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러셀 자서전 - 하
버트런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 사회평론 / 2003년 3월
평점 :
신없이 살긴 쉬워도 신없이 죽긴 어렵다. 무신론자에게 필요한 것은 확고한 신념이 아니라 용기다. 20세기 영국 수학자이자 논리학자였던 버트런트 러셀은 우리에겐 무신론자의 대명사처럼 알려져 있다. 20대에 내가 접한 러셀의 책도 그와 같다. 최근 읽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도 그런 부류였다. 자서전을 읽고 나서야 내가 한 인간을 피상적인 지식과 편견으로 이해하려 했음을 깨닫게 됐다. 그를 종교적인 관점에서만 바라본 지금까지의 시점은 편협한 것이었다. 그의 삶은 진리에 대한 갈망, 무지와 폭력에 대한 증오, 사랑과 지식에 대한 열정 자체였다. 버트런트 러셀 1세기의 삶을 정리하고 있는 러셀 자서전은 방대하다. (상)(하)로 나뉜 이 책의 두께에 짓눌려 사놓은지 수 년동안 서재에 잠들어 있었다. 느리게, 의미있는 책 위주로 독서하겠다는 올해의 계획에 맞춰, 50여일 책장을 넘겼고 비로소 러셀 자서전을 완독했다.
러셀은 1872년에 태어나 1970년에 영면에 든 사람이다. 영국 빅토리아 왕조 말기에 태어나 1,2차 세계대전을 겪었고 한국 전쟁과 미소 냉전과 베트남 전을 모두 지켜보았다. 놀라운 것은 이 역사적 사건 마다 자신의 생각을 대중에게 표명했고, 소신에 따라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는 점이다. 러셀의 조부는 초대 러셀 백작이자 영국 수상을 두 차례 역임한 존 러셀 경이었다. 명문 집안의 자손으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할머니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과 도덕 과학을 공부했다. 젊은 시절 그는 수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고 31살이던 1903년 심열을 기울인 저작 <수학의 원리>을 발표했다. 이 책을 통해 세계적 명성을 얻는다.
그의 삶은 평탄한 수학자이자 논리학자로서 이어질 수 있었다. 세계적인 명성을 쌓았으니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일생 편안하게 생을 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1914년의 1차 세계 대전과 유럽의 위기는 러셀을 투사로 만들고 만다. 제국주의 경쟁에 빠져든 유럽대륙의 정치인들이 민족주의와 애국심에 호소하며 1차 대전을 일으키려 하자, 적극적인 반전 투쟁에 앞장선다. 러셀은 징병반대 문건을 쓴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받았으나 납부를 거부했고 곧바로 트리니티 칼리지 대학 강의권을 박탈당했다. 1차 대전 중에는 전쟁반대를 선동했다는 이유로 6개월간 투옥되기도 한다. 당대 러셀의 이런 행동은 기행으로 여겨졌을게 분명하다. 명문가의 자손이며, 당대 유명 철학자이자 귀족으로서 상류층이었던 그의 행동은 민족과 국가라는 개념앞에 배반이자 반역으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믿는 가치에 대해 의문을 갖고 집요하게 그것을 사유하며 옳지 않다고 믿는 것에 대해 적극적인 의사를 표명한 것은 확고한 자유주의 철학 덕분이다. 러셀이 자서전에서 `자유주의자의 10계명'으로 풀이한 이것의 제 1 원칙은 "어떤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하지 말라"이며, 제 5 원칙은 "다른 사람들의 권위를 존중하지 말라. 그 반대의 권위들이 항상 발견되기 마련이니까"였다. 9원칙은 "비록 진실 때문에 불편할지라도 철저하게 진실을 추구하라"다. 뼛속까지 자유주의자였던 그는 국가나 종교의 권위와 편협을 참아내지 못했다. 그의 생애는 권위와 편협에 대한 저항의 과정이었다. 대학 입학을 앞둔 청년 시절, 그는 무신론으로 기울어진다. 반박 불가능이라 믿던 신학의 제 1원인론을 그는 포기한다. " 누가 나를 만들었는가?" 라는 질문이 "누가 하느님을 만들었는가?"라는 보다 깊은 의문을 불러왔기 때문이었다.
"종교적 회의로 보낸 긴 세월 동안 나는 점차 사라져가는 믿음 때문에 대단히 불행했다. 하지만 과정이 끝나고 나자 놀랍게도 그 주제를 모두 정리하고 크게 기뻐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러셀 자서전(상) 63쪽
러셀의 회의하는 자유주의적 태도는 종교 영역 뿐 아니라 정치와 남녀평등, 교육과 선악의 이분법, 성도덕과 결혼 등 모든 영역에 걸쳐 확장된다. 그는 줄기차게 남녀간의 평등한 성 역할을 주장했고 이것은 시대의 경향을 앞서가는 것이었다. 영국 민주주의의 후진성을 질타하는 그의 농담섞인 자조는 왠지 오늘날 민주주의의 모순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민주주의에는 단 하나라도 장점이 있다. 의원이 멍청하다면 그를 뽑아준 사람들은 더 멍청한 셈이니 적어도 의원들이 유권자들보다는 덜 멍청할 수 있다"(러셀 자서전 상, 130쪽) 1927년에는 두 번째 아내인 도라 블랙과 비콘 힐 학교라는 실험 학교를 만들어 기성 교육의 모순을 제거하고자 노력했는데, 이것은 오늘날 대안학교의 시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929년 출간한 <결혼과 도덕>이란 책에서 우애결혼이란 개념을 설파하며 자유로운 성과 연애, 기존 관념을 타파하는 결혼의 의미를 주장한다. 결국 이 책은 청교도적 성도덕이 지배하는 미국 사회에 숱한 논쟁을 불러왔다. 결국 그는 미국 대학에서 강의할 기회를 잃게 되며 추방 압력과 대학 당국의 단합아래 교수로서 채용될 기회를 박탈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히틀러와 파시즘을 제외한 어떤 전쟁에도 반대했던 그는 국가와 정치 세력의 모순을 지적하고, 견제하는데 힘을 쏟았다. 국가권력이 항상 시민과 인류 생명의 유익을 위해 행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에, 그는 지속적인 시민불복종 운동을 기획하고 주도했다. 핵무기가 발명된 이후로 그는 전세계적 핵철폐 운동에 앞장선다. 핵무기가 처음 발명되고 실험된 시대는 막 2차 대전이 끝나고, 미국과 소련으로 양분된 세계 권력이 언제든 핵전쟁을 감행할 수 있는 위기의 순간이었다. 그는 아인슈타인 등 수많은 과학자와 학계 유명인사들과 규합해 핵전쟁 반대와 핵전력 감축 협상에 정치인들이 나설 것을 주장했다. 그는 숱한 저작의 문학적 업적을 인정받아 여든 나이에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 과히 최고의 명성과 그에 따르는 부를 얻었다 할 그 이후에도, 그의 사회 활동과 저작은 멈추지 않았다. 98세에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베트남 전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세상과 인간에 대한 그의 관심과 애정은 일생동안 지속됐다.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열정들이 마치 거센 바람과도 같이 나를 이리저리 제멋대로 몰고 다니며 깊은 고뇌의 대양 위로, 절망의 벼랑 끝으로 떠돌게 했다." 러셀 자서전 (상), 프롤로그 中
그는 신없이 일생을 살았고 신없는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동시대인들에게 존경받는 가장 위대한 지성인이었지만, 무신론을 주장하고 성 해방과 반민족, 반국가적 세계시민으로서의 정치이념을 주장했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기도 했다. 특히 미국 독자들 가운데 기독교인들은 노골적으로 그의 사생활(아내가 넷이며 이혼 경력이 세번이란 사실)을 들먹이며, 성적 타락이 도덕적 성장을 막았다며 그의 업적을 깎아내렸다. 러셀 자서전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프롤로그의 도입부는 그가 지향한 삶을 간략하고 명쾌한 세 단어로 규정짓는다. 사랑과 지식, 그리고 연민이다. 이것은 그가 일생을 걸고 집착하고 집중한 생의 방향성이었다. 그 과정에서 네 명의 아내를 맞이하고, 세번을 이혼했지만 그 누구에게도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은 하지 않았다.
첫번째 아내였던 앨리스 러셀은 80세 생일을 앞두고, 러셀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와 함께 했던 결혼 시절을 일생 가장 행복했던 시간으로 회상하고 있다. 일부 편협한 종교인들과 권력자들을 제외하곤 그의 놀라운 업적과 열정을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반핵운동을 하다, 88세의 나이에 법정에서 2개월 형을 선고받는 그를 보며, 자연스럽게 진실과 인류를 위해 싸우는 행동하는 지식인의 진면목에 존경과 전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어떤 정치이념에도 치우치지 않았던 그는, 냉전 시절 소련의 후르시초프 등 세계 주요국 지도자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긴장완화와 핵전쟁 방지, 군비감축, 동서 냉전 해소를 위해 죽는 순간까지 분투했다. 특히, 미국이 일으키는 패권 경쟁과 전쟁들마다 그는 강력한 반대와 비난에 앞장섰다.
러셀의 삶은 사랑과 지식에서 출발해 연민이란 인류애로 끝난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존중이며, 문명에 대한 사랑이고, 자유와 인권에 대한 투쟁이었다. 그는 종교를 버렸지만 가장 종교적인 태도로 세상과 인류 앞에 봉사했다. 진리와 타락한 권력에 대한 그의 싸움에 세계 최강국 미국이 세계 최빈국인 베트남을 상대로 한 살육의 실상을 깨닫게 됐고, 핵전쟁의 위험성을 아흔 노구의 몸으로 알린 까닭에, 호전적인 국가 권력이 핵전쟁의 불장난을 일으킬 위험성은 견제될 수 있었다. 그는 진리앞에 자유롭기를 소망했다. 하여,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신념에 맞서 "거짓과 더불어 제정신으로 사느니, 진실과 더불어 미치는 쪽을 선택하고 싶다"는 소망을 표명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반복되는 철학적 질문 앞에 러셀은 명쾌한 힌트를 제공해 준다. 무엇에 헌신해야 하는가, 라는 사명감에 대한 질문 역시 마찬가지다. 고뇌하는 청년에게, 인류의 어리석음 앞에 좌절하는 시민에게, 사랑과 지식, 연민을 추구한 러셀의 100년 시간은 그 자체로 위대한 가르침이자 교훈으로 환원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