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OZ>라는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이츠키 나츠미(樹なつみ).
한국 만화가 100만부씩 팔려 나가던 호시절에 국내에 소개되었던 이츠키 나츠미의 <OZ>는 당시 서울문화사에서 일본판과 흡사한 최고급 퀄리티 소장본으로 출간되어, 만화는 으레 후달리는 종이에 찍는 걸로만 생각해왔던 국내 독자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요즘이야 애장판이니 소장본이니 그런 류의 책이 많아졌지만, 당시만 해도 만화야 대충 찍어내도 100만부씩 팔려 나가는 줄로 알고 있던 국내 시장에 신선한 충격을 준 책이었다. 물론 대담한 설정의 근미래 SF에 로맨스를 버무려낸 내용에도 감탄을 보냈었지만...지금까지도 <OZ>는 중고 만화 거래 시장에서 '환상의 작품'으로 통하며 높은 값에 팔리고 있다.  

각설하고...이츠키 나츠미의 매력은 순정 작가답지 않은 그 호방한 스케일의 설정과 뛰어난 스토리 구성에 있다. 3차대전 이후 멸망한 지구를 무대로 한 근미래 SF <OZ>와 발칸성계 연방의 스페이스 콜로니를 무대로 한 SF물 <수왕성>, 일본 고대의 이즈모국 신화를 토대로 하여 고대와 현대를 오가는 <팔운성> 등. 가상의 국가 라기네이와 미국, 일본 그리고 중국을 오가는 연애물(?) <카시카(원제 : 꽃피우는 청소년)>가 수수해보일 정도다.
호방한 스케일의 설정으로 작품을 그려나가다 보면, 그 설정에 눌리거나 얽매이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츠키 나츠미는 그러한 함정에 빠지지 않고 스토리를 이끌어 나간다. 인간 사이의 갈등과 번민, 화해, 그리고 충격적인 반전 등 독자의 마음을 쥐락펴락 하는 그 진행은 더할 나위 없다.

무엇보다 이츠키 나츠미의 최대 매력은 그녀가 창조해내는 매혹적인 캐릭터에 있다. 언젠가도 쓴 적이 있지만, 이츠키 나츠미는 '매혹적이지만 그만큼 위험한 인물'을 제대로 그려낼 줄 알고 있다. <OZ>에 나오는 1019와 무토 그리고 리온, <수왕성>의 토드와 서드, <팔운성>의 후즈치 쿠라키, <카시카>의 리렌 등은 모두 지극히 매력적인 외모와 재능의 소유자지만 또한 그만큼 오싹한 위험함과 광기를 지니고 있는 인물들이다. 좌중을 휘어잡는 이들의 매력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그들의 매력 뒤에는 독기를 품은 칼날 혹은 끝간데 없는 어둠이 숨겨져 있다. 하지만 이런 인물들은 언제나 여자들의 마음을 휘어잡는다. 작품 속에서 이들은 평범하고 안온한 일상을 갈구하지만, 운명은 언제나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두질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갈등하고 번민하며, 독자들은 이 매력적인 캐릭터에게 그대로 몰입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츠키 나츠미는 분명히 위험한 작가다!

그런 그녀의 스토리 진행과 캐릭터 창조에는 분명 경의를 표하는 바이지만, 이츠키 나츠미는 언젠가 '엘리트주의'라고 흉봤던(?) 요시나가 후미보다 더 심각한 '순혈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가끔 들 때가 있긴 하다. <수왕성>에서 펼쳤던 그 위험한 지배 이론이나, <OZ>의 필리시아와 리온 남매가 언뜻 무토 중사에게 드러내던 적의, <팔운성>의 쿠라키 주변 인물들이 그에게 보여주는 태도 등등을 보고 있노라면 이건 '혈통'을 중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순혈주의'의 이론을 설교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아 입맛이 쓰기도 하다.

스토리와 캐릭터 창조에는 엄청나게 공력을 들이는 편이지만, 이츠키 나츠미의 그림은 썩 훌륭하다고 할 순 없을 듯 하다. 컬러 일러스트보단 분명히 흑백이 분명한 펜터치와 연필 스케치에 더 능한 작가다. 공식 사이트(이츠키 나츠미도 이노우에 다케히코나 토리야마 아키라처럼 자신의 이름으로 된 유한회사를 설립, 자신을 법인화해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주소는 http://www.ina-inc.jp )에 올려져 있는 컬러 일러스트는 정말 헉 소리나게 촌스럽지만, 연필 스케치에선 스토리와 캐릭터에서 느껴지는 강렬함이 그대로 뿜어져 나온다. 최근작으로 오면 올수록 나날이 성의가 없어지는 게 눈에 보이는 것 같아 좀 불만스럽지만, 스토리에 몰입해 읽다 보면 만화 속의 캐릭터들은 더없이 위험한 매력을 지닌 인물들로 콩깍지(?)가 씌어 보일 것이다.

p.s. 얼마 전 신간 만화를 검색하다 보니 <데몬 성전 1>이라는 작품이 번역 출간된 것을 발견했다. 일본에선 현재 3권까지 단행본으로 발간된 작품이라고. 이츠키 나츠미의 작품을 읽고 싶어도 품절/절판된 책들뿐이라 못 구하겠다는 이들은 이 작품을 봐도 좋을 것이다. 단, 그녀의 작품은 3권까지는 인내심을 갖고 읽어줘야 한다는 사실도 유념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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