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지나간 자리 SE - [초특가판]
울루 그로스버드 감독, 우피 골드버그 외 출연 / 드림믹스 (다음미디어)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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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걸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영화다. 가족에 대한 애정과 집착, 가족의 부재와 상실감에 따르는 고통, 가족의 개념, 새로운 가족과의 만남 등 이 영화는 가족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경험들을 비교적 이성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세 자녀를 둔 엄마(미셀 파이퍼)는 사진작가. 단란하고 행복한 가족이다. 평범한 중산층 가족의 삶에 갑작스러운 불행이 닥친 것은 아이의 실종. 엄마는 아이 셋을 데리고 동창회(시카고의 호텔)에 참석하는데, 그 자리에서 그만 둘째 아이를 잃어버리고 만다. 그 아이는 이제 겨우 세 살.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지만 사건은 의외로 커지고, 아이는 결국 실종된 채 사건은 미제로 남게 된다. 아이의 실종으로 심한 충격에 휩싸인 엄마. 직업도, 생활도 모든 것이 피폐해지고 가족관계는 모래알처럼 버석거리기만 한다.
'벤(둘째 아이)보다 늦게 죽고 싶지 않다'는 엄마의 말은 아이를 잃은 부모의 심정을 그대로 말해준다. 동생 벤을 돌봐야 했던 큰 아들(베이커)은 동생이 실종될 때 함께 있었고 모든 것이 자기 책임이라는 죄책감에 빠져들고, 엄마는 남은 두 아이에 대해서도 예전처럼 깊은 애정을 쏟지 못한다.
가족의 내면은 고통스럽지만 하루 하루, 나날의 삶은 지탱되고 있고 아빠의 사업은 예전보다 좋아져 식당을 개업한다. 개업한 식당은 시카고에 있고, 가족은 시카고로 이사한다. 엄마는 아이가 살던 집에서 떠나려고 하지 않지만, 남편의 설득으로 어쩔 수 없이 동의한다.
그렇게 세월은 9년이 흘러가고, 막내딸이 9살이 되던 어느날, 막내딸을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던 마을의 소년을 우연히 본 엄마는 그만 숨이 막힐 정도로 충격을 받는다. 잃어버린 둘째 아들과 너무나 똑같이 생긴 아이.
미친듯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고, 사진을 인화해 컴퓨터로 합성한 성장사진과 대조를 한다. 완벽하게 일치하는 얼굴.
결국 지문 조회를 통해 아들을 찾게 되는 가족은 기쁨도 잠시, 어색함과 낯설음에 당황한다. 분명 세 살때 잃어버린 둘째 아들이 맞건만, 그 아이는 이제 다른 가족의 아들이었고, 누구보다도 자기를 길러준 부모를 사랑하고 있었다.
가족 사이의 갈등은 증폭되고, 엄마는 냉정하게 생각한다. 자신의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둘째 아들이지만, 9년이라는 시간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것을 인정하기까지 가족은 모두 힘들고 고통스러운 갈등을 겪은 것이다.
둘째 아들을 다시 예전의 부모에게로 돌려보내기로 한 것은 엄마의 결단과 설득이었다. 엄마는 가족의 행복이 결국 한 아이의 불행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렇게 둘째 아들은 자기가 자랐던 집으로 돌아가고, 가족이란 피를 나눈 것만으로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리게 된다. 
가족의 부재로 인한 상실과 가족 관계의 붕괴, 다시 만난 가족과의 결합에 따르는 시간, 환경, 문화의 공백의 불일치, 피를 나눈 혈연이라도 '가족'이 될 수 없다는 현실 인식.
그리고, 집으로 돌아간 둘째 벤은 자신을 길러준 아버지와 오랜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자신을 낳고 길러준 친부모와 형제들이 낯설지만, 어쩔 수 없이 지나간 9년의 공백은 가족들의 사랑으로 메워야 하는 것임을 생각하며.

자식을 키우는 부모로서 이 영화는 남의 일같지 않더군요. 영화는 차분하게 전개되고 가능한 객관적으로 가족 관계를 바라보았지만, 그래도 슬프고 눈물납니다. 뭐, 해피엔딩이니까...
미셀 파이퍼와 우피 골드버그가 등장해서 영화가 더 좋게 느껴졌나봅니다. 좋아하는 배우들이라.
가족이란 뭘까요? 우리의 본능 속에 있는 최소 집단일까요? 가족의 개념도 많이 달라지고, 경제, 정치, 사회, 문화적인 분석으로 '가족'의 의미가 사뭇 달라지고 있지만, 평범한 소시민에게 가족은 자신의 삶을 의지하는 최소한의 영역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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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마음 속에 응어리진 사건...   

올해를 넘기기 전에, 마음 속에 응어리진 사건을 털어놓고 가렵니다.

예전에 본의 아니게 갓길 주행으로 카파라치에게 사진이 찍혀 벌금을 물었다는 내용을 어떤 카페 게시판에 썼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후, 결과가 어떻게 되었냐 하면, 범칙금 내는 것이 너무 억울해서 일단 사유서를 써서 제출하고 법원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뭐, 즉결 심판이었던 것 같은데, 법원은 태어나서 처음 가봤습니다.

아침에 가서 대기를 하고 있으려니까, 법복을 입은 판사가 들어오더군요.

그날은 몇 사람이 즉결 심판으로 대기하고 있었는데, 앞에 사람들도 1-2분 정도 간단하게 끝나더군요.

내 차례가 되었는데, 판사가 서류-아마도 제가 쓴 사유서일 겁니다.-를 쓱 보더니 '이유없다'고 하면서 벌금 10만원을 때리더군요.

범칙금을 그냥 내면 9만원이었는데, 그보다 더 많이 내게 되었습니다.

벌금을 내지 않고 [정식 재판]을 청구할 수 있다는 말도 했습니다.

판사의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이 결정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 한 개인이 겪은, 진심으로, 내가 가진 모든 양심과 자존심과 우리 가족의 명예를 걸로 사유서를 작성해서 제출했는데, 그게 한낱 종이조각에 불과했던 겁니다.

법원을 나오면서 [정식 재판]을 할까 하다가 그냥 벌금 10만원을 물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형식적으로는 끝이 났지만, 마음 속에는 응어리가 졌습니다.

이 사회가 얼마나 부도덕하고 엉망인지, 정직하고 성실한 인간에 대한 배려가 눈꼽만큼도 없는 파렴치한 국가인지...

제가 겪은 사건은 정말 하찮은 것이지만, 개인 개인이 겪는 그 수많은 사연들을 모두 들어줄 여유가 국가적으로는 없을 지 모르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그 사건 이후에 몇 달 지나지 않아 곧바로 카파라치 제도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경찰이나 당국에서도 이미 카파라치가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도 양심적인 시민의 말은 무시하고 카파라치의 사진을 믿고 일방적으로 벌금을 때리는 이런 사회야 말로, 희망이 없는 사회가 분명합니다.

이 사소한 사건 외에도 나와 직접 관련은 없지만, 사회적으로는 분명 관련이 있는 사건들--최근의 노동자 분신 사건, 농민의 할복 자살 사건, 외국인 노동자들의 야만적인 대우, 철거민들의 항거 등등-을 보면, 우리 사회는 썩을대로 썩은 사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법과 제도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너무나 분명합니다. 한나라당을 비롯해 정치하는 놈들에게는 솜방망이이고, 묵묵히 일하는 서민에게는 철퇴가 되는 것이 법이라면, 그런 법은 불복종하는 것이 민주주의 시민의 권리라고 생각합니다.

그후, 나는 법, 판사, 검사 보기를 내 발가락에 낀 때만큼도 여기지 않습니다.

물론, 성실하고 진실하게 법을 집행하는 판사님, 검사님 많습니다.

하지만, 적지않은 판검사들은 권력에 아부하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 법집행을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이 빨리 사라지는 것이 좋은 사회겠지요.

나 혼자만 이런 불신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별종이어도, 역시 그건 내가 감수해야 할 문제일 테니까요.

다만, 정말 상식이 통하는 사회, 인간을 인간으로 대접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너무나, 너무나 당연하게 상식이 통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게 왜 그렇게 안 될까요?

어렵고 힘들 일 하는 노동자-환경미화원, 119 대원,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 건설 노동자, 농민 등-들이 넉넉하게 월급받고, 자부심을 가지며 일하는 나라가 불가능한 걸까요?

국회의원이 자전거타고 출퇴근하고, 버스, 전철 타고 출퇴근하면서 시민들과 대화하고, 국정에 반영하고, 진정으로 나라를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는 것이 불가능한 걸까요?

너무나 타락하고 더러운 꼴이 많아서 이에서 신물이 납니다. 탐욕스럽고 뻔뻔하고 교활하고 악랄한 정치가들을 날마다 봐야 하는 이 사회가 진저리가 납니다.

어쩔 수 없이,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어서 묵묵히 살아가지만, 왜 많이 배우고 권력을 가진 놈들은 사기치고, 도둑질을 해도 아무 탈이 없는 걸까요? 

내 자식에게 아무 것도 물려 줄 것이 없는 이 사회의 미래가 암담하고 비참할 뿐입니다.

그래도 희망을 가지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만,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언제나 될 지 답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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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의 즐거움

 
서울이나 서울 근교에 사는 사람치고 관악산을 모르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북한산이나 도봉산이 서울의 북쪽에 자리잡은 명산이라면 관악산은 서울의 남쪽에 있는 명산이다. 그리 높지도 않고 거칠지도 않은 산이지만, 이른바 ‘악’자가 들어가는 산은 뭔가 심상치않은 기운이 있다고 말한다. 설악산이 그렇고 치악산이 그렇다. 하지만 관악산은 그런 명산에 비할 바는 솔직히 못된다. 다만 서울 근교에서 아기자기하게 즐길 수 있는 산이어서 좋다는 말이다.
서울사는 사람들은 북한산의 절경을 보고 감탄한다. 서울에 이런 아름다운 산이 있다는 것에 대해 놀라움과 신기함을 감추지 않는다. 또한 산을 자주 다니는 사람일수록 북한산에 대한 진가를 인정한다. 그렇다. 북한산은 서울 근교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절경이 빼어난 산임에는 틀림없다. 반대로, 관악산은 산으로 취급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관악산을 높게 평가하지 않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일단 산세가 완만하고 지형이 평이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볼 것이 없다는 것이다. 볼 것없는 산은 아름답지 못한 여성에 비유되는 것은 아닌지.
나는 많은 산을 다니지는 않았다. 따라서 산의 진정한 맛을 느끼지는 못하고 있고, 앞으로 조금씩 그런 맛을 알아갈 생각이다. 하지만 산을 무척 좋아하고 시간이 있으면 가까운 산이라도 늘 찾는 편이다. 산을 좋아한다는 것이, 유명하고 아름다운 산만을 찾아다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 역시, 산이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을 수련하고 그 앞에서 겸손을 배우는 외경의 존재임을 믿는다. 따라서 산을 오를 때의 그 힘겨움과 산에서 바라보는 인간의 왜소함을 통해 삶을 배우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산이란, 명산이건 뒷동산이건 그리 가릴 것이 없다고 본다. 다만, 큰 명산들은 그 산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신화적, 민중적 삶의 토대와 의미가 조금 더 남다르기 때문에 우리에게 더 많은 감동을 줄 수는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관악산을 자주 오른다. 내가 관악산 줄기 바로 밑인 삼성산 자락에서 살기 시작한 것이 1974년부터였으니까 20년동안 관악산을 바라보며 살아온 것이다. 살아가는 것이 팍팍하고 답답하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산을 오르거나 산에 대한 애정을 떠올릴 만한 여유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가끔은 산을 올라 그 답답하고 힘겨웠던 삶을 되새기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던 때도 있었다.
지금은 그나마 작은 아파트에 먹고 사는 걱정을 예전보다는 덜 하고 있어서 그때에 비한다면 행복에 겨운 나날이다. 일요일이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산을 오른다. 새벽같이 서둘러 북한산을 가고 싶기도 하지만, 산에 오르는 것보다 그 먼길을 사람들 속에서 시달리며 오고가는 길이 고달파서 아예 가까운 관악산을 선택하고 마는 것이다.
예전에는 같은 코스만을 선택해서 오르내렸지만, 요즘은 이곳 저곳,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고 있다. 관악산이 작아서 뭐 볼 것이 있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내가 다녀본 관악산은 결코 별볼일 없는 산이 아니었다. 조선시대에는 호랑이가 출몰했던 - 하긴, 조선시대에 어느 산에서나 호랑이가 없던 곳은 없었겠지만 - 그 울창한 산림은 없어졌지만, 그래도 사람의 발자국이 뜸한 곳이 아직도 있다.
관악산은 서울시 금천구 시흥동, 관악구 신림동, 사당동, 경기도 관천시, 안양시에 걸쳐 있는 산이다. 올라가는 길은 어디에서나 가능하지만, 서울대 입구, 안양유원지, 과천, 사당동 관음사 방향 등이 있다. 서울대 입구에서 올라가면 연주암쪽과 삼막사쪽으로 갈라지고 연주암쪽으로 해서 과천으로 내려오는 길이 가장 짧은 길이다. 과천에서 오르면 연주암이 바로 나오는데, 서울대쪽과 안양, 사당동 쪽으로 길이 갈려 서울대쪽이 가장 가깝고 안양과 사당동쪽 길은 비교적 긴 편이다. 사당동쪽에서 오르면 능선을 따라 연주암을 지나 삼막사를 거쳐 안양 유원지까지 일종의 종주를 할 수 있는 길이 된다. 사당동 쪽에서 올라 안양유원지까지 가는 길은 4-5시간은 충분히 걸리는 길이다.
사람이 많기로는 서울대 입구쪽과 안양유원지, 과천쪽이지만 연주암과 삼막사 주변을 제외하면 대부분 사람이 많지 않다. 일요일같이 사람이 많이 올라오는 날에도 서울대 수목원을 지나는 길에는 사람의 발길이 뜸해서 호젓한 산행을 할 수 있다.
게다가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코스를 잡으면 거의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없을 정도가 된다. 관악산에서 사람의 흔적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신기한가. 서울대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코스는 채 한 시간이 걸리지 않는 짧은 길이다. 정상에는 태극기가 꽂혀있고 그 뒤로 진짜 정상에는 군부대가 있다. 이 군부대를 우회하는 코스가 재미있다. 정상에서는 남산이 직선으로 바라보이고 서울과 경기도가 모두 보인다. 물론 서해바다도 보인다. 소래근교의 바다인데, 맑은날에는 바다가 파랗게 반짝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북서쪽으로는 김포공항이 보이고 한강과 여의도와 63빌딩과 서울시대 한복판과 남산탑과 이태원쪽과 흑석동,방배동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서남쪽으로는 산줄기가 이어져 많이 보이지는 않지만 대방동, 시흥동, 기아자동차 공장, 안양천이 흐르는 주변이 한눈에 들어온다.
단숨에 정상에 올라, 태극기 아래에서 오이나 사과를 깎아먹는 그 각별한 맛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여기서 연주암은 상당히 먼 거리이다. 삼막사가 가깝고 시흥동쪽 길이 바로 정면으로 보인다.
산본으로 이사온 뒤로는 정상에 올라본 적이 거의 없다. 과천에서 연주암에 들러 서울대 수목원을 지나 안양유원지로 내려오거나 사당동으로 나오는 코스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연주암에서 사당동 쪽으로 내려오는 길은 완만하고 많이 걷는 것이 장점이지만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서 재미가 없다. 관악산을 자주 찾는 이에게 널리 알려진 코스로는 관악산 팔봉이 유명하다. 연주암에서 안양쪽으로 가기 위해서 일단 첫 봉우리로 올라서면 눈 아래로 팔봉 능선이 굽이치며 펼쳐진다. 팔봉 능선을 따라가는 재미는 아기자기한 바위 능선을 타는 것이지만 너무 유명해서인지 역시 사람의 발길이 잦다. 내가 가장 즐겨찾고 마음 속으로 흐믓하게 여기는 길은 팔봉 능선의 중간에서 벗어나 서울대 수목원 끝으로 연결되는 길이다. 이 길은 사람이 거의 없고 언제나 조용하며 한적하고 쓸쓸하다. 이렇게 아름다운 길에 사람마져 없다는 것이 기적같은 일이지만 나는 이 길을 다른 사람에게는 알려주지 않는다. 나만 혼자서 호젓이 즐기고 싶기 때문이다.
관안산은 지형이 완만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찾기는 하지만 구석구석 다니지는 않는다. 따라서 호젓한 산길을 걷고 싶으면 능선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된다. 관악산을 여러번 다니기는 했지만 아직도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관악산을 찾는다. 앞으로 다른 산을 더 열심히 찾아다니겠지만, 관악산은 나의 좋은 친구로 늘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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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배리의 가을

 

                                                                                   

긴 가을 가뭄 끝에 비가 내렸습니다.

메말랐던 논밭과 산이 싱그럽게 살아나는 것이 눈으로 마음으로 느껴질 만큼 생생합니다.

축복입니다.

황금물결을 이루며 일렁이는 논을 바라봅니다.

이삭 한 알 한 알이 금싸라기처럼 반짝거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뭄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텨오더니 단비를 마시고 난 후 속이 꽉 차오르는 듯합니다.

어떤 꽃보다 아름다운 벼이삭의 황금물결이 언제까지고 남아있기를 기대하지만, 며칠 사이 논은 훤하게 비었습니다.

벼를 갈무리하는 것을 시작으로 가을은 깊어 갑니다.

마을 한 가운데 수호신으로 서 있는 600년 넘은 은행나무 잎이 노랗게 물들고, 정배 분교 운동장에서는 은행 털기 축제가 열렸습니다. 학부모와 마을 주민이 함께 하는 은행 축제에서 얻는 수익금은 학교와 아이들을 위해 쓰입니다.

마을 여기저기 밤나무의 툭툭 벌어진 밤송이에서 밤이 떨어집니다.

밭에서는 들깨를 베어 눕히고, 커다란 비닐 천을 바닥에 깔고 깨를 텁니다. 깨 냄새가 고소하고 향긋하여 저절로 걸음이 멈춰집니다. 툭툭 털 때마다 까맣게 익은 깨알이 후드득 후드득 쏟아져 나오는 걸 보니 보석 알이 쏟아지는 듯합니다.

 앞집 강원도 할머니가 감을 한 바구니 가져오셨습니다.

마을에 드물게 서 있는 감나무에서 거둬들인 수확물입니다. 추운 지역이어서 감나무가 잘 자라지 않는다는데, 그래서 더 귀한 감을 나눠 주시는 것입니다. 여름에도 애호박이며 풋고추를 여러 번 주시더니 이 가을 별미인 감도 주십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하루 20리를 걸으시는 전직 교장 선생님은 집 뒤 터의 밤나무를 털었다며 밤을 한 됫박 주시고 가십니다.

송구한 마음으로 고맙게 받습니다.

텃밭을 가꾸는 마을 어른들은 풋고추며 애호박이며를 언제든 따다 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밤하늘에는 별이 아름답게 반짝이고, 가을 산천을 수놓은 단풍은 그 화려함을 더해갑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뚜렷한 모습을 자랑하는 이곳 정배마을, 맑고 시원한 계곡과 숲으로 둘러싸인 시골에서 살게 된 것이 축복같이 느껴집니다.

 대도시 아파트에서 살다 연립주택조차 하나 없는 시골마을로 이사 온 우리를 보고 동네 어른들은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런 촌구석에 뭐 하러 들어온 거요?”

시골에서 평생을 사신 분들이니 시골 살이가 늘 좋을 수는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갈수록 농어촌의 생존이 어려워지고 있으니 도시를 마다고 시골로 내려온 우리를 보는 동네 어른들의 의문은 당연한 듯도 합니다.

무슨 대단한 결심을 하거나, 뜻한 바가 있어 시골에 내려 온 것이 아니니 달리 이유를 말씀드리기가 난감해 그저 웃으며 “살기 좋은 동네로 이사왔어요”하고 말씀드립니다.

들어와 살기는 일 년 남짓이지만 두 해 전에 정배리에 땅을 사 집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집 짓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어서 시간도 많이 걸리고, 정배리에 세를 얻지 못해 면소재지에서 일 년 넘게 살면서 집을 지었습니다.

외지 사람이 집을 짓고 들어오는 것도 신기한 일이거니와 마을 외곽이 아닌, 마을 한 가운데 땅을 사 집을 지으니 동네 어른들의 관심이 더욱 컸습니다.

마을 속에 집을 지은 것은, 우리가 외지 사람으로 ‘전원’을 즐기려는 것이 아니라 마을 주민이 되어 함께 살아가겠다는 뜻을 가졌지 때문입니다.

연세 많은 어머니와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를 위해서도 이웃이 가까이 있는 마을이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시골로 이주하면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지만, 도시에서의 삶과 시골에서의 삶이 다를 것이라고는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고, 살아왔던 도시에서의 삶이 어떤지 되새겨 보는 시간도 많이 가졌습니다.

도시의 삶이 모두 부정적이진 않겠습니다만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소음과 매연으로 인한 환경, 소비와 소비로 이어지는 생활, 치열한 경쟁을 부추기는 정서 등을 먼저 떠올리게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 가족은 도시에서 시골로 이주하며 잃은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도시에서만 살았다면 생각하지 못했던 많은 이야기들이 시골살이를 통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원’에 살고 싶어 합니다. 공기 좋고, 물 맑고, 아름다운 전원에 멋진 집을 짓고 살고 싶다는 꿈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 꿈을 실천하는 사람은 아주 적습니다.

도시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이들 교육, 직장, 아파트를 이용한 재테크 이 세 가지가 가장 큰 원인이 아닐까 합니다.

 

정배리에 집을 짓기 시작하는 날, 소박하게 고사를 지냈습니다.

마을 주민께 인사를 드리고, 우리가 집 지을 땅과 마을인 자연에도 함께 살게 된 우리를 받아들여 주십사 하는 마음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렇게 조심조심 쭈볏거리는 마음으로 정배리 주민이 되어 시골 살이를 시작했습니다.

새로 지은 집에 입주한 때는 한여름이었는데, 그 해 여름은 내내 마을 앞 개울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전교생 반은 모이는 개울에서 코끝이 새까맣게 반질거릴 때까지 여름내내 물놀이를 하고 놀았습니다.

해가 질 때까지 즐겁게 노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흐믓했습니다.

엄마들은 옥수수며 감자며 수박이며 떡을 가지고 나와 간식으로 나눠 먹고, 어린이들과 함께 물놀이를 했습니다.

초등학생인 우리 아이는 전교생이 서른 명도 안 되는 분교에 다닙니다.

매일같이 작은 운동장을 뛰며 축구를 하고, 산과 들녘, 친구집 나들이가 녀석들의 놀이터입니다.

 

가을이 되자 일손이 부족해서 ‘부지깽이도 거든다’는 말이 나올 만큼 마을은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여름내 땀 흘린 보람이 풍성한 수확으로 돌아 왔습니다. 우렁이 농법으로 기른 벼에서는 메뚜기들이 툭툭 튀어 다녔습니다.

도시에서는 계절이 바뀌는 것을 쉽게 느끼지 못하지만, 시골에서는 하루하루의 변화를 섬세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단풍이 산꼭대기부터 불붙어 내려오는 것, 활엽수의 잎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능선이 공룡의 갈비처럼 앙상하면서도 장엄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 아침마다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마당 수도가의 물이 얼고, 눈이 내리면 산과 들이 하얗게 뒤덮인다는 것, 밤이 되면 산에서 멧돼지, 고라니, 너구리가 마을 가까이 내려온다는 것, 봄이면 나무에서 돋아나는 나뭇잎이 연한 연두빛이지만 나무마다 다르고, 매일 매일이 다른 연두빛이라는 것, 그래서 나뭇잎만으로도 충분히 나무와 산과 숲이 아름답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시골에서 살면 모든 것이 불편하다고 생각합니다.

시골에 내려와 살고 싶어도 불편해서 싫다고 말하는 사람을 여럿 만났습니다.

깜깜한 시골 마을이 무섭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시골에는 백화점도 없고, 대형 할인매장도 없고, 극장이나 병원도 가깝지 않고, 학원도 없거나 멀기 때문에 불편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도시의 편리함이란 거의 모든 것이 소비하는 것입니다.

백화점, 대형 할인매장, 편리한 문화시설 모두 돈을 쓰는 곳입니다.

시골은 살아가는 방식이 도시와 많이 다릅니다. 도시에서만 살았다면 이 다름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달라서 좋은 점이 많다는 것도 놓치고 살았을 것입니다.

끊임없이 소비해야만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곳이 도시라면, 가능한 적게 소비하고 주위 환경에 맞게 겸손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이 시골이라고 느낍니다.

불편하다고는 해도, 시골의 문화 환경이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면소재지에 나가면 ‘주민자치센터’에서 다양한 교육·문화 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배우고 싶은 사람들은 무료에 가까운 적은 돈을 내고 얼마든지 배울 수 있습니다.

읍소재지로 나가면 더욱 다양한 문화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수영장까지 있어서 초등학교 우리 아이는 지난해 읍에 있는 여성회관 수영장에 다니며 수영을 기초부터 잘 배웠습니다.

군에 흩어져 있는 관광지와 리조트, 온천 등은 군민에게는 입장료·주차비가 무료이고, 반값으로 깎아주는 곳도 많습니다.

 

마을에 들어와 이웃과 가깝게 지낼 수 있는 첫 단계로 우리는 ‘무조건 인사하기’를 실천했습니다.

마을에는 젊은이가 거의 없습니다.

아무리 젊어도 50대가 넘으니 대부분 노인들입니다.

길에서 만나거나 집 앞에서 뵙게 되면 먼저 인사를 드렸습니다.

도시에서는 아파트의 앞집과 겨우 인사하는 정도였고, 한 아파트에서 7년을 살았어도 가까워진 이웃이 거의 없었습니다.

우리가 특별히 폐쇄적인 성격이 아님에도 어쩐 일인지 도시에는 가깝게 느껴지는 이웃을 만들기가 어렵고, 그럴 기회도 별로 없었습니다.

시골에서도 도시처럼 이웃과 마음을 열지 않고 똑 떨어져 살아갈 수 있겠지만, 그게 오히려 쉽지 않습니다.

마을 노인들은 먼저 찾아와서 필요한 ‘정보’를 ‘탐색’하기 때문입니다.

이웃의 참견과 간섭이 때로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그런 관심을 받는다는 것조차 참으로 오랜만에 맛보는 것임을 알기에 시골살이를 시작하며 자연스럽게 마음을 열게 되었나 봅니다.

 

이웃과 가까워지는 두 번째 방법은 마을 행사에 가능한 많이 참여하는 것입니다.

작은 시골이지만 크고 작은 행사가 다양하게 열립니다.

일 년에 몇 번씩 있는 마을 대청소는 마을 어르신들과 친해질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인데, 마을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도시 사람들이 놀러와 버리고 간 쓰레기를 모아 치우는 일을 합니다. 마을 청소 때면 마을 어르신 대부분이 나오시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인사드리고 낯을 익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외지에서 들어와 사는 사람이 마을 청소에도 잘 나온다는 인상을 주면 마을에 적응하기가 한결 쉬워집니다.

마을 청소를 끝내고 마을 회관에 모여 점심 식사를 함께 하는데, 어떤 날은 밥과 돼지고기, 어떤 날은 컵라면, 어떤 날은 개고기(^^;) 등 메뉴도 다양합니다.

이런 때면 빠지지 않는 막걸리, 소주 등을 한 잔씩 나누며 인사도 드리고 마을 돌아가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습니다.

마을 총회, 마을 노인들의 단체 관광, 면민의 날 행사, 군민의 날 행사 등 일 년이면 여러 차례 마을 주민이 모이는 기회가 있습니다.

이런 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면서 외지에서 들어 온 우리도 주민으로 동화되는 즐거운 느낌을 갖게 됩니다. 마을 주민들도 외지인이지만 열심히 함께하는 노력을 이쁘게 보아 주십니다.

 

시골에는 노인이 많이 사시다 보니 우리 집의 경우 어머니가 큰 역할을 하셨습니다.

마을 노인들과 잘 어울리시고, 마을 회관에서 점심도 드시고, 노인회 관광 때는 함께 하시면서 젊은 우리 부부보다 어머니가 동네 소식을 훨씬 많이 알게 되어 우리에게 마을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누구네 아들이 중국 동포와 결혼을 한다더라, 누구네 집에서 어제 차로 고라니를 쳐서 잡았는데, 고라니 고기를 먹으러 오라더라, 들깨 값이 얼마를 한다더라, 누구네 집에서 땅을 내놨다더라...

마을 소식을 줄줄이 꿰고 계신 어머니를 보면 마을 토박이가 다 되신 듯 여겨집니다.

마을 회관에서 심심풀이 화투도 치고, 고추밭이며 깨 밭, 무 밭, 배추 밭에서 일도 도우시며 동네 노인들과 가까워져서 덩달아 우리 집까지 덕을 보게 되었습니다.

올해는 배추며 무가 풍년이어서 밭에 지천으로 널려 있습니다. 값이 너무 헐어서 사가는 사람도 없고, 팔 도리도 없으니 그저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볼 뿐입니다. 밭에서 채 뽑지도 않고 서리를 맞는 배추·무도 많습니다.

지난해에는 마을 어른이 기른 배추와 무를 사서 김장을 했습니다. 아파트에 살 때는 고작 김치 냉장고에 담는 것이 전부였지만, 시골에서는 마당에 땅을 파 김장독을 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탓이었는지 어머니가 올해는 김치 욕심을 더 내시는 듯합니다.

네 식구 살림에 배추를 60포기나 김장을 했는데, 올해는 돈 주고 사지 않고도 충분할 만큼 무·배추가 공짜로 들어왔습니다.

당신들 밭에서 조금씩 뽑아가라는 무·배추가 한 집에서 열 포기, 다른 집에서 열 댓 포기, 또 다른 집에서 댓 포기... 이렇게 모은 것이 지난 해 보다도 많습니다.

작년에는 우리 식구끼리 모여 김장을 했는데, 올해는 마을 할머니 여섯 분이 오셔 도와주셨습니다. 일손이 많아 김장 담그기가 오전에 모두 끝났습니다. 일 잘하는 할머니, 아주머니들의 손발이 척척 맞은 결과였습니다.

어머니도 올해는 이 집, 저 집을 다니며 배추도 다듬고, 절이고 씻고, 김장 속도 넣고, 일을 도와주셨습니다. 그렇게 바지런히 품앗이를 하셨기 때문입니다만, 올해는 지난해와는 사뭇 다르게 김장을 할 수 있어서 마음이 흐믓합니다.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도시에서 폐쇄적으로 살았던 것이 우리의 의지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소통과 대화를 가로 막는 벽이 우리의 환경 속에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골로 이주하면서 환경이 바뀌고, 사람 사이를 가로 막던 벽도 사라졌다고 느껴집니다.

아파트 빌딩 숲처럼 높게 솟은 벽은 물리적 벽만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시골의 트인 자연으로 오면서 아파트·빌딩들에 가로 막혔던 벽이 자연스럽게 사라졌습니다.

시골 마을이라야 아파트 한 동보다도 적은 인구가 살고, 한 사람, 한 가족의 일을 알고 지내게 되며, 이런 관심이 서로를 가깝게 만들어주는 듯 합니다.

김장을 마치고 노인회에서 마을 어른들 여럿을 모시고 관광을 다녀왔습니다.

일 년 농사를 완전히 끝내는 것은 김장을 담근 다음이라고 합니다.

한 해 농사를 갈무리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관광을 다녀오시는 날, 목화송이 같은 눈송이가 펑펑 쏟아졌습니다.

꽁꽁 언 겨울이 가고, 언 땅 녹아 들 풀 나고, 강물 녹아 출렁이는 봄이 오면 볍씨 뿌려 모내기 하고, 꽃나무 심고 가꾸는 봄이 오겠지요.

매일매일 변하는 자연에서의 삶이 우리 집 마당의 공기마냥 늘 새롭고 신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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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중대 - 아웃케이스 없음
표도르 본다르추크 감독, 알렉세이 차도프 외 출연 / 와이드미디어 / 2007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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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드문 러시아 영화.

러시아 영화는 ‘전함 포템킨’, ‘어머니’, ‘파업’ 등 아주 오래된 영화만 주로 보았기 때문에 이 영화는 신선하고 충격적이다.

게다가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영화여서 더욱 그렇다. 제 345 공수연대 9중대가 겪은 실화.

1988년, 지금의 러시아가 아닌, ‘소련 연방’이던 그때,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소련 군대는 무자헤딘 게릴라와 엄청난 전쟁을 벌이면서 10년 동안 1만5천명의 젊은 병사가 죽는다.

영화 전반부는, 시골의 젊은이가 군에 입대하는 과정과 서로 다투고 가까와지는 과정을 담았다. 후반부는 그야말로 전쟁터의 삶과 죽음을 그리고 있는데, 헐리우드 액션 부럽지 않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 또한 대를 이은 유명한 감독이라는 점도 눈길을 끈다. 그 옛날 ‘전쟁과 평화’를 만들었던 세르게이 본다르축 감독의 아들이 이 영화를 감독한 것이다.

러시아에서 5백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영화를 봤다고 하니, 그야말로 대박인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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