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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리영희, 임헌영 대담 / 한길사 / 2005년 3월
평점 :
리영희 선생이 타계하셨던 2010년 12월에 서재에 들여놓은 책을 1년이나 묵히고 펴보았다. 그때 함께 들여논 책은 한길사에서 나온 그의 전집 가운데 6권에 이른다. 1970년대, 지식인들의 필독서로 읽힌 <전환시대의 논리>를 비롯 <자유인>, <우상과 이성>,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21세기 아침의 사색>, 그리고 이 책 <대화>였다. 1년간 감히 펴볼 생각을 못했다. 다른 책을 읽느라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다는 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와 사회적 진실에 정면으로 맞설 용기가 없어서 였다고 하는게 더 정확하다. 리영희의 저서들로부터 깨닫게 될 진실들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그는 현대사의 여러 사건들을 진실이란 깃발아래 써내려간 논평가요, 저널리스트였다. 끊임없는 탐구정신으로 세계의 시대조류를 파헤친 성실한 언론인이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독재를 거치며 그는 진실을 추구하는 글쓰기를 해왔다. 투옥과 고문을 당했고, 수차례 언론사와 교수직에서 해직당하며 궁핍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의 반대편에는 시대가 요구하는 맞춤식 글쓰기와 처세로 승승장구한 언론인과 교수들이 있었고, 그들은 리영희와 전혀 다른 영광의 길을 갔다. 그들은 훗날 장관, 언론사 사장, 고위관리로 임용됐다. 이 영화와 리영희가 멀어진 것은 단 한가지 이유, 진실에 바탕을 둔 삶과 글쓰기를 해왔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 보기드는 고집장이 리영희는 누구인가?
리영희는 1929년 12월 2일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면에서 태어났다. 1942년 남한으로 내려와 경성공립고등학교와 1950년 한국해양대학교 항해과를 졸업하고 안동에서 친구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중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일했다. 그 해에 6.25 전쟁을 맞아 유엔군 연락장교단에서 통역관으로 3년 전쟁을 보낸다. 미국 고문관과 한국군 장교 사이의 통역 업무를 맡았던 그는 지금의 통일 전망대 근처, 향로봉 고지에서 오랜시간 전쟁의 참혹함과 군대에 대한 혐오를 경험한다. 통역업무의 특수성 때문에 휴전이되고도, 1957년 육군 소령으로 예편하기 전 7년간이나 그는 스스로 혐오하던 군대에 잡혀있어야 했다. 군 제대후, 그는 합동통신사 외신부장과 조선일보사 외신부장을 거치며 저널리스트로서 인생을 시작한다. 엄혹한 시절, 진실을 추구하고 탐구한 리영희식 글쓰기가 시작된 지점이다.
6.25 전쟁을 전장에서 몸소 체험하고, 대한민국 육군 소령으로 예편 한 이력으로 봤을 때,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리영희는 최전선 전장에서 인생의 젊은 날을 보내며 전쟁의 비극과 그 원인, 이데올로기의 허상 같은 걸 배운다. 전장 고지에서 미군 고문관의 통역담당 장교로 활동하던 시절, 그는 보충병으로 충원되어 전방 고지로 올라오던 병사들의 신분과 죽음을 예약한 고지전의 아이러니를 몸소 체험한다. 안타깝게도 죽음이 예약된 고지전에 충원된 병사들의 신분이란 지금과 다를 바 없이, `돈과 빽'이 없는 사회 하층민이 대부분이었다. 리영희는 미군 고위관리들과 함께 전쟁을 겪어내며, 강대국의 계산적 논리를 배운다. 훗날, 그가 대부분의 지식인들과 달리 미국에 대한 환상에 젖지 않고 그들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었던 이유다.
리영희의 자서전 <역정>을 읽은지 이제 10년이 되었다. 1960년대 까지를 다루고 있는 그 책에 대한 기억은 강렬했다. 지금껏 그 어떤 책에서도 배우지 못하고 감히 생각해 보지 못할 이야기를 그는 반쪽짜리 자서전(삶의 전반기만을 다룬다)을 통해, 쏟아냈던 것이다. 리영희 선생은 2000년 지병인 뇌출혈로 사실상의 집필 활동을 접었고 자신의 삶과 글쓰기를 정리할 최종적인 자서전을 낼 형편과 여력이 없었다. 외국언론을 통해 그는 `사상의 은사'로 호칭되었다. 20세기 한국 현대사를 가장 진실한 언어와 양심으로 담아냈던 그의 삶이 한 권의 묵직한 자서전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겐 큰 행운과도 같다. 민족문제연구소장이자 문학평론가인 임헌영과 대담 형식으로 된 이 책 <대화>는 임헌영이 시대순으로 굵직한 사건과 그의 행적을 회고하고 질문하면 리영희가 답변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총 2년간이나 수정,퇴고 작업을 거쳐 이 책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700여 장의 육중한 부피를 읽어내려가며, 왜 그가 `사상의 은사'라는 별칭을 얻었는지 독자는 깨닫게 될 것이다. 저널리스트로서 그는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를 워싱턴포스트에 익명으로 기고하는 일에 전념했고, 훗날 4.19 혁명에 공헌한다. 베트남 전쟁을 분석하는 심층적인 저술,연구 활동을 통해 미국의 세계 지배전략이 무엇인지 논파하는 글을 발표한다. 리영희는 박정희 군사정권을 실질적으로 조정하고, 지원하는 것이 미국이며 한국 정치와 경제가 미국의 지배전략에 따라 좌우 되는 것을 파악해 숨은 진실에 대해 중요한 기사와 저작들을 내놓게 된다. 독자들은 한국 현대사의 숨은 비화, 여럿을 목격하고 파악하는 희열의 순간들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리영희가 당시의 독재권력 하수인들에 의해, `의식화의 원흉'이란 악담을 들은 것은 이 때문이었을까? 21세를 살고 있는 독자들까지도 이 책의 행간을 읽어나가며 얻게 되는 `진실'과 그 진실을 추구하는 한 지식인의 `열망', 그것 말이다.
"중국의 장개석 총통과 소련의 스탈린은, 제 2 차 세계 대전 중 카이로선언과 포츠담협정으로 일본 패망 후 그 식민지인 조선민족의 즉시 독립을 주장했지요. 그러나 영국의 처칠은 철저한 제국주의 신봉자였기 때문에 조선인의 자치능력을 인정하지 않았고, 미국의 로즈벨트 대통령은 조선인을 미국의 식민지인 필리핀 인민의 수준으로 간주해서 적어도 30년 동안은 신탁통치를 하고 난 뒤에 자주독립을 허용하자는 주장이었어. 이런 사실을 지금까지도 모르는 한국사람이 많아요. " 리영희 <대화>, p. 82
박정희에 대한 리영희의 묘사는 주목할 만 하다. 이 책에 따르면 박정희는 대구사범 재학 시절 일제가 운영하던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려 하는데, 기혼자에 만 20세가 넘어 자격이 되지 못하자, <만주신보>에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報國 滅私奉公)이란 혈서를 보내고, 그에 감복한 일본 장교들이 그를 일제 육사에 입학시키게 된다. 리영희에 따르면, 그는 일제시대엔 천황 숭배자로 민족의 배반자였고, 해방이 되자 남한의 사상적 주류였던 남로당(공산주의)에 재빨리 편승했는가 하면, 여,순 사건으로 형세가 불리해지자 자신의 사상과 충성을 맹세했던 남로당은 물론 자신의 책임으로 관리하고 있던 비밀 당원의 명단까지 미국 군정에 팔아넘긴자로 철저한 기회주의자요 변절자라는 것이다.
리영희는 또한 박정의 시대의 경제 발전을 그 개인의 성과로 돌리는 것에 반대한다. 1960년대까지 모든 면에서 앞서가던 북한을 미국은 경계하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동베를린에 대항해서 서베를린을, 동독에 대항해서 서독을 집중적으로 지원한 것과 마찬가지로, 아시아에서 남한을 자본주의의 `테스트 케이스' 또 `쇼 케이스'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래, 미국은 박정희 시절 다른 예속국가와 정부들에게 지원한 것보다 월등히 많은 물질,정치,외교적 원조를 전면적,직접적으로 제공한다. 미국은 체면을 걸고 로스토 계획에 따라 케네디가 미국의 남한 경제지원을 일본에게 대행시킨 것이다. 이것이 박정희가 정권의 목숨을 걸고 한일회담의 성사를 강행한 이유라는 것이다.
"박정희 정권의 일정한 물질적 성과를 마치 박정희 대통령의 뛰어난 정치적 지도력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꽤 많은데, 사실은 이상과 같은 미국의 세계적 체제경쟁 배경 때문이었다는 국제정치를 알 필요가 있어요. 게다가 한국인의 높은 교육 수준과 지적 수준이 다른 예속국의 국민들과 달랐고." 리영희 <대화>, p.295
온 몸과 이성의 힘을 다해, 리영희는 시대의 무지와 권력자들의 횡포, 반민족적 사대주의와 싸워왔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나가며 드는 생각은 자생적인 독재자와 강대국 미국에 대한 반감 같은게 아니었다. 그 시대의 시민, 민중, 민족의 역량에 대한 각성 같은거라고 해야 더 정확하다. 리영희는 이 책 안에서 권력자와 강대국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동시에, 그 시대에 협업하고 동업했던 `끄나플'들과 침묵으로 일관했던 `시민'들에 대한 반성도 요구한다. 이땅에 독재와 사기 정권이 들어설 수 있던 책임을 정치 세력과 미국에만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시절 지식인과 언론인을 비롯한 뭇 대중이 그같은 정치구도와 세력을 허용했단 주장처럼 들린다. 이 말은 오늘날의 정치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꼼수정권을 들어서게 한 것은 바로 우리들 아닌가? 사실 잘먹고 잘살게 해준다면 사기와 편법에 능숙한 지도자도 괜찮다고 자위했던 우리들 아니었던가?
"박정희 시대의 언론과 권력관계를 두고 말하면, 차라리 신문사주와 신문인이 자진해서 권력에 몸을 팔았다고 나는 생각해. `강간'을 당했다기 보다 `화간'을 한 것이지." 리영희 <대화> ,p.321
리영희는 비롯 가진게 없었지만, 뛰어난 영어실력과 통역장교로 7년간 복무하며 한국 최고의 엘리트로서 미군정의 영향력이 남아있던 남한에서 권력을 움켜쥘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가 마음만 고쳐먹었다면 아마도 고위 관리와 장관을 거치며 일생 호의호식 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독재 정권을 거치며 꼬박 세번 투옥당해 옥고를 치르고, 정보기관에 끌려가 고초를 당한다. 삼남매를 키우며 고생하는 아내를 생각하며 세번째 구속되었던 법정에서 방청객의 아내에게 고개를 돌려, `고생시켜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다 입회형무관에게 제지당한다. 조선일보 외신부장으로 있던 시절, 김대중이란 신입 직원이 들어오는데 맘에 들지 않았단다. 훗날, 그만 남고 리영희를 비롯한 많은 기자들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퇴출 당했다. 알다시피 김대중은 훗날 조선일보 대표 주필로 이름을 날렸다.
편한 삶을 마다하고 누군들 이런 고초를 겪고 싶어했을까?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저널리스트와 지식인의 본령이 진실의 추구와 탐구에 있고, 저널리스트가 발굴한 진실을 뭇 대중과 나누는 것에 있고, 무지의 나락에서 그들을 구원하는 것에 있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20세기 중국 인민의 사상적 스승이자 계몽의 선구자란 호칭을 얻은 작가 루쉰을 리영희는 가장 존경하며 닮고자 했다. 그처럼 리영희도 한국 민중을 노예근성이 장악한 어둠의 장막에서 구출해 내려 노력했다. 그의 글쓰기를 통해 7,80년대 의식화 된 젊은이들이 많다. 보다 정확히 그것은 의식화가 아니다. 그것은 이땅의 지식인과 대중이 진실에 눈뜨는 기회였다. 그 시절 어떤 언론인과, 지식인도, 그처럼 온 몸을 던져 진실을 쓰지 못했다. 리영희가 언론인으로서 미래에도 존경받아야 할 이유다.
지난 5년은 언론과 역사의 퇴행기였다. 언론의 자유가 위축되고, 남북관계는 단절되고, 한국 외교는 미국으로 편향되었다. 네티즌 논객 미네르바의 구속과 SNS의 통제는 진실을 추구하는 입들을 막고자하는 꼼수였다. 민주주의가 언제든 퇴행할 수도 있다는 교훈을 우리는 몸소 체험했다. 진실을 감추고 거짓을 유통시키려는 세력이 여전히 막강하며, 지식인의 곡필이 뭇 대중을 희롱하는 시대다. 리영희의 회고록 <대화>를 읽으며, 글을 쓰는 자의 태도를 배운다. `진실을 가르치는' 그의 글쓰기로부터 이 시대 책읽는 자와 글쓰는 자의 자세를 가다듬는다. 진실은 남이 그저 건네주는게 아니라 찾고 탐구하는 것이며, 비판하는 가운데 다가오는 것이다. 리영희, 그를 어찌 `사상의 은사'라 부르지 않겠는가?
"글을 쓰는 나의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누어야 하는 까닭에, 그것을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영원히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행복, 사회의 진보와 영광은 있을 수 없다." 리영희 <대화>, p.675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2/0105/pimg_719042193725813.jpg)
20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