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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귀의 비상 - 미셸 투르니에 독서노트
미셸 투르니에 지음, 이은주 옮김 / 현대문학 / 2002년 4월
평점 :
품절
미셸 투르니에의 독서노트 <흡혈귀의 비상>을 읽는 것은 즐거운 경험이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 세권 중에서 딱 한 권만 건질만했다. 아무래도 소장하고 다시 한번 꼼꼼하게 읽어봐야 할듯.....곧 책을 사서 다시 꼼꼼하게 줄치면서 보고 싶다.
이것은 독서노트라는 제목이 붙어 있지만, 서평 정도의 글이 아닌 듯하다. 문학평론가들의 평론과는 성격이 확연히 다르지만, 비평에 가까운 글들이 실려 있다. 소설가이기 전에 철학자인 미셸에게 영향을 끼쳤던 고전작품들에 대한 찬사가 담겨 있기도 하고, 너무 멀게 느껴졌던 거장들을 친근한 이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매력이 있기도 하다.
물론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문장의 어려움 때문이 아니라 미셸 투르니에의 방대한 지식 때문에 그렇다. 불문학 번역가인 친구의 말에 따르면, "투르니에의 작품은 아무리 엉망으로 번역해놓아도 잘 읽힐 정도로 문장이 훌륭하다."라고 했다. 이 책은 문장도 훌륭했고, 번역도 매끄럽게 잘 된 것 같다. 투르니에의 철학적 지식과 서양문학에 대한 통찰력을 따라가기가 좀 벅찼을 뿐.
사실 첫 문장부터 매료되어 있었다고 해야 옳을 듯하다. "숨을 쉬는 것처럼, 꿀벌이 꿀을 만드는 것처럼 글을 쓰는 작가들도....."
문장의 풍부함 때문에 도저히 놓칠 수 없는 페이지들이 참으로 많았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흡혈귀인가? 나르는 흡혈귀? 흡혈귀의 비상이라.....책에는 소명이 있다. 그것은 출판되고 배포되어 독자들에게 읽혀야한다. 책 한권은 한 명의 독자를 만나는 게 아니라 무한한 수의 독자를 만나고, 독자들은 책을 읽음으로 해서 저자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독서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란다. 영화를 완성하는 것이 관객이듯, 책을 완성하는 것도 독자의 몫이다. 읽는 사람은 읽는 행위 자체로 작가의 창작 행위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고, 작품을 새롭게 창조할 수 있는 것이라 한다. 쓰여졌으나 읽혀지지 않는 책은 알맹이가 없이 텅빈 불행한 존재라고....
"....작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며, 한 권의 책을 출판할 때 그는 익명의 남녀의 무리 속으로 종이로 만들어진 새떼를, 피로 굶주려 야윈 흡혈조를 풀어놓는 것이다. 그 새들은 닥치는 대로 독자를 찾아 흩어진다. 한 권의 책이 독자를 덮치면, 그것을 곧 독자의 체온과 꿈들로 부푼다. 그것을 활짝 피어 나고, 무르익어, 마침내 자기 자신이 된다. 그것을 작가의 의도들과 독자의 환상들이 구별할 수 없게 뒤섞여 있는-어린아이의 얼굴에 아빠의 모습과 엄마의 모습이 섞여 있듯이-풍부한 상상의 세계이다. 마침내 독서가 끝나면, 소진되어 독자에게서 버림받는 그 책은 제 상상력을 수태시키려 다른 생명을 기다릴 것이며, 그 소명을 실현할 기회를 만나면, 마치 수탉이 무수한 암탉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듯,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넘나들 것이다."(13p)
독서 행위는 상상력의 전염이며 그것을 통해 새로운 창조가 만들어진다고 투르니에는 서문격인 '흡혈귀의 비상'이란 산문에 밝혔다. 이것은 소설창작과 책읽기, 그리고 독자들의 열렬한 독서가 바탕이 된 시대의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든다. 흡혈귀의 비상과도 같이 책이 읽히고 수많은 사람들이 상상의 세계에 피가 빨리는 그런 시절이 다시 온다면 참 좋겠다.
투르니에의 문학에 대한 접근은 상당히 새롭다. 지금까지 생각도 할 수 없던 것들을 많이 알게 되어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타잔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타잔은 정글에서 야생생활을 하는 원시인이다. 그런데 그는 털이 북실북실한 모습이 아니다. 그는 면도도 세수도 하지 않지만 매끈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어른의 몸을 가진 타잔이지만, 어린이의 순수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타잔은 꿈의 대상이며 유토피아적인 인간이다. 그런 면에서 타잔이야기는 SF라고 투르니에는 평했다. 타잔은 가짜 어른이며, 열 두 살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수염도 나지 않는다.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라. 그러면 거인이 될 것이다!":타잔의 힘의 비밀이 이것이다. 타잔의 작가 E.R버로스가 작품에 담은 메세지가 바로 그것이라고 투르니에는 말한다. 타잔은 순수해야 하며 동정이어야하며 어린이의 상태에 있어야 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멍청한 영화인들이 타잔에게 여자(제인)을 주고, 그로 하여금 어색하게 에로틱한 행독을 하도록 만들었'다고.
이것 외에도 우리가 고전이라고 부르고 있는 작가들에 대해서 새로운 접근을 해볼 수 있었다. 플로베르가 "마담 보바리, 그건 나다!"라고 말했다는 것이 인상깊었다. 마담 보바리이 그저 자유부인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담 보바리는 남자들의 사랑을 하고 있다. 주체적으로 사랑을 구하고 힘있게 그 사랑을 버리기도 한다.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보바리는 여성의 모든 것을 전복시키는 파괴력을 가진 주인공이었다.
이 책에는 유럽 문학을 풍부하게 바라볼 수 있는 코드가 담겨 있다. 토마스 만, 귄터 그라스, 앙드레 말로, 에밀 졸라, 괴테..노발리스...특히 이자벨 에버하르트에 대한 이야기는 무척 인상깊었다. 꼼꼼하게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읽어봐야할 가치가 있는 책을 오랜만에 만났다. 장 지오노, 이탈로 칼비노...꼭 읽어보겠다고 벼르던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도 나와서 반가웠다. 이토록 풍부한 지식과 통찰력을 가진 작가가 있다니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역시 대가는 대가가 될 만한 자격이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