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추리소설을 각별히 좋아한다. 추리소설을 읽는 이유에 대해서는 언젠가 서재의 방명록에 길게 쓴 적도 있다. 말도 안되는 이유라서 다시 쓰지는 않겠지만, 아무튼 추리소설이 좋다.

추리소설과의 인연의 처음으로 기억되는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학급문고에서 발견하고 읽은 엘러리 퀸의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이었다. 이집트 십자가란 위쪽의 튀어나온 부분이 없는 T자 모양의 것이라는 뒷표지 설명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그러고보면 그 때나 지금이나 쓸데없는 상식에 집착하고 '퀴즈가 좋다' 프로 같은 것에 매우 흥분하는 성정에는 변함이 없다.

좌우간, 그 T자 모양의 십자가라는 것이 사람 머리통을 잘라낸 시체를 예수님 모양으로 갖다붙여 생긴 것이라는 대목에 이르러 경악하고 말았다. 그것이 내가 최초로 기억하는 잔혹이다. 그 후로 엘러리 퀸과 아가사 크리스티를 섭렵하고, 틈나는대로 이런저런 안락의자 탐정 이야기를 읽었다.

고등학교 때인가, 비로소 하드보일드와 만났다. 레이몬드 챈들러와 대쉴 해미트와 그보다 덜 유명한 이런저런 탐정의 이야기를 수소문해가며 읽었다. 허기를 채울 길이 없자 영어소설을 사서 읽는 버닝단계에 들어선 것도 이 때다.

그런데, 왠지 한국 추리소설이나 현대 추리소설은 읽게 되지가 않았다. 친구 중에 김성종을 좋아한 이가 있어 (그 친구는 왜 고등학생이면서 김성종 같은 작가를 좋아하게 된 것일까? 지금 생각하면 의아하다. 그 친구는 <여명의 눈동자>는 읽지도 않고 <제5열> 이런것도 아니고, 김성종의 순수한 추리물을 읽었다.) 몇 권 강제로 시도당한 적이 있긴 한데 그 뿐이었다. 도서관에서 <올해의 한국추리소설> 이런 책을 보면 당연히 가져다 읽긴 했지만 흐으..음? 하고 말았달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가장 큰 장벽은 '추리소설에는 특정한 배경이 필요하다'는 나의 선입관이었다. 정통추리물이라면, 신사들은 파이프담배를 물고 숙녀는 모자를 쓰고 - 여행은 기차로 하고 운동은 승마로 하는, 1900~1930년대 영국이나, 많이 봐줘서 유럽과 신대륙이 배경이어야지! 뭐 이런 생각 말이다. 물론 느와르라면... 말 안 해도 다들 알겠지. 금주법 시대, 갱단과 마피아와 카지노, 스포츠카에 탄 금발의 여인, 콜트권총... 뭐 이런 거다 =_= 이런 배경을 벗어난 곳에서의 범죄와 추리는 아무래도 어색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혹시 아직도 그 때의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헤닝 만켈 시리즈를 읽어보시길 바란다. 물론 추리소설의 황금기의 배경을 벗어나서도 얼마든지 많은 소설이 있었고, 그중 좋은 것 또한 많지만, 2000년대의 감성에 잘 맞기로 헤닝 만켈의 책 만한 것이 없다. 단순히 추리로 훌륭하다, 라거나 재미가 있다, 라는 것보다도 어떤 의미로는 '쿨'하다고나 할까.

아... 원래는 이 시리즈의 주인공인 발란더 아저씨의 매력을 전도하는 글을 쓸 양이었는데... 아무 상관없는 내용만 잔뜩 쓰고 말았다. (내가 원래 그렇지 뭐. 주제에 몰두하지 못하는 -_-;;;)

발란더 아저씨의 매력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뇌수까지 구석구석 파헤치기로 하고, 이 글에선 현재 알라딘에서 헤닝 만켈 시리즈를 30% 할인하고 있다는 정보로 마무리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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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oey 2003-12-06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 마지막 문장 너무 좋아요. 헤닝 만켈은 왜 아무리 해도 안 팔리는 거야. ㅠ.ㅠ 다음 페이퍼 기대할께요! 더불어 하고 계신 번역도 모쪼록 마감하시길. 헤헷. (고등학교 중간고사 기간에 세로줄로 된 여명의 눈동자 열 권을 읽어치우던 기억이 나는군요. 으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