 유다라는 누명을 기꺼이 뒤집어쓰며 신도들 앞에서 잘못을 회개하는 척 연기하고 끝까지 진실을 밝히지 않는다. 신도들은 진리를 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믿음이 부정되지 않으면서, 혹시나 신이 존재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그들의 불안감을 잠재워 줄 수 있는 촉진제, 즉 순교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신도들은 진리를 알고도 견딜 수 있을 만큼 강인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십자가를 질 수 없는 사람들이었고, 그것을 아는 신 목사는 그들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진 것이다. 

   재미 소설가 김은국의 1964년작,「순교자 The Martyred」의 줄거리이다. 일반 대중들은 '신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가상의 존재일 뿐이고, 죽어서 가게 된다는 내세 따위는 없다'는 냉혹한 진리를 믿고 싶지도 아니 알고 싶지도 않아한다. 그래서 진실을 알고도 견뎌낼 수 있는 사람들은 다수의 사람들을 위해 거짓 연기를 해야한다, 그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도덕도 마찬가지이다. 신이 실재의 존재가 아닌 것처럼 도덕 또한 그 자체로 옳고, 완벽한 것이 아니다. 도덕은 정치 엘리트들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세속적인 것이다.

  하지만 도덕이 근거가 없는 세속적인 것이기에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기능을 빼앗아 버린다며 사회는 방종을 일삼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상태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잣대로써 계속 남아 있어야 한다. 다만, 도덕은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 아니고 가진 자들의 이익에 휘둘릴 염려가 있으므로 도덕 혼자서는 안되고 정치철학을 교육받은 엘리트들에 의해 사회가 움직여야 한다. 정치철학을 교육받은 엘리트들은 완벽한 지식을 바탕으로 공동의 이익(공공선 good)을 위해 일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바로 '네오콘'이다. 네오콘들은 국가 전반을 통제함으로써 사회질서를 지킨다. 동성애 금지와 같은 보수적, 자연적(네오콘들이 보기에) 가치 수호, 가톨릭의 국교화, 일반대중의 정치참여 금지 등이 바로 그것이다.

 

네오콘에 대한 비판

   분명 '너도 옳고, 나도 옳은 수 있다'는 상대주의적 사고는 진리에 대한 회의주의적 사고를 사회에 퍼뜨릴 위험이 있다. 하지만 상대주의를 거부하고 '나만이 옳다'는 식의 논리 또한 문제가 있다. 네오콘은 사회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목하에 하나의 가치를 정하고 사회 구성원들에게 그것을 강요한다. 동성을 사랑하는 것은 이성을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오직 하나의 가치-이성간 결혼-를 추구하는 네오콘들에게 동성애자들의 행복추구권 따위는 관심 밖이다.

    이러한 네오콘들의 태도는 비단 미국 국내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사회에 강요할 뿐만 아니라 세계 최강의 힘을 가지고 국제 정치에도 관여하면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선(善)'을 휘두른다.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며 거짓 정보를 퍼뜨리고 멋대로 심판 전쟁을 벌이는 등 그 전과가 화려하다.

   네오콘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군사력으로 다른 나라를 얼마든지 희생시켜도 좋다고 한다. 그들에게 세상은 '강자의 자연권'이 지배하는 정글이다.(P.186) 네오콘의 외교는 다윈의 적자생존법칙을 뛰어넘는 제국주의 논리이다. 

   네오콘식 정치의 근본인 정치적 엘리트와 우월한 하나의 가치에 의한 다스림은 이렇게 국내외적으로 사람들의 다양한 취향, 흥미, 사고방식 등을 탄압함으로써 엘리트들을 제외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책에 대한 비판

  "단순히 독일이 우경화되고 유대인들을 쫓아냈기 때문에 우파의 원칙들이 자동적으로 거부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스트라우스의 말을 비판하기 위해 "마치 스탈린식의 현실 공산주의가 폭압적인 일인 독재에 불과하다는 현실을 목도하고도 '공산주의가 자동적으로 거부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공산주의자처럼 이야기한다."고 저자는 154쪽에서 얘기한다.

  저자는 스트라스를 비판하기 위해 공산주의자의 경우를 예로 든다. 독일이 우경화되고, 유대인들을 탄압한 것은 우파의 원칙들이 시행된 것이므로 우파는 배제되어야 한다. 스탈린의 공산주의가 나쁘기 때문에 역시 그 큰 틀인 공산주의 역시 자동적으로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논리는 이렇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 없다.

  우선, 왜 스탈린을 예로 들며 가지고 비유를 해야했는지 의문이 생긴다. 저자처럼 스탈린을 예로 들며 공산주의를 배격해야 한다는 사람들도 많지만 스탈린의 러시아에서 일어났던 변화는 공산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라며 진정한 사회주의가 아니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그에 못지 않게 많다. 저자는 전자의 입장인 듯 하지만 난 후자의 입장이기 때문에 저자의 예시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스탈린 치하의 러시아는 스탈린을 필두로 공산주의에서 타도의 대상인 엘리트들이 정치적, 경제적 실권을 장악한 사회였다. 자본주의의 '자본가-노동자' 관계, 즉 '엘리트 독재' 관계를 타파하기 위해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공산주의였는데도 결과적으로 엘리트 독재를 답습한 꼴이 되어버린 스탈린의 러시아는 결코 공산주의 사회라고 할 수 없다.

  또한, 우파가 그리고 스탈린이 잘못했다고 그들의 원칙이 '자동적으로' 거부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동의할 수 없다. 나는 우파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분명 안정적 변화와 전통의 가치를 중시하는 그들의 태도는 사회를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스탈린을 공산주의자라고 봤을때) 스탈린의 공산주의가 잘못됐다고 공산주의 전체를 싸잡아 자동적으로 거부하는 태도도 옳지 않다.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는 말처럼 한 이불을 덮고도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의(-ism)'라는 단어로 서로 나누고 묶어서 생각을 분류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반대로 우파의 일부만 보고, 공산주의의 일부만 보고 그 전체를 싸잡아서 '자동적으로' 거부하는 것도 웃긴 일 같다. 

   이 외에도 빨간 것에 대해 결벽증을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저자 역시 책의 여기저기서 사회주의에 대해 거부감을 표출해서 잠깐잠깐씩 답답함을 느꼈었다. 하지만 그 점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네오콘의 사상적 기반이나 내용, 실제 정치에서의 네오콘의 영향력에 대한 설명이 쉽게 잘 되어 있어서 나같이 국제정치에 문외한인 사람들에게는 네오콘에 대해 재밌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였다. 부시 대통령이 소위 불량국가라고 불리는 나라들에 대해 주장하는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가 무엇인지,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이 이스라엘의 레반논 침공에 대해서 어떻게 '평화의 확산을 위해서 그 정도의 희생은 감수해야 한다'고 태연하게 말할 수 있는 지 그 저의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읽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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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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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 다섯 소년의 227일 간의 표류일기 

  파이는 평범한 열 다섯의 소년이었다. 하지만 파이의 가족이 캐나다로 이민을 가기 위해 태평양을 항해하던 중 배가 침몰하면서 더 이상 평범할 수 없었다. 파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생동안 단 하루도 겪지 않아도 될 일들을 227일이나 경험해야 했다. 파이의 가족이 타고 가던 침춤호의 사람들은 다 죽었지만 다행히 파이는 구명 보트를 타고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파이가 타고 있던 구명보트에는 얼룩말과 오랑우탄, 하이에나 그리고 벵골 호랑이가 함께 타고 있었던 것이다. 침춤 호가 침몰된지 시일이 지나면서 구명 보트를 타고 있는 승객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하이에나가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잡아먹었고,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크가 그 하이에나를 잡아먹어서 구명보트의 승객은 파이와 리처드 파크 단 둘만 남게 되었다.

   보통 사람들이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으레 보였을 반응을 파이 역시 보인다. 처음에는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잔인하게 잡아먹는 하이에나를 보며 분노했었지만 연민에 대한 감정도 곧 잊고, 리처드 파크에 의해 위협받고 있는 자신의 생명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리처드 파크에게 잡아먹힐 걱정을 하면서도 혹시라도 기적이 일어나서 지나가는 배가 나타나 자신을 구해주길 바랬다. 하지만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그러한 희망을 포기했고, 동시에 이 상황에 적응하고 살아남아야겠다는 의지를 가졌다. 파이는 리처드 파크와 '공존'하기 위해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파이와 리처드 파크의 관계는 파이가 우위를 점하는 일방적인 관계여만 했다. 호랑이의 특성상 자신의 아래에 있는 것은 언제든지 공격하여 먹이로 삼을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파이는 리처드 파크에게 먹이와 물을 주며, 표류했던 227일간 그러한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생존할 수 있었다.

생존의 서바이벌 게임

  <파이 이야기>를 읽는 내내 나는 미국 CBS 방송국의「서바이벌(Survivor)」이라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떠올렸다. 꿈 많고, 무엇이든 잘 믿는 낙천적이었던 고등학생 시절, '최악, 최저'의 상황에서 인간이 어디까지 비열하고, 추해질 수 있는지 '서바이벌'을 보고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굉장히 실망을 한 적이 있었다. 파이가 극한의 상황에서 보였던 행동과 심리는 그때 내가 서바이벌의 보고 충격을 받았었던 그것과 유사했다.   

  서바이벌에 출연하는 16명의 도전자들은 두 부족으로 나누어 경쟁하며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는 무인도에서 아무것도 없이 자연을 이용해 직접 집을 짓고, 먹을 것을 구하며 생활해야 한다. 그리고 한 회마다 도전에서 진 부족은 부족 투표를 통해 부족원 중 한 사람씩 퇴출시키고, 최후에 남은 1인이 승리자로 100만 달러의 상금을 받는다.

1. 약자의 낙오에 초연해지기 ─ 양심은 거추장스러운 장식일 뿐

   서바이벌의 도전자들이 퇴출되는 데는(voted-out)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역시 가장 큰 이유는 약하기 때문이다. 다윈의 적자생존 법칙이 여기서도 적용된다. 게임을 하는데 있어서 약한 존재는 방해가 되기 때문에 최고의 부족을 만들기 위해 약자는 퇴출당한다. 아무리 나와 친한 사람이라도 이 다윈의 규칙에서는 예외가 없다. 개인적인 감정 보다는 팀을 위해 그리고 나의 생존을 위해 약자를 낙오시키고 그에  무덤덤해 질 수 있어야 한다.  파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분노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 점에 대해 솔직해져야겠다. 얼룩말에 대한 연민도 오래가지 않았다. 내 목숨이 위협 받을 때는, 생존을 향한 이기적이고 무시무시한 갈망에 동정심도 가려버린다. 얼룩말이 심한 고통을 겪는 것을 슬펐지만 ─ 몸집이 큰 동물이어서 시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 내가 어떻게 해줄 수가 없었다. 가여웠지만 곧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P.156)"

  처음에는 얼룩말의 죽음이 너무 슬펐고, 하이에나의 비열한 모습에 분노했지만 당장 자신의 생명조차 위협을 받는 상태에서 파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좀 더 정확하고, 좀 더 잔인하게 표현하면 '할 수 없었다'가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승산 없는 게임이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비열하게 얼룩말을 공격하고 있는 하이에나에게 덤벼서 최소한 '방관자'의 위치는 벗어날 수 있었지만 파이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방조자'가 되었다. 직접 죄를 저지른 범인보다는 못할 지 몰라도 살인을 방조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도왔기에 죄책감에 시달려야 하는 방조자. 하지만 그 죄책감도 잠시 뿐  죽음에 대한 공포 앞에서 파이는 얼룩말의 죽음에 대한 기억과 죄책감이라는 감정조차 잊었다. 존재의 위협이라는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양심이란 거추장스러운 장식물일 뿐이었다.

2. 관계 맺기  ─ 공존, 정신적 벗

   서바이벌의 최후 생존자가 되는 방법 중 하나가 '견고한 동맹'을 잘 이용하는 것이다. 도전자들은 마음이 잘 맞는다든가, 남녀 성별로 또는 전략적 이해관계가 잘 맞는 사람들과 서로 '동맹'이라는 것을 맺는다. 과반수의 원칙을 따르는 투표라는 탈락방법은 한 부족 내에서도 다수파와 소수파로 나눠져야만 하는 상황을 만들어 낸다. 그렇기에 부족 내에서도 서로 전략적으로, 수적으로 우위를 점하기 위해 경쟁해야 하는데 '다수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사람들은 서로 더 많은, 더 강한 사람들을 끌어들이려고 하며 그 결과, 부족 내 새로운 집단인 '동맹'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최후에 한 명이 남을 수 밖에 없는 경쟁의 속성상 사람들은 같은 동맹이라고 서로를 전폭적인 신뢰 관계 하에 믿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서로를 의심하면서도 무인도 이전의 사회에서 그랬었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그를 믿고 싶은 마음이 있기에 동맹이라는 불안전하지만 미약하게나마 기댈 곳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서바이벌'은 40일 후에 끝이 나지만 파이가 처한 상황은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언제 끝이 날 지 모르는 싸움을 버텨야 했고, 그 싸움엔 벵골 호랑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파이는 벵골 호랑이를 이길 수 없었다. 물리적인 힘으로도 열세였고, 어쩌다 바다로 몰아낸다고 해도 워낙 수영을 잘하기 때문에 금방 구명 보트로 올라올 것이며, 결정적으로 호랑이를 이길 만한 마땅한 계책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파이는 리처드 파크와 공존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태평양 망망대해에서 지나가는 배에게 구출되기만을 기다리는 파이의 처지에서는 비록 말은 통하지 않더라도 함께해 줄 정신적 벗이 필요했다. 그 벗이 육식 동물인 호랑이였기에 '관계'를 만든 뒤에도 파이는 끊임 없이 리처드 파크를 의심하고, 경계해야 됐다.  하지만 사방이 바다 뿐인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리처드 파크는 자신과 '구출'이라는 목표를 함께하고 있는 하나뿐인 '육지 생물'이였기에 파이에게는 두려우면서도 유일하게 기댈 수 있고, 생명의 의지를 북돋워주는 존재였다.

어느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나요? 어느 쪽이 더 나은 가요?

   파이는 책의 끝 부분에서 우리에게 동물이 나오지 않는 또 하나의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렇게 질문을 던진다. 물론, 더 마음에 드는 이야기는 동물들이 나오는 감동적인 생존 이야기다. 알라딘의 다른 리뷰들 역시 거의 동물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든다고 하며 글을 끝맺고 있다. 모든 것을 긍적으로 생각하고, 쉽게 믿었던 고등학생 때야 그렇게 만족하고 책장을 덮었겠지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좋든, 싫든간에 이제 나는 현실을 알아가는 나이이다. 그래서 만족하며 쉽게 책장을 덮을 수가 없었다.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가 더 낫다는 말에 눈물을 흘리는 파이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내 마음에 든다고 해서 그것이 마냥 사실이고 현실일 순 없다.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책을 읽는 내내 '서바이벌 게임'을 생각했던 나로서는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쉽게 '감동적인 이야기'로 끝낼 수 없었다. 좀 더 '신빙성'이 있는 것은 사람이 나오는 이야기였다. 대부분의 경우, 살고자 하는 인간은 목숨이 위협 받는 상황에서 살인도 불사하지 않으며 그보다 더한 짓도 서슴지 않는다. 일말의 양심의 가책은 느끼겠지만 말이다. 그러한 현실을 알기에 사람이 나오는 이야기가 더 사실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어쩔 수 없으며, 파이의 눈물 또한 감동의 눈물이 아니라 죄책감에서 나오는 눈물로 보인다.

  동물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든다고 답하며 마지막 책장을 덮을지 그리고 파이의 눈물을 어떻게 볼 것인지는 전적으로 책을 읽은 독자에게 달려있다. 그 결론은 독자 개개인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가지고 서로 다른 눈으로 책을 보는 만큼 가지각색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동물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든다며 이야기를 끝내지 못했고, 그것을 넘어서 현실을 운운하는 것을 보니 나 역시  때묻은 현실주의자가 되어 버린 것 같다. 현실을  아는 사람은 현실의 틀에 발목이 잡혀서 기적을 보지 못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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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모와 어둠 속의 기적 1
발터 뫼르스 지음, 이광일 옮김 / 들녘 / 200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어둠 속에 알파벳이 한 글자씩 적혀 있는 서랍들이 있다.  'A… Z' . 우리는 그 중에서 R자가 적힌 서랍을 연다. 루모(Rumo)의 R이다. R자가 적혀있는 서랍이 열리면서 영사기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우리 앞에 있던 투명한 스크린에 루모의 모험이 펼쳐진다.

  루모는 개와 노루가 묘하게 뒤섞여서 전반적으로는 개의 모습이지만 노루처럼 머리에 두 개의 뿔이 달려있는 '볼퍼팅어'이다. 태어나면서 부모들에게 버림을 받는 볼퍼팅어들은 누구에게 주워지느냐에 따라 다양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채찍으로 매일 학대를 일삼는 주인들도 있지만 루모는 다행히 유순한 페르하헨들의 손에서 자라며 금지옥엽 대접을 받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살아있고, 움직이는 생물들은 모든 잡아먹는 외눈박이들에게 잡혀가면서 드디어 루모의 모험이 시작된다. 타고난 싸움 실력으로 외눈박이들에게서 탈출한 루모는 모든 볼퍼팅어들이 보게 되는 은띠를 따라 볼퍼팅에 도착한다. 볼퍼팅은 볼퍼팅어들만이 들어올 수 있는 볼퍼팅어들만의 도시이다. 이 곳에서 볼퍼팅어들은 도시를 위해 공공의 의무를 수행하고, 그 대가로 볼퍼팅어의 역사, 글쓰기 그리고 싸움 기술을 배운다. 모든 볼퍼팅어들은 매우 호전적이고 싸움을 잘하기 때문에 볼퍼팅어가 싸움을 잘 한다는 것은 자랑거리가 아니라 평범한 '사실'일 뿐이다. 다만 학교를 다니면서 싸움의 기술에 대해 더 정교한 교육을 받고, 자신이 더 잘 싸울 수 있는 분야가 어느 것인지 계발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볼퍼팅에서 싸움 실력을 늘려가면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며 일상에 안주하고 있던 루모와 다른 볼퍼팅어들에게 위기가 닥치고, 루모는 그 위기에서 동족들을 구해낸다.

  사실, 루모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혹은 우리가 바라는 영웅의 모습이 아니다. 루모는 '주몽'처럼 비열한 경쟁자에 비해 딱히 선하다고 할 수 없으며, 특출나게 지략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리포터'처럼 선택받은 자로써 사람들을 휘어잡을 수 있는 극적인 쇼맨쉽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루모가 그의 세계를 구하는 영웅이 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단지 ''  덕분이었다. 꼭 루모가 아니더라도 선천적으로 싸움을 잘하는 기술을 타고나는 볼퍼팅어라면 누구나가 루모처럼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루모는 볼퍼팅 시의 모든 볼퍼팅어들이 위험에 처한 그 순간 우연히 시의 외부에 있었고, 다른 모든 이가 겪어야 했던 동족의 위기을 비껴나갈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구할 수 있는 위치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영웅이 될 수 있는 전제'를 가졌다고 해서 무조건 '영웅이라는 결론'이 나올 수는 없다. '평양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는 말처럼 영웅이 될 수 있는 기회를 가졌고, 적으로부터 동족을 구해낼 수 있는 역량을 가졌다고 해도 저 싫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루모는 그가 사랑하는 볼퍼팅어인 랄라를 위해 누르넨이라는 거미 괴물을 무찌르고, 발터 뫼르스가 창조해낸 기상천외한 생물들로 가득찬 지하세계로 뛰어든다.

  루모가 볼퍼팅어들을 구해내고 난 뒤 다른 볼퍼팅어들은 루모가 겪은 모험과 그가 지하세계의 괴물들을 물리쳤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 워낙 말주변이 없는 데다가 옆에서 루모의 모험에 대해 간간이 과장 섞인 뻥과 함께 침 튀겨가며 설명해줄 '보조자'가 없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 보조자가 루모와 텔레파시로 의사소통을 하고, 직접 말을 할 수 없는 루모의 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모는 다른 볼퍼팅어들이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아도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인정받지 못해도 그 자신이 만족할 만한 모험을 했고, 그 속에서 성장할 수 있었으며,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시 행복을 되찾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R자가 적혀있는 서랍이 닫힌다

  루모의 모험을 다른 볼퍼팅어들이 알아주어 그 뒤 모든 볼퍼팅어들의 영웅으로 후세에 길이길이 남을 전설이 되었는지, 아니면 동족의 위기를 함께했던 평범한 볼퍼팅어로 기억에서 잊혀졌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R자가 적힌서랍이 닫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루모와 어둠 속의 기적' 두 권을 함께 한 우리는 루모가 겪은 모든 일들을 알고 있기에 빙그레 웃으며 마지막 책장을 덮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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