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딸
이사벨 아옌데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1년 7월
평점 :
품절


명은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의지에 대해 개척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것인가는 사람들이 늘 고민하는 문제이다. 그것이 단순히 수동적으로 팔자소관이니 견뎌야할 문제라면 삶의 의미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진정한 운명이란 타고난 가정적 사회적 환경을 제외한다면 인간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고 노력에 의해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인간은 삶의 의미를 그것에서 찾는다. 아옌데의 소설은 운명을 선택하고 개척한 여인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물론 소설은 중고등학생이면 누구나 교과서를 통해 배워 알고 있듯이 개연성 있는 이야기(Fiction)를 말한다. 우리는 때때로 영화 속의 인물과 영화배우를 동일시하듯이 소설 속의 픽션과 소설가를 혼동하기도 한다. 배우가 그 인물이 되어 연기를 하듯이 소설가 또한 이야기라는 매개체를 통해 소설 속에서 인물을 연기하고 창조하는 작업을 한다. 독자들은 소설을 두고 소설가의 과거 행적이나 성격까지 추적해 올라가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물론 그 작가의 경험이나 환경은 소설을 이해하는데 큰 밑거름이 되기는 하지만 그것이 완전하게 동일한 것은 아니다.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란 것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 작가가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는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를 파악하는데는 그 작가를 아는 것도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아옌데의 경우 특별한 이력이 스케일이 큰 작품 속에 묻어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옌데는 환상적인 창조력을 지닌 이야기꾼에 가깝다. 아옌데의 <운명의 딸>은 풍부한 상상력과 이미지가 가슴에 와 닿게 만드는 묘사력, 그리고 스토리를 끌어가는 힘이 가득한 소설이다. 무엇보다 아옌데는 독서의 즐거움을 깨닫게 해주는 몇 안 되는 고마운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물론 이 소설을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구분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단지 주인공이 여성인 소설이다. 이사벨 아옌데의 <운명의 딸>은 여성을 잘 이해하고 있는 여성 작가에 의해 엘리사라는 여성에 대해 쓰여진 소설이다. 이것엔 어떤 사상을 전파하려는 노골적인 의도도 없이, 그저 한 여자가 자신의 운명을 어떤 식으로 살아갔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짙은 여성성을 느끼는 이유는 남자들이 냄새나고 더러운 달거리 정도로 생각할 지도 모르는, 월경의 피를 토해본 일이 있는 여성이 담담하게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여성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며 자기 운명을 개척하고 선택할 수 있었던 용기 있는 여성에 대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미스 로즈의 생각으로 표현되었다시피 ‘중요한 건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수동적으로 다가온 삶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엘리사가 타고난 운명이란 칠레의 인디오 혼혈쯤 되는 아이로 상자곽에 버려진 고아에 불과했다. 이야기는 미스 로즈라는 과거가 있는 여자가 여자들이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저버리면 여성 참정권론자들처럼 콧수염이 난다는 얘기가 돌던 시절에 자기 의지에 의해 아이를 키우기 시작하면서 시작되었다. 물론 미스 로즈는 모성애가 있는 여자가 아니었고 변덕이 죽 끓듯 했지만, 엘리사는 차라리 자신에게 독립심을 키워준 로즈에게 고마워한다. 엘리사는 성장을 하게되고 호아킨이라는 남자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되고 그와 뜻하지 않게 이별을 하게 된다. 호아킨을 찾아 떠남을 선택하고 이후 그녀의 삶은 파란만장하게 펼쳐진다. 그녀를 일깨운 것은 사랑이었지만, 사랑에 대한 자연스러운 열망을 논리의 잣대로 논할 수는 없겠다.

엘리사는 배를 타고 가는 길에서 완전하게 여성성을 잃는 상황까지 가버린다. 임신한 아이를 잃어버리는 과정, 비위생적인 상황에서 피를 토하며 죽음을 경험하는 일을 겪으며 엘리사는 사랑이 아닌 자신의 운명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한다. 그곳에서 가장 이상적인 동반자 타오치엔을 만난다. 엘리사에게 타오치엔은 절친한 친구로 표현된다. 둘은 부부관계가 주종관계를 너머서 평등하고 아름다운 우정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둘의 결합은 서양적인 자유와 동양적인 카르마와의 결합으로 상당히 신비롭게 그려진다. 죽은 호아킨의 목을 보고 나오며 “이제 난 자유로워요”라고 말하며 이 소설은 깊은 감동을 남긴 채 막을 내린다. 엘리사는 의지에 의해 숱한 선택을 하며 주어진 운명 속에서 자기를 발견하는 작업을 한다. 그녀는 미스 로즈의 장난감이 되어서 칠레에 이민 온 영국인의 수양딸로서 예쁘게 살수도 있었다. 당시는 미국으로 금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고, 엘리사는 사랑을 찾아 인생을 찾아 떠났다고 볼 수 있다. 골드러시는 개척정신과 동일시되는 단어다. 엘리사는 주어진 운명을 벗어버리고 골드러시에 몸을 실었고 자기 인생을 개척한 용기 있는 여성이었다.

<운명의 딸>은 학창시절 고전 소설을 읽었을 때의 감동을 느끼게 해주었던 빼어난 작품이었다.  놀라운 상상력과 작가의 재능과 역량에 감탄하면서 한 문장 한 문장을 읽을만했다. 쓸데없는 말은 없었고, 긴 문장도 그 자체로 적절했고 아름다웠다. 이 소설에서 여자의 운명을 가장 잘 보여준 것은 전족에 관한 이야기다. 타오치엔의 중국인 부인은 전족을 했고, 타오치엔이 애타할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그 작고 예쁜 발! 전족을 한 여성은 당시의 기준으로는 아름다운 여인이었지만 여성의 발은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전족을 한 여성은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고 일을 할 수도 없이 병들어 누워 있어야 했다. 타오치엔은 사랑하는 부인이 죽었을 때 죽음을 부르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발이 커도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여자였다면.....아름다움을 위해서 발의 자유를 잃어야했던 여자들이 또 얼마나 많았겠는가. 엘리사는 타오치엔에게 “나는 발큰 여자”하면서 투정을 부리기도 한다. 엘리사는 발이 컸지만 자기 마음대로 걸어다닐 수 있었고 운명을 개척할 수 있었다.

진실로 여성에게 중요한 것은 사회적 잣대로 찌그러든 전족인가 아니면 건강한 발로 마음껏 걸을 수 있는 자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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