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셰익스피어
진중권, 듀나, 이윤택 외 지음 / 씨네21북스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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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나라에서 셰익스피어의 영향력은 그 정도는 아닌 듯 하지만, 일찌기 엘리자베스 여왕께서 '셰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못 바꾼다'라고 하셨을 정도라니 서구 사회에서 셰익스피어가 미치는 영향은 그만큼 큰 것이라 하겠다. 그렇기에 셰익스피어의 수많은 희곡들은 끊임없이 연극과 영화로 재변주되었다.  

<필름 셰익스피어>는 이러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재해석하거나 충실히 재현한 영화들을 대상으로 한 비평서이다. 컨텍스트에 접근한 방식도, 그 깊이도 모두 다르지만 '셰익스피어' 그리고 '필름'이라는 테마 하나로 묶인 품이 제법 흥미롭다.

실제로 나같은 경우엔 책에 소개된 영화 중엔 바즈 루어만의 <로미오+줄리엣>과 존 매든의 <셰익스피어 인 러브> 밖에 본 게 없긴 하지만, 영화나 셰익스피어의 희곡 중 어느 한 가지만 알고 있더라도 충분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게 이 책의 강점이다.

개인적으론 듀나가 쓴, 로렌스 올리비에의 <햄릿>과 케네스 브래너(그렇다, 해리포터 2편에 나오던 그 록허트 교수역의 배우 말이다. 진지한 분인데 어쩌다...)의 <햄릿>을 비교한 글과 피터 그리웨이의 <프로스페로의 서재>를 미학적 관점에서 읽어낸 진중권의 글이 맘에 들었다. 듀나의 글은 정말 영화가 땡기게 하는 마력을 갖고 있고, 진중권의 글은 그다워서 좋았다.

하지만 사실 글만으로 따지면 가장 마지막에 실린 임옥희의 글 '차마 널 미워할 수 없는 이유'가 제일 가슴을 후벼팠다. 이 글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변주한 영화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를 비평하고 있는데, 글이 주는 재미도 재미지만 사랑의 속성을 통렬하게 간파한 대목이 정말 무릎을 치게 했다.

...그러나 사랑의 리비도 경제 역시 만만찮은 계산에 입각해 있다. 팽팽하게 평행을 이루던 관계가 한순간 기울어진다. 사랑의 천칭이 기울어지는 순간, 권력관계가 작동한다.
사랑은 주면 줄수록 주는 쪽이 손해다. 사랑이라는 선물을 주는 쪽이 약자가 된다. 그래서 사랑의 약자는 자존심이 상하고 때로는 모욕을 맛보면서 눈물을 흘린다. 사랑에 빠진 자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되돌려받고 싶어한다. 타자에게 보낸 사랑이 내게로 되돌아와야만 나의 자존심이 회복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랑의 변증법이다. 그런 맥락에서 사랑은 타자에게로 열리는 경험인가 하면, 타자를 나의 이미지로 복제하려는 긴장과 갈등의 경험이기도 하다. 상대를 나의 이미지와 동일시하려는 사랑의 이면에는 서로의 자존심을 건 권력관계가 놓여 있다. 되돌아올 사랑을 전제하지 않는, 그래서 주고 또 줘도 주는 자의 자존심이 저하되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면, 누가 사랑하기를 두려워하랴.

이 얼마나 절묘하게 사랑의 속성을 간파하고 있는 글인가. 아낌없이 주는 사랑? 그런 건 존재하지 않을런지 모른다. 어차피 사랑이라는 가장 순수한 감정 뒤엔 이렇게 복잡한 계산이 깔려있는 건지도 모르니까. 이 글을 읽은 것만으로도 난 이 책의 가치를 충분히 인정하련다.

확실히 씨네21이란 주간지의 저력은 대단하다. 좋은 컨텐츠를 많이 갖고 있으니 첫 번째, 두 번째 낸 단행본들 모두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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