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구판절판


동물원은 집이 사람에게 해주는 일을 동물들에게 해준다. 야생의 영역에서는 뚝뚝 떨어져 있지만, 동물원에서는 우리라는 좁은 공간에 모여 있다. 우리에 들어오기 전에는 동굴이 여기 있고, 강이 저기 있고, 한참 떨어진 곳에 사냥터가 있고, 그 옆에 언덕이 있고, 산딸기는 저 멀리 있었다 ─ 언제나 사자, 뱀, 개미, 거머리, 덩굴, 옻나무에 시달려야 했지만, 이제 손이 닿는 곳에 있는 수도꼭지에서 강이 흐르고, 잠자리 바로 옆에서 몸을 씻고, 요리한 곳에서 식사하며, 집에 담장을 쌓을 수 있고, 깨끗하고 따듯하게 보존할 수 있다.

사람의 집은 기본 욕구를 가까이서 안전하게 해결해주는 영역 안에 있다. 동물원은동물에게 마찬가지 역할을 해준다. 그 안에 필요한 곳이 다 있다 ─ 쉴 곳, 먹고 마실 곳, 목욕할 곳, 털을 가다듬을 곳 등등. 사냥할 필요가 없고, 먹이가 일주일에 엿새 동안 생기는 것을 알면, 동물은 동물원에 자리를 마련한다.

…(중략)… 갇혔다는 느낌은 더더욱 없다. 오히려 주인이 된 기분을 느끼며, 동물원 안에서도 야생 그대로 행동한다. 침범 받으면 사력을 다해 영역을 지킨다. 그렇게 동물원에 가두는 것이 야생으로 사는 것보다 객관적으로 더 나을 것도 나쁠 것도 없다. 동물의 욕구만 충족된다면, 대자연이든 인공 환경이든 영역은 기정사실이 되어버린다.

표범의 점박이 무늬처럼, 가치판단을 할 필요가 없다. 동물이 지성이 있어 선택할 수 있다면, 동물원의 삶을 선택할 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동물원과 야생의 차이는 동물원에는 기생충과 적이 없고 먹이가 풍부한데, 야생의 서식지에는 기생충과 적이 많고 먹이가 드물다는 것이라나. 생각할 나름이다. '리츠' 같은 고급 호텔에서 무료로 룸서비스를 해주고 무제한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쪽을 택하겠는가? 아니면 돌봐줄 사람 하나 없는 노숙자가 되겠는가? 하지만 동물에겐 그런 분별력이 없다. 본성의 범위 안에서 갖고 있는 것으로 살 뿐.-31~32쪽

달아나고 싶은 이유가 뭐든, 미쳤든 아니든, 동물원을 곱지 않게 보는 사람들이 알아야 할 점이 있다. 동물은 '다른 곳으로'가 아니라 '뭔가로부터' 달아난다는 사실이다. 자기 영역 안에 두려움을 주는 게 있으면 ─ 적의 침입, 우두머리인 동물의 공격, 놀라게 하는 소음 ─ 도망칠 태세를 취한다.-59쪽

서늘함이 입속에 박하를 깨문 것처럼 신선하게 느껴졌다.-71쪽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분위기보다는, 그가 거기 있다는 ─ 열린 마음으로 인내심 있게 ─ 사실이 본능적으로 이해된다는 점이었다. 누군가 그와 대화하고 싶을 경우에 대비해서 거기 있다는 것. 영혼의 문제든, 무거운 마음이든, 어두운 양심이든, 무슨 말을 해도 그가 사랑으로 들어주리라는 것. 그가 맡은 일은 사랑하는 일이었고, 그가 최선을 다해서 위로해주고 길잡이가 되어줄 터였다.-72~73쪽

"간디께서는 '모든 종교는 진실하다'고 말씀하셨어요. 저는 신을 사랑하고 싶을 뿐이에요."-94쪽

분노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 점에 대해 솔직해져야겠다. 얼룩말에 대한 연민도 오래가지 않았다. 내 목숨이 위협 받을 때는, 생존을 향한 이기적이고 무시무시한 갈망에 도정심도 가려버린다. 얼룩말이 심한 고통을 겪는 것을 슬펐지만 ─ 몸집이 큰 동물이어서 시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 내가 어떻게 해줄 수가 없었다. 가여웠지만 곧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무슨 자랑이 아닌 것은 안다. 내가 너무 냉담했던 것이 미안하기도 하다. 불쌍한 얼룩말과 녀석이 겪었던 일을 잊지 못한다. 그 생각을 할 때마다 기도를 하게 된다.-156쪽

자랑은 아니지만, 난 그 순간 살려는 강렬한 의지를 갖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 경험으로 보면 누구나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한숨지으며 생명을 포기한다. 또 어떤 이들은 약간 싸우다가 희망을 놓아버린다. 그래도 어떤 이들은 ─ 나도 거기 속한다 ─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운다. 어떤 대가를 치르든 싸우고, 빼앗기며, 성공의 불확실성도 받아들인다. 우리는 끝까지 싸운다. 그것은 용기의 문제가 아니다. 놓아버리지 않는 것은 타고난것이다. 그것은 생에 대한 허기로 뭉쳐진 아둔함에 불과할지도 모른다.-188~189쪽

근본을 흔드는 공포, 생명의 끝에 다가서서 느끼는 진짜 공포는 욕창처럼 기억에 둥지를 튼다. 그것은 모든 것을 썩게 한다. 그것에 대한 말까지도 썩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힘껏 싸워야 한다. 거기에 말의 빛이 비추도록 열심히 싸워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가 피하려 하고 심지어는 잊으려 하는 고요한 어둠으로 다가오면 우리는 더 심한 공포의 공격에 노출된다. 우리를 패배시킨 적과 진정으로 싸우지 않았으므로.-2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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