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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도 11월에는
한스 에리히 노삭 지음, 김창활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11월
평점 :
남자 작가가 쓴 소설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섬세한 소설. 늦어도 11월에는....좋은 소설이 한 독자의 인생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 가를 보여주는 작품. 이 소설은 나의 계절에 대한 취향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11월을 제일 재미없는 달이라고 생각하며 삼십년 넘게 살아온 사람이었다. 11월에는 공휴일이 하루도 끼어 있지 않은데다가 겨울로 들어서는 스산하기 이를 데 없는 시간이라 매해 불편함을 느꼈던 달이었다. 두번째로 싫어하는 달은 2월. 2월은 무개성한 회색의 시간들로 느껴졌던 터였다. 제일 싫어했던 11월. 그 11월에 대해서 뭔가 할말이 있는 소설이라니 도대체 무엇일까.
이 책의 작가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고, 이 소설 또한 1955년도에 발표한 소설이었다. 신파가 가득한 옛날 소설. 그러나 이 소설이 왜 가슴에 그토록 애처롭게 스며드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마도 요즘에는 발견할 수 없는 고전미가 흐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소설 속에는 사랑의 지고지순함, 약속의 절대성이 담겨 있었다. 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아주 안전하게 살고 있었다. 능력있는 남편을 만나 부족한 것 없이 살아왔다. 그러던 그녀에게 어느날 한 남자가 나타나 이렇게 말한다.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이부분에서 통속소설이라고 쉽게 판단해서는 안된다.) 선수(?)들이 아무렇게나 던질 수 있는 이 말 한마디에 여자는 모든 것을 버리고 집을 떠난다. 그리고 시작되는 그들의 여정. 그렇게 떠나간 연인들의 뒷 이야기는 결코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사는 모습이 아니다. 여자는 단 한 마디에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왔지만, 남자는 여자가 진짜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올 줄은 상상도 못했던 듯 다소 애매한 태도로 일관한다. 그들의 무료한 일상이 이어진다. 남자는 예술가로서 자기 작품에 몰두하고, 여자는 공허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다 시아버지가 찾아오고 어떻게든 가정으로 며느리가 돌아오길 바란다. 여자는 다시 자신의 가정으로 돌아가지만 결코 행복할 수가 없다. 남편은 예전에 그랬듯이 변함없이 그녀를 몰이해한다. 여자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피곤하다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그런 종류의 남자였다. 남편은 아내가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늦어도 11월에는......"
남자는 언젠가는 작품을 완성할 거라고 말했다. 늦어도 11월까지는......그런데 11월이 되었을 때 남자는 진짜로 여자를 찾아온다.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었던 예술가의 무능한 망설임. 이제는 작품을 완성했으므로 남자는 이전과는 다르게 당당하게 여자에게 다가선다. 이 극적인 장면은 무어라 말할 수 없이 품위있는 문장으로 그려진다. 여자는 처음에 그랬듯이 아무 조건없이 다시 남자를 따라나선다. 마치 그의 약속을 잊지 않고 있었다는 듯이.......늦어도 11월에는......결말은 밝히지 않을란다.
여자의 마음을 완전히 알아주는 그런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남자의 탈을 쓴 여자가 분명하다. 죽고 싶다고 말하는 건, 내가 괴로우니 날 좀 안아달라는 말인데 그런 말을 알아듣는 남자는 없다. 소설 속의 주인공 마리안네도 많은 말을 하지만 남편은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 마리안네가 원했던 것은 다정한 말 한마디, 그리고 보듬어 안는 작은 사랑이었을 뿐이었는데......남편은 그 일을 작은 일이라 무시하고 하지 않아 자기 눈앞에서 다른 남자를 따라 떠나는 아내를 보게 되었다.
요즘과 같은 디지털 시대에는 어디 한 마디의 약속이 지켜질 수 있는 시대이던가. 말들은 너무도 쉽게 변하고, 약속은 쉽게 깨어진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에는 친구와의 약속은 결코 깰 수 없는 절대성을 지니고 있었다. 장소가 어긋나서 서로 다른 곳에서 두 시간 넘게 기다려도 서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친구가 올까봐 고개만 내밀고 꼼짝 않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요즘 세상에 "늦어도 11월에는...."이라는 애매한 약속을 절대적으로 지킬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소설 속의 그는 분명히 그 약속을 지켰다. 깊은 울림으로 남아 11월을 사랑하게 만든 소설. 역시 문학은 힘이 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