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딸
이사벨 아옌데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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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은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의지에 대해 개척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것인가는 사람들이 늘 고민하는 문제이다. 그것이 단순히 수동적으로 팔자소관이니 견뎌야할 문제라면 삶의 의미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진정한 운명이란 타고난 가정적 사회적 환경을 제외한다면 인간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고 노력에 의해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인간은 삶의 의미를 그것에서 찾는다. 아옌데의 소설은 운명을 선택하고 개척한 여인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물론 소설은 중고등학생이면 누구나 교과서를 통해 배워 알고 있듯이 개연성 있는 이야기(Fiction)를 말한다. 우리는 때때로 영화 속의 인물과 영화배우를 동일시하듯이 소설 속의 픽션과 소설가를 혼동하기도 한다. 배우가 그 인물이 되어 연기를 하듯이 소설가 또한 이야기라는 매개체를 통해 소설 속에서 인물을 연기하고 창조하는 작업을 한다. 독자들은 소설을 두고 소설가의 과거 행적이나 성격까지 추적해 올라가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물론 그 작가의 경험이나 환경은 소설을 이해하는데 큰 밑거름이 되기는 하지만 그것이 완전하게 동일한 것은 아니다.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란 것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 작가가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는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를 파악하는데는 그 작가를 아는 것도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아옌데의 경우 특별한 이력이 스케일이 큰 작품 속에 묻어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옌데는 환상적인 창조력을 지닌 이야기꾼에 가깝다. 아옌데의 <운명의 딸>은 풍부한 상상력과 이미지가 가슴에 와 닿게 만드는 묘사력, 그리고 스토리를 끌어가는 힘이 가득한 소설이다. 무엇보다 아옌데는 독서의 즐거움을 깨닫게 해주는 몇 안 되는 고마운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물론 이 소설을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구분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단지 주인공이 여성인 소설이다. 이사벨 아옌데의 <운명의 딸>은 여성을 잘 이해하고 있는 여성 작가에 의해 엘리사라는 여성에 대해 쓰여진 소설이다. 이것엔 어떤 사상을 전파하려는 노골적인 의도도 없이, 그저 한 여자가 자신의 운명을 어떤 식으로 살아갔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짙은 여성성을 느끼는 이유는 남자들이 냄새나고 더러운 달거리 정도로 생각할 지도 모르는, 월경의 피를 토해본 일이 있는 여성이 담담하게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여성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며 자기 운명을 개척하고 선택할 수 있었던 용기 있는 여성에 대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미스 로즈의 생각으로 표현되었다시피 ‘중요한 건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수동적으로 다가온 삶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엘리사가 타고난 운명이란 칠레의 인디오 혼혈쯤 되는 아이로 상자곽에 버려진 고아에 불과했다. 이야기는 미스 로즈라는 과거가 있는 여자가 여자들이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저버리면 여성 참정권론자들처럼 콧수염이 난다는 얘기가 돌던 시절에 자기 의지에 의해 아이를 키우기 시작하면서 시작되었다. 물론 미스 로즈는 모성애가 있는 여자가 아니었고 변덕이 죽 끓듯 했지만, 엘리사는 차라리 자신에게 독립심을 키워준 로즈에게 고마워한다. 엘리사는 성장을 하게되고 호아킨이라는 남자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되고 그와 뜻하지 않게 이별을 하게 된다. 호아킨을 찾아 떠남을 선택하고 이후 그녀의 삶은 파란만장하게 펼쳐진다. 그녀를 일깨운 것은 사랑이었지만, 사랑에 대한 자연스러운 열망을 논리의 잣대로 논할 수는 없겠다.

엘리사는 배를 타고 가는 길에서 완전하게 여성성을 잃는 상황까지 가버린다. 임신한 아이를 잃어버리는 과정, 비위생적인 상황에서 피를 토하며 죽음을 경험하는 일을 겪으며 엘리사는 사랑이 아닌 자신의 운명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한다. 그곳에서 가장 이상적인 동반자 타오치엔을 만난다. 엘리사에게 타오치엔은 절친한 친구로 표현된다. 둘은 부부관계가 주종관계를 너머서 평등하고 아름다운 우정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둘의 결합은 서양적인 자유와 동양적인 카르마와의 결합으로 상당히 신비롭게 그려진다. 죽은 호아킨의 목을 보고 나오며 “이제 난 자유로워요”라고 말하며 이 소설은 깊은 감동을 남긴 채 막을 내린다. 엘리사는 의지에 의해 숱한 선택을 하며 주어진 운명 속에서 자기를 발견하는 작업을 한다. 그녀는 미스 로즈의 장난감이 되어서 칠레에 이민 온 영국인의 수양딸로서 예쁘게 살수도 있었다. 당시는 미국으로 금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고, 엘리사는 사랑을 찾아 인생을 찾아 떠났다고 볼 수 있다. 골드러시는 개척정신과 동일시되는 단어다. 엘리사는 주어진 운명을 벗어버리고 골드러시에 몸을 실었고 자기 인생을 개척한 용기 있는 여성이었다.

<운명의 딸>은 학창시절 고전 소설을 읽었을 때의 감동을 느끼게 해주었던 빼어난 작품이었다.  놀라운 상상력과 작가의 재능과 역량에 감탄하면서 한 문장 한 문장을 읽을만했다. 쓸데없는 말은 없었고, 긴 문장도 그 자체로 적절했고 아름다웠다. 이 소설에서 여자의 운명을 가장 잘 보여준 것은 전족에 관한 이야기다. 타오치엔의 중국인 부인은 전족을 했고, 타오치엔이 애타할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그 작고 예쁜 발! 전족을 한 여성은 당시의 기준으로는 아름다운 여인이었지만 여성의 발은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전족을 한 여성은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고 일을 할 수도 없이 병들어 누워 있어야 했다. 타오치엔은 사랑하는 부인이 죽었을 때 죽음을 부르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발이 커도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여자였다면.....아름다움을 위해서 발의 자유를 잃어야했던 여자들이 또 얼마나 많았겠는가. 엘리사는 타오치엔에게 “나는 발큰 여자”하면서 투정을 부리기도 한다. 엘리사는 발이 컸지만 자기 마음대로 걸어다닐 수 있었고 운명을 개척할 수 있었다.

진실로 여성에게 중요한 것은 사회적 잣대로 찌그러든 전족인가 아니면 건강한 발로 마음껏 걸을 수 있는 자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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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도 11월에는
한스 에리히 노삭 지음, 김창활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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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작가가 쓴 소설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섬세한 소설. 늦어도 11월에는....좋은 소설이 한 독자의 인생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 가를 보여주는 작품. 이 소설은 나의 계절에 대한 취향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11월을 제일 재미없는 달이라고 생각하며 삼십년 넘게 살아온 사람이었다. 11월에는 공휴일이 하루도 끼어 있지 않은데다가 겨울로 들어서는 스산하기 이를 데 없는 시간이라 매해 불편함을 느꼈던 달이었다. 두번째로 싫어하는 달은 2월. 2월은 무개성한 회색의 시간들로 느껴졌던 터였다. 제일 싫어했던 11월. 그 11월에 대해서 뭔가 할말이 있는 소설이라니 도대체 무엇일까.
 
이 책의 작가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고, 이 소설 또한 1955년도에 발표한 소설이었다. 신파가 가득한 옛날 소설. 그러나 이 소설이 왜 가슴에 그토록 애처롭게 스며드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마도 요즘에는 발견할 수 없는 고전미가 흐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소설 속에는 사랑의 지고지순함, 약속의 절대성이 담겨 있었다. 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아주 안전하게 살고 있었다. 능력있는 남편을 만나 부족한 것 없이 살아왔다. 그러던 그녀에게 어느날 한 남자가 나타나 이렇게 말한다.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이부분에서 통속소설이라고 쉽게 판단해서는 안된다.) 선수(?)들이 아무렇게나 던질 수 있는 이 말 한마디에 여자는 모든 것을 버리고 집을 떠난다. 그리고 시작되는 그들의 여정. 그렇게 떠나간 연인들의 뒷 이야기는 결코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사는 모습이 아니다. 여자는 단 한 마디에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왔지만, 남자는 여자가 진짜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올 줄은 상상도 못했던 듯 다소 애매한 태도로 일관한다. 그들의 무료한 일상이 이어진다. 남자는 예술가로서 자기 작품에 몰두하고, 여자는 공허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다 시아버지가 찾아오고 어떻게든 가정으로 며느리가 돌아오길 바란다. 여자는 다시 자신의 가정으로 돌아가지만 결코 행복할 수가 없다. 남편은 예전에 그랬듯이 변함없이 그녀를 몰이해한다. 여자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피곤하다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그런 종류의 남자였다. 남편은 아내가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늦어도 11월에는......"
남자는 언젠가는 작품을 완성할 거라고 말했다. 늦어도 11월까지는......그런데 11월이 되었을 때 남자는 진짜로 여자를 찾아온다.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었던 예술가의 무능한 망설임. 이제는 작품을 완성했으므로 남자는 이전과는 다르게 당당하게 여자에게 다가선다. 이 극적인 장면은 무어라 말할 수 없이 품위있는 문장으로 그려진다. 여자는 처음에 그랬듯이 아무 조건없이 다시 남자를 따라나선다. 마치 그의 약속을 잊지 않고 있었다는 듯이.......늦어도 11월에는......결말은 밝히지 않을란다.
 
여자의 마음을 완전히 알아주는 그런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남자의 탈을 쓴 여자가 분명하다. 죽고 싶다고 말하는 건, 내가 괴로우니 날 좀 안아달라는 말인데 그런 말을 알아듣는 남자는 없다. 소설 속의 주인공 마리안네도 많은 말을 하지만 남편은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 마리안네가 원했던 것은 다정한 말 한마디, 그리고 보듬어 안는 작은 사랑이었을 뿐이었는데......남편은 그 일을 작은 일이라 무시하고 하지 않아 자기 눈앞에서 다른 남자를 따라 떠나는 아내를 보게 되었다.
 
요즘과 같은 디지털 시대에는 어디 한 마디의 약속이 지켜질 수 있는 시대이던가. 말들은 너무도 쉽게 변하고, 약속은 쉽게 깨어진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에는 친구와의 약속은 결코 깰 수 없는 절대성을 지니고 있었다. 장소가 어긋나서 서로 다른 곳에서 두 시간 넘게 기다려도 서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친구가 올까봐 고개만 내밀고 꼼짝 않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요즘 세상에 "늦어도 11월에는...."이라는 애매한 약속을 절대적으로 지킬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소설 속의 그는 분명히 그 약속을 지켰다. 깊은 울림으로 남아 11월을 사랑하게 만든 소설. 역시 문학은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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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화원 네버랜드 클래식 11
프랜시스 호즈슨 버넷 지음, 타샤 투더 그림, 공경희 옮김 / 시공주니어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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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내게는 100권짜리 계몽사 어린이 문고가 있었다. 당시로서는 최고의 장서를 가진 어린이였다. 강원도의 바닷가에서 나만큼 책을 많이 가진 아이는 없었다. 그게 열살 무렵. 나는 당장에 백권을 다 읽을 수 없었어도 날마다 행복했다. 비밀의 화원. 클로디아의 비밀. 동굴의 마녀. 빨간머리 앤...루슬란과 루드밀라....등등 최고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작품들이 100권이나 내 책꽂이에 꽃혀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지금도 흐뭇해진다. 나는 그 책의 절반 쯤은 탐독하고 절반쯤을 설렁설렁 그림이나 넘기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00개나 되는 멋진 이야기들이 항상 내 곁에 있었고, 어디 도망갈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어 잠들때마다 책장을 바라보는 일이 즐거웠던 기억이 있다.

커 나가면서 나의 독서는 어린이책을 떠나 세계문학전집으로 이어졌고, 수많은 다양한 책을 무리없이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런데 다시 어린이책이라니? 아주 우연한 기회에 어린이책에 관심을 갖게 된 이후로 내 독서 목록에 어린이책을 한두권 더 끼워넣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어릴때 읽었던 고전들을 다시 읽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경험인가를 깨달았다. 요즈음엔 너무도 좋은 책들이 많이 나온다. 시공주니어의 네버엔드 클래식 목록은 바로 그런 책들이다. 우선 훌륭하게 제본한 양장본이며 원작을 완역한 작품이라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어릴 때 우리가 읽었던 동화책은 번역이 그리 좋지 못했고, 내용도 마음대로 편집된 것이 많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었다. 아마도 완역된 비밀의 화원을 읽지 않았더라면 그 이야기의 진가를 영원히 몰랐을 것이다.

아마도 지난 시절엔 어린이책이 그저 줄거리를 전달하면 된다는 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리라. 다시 읽기 시작한 어린이책은 문학적으로도 대단히 훌륭해서 문장 하나하나에 주목하며 읽어야 그 개성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하나의 '작품'이었다. 누구나 비밀의 화원의 줄거리는 익히 알고 있겠지만 새롭게 번역된 책을 읽으면 분명 줄거리 이상의 것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메리나 디콘, 콜린 세 어린이의 뜰로 조심스럽게 초대받은 기분이 들었다. 아내의 죽음과 함께 10년 동안 갇혀있던 아내의 뜰. 크레이븐씨는 10년 동안 슬픔에 싸여 살았고 뜰의 열쇠와 함께 자기 마음도 땅속에 묻어 버렸다. 그에겐 사랑도 삶의 희망도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아내의 뜰에선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비밀의 화원의 배경이 되는 곳은 요크셔의 황무지다. 주인공 메리는 처음 황무지를 보았을 때 그곳이  바다와 같다고 생각했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 나오는 황무지는 황량하고 괴기스럽고 음울하다. 그러나 비밀의 화원 속의 황무지는 신선한 공기로 아이들의 마음을 일깨우고 갖가지 아름다운 꽃과 풀들과 동물들이 가득한 따뜻한 공간으로 그려진다. 황무지의 신선한 공기는 못된 아이의 마음을 순하게 하고 휠체어를 타고 있는 병약한 아이를 걷게도 만든다. 

이 책을 읽으며 어린 시절의 삶을 생각했다. 어린이다운 마음이 무언지 다시금 깨닫고 싶다면 고전 어린이 명작들을 다시 읽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다. 이 책의 아이들은 매일매일을 새롭게 살아가고 있다.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 아니라 아침이 되면 새로운 일들을 계획하고 멋진 하루를 보낼 생각으로 가슴 벅차한다. 그리고 날마다 쑥쑥 자라고 있으며, 무언가를 가꾸고 키워낸다. 어린 시절에는 나도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매일 기대에 차 있었고, 아침마다 알 수 없는 희망에 부풀곤 했다. 공상을 하느라 하루를 다 보내기도 했고,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고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으면 오후가 그렇게 신날 수 없었다.

프랜시스 호즈슨 버넷은 어쩌면 이리도 아이의 마음을 잘 그려낼 수 있었을까.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이 글은 어린이들보다 어쩌면 어른들이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인지도 모른다. 어린이들은 자기들과 똑같은 아이들의 모험을 즐기면서 행복해할 수 있을 테고,  어른들은 잃어버린 어린시절에 대한 기억을 되새길 수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가 교훈을 주려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은 심지어 교훈을 얻기도 할 것이다.

어린이책을 읽고 있으면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명랑한 생각만 하면서 즐겁게 살아가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다보면 나를 되돌아보게 되기도 한다. 어른들은 때로 이 글 속의 크레이븐씨처럼 시커먼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다. 그 짐을 놓으려면 아무래도 책 속의 아이들처럼 자신에게 좋은 마법을 거는 방법을 배워가야할 것이다.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다.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 일어난다. 그것이 과학적 근거가 있는지 어쩐지는 몰라도 적어도 이 책 안에서는 엄연한 진실로 통한다. 생각하는 대로 마법을 거는 대로..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책 속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아가, 네가 장미를 가꾸는 곳에 엉겅퀴는 자랄 수가 없단다.....

어릴 때 읽었던 책에는 모든 등장인물이 표준어를 썼다. 그리고 버릇없는 데다 신분이 높은 아이 메리도 하인이 어른이라면 무조건 존댓말을 쓰게 나왔다. 그런데 새로운 번역에는 요크셔 사람들은 촌스러운 사투리를 쓰고, 메리와 콜린은 항상 무례한 말투를 쓴다. 원작의 묘미를 최대한 살린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요크셔 사투리는 거의 충정도와 전라도 경상도를 섞어 놓은 듯한 이상한 말투로 번역이 되었는데 처음엔 거슬리다가 어느 정도 지나니까 익숙해져서 그게 정말로 요크셔 사투리 같았다. 그랬어예이~ 밥 먹었어예이?

비밀의 화원 너무 재미있거가꾸 시간이 지멋대루다 가는 줄도 몰랐어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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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귀의 비상 - 미셸 투르니에 독서노트
미셸 투르니에 지음, 이은주 옮김 / 현대문학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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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투르니에의 독서노트 <흡혈귀의 비상>을 읽는 것은 즐거운 경험이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 세권 중에서 딱 한 권만 건질만했다. 아무래도 소장하고 다시 한번 꼼꼼하게 읽어봐야 할듯.....곧 책을 사서 다시 꼼꼼하게 줄치면서 보고 싶다.

이것은 독서노트라는 제목이 붙어 있지만, 서평 정도의 글이 아닌 듯하다. 문학평론가들의 평론과는 성격이 확연히 다르지만, 비평에 가까운 글들이 실려 있다. 소설가이기 전에 철학자인 미셸에게 영향을 끼쳤던 고전작품들에 대한 찬사가 담겨 있기도 하고, 너무 멀게 느껴졌던 거장들을 친근한 이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매력이 있기도 하다.

물론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문장의 어려움 때문이 아니라 미셸 투르니에의 방대한 지식 때문에 그렇다. 불문학 번역가인 친구의 말에 따르면, "투르니에의 작품은 아무리 엉망으로 번역해놓아도 잘 읽힐 정도로 문장이 훌륭하다."라고 했다. 이 책은 문장도 훌륭했고, 번역도 매끄럽게 잘 된 것 같다. 투르니에의 철학적 지식과 서양문학에 대한 통찰력을 따라가기가 좀 벅찼을 뿐.

사실 첫 문장부터 매료되어 있었다고 해야 옳을 듯하다. "숨을 쉬는 것처럼, 꿀벌이 꿀을 만드는 것처럼 글을 쓰는 작가들도....."

문장의 풍부함 때문에 도저히 놓칠 수 없는 페이지들이 참으로 많았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흡혈귀인가? 나르는 흡혈귀? 흡혈귀의 비상이라.....책에는 소명이 있다. 그것은 출판되고 배포되어 독자들에게 읽혀야한다. 책 한권은 한 명의 독자를 만나는 게 아니라 무한한 수의 독자를 만나고, 독자들은 책을 읽음으로 해서 저자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독서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란다. 영화를 완성하는 것이 관객이듯, 책을 완성하는 것도 독자의 몫이다. 읽는 사람은 읽는 행위 자체로 작가의 창작 행위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고, 작품을 새롭게 창조할 수 있는 것이라 한다. 쓰여졌으나 읽혀지지 않는 책은 알맹이가 없이 텅빈 불행한 존재라고....

"....작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며, 한 권의 책을 출판할 때 그는 익명의 남녀의 무리 속으로 종이로 만들어진 새떼를, 피로 굶주려 야윈 흡혈조풀어놓는 것이다. 그 새들은 닥치는 대로 독자를 찾아 흩어진다. 한 권의 책이 독자를 덮치면, 그것을 곧 독자의 체온과 꿈들로 부푼다. 그것을 활짝 피어 나고, 무르익어, 마침내 자기 자신이 된다. 그것을 작가의 의도들과 독자의 환상들이 구별할 수 없게 뒤섞여 있는-어린아이의 얼굴에 아빠의 모습과 엄마의 모습이 섞여 있듯이-풍부한 상상의 세계이다. 마침내 독서가 끝나면, 소진되어 독자에게서 버림받는 그 책은 제 상상력을 수태시키려 다른 생명을 기다릴 것이며, 그 소명을 실현할 기회를 만나면, 마치 수탉이 무수한 암탉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듯,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넘나들 것이다."(13p)

독서 행위는 상상력의 전염이며 그것을 통해 새로운 창조가 만들어진다고 투르니에는 서문격인 '흡혈귀의 비상'이란 산문에 밝혔다. 이것은 소설창작과 책읽기, 그리고 독자들의 열렬한 독서가 바탕이 된 시대의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든다. 흡혈귀의 비상과도 같이 책이 읽히고 수많은 사람들이 상상의 세계에 피가 빨리는 그런 시절이 다시 온다면 참 좋겠다.

투르니에의 문학에 대한 접근은 상당히 새롭다. 지금까지 생각도 할 수 없던 것들을 많이 알게 되어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타잔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타잔은 정글에서 야생생활을 하는 원시인이다. 그런데 그는 털이 북실북실한 모습이 아니다. 그는 면도도 세수도 하지 않지만 매끈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어른의 몸을 가진 타잔이지만, 어린이의 순수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타잔은 꿈의 대상이며 유토피아적인 인간이다. 그런 면에서 타잔이야기는 SF라고 투르니에는 평했다. 타잔은 가짜 어른이며, 열 두 살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수염도 나지 않는다.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라. 그러면 거인이 될 것이다!":타잔의 힘의 비밀이 이것이다. 타잔의 작가 E.R버로스가 작품에 담은 메세지가 바로 그것이라고 투르니에는 말한다. 타잔은 순수해야 하며 동정이어야하며 어린이의 상태에 있어야 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멍청한 영화인들이 타잔에게 여자(제인)을 주고, 그로 하여금 어색하게 에로틱한 행독을 하도록 만들었'다고.

이것 외에도 우리가 고전이라고 부르고 있는 작가들에 대해서 새로운 접근을 해볼 수 있었다. 플로베르가 "마담 보바리, 그건 나다!"라고 말했다는 것이 인상깊었다. 마담 보바리이 그저 자유부인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담 보바리는 남자들의 사랑을 하고 있다. 주체적으로 사랑을 구하고 힘있게 그 사랑을 버리기도 한다.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보바리는 여성의 모든 것을 전복시키는 파괴력을 가진 주인공이었다.

이 책에는 유럽 문학을 풍부하게 바라볼 수 있는 코드가 담겨 있다. 토마스 만, 귄터 그라스, 앙드레 말로, 에밀 졸라, 괴테..노발리스...특히 이자벨 에버하르트에 대한 이야기는 무척 인상깊었다. 꼼꼼하게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읽어봐야할 가치가 있는 책을 오랜만에 만났다. 장 지오노, 이탈로 칼비노...꼭 읽어보겠다고 벼르던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도 나와서 반가웠다. 이토록 풍부한 지식과 통찰력을 가진 작가가 있다니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역시 대가는 대가가 될 만한 자격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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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정치적인 상황을 모르는 상태에서 읽는다면 아마도 이 글을 깊이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단순하고 적절한 표현으로 독자를 이끌어가고 있지만, 이 소설의 배경이 한국이라면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어느 교수가 스캔들로 대학에서 쫓겨나서 딸이 있는 농장으로 간다. 그 딸은 땅을 지키겠다고 땅으로 돌아온 여성. 이미 추락했지만 딸과 함께 땅에서 지낸다면 평화로울 것이라고 생각하던 어느날, 침입자가 나타난다. 그 침입자는 잔인한 방식으로 폭행을 저지르고 그 오후의 짧은 시간은 데이비드와 루시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고 말 그대로 추락을 경험하게 한다.

그리고 그 폭력의 대가를 받아들이고 이겨내고 아프리카 땅을 끝까지 지키려는 딸과 그곳에서 도망치길 바라는 아버지와의 갈등....

왜 이들이 폭력에 대해 민감하며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역사의 보복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는지 남아공에 살지 않는 사람은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겠지만, 어느정도의 스키마를 가지고 있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재미있게 읽히는 소설이다.
흑백의 갈등, 남아공에서 오랫동안 행해져왔던 흑인에 대한 폭력...그것이 현재의 백인들에게 보복을 가하고 있다. 돌고 도는 폭력의 고리를 잘 알고 읽어야 이해할 수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언어의 절약성을 활용한 작가로 아마도 쿳시를 능가할 자는 없을 것 같다. 폭력의 희생물이 되는 장면은 너무도 스피디하고 간결하게 그려져 있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독자들이 상상을 해야할 몫이 더 크다. 첨예한 문제를 부드럽고 간단하게 묘사한 그부분은 작가의 능력을 절감하게 하는 부분이다.

어쨌거나 읽어볼 만한 소설이며, 남아공의 또 다른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나딘 고디머의 <보호주의자>와 비교해볼 때 엄청나게 재미있는 소설이다.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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