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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중독 - 미국이 군사주의를 차버리지 못하는 진정한 이유
조엘 안드레아스 지음, 평화네트워크 엮음 / 창해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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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의 국제면이 미국의 이라크 공격 관련 기사로 도배가 된 지도 꽤 오래되었다. 전쟁의 위기가 고조됨에 따라 국제 유가는 하루가 다르게 오르고 주가는 연중 최저치를 향해 곤두박질 치고 있다. 이제 사람들의 입에서 전쟁을 하려거든 차라리 빨리 하라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되었다. 한편 지난 2월 15일의 전세계적인 반전시위 이후 계속해서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져가지만 미대통령 부시는 코웃음을 치며 '후세인 제거'의 뜻을 굽히지 않고 있다.

도대체 왜 부시는 그토록 전쟁을 못해 안달이 난 것인가? 이에 대해 의문에 답을 주기위해 최근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중에서도 이책 <전쟁중독>은 만화라는 틀을 빌어 왜 미국이라는 나라는 끊임없이 전쟁에 나서는지(또는 전쟁을 일으키는지)에 대해 속시원하게 설명을 해준다. 그 이유는 한마디로 전쟁이 '남는 장사'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개국 초기 스페인, 멕시코와의 전쟁을 통해서 자신의 땅을 늘린 뒤로, 끊임없이 전 세계로 군대를 보내 다른 나라의 부를 빼앗아들였다. 쿠바, 필리핀, 한국, 베트남, 파나마, 이라크, 유고...... 미군이 쓸고 간 자리에는 자국의 다국적 기업, 정유회사, 군수업체, 은행을 보내 껌에 단물을 빼먹듯이 자원이나 돈을 챙겨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 책은 미국의 추악한 실상을 고발했던 <오만한 제국>(미국의 대표적 좌파 역사학자 하워드 진의 저서)의 만화판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미국에서 출간된 2002년 판을 가지고 있어서 이번에 나온 창해의 책과 비교해 볼 수 있었는데, 몇 가지 아쉬운 점이 눈에 띄었다. 먼저 원서의 그림에 딸린 설명을 번역본에는 빠트린다거나(14쪽 'Texas', 15쪽 'T. Roosevelt, 1897', 35쪽 'EXXON', 'Emir'), 엉뚱하게 옮긴(37쪽 'click') 경우가 있었다. 게다가 '신속전개군'(22쪽), '이라크를 방위하는 자'(34쪽), '코소보 해방전선'(38쪽) 등과 같이 부정확한 용어를 사용한 경우도 여럿 있었다(각각 '신속배치군', '이라크 군', '코소보 해방군'으로 옮겨야 한다). 앞의 것은 편집자가 꼼꼼히 챙겼어야 했고, 뒤의 것은 옮긴이가 조금만 더 신경을 썼더라면 피할 수 있었던 실수였다. 게다가 38쪽에서는 '분리독립에 직면한 정부'(the government of the country facing dismemberment)를 '그들이 세우고자 하는 정부'로 잘못 옮겨놓기까지 했다.

몇몇 실수에도 불구하고 이번 번역본에 한국의 독자들을 위해 따로 역주를 달아 이해를 도왔고, 몇몇 통계의 수치를 최근의 것으로 고쳐 신빙성을 높인 점은 높이 사줄 만하다. 추후 판을 달리할 때는 앞서 말한 잘못이 꼭 고쳐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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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무지개 2004-05-02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보고 싶어 지는군요 ㅡㅡㅋ

그래평화 2008-11-25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분리독립에 직면한 정부는 한국말로 고치면서 콘텍스트에 따라 의역한걸로 보이기도 하네요.

물장구치는금붕어 2008-11-25 20:16   좋아요 0 | URL
네. 그렇게 봐야 하네요.
 
아저씨의 장난감 日記
현태준 지음 / 시지락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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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뽈랄라 대행진>(안그라픽스, 2001)에서 자신을 '울트라 캡숑 엉터리 장난감 연구가'라고 소개하며 수집한 자료의 일부를 살짝 공개했던 재미난 아저씨 현태준. 그가 드디어 장난감에 대한 연구 성과(?)를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냈다.먼저 아저씨가 수집한 장난감의 면면을 보자. 물은 제대로 안나가고 꼭지부터 빠지기 일쑤였던 싸구려 고무 물총, 수업시간에도 선생님 몰래 구슬을 받아먹느라 바빴던 패크맨, 일본 만화 캐릭터를 흉내내 만든 정체 불명의 로봇들, 흔히 '조립식'이라 불렀던 프라모델에서 누이들이 가지고 놀던 종이 인형까지, 모두들 사이좋게 모여 알록달록한 색깔을 뽐내고 있다.칠팔십 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냈던 이라면 여기에 실린 사진 하나 하나에 '맞다 맞아'를 연발하며 반가움에 어쩔 줄 몰라할 것이다. 추억은 누추할수록 아름답다고 하질 않았던가.

아저씨는 이렇게 장난감을 몇 가지 주제로 나눠서 끼리끼리 묶은 다음, 점점 사라져가는 학교 앞 문방구 이야기와 이미 사라져버린 어린이 잡지 이야기를 보태 씨줄로 삼고, 각 장난감에 얽힌 자신의 추억과 감상을 날줄로 삼아 자신의 어린 시절을 고스란히 되살려 놓았다.땀에 절은 셔츠에 꾀죄죄한 모습으로 변두리 동네의 낡은 문방구를 찾아다니는 퉁퉁이 아저씨. 주인 아줌마의 눈총을 받아가며 먼지 더미 속에서 그가 찾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어렸을 때 가지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 쳐다보기만 했던 그때 그 로봇? 아니면 놀림 받을 게 무서워 차마 사지 못했던 예쁜 종이 인형?

높으신 분들의 안전을 염려한 사람들에게 무선 조종 비행기를 빼앗기고 툭하면 경찰서로 불려갔다는 모형점 사장님의 회상이나, 일본 것을 베껴 만들다보니 독일군 모형보다 미군 모형이 턱없이 부족했지만 TV 시리즈 <전투>에서처럼 늘 소수 정예의 미군이 이겼다는 아저씨의 놀이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단순히 장난감 이야기라고 치부해버릴 수 없는 그때의 시대 상황이 묻어 나온다. 서투른 기술로 급히 만든 탓에 원작과 다르게 삐뚤 빼뚤 못난 얼굴을 갖게된 아톰은 당시 우리들-어른과 아이 모두-의 자화상이 아니었던가?

아마 아저씨에게 직접 물어보면 자신은 그런 심각한 생각은 해본 적 없다면 재미없는 이야기는 관두자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디자인과 키치>(시지락, 2002)의 어려운 설명보다, 촌스럽고 어설픈 장난감에 대한 아저씨의 애정에서 '사용 중심적 디자인 보기'라는 키치(kitsch)의 미학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데 이 책의 숨은 매력이 있다. 키치 소비에 내재한 심리가 '향수', '과시', '대리만족', '놀이', '성적 유희', '풍자'라고 한다면 장난감 만한 키치가 없을 것이다.

나이 먹은 사람이 장난감을 좋아한다고 사람들이 흉볼 것을 걱정하거나 서점에서 눈치를 보며 이 책을 몰래 읽는 분들에게, 이태준이란 소설가 아저씨가 남긴 '인형'이란 글을 들려주고 싶다.'나는 장난감을 좋아합니다. 어린애처럼 가지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진고개를 갔다가도 장난감 파는 집 앞에 가서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지요. 사지는 못하더라도 유리창 밖에서 기웃거리며 무슨 새 장난감이 나왔나하고 들여다보곤 한답니다. …… 인형을 볼 때마다 어렸을 때 생각이 납니다. 어떤 때는 눈물도 납니다.'(<어린이>, 1930년 2월호)아저씨! 똥폼 잡지 말고 같이 놀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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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테라스에서 모노노케 히메까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45
박규태 지음 / 책세상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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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즈미 신사참배 파문.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14일 한국과 중국 등이 반대하고 있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또 기습적으로 강행했다.'(한겨레. 2003년 1월 4일자 기사)이 기사를 대하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반응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또야?' 이 한마디에는 우리 민족이 겪었던 식민지배의 고통에 대한 분노보다는 주변국의 반대에 아랑곳하지 않고 해마다 되풀이되는 이 소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배어있다. 왜 일본의 수상과 각료들은 2차대전의 A급 전범들이 모셔져 있는 야스쿠니 신사에 굳이 가려는 것이고, 전쟁에 반대한다고 하는 일본인들도 이 문제에는 동정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단지 우익 정치가의 돌출행동이나 옛 제국 시절에 대한 향수로 해석하기에는 미진한 구석이 남는다.

이 문제에 대해 <아마테라스에서 모노노케 히메까지>의 저자는 정치적인 관점이 아닌 일본인들의 '원령 신앙'을 이해하는 데서 그 실마리를 찾을 것을 제안한다. 아직도 사람이 죽으면 가미(神)가 된다는 생각을 가지는 많은 일본인들은 전쟁터에서 비정상적으로 죽은 자는 원령(怨靈)이 되어 산 자를 괴롭힐지도 모르니 죽은 자의 원령을 위무해주어야 하고, 야스쿠니 신사가 그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이 책은 이렇게 사회 문화체계의 가장 심층에서 작동하는 코드로 '종교'를 설정하고, 일본이라는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본 종교에 대한 우리의 무지와 일본에 대한 이중적인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것을 주문한다. 여기서 말하는 이중적인 콤플렉스가 '있다, 없다'로 대변되는 기존의 일본 관련서들을 가리키는 것임은 쉽게 추측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최고(最古)의 역사서인 <고사기(古事記)>에 실린 천손강림(天孫降臨) 신화로 시작해서, 불교의 전래와 그에 따른 신도와 불교의 습합(習合), 그리고 기독교의 전래 이후 신종교의 발생에 이르기까지 일본 종교의 역사를 더듬어 내려오는 동안 저자가 가장 주목하는 것은 신도의 독특한 '선악 관념'이다.

신도의 가미는 도덕적인 선악에 구애받지 않는 존재로 여겨져 이치(理)에 맞느냐 안 맞는냐를 가지고 헤아릴 것이 아니라, 다만 가미의 성냄을 두려워하면서 전적으로 삼가 모실 일이라는 것이다. 확실히 이 것은 유일신을 절대 선으로 상정하는 서구의 기독교적인 도덕관이나 인(仁)과 의(義)를 중시한 중국과 한국의 유교적 도덕관과는 판이하다.
이러한 선악관이 나중에는 덕(德)의 원리보다는 종(種)의 원리를 중히 여기는 근세 일본의 이데올로기의 기초를 이루었다고 보면, 천황을 찬양하는 내용의 기미가요와 일장기를 앞세워 군국주의로 내달았던 그네들의 속내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저자는 이렇게 타자의 문화를 포괄적인 개념어로 규정짓기보다 문화란 숲의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풍경을 볼 것을 주문한다. 하지만 계율과 내세보다는 현세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욕망을 긍정하는 일본의 불교-결혼을 하는 승려를 보라-를 보면서 개방적인 일본의 성문화나 발달된 대중문화를 떠올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현대 일본 사회의 종교를 설명하면서 옴진리교와 같은 신흥 종교의 성행을 '가상의 현실화'라는 정보화 사회의 문제로 보는 시각 등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몇 군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마테라스에서 모노노케 히메까지>가 일본의 종교사에 대한 날씬한 개설서이자 일본 문화의 숲으로 가는 훌륭한 지도 역할을 하리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일본 관련서들의 깊이 없는 이원론에 아쉬움을 느꼈던 분들이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이누야사> 등 일본 대중문화의 신화적 상상력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궁금한 분들에게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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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조단 - 인디코믹스 2
김경호 지음 / 초록배매직스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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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자신이 세계 최초로 개념화했다는 '사회불평만화'-'돌아온 조단'에는 온갖 사회/문화적 코드들이 뒤범벅으로 섞여있다. 그래서 이 연작 만화들을 보고 웃으려면 이 코드들을 디코딩(decoding)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너무 걱정마시라. 황비홍과 마이클 조던 이 두 넘만 알면 줄거리 파악하는 데 지장은 없다. 홍콩 영화라면 영화관에서 돈내고는 절대 못 본다는 사람도, 연휴 때면 재탕 삼탕에 우탕탕탕까지 해먹는 재방송 덕분에 황비홍 나오는 영화 한 편 안 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동네방네 개나 소나 농구공을 갖고 놀게 만들어서, 학교 농구대를 한번 써볼라면 번호표 받고 줄서게 만든 넘이 바로 '에어' 조던이 아니었던가? 게다가 만화책이 수능교재도 아니고 줄거리 파악해서 어디에 쓸건가? 그냥 보고 웃자.

조단은 홍길동이요. 배트맨이다. 가요판을 점령해 버린 '붕어'들을 응징하고, 감옥에 잠깐 계시다가 나오면서 독립 투사 흉내를 내는 비리 정치인들에게 일격을 가한다. 하지만 그는 홍길동의 도술도 없고 배트맨의 배트카도 없다. 단지 정의감과 맨주먹뿐. 그래서 그는 슬프다. 그리고는 외친다.'아조(我趙)!' 때때로 아마추어리즘이 '인디'란 이름을 면죄부 삼아 상업화하려는 시도가 보여 불편할 때가 있다. 이 작품도 완성도만 따지자면 감히 일독을 권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작가의 진정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어서 후속작이 나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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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잔
에드가 라이스 버로스 지음, 안재진 옮김 / 다우출판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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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라의 고전이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는 아동용 동화 취급을 받는 경우가 더러 있어왔다. 그 대표적인 예가 <걸리버 여행기>일 터이니, 조나단 스위프트의 인간 세상에 대한 이 통렬한 풍자물이 완역되어 나온 것이 불과 한해 전의 일이다.

대개 '어린이 명작' 따위의 딱지가 붙은 채 읽혀왔던 이들 중 또 한편이 완역되어 나왔는데, 이번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타잔이다. 기성 세대에게는 여러 편의 할리우드 영화와 TV 시리즈로, 요즘의 어린이들에게는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으로 익숙한 타잔의 본디 이야기를 온전히 읽을 수 있게된 것이다.

거의 한세기 전인 1912년에 연재가 시작된 이 소설을 읽어가면서 놀란 것은, 기존의 영화와 다른 원작의 차이점이나 작가의 문명 사회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 따위가 아니라, 바로 읽는 '재미' 그 자체이다.

영국에서 출발해서 아프리카의 밀림으로, 다시 미국의 농장으로 무대를 옮겨가며 벌이는 타잔의 모험담은 '인디아나 존스' 3부작이 보여주었던 스펙터클을 무색하게 한다. 더구나 타잔과 제인의 사랑이 겹쳐지고 엇갈리는 대목은 마치 주말 연속극을 볼 때 처럼 읽는 이의 속을 태우는 맛(?)이 있어, 정신없이 읽다가도 책의 마지막이 가까워지면 마음을 졸이며 아껴 읽게 된다.

허나, 너무 아쉬어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이제 시작일뿐 이 뒤로도 23편의 단행본이 이어진다고 하니, 얇은 주머니가 원망스러울 망정 후속편이 나오길 기다리는 즐거움 또한 어디에 비길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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