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지음, 원마루 옮김 / 포이에마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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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육아와 교육에 관한 책을 읽지 않은 것은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조바심을 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더군다나 그런 책들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이란게 거기서 거기다. 다 알고 있는 내용을 복습하는 것은 독서의 즐거움을 해친다.  육아에 정답이 있는가,라는 회의도 든게 사실이다. 아이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라는 문제에 나는 정답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사랑이다. 넘치는 사랑 말이다. 되돌아보니 사랑만을 주겠다는 각오는 빗나가고 말았다. 사랑뿐만 아니라 상처 또한 준 것이 사실이다.  왜 어른들은 사랑하면서도 아이에게 상처를 주게 되는걸까.  내 잘못을 되짚어보고자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의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포이에마,2014)를 읽었다.


그는 영국에서 국제적 기독교 공동체 브루더호프를 이끌고 있는 목사다. 책이 큰 줄기에서 기독교적 가르침을 차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색채보다 강한 것은 지난 40년동안 수많은 부모와 아이들을 상담하며 얻은 교육과 양육의 지혜였다.  그의 이력에서 특별한 것은 1999년부터 전신마비 사고를 당한 뉴욕 경찰관 스티브 맥도날드와 함께 `폭력의 고리끊기'라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에선 학교에서 문제아로 낙인찍힌 중,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을 상대로 용서를 통한 화해의 메세지를 전한다.  다양한 경험과 상담 사례가 아이들의 양육에 관한 평범하지만 진심이 담긴 저자의 가르침으로 승화한다. 


아이는 질책보다 용서가 필요한 존재며, 미움이 아닌 사랑받아야할 개체다. 이것이 양육과 훈육의 기본 원칙임을 저자는 강조한다. 아이를 망치는 것은 어른의 욕망이지 아이의 잘못이 아니다. 아이가 어른의 스승으로 이 세상에 왔다는 것은 종교적인 수사가 아니다. 아이가 그릇된 길로 나아가는 것은 어른을 흉내내서다.  아이는 따라하기의 천재들이다. 결과를 놓고 질책하는 것은 주객전도라 할 수 있다. 오염된 세상은 어른이 만드는 것이고,  그 세계에 자연스럽게 물든 이들이 바로 아이들이다. 우리가 잘못된 길로 들어선 아이들을 용서하고 흔쾌히 보듬어야 하는 이유다.


" 과잉 인구가 지구를 파괴한다는 전문가들의 말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 지구를 파괴하는 건 탐욕과 이기심이지 아이들이 아니다. 아이들은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온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아이들이 우리의 선생으로 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복잡하기만 한 세상에서 우리 어른은 아이들만 줄 수 있는 교훈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17쪽,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학업성취도를 보이는 핀란드에선 아이가 일곱 살이 되어야 공부를 시킨다. "이들 국가의 교육자들은 일곱 살까지 아이들이 가장 잘 배우는 방법은 노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고도 그들은 학교를 졸업할 때쯤이면 학업 성취도가 세계 상위권이다. 유치원부터 조바심을 내고 아이를 들볶는 한국 상황과는 여러모로 비교된다.  교육이란 획일적인 가르침이기 마련이다.  획일성은 창의성의 건너편에 있는 말이다.  일곱 살 이전의 아이는 놀면서 가장 많이 배운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아이가 자유롭게 노는 일을 불안하게 바라보는 부모들은 자녀를 창의적 인간으로 길러내는 것을 자신도 모르게 방해하는 것이다.


오늘날 맞벌이 부부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부족하다. 이 부족한 시간을 보상하는 방법으로 자녀들에게 스마트 기기를 선물한다. 바쁜 부모와 시간을 보낼 일이 없는 아이들은 컴퓨터와 테블릿 피시를 조작하는 일에 익숙하다. 어떤 부모들은 아이가 최신 전자기기를 자유롭게 조작하는 일을 빠르게 배우길 소망한다. 최신 기술도 공부의 일종이라 믿기 때문이다. 반면, 캘리포니아 로스앨터스에 거주하는 구글, 애플, 휴렛패커드의 경영진 자녀들은 발도로프 학교에 다닌다. 발도로프 학교에선 첨단 기기만 아니면 그 어떤 것도 교육 자료로 환영한다. 펜과 종이, 뜨개질바늘, 가끔은 진흙도 등장한다. 컴퓨터는 눈을 씻고 찾아도 볼 수 없다. 첨단 기술 기업의 경영자들이 자녀를 컴퓨터로부터 보호하는 학교를 선택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컴퓨터 엔지니어 출신의 교사 캐시 와이드는 배움을 아주 매력적이면서도 손에 잡힐 수 있을 정도로 실제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애쓴다. 작년에 캐시는 산수 시간에 분수를 가르치기 위해 학생들에게 음식을 자르게 했다. 사과, 케사디야, 케이크를 4분의 1,  2분의 1,  16분의 1로 잘랐다. `4주 동안 분수로 먹고 살았어요.  제가 아이들에게 다 돌아갈 수 있게 케이크를 자를 때 아이들이 딴짓을 하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교실을 첨단 기술로 가득 채우는 정책을 옹호하는 이들은 현대 사회에서 경쟁하려면 컴퓨터가 필요하다고 항변하지만, 발도로프 학교의 부모들은 되레 묻는다.  `그렇게 배우기 쉬운 컴퓨터를 뭐 하러 서둘러 가르쳐요?'"  74-75쪽


아이의 양육 과정에서 갈등을 겪는 부모들은 순전한 사랑과 엄격한 훈육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유지할 것인가로 고민한다. 모든 부모는 사랑이란 감정을 훼손하지 않는 채,  아이가 잘못된 습관과 행실을 고칠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 그런데, 사랑과 훈육을 결합하기가 쉽지 않다.  내면의 사랑을 외부의 엄격성으로 드러내기 마련인, 훈육 과정은 아이에게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리며 정답에 가까운 조언을 건넨다.  "아이를 훈육하기를 두려워마라. 하지만 아이가 미안해하는 걸 느끼는 순간 즉시 완전히 용서하는 걸 잊지 마라"(119쪽)  유년을 생각해보면 우리 자신이 얼마나 눈치가 빨랐고 영리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지적당하지 않아도, 아이들이란 자신의 잘못을 깨닫기 마련이고 질책 당할 준비를 하기 마련이다.  우리의 목적지는 질책이 아니라 사랑이다.  잘못을 고백하는 아이를 따뜻하게 안아주고 용서하는 것이야말로 사랑이란 진심을 드러내는 최고의 훈육이다.


이 책의 후반부에는 독일 소설가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소설 <귀로 Der Weg zuriick>가 소개 돼 있다. 그는 1차 세계 대전 직후, 한때 시골 학교 교사로 재직한 적이 있었다. 그는 이 시기의 짧은 기억을 소재로 훗날 <귀로>라는 소설을 집필한다.  자신의 경험을 투영한 듯한 이 작품은 비참하고 잔인한 전쟁터에서 돌아온 교사가 해맑고 순수한 아이들을 맞대고 선 교탁에서, 어른들의 잘못된 욕망과 범죄로 물든 세계를 반성하는 모습이 잠시 등장한다. 소설 속 교사의 모습으로 화한 레마르크는 이렇게 적고 있다. " 이 끔찍한 시대에도 홀로 죄악에 물들지 않고 순전함을 지킨 너희 작은 생명에게 나는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166쪽)   야만적인 전쟁에 참여한 사람으로서, 그는 자신과 우리의 문명이 유년의 밝은 빛을 띄는 아이의 순수성을 오염시키지 않기를 소망하고 있다.  이 소설의 마지막 단락은 이렇게 끝난다.


" 경련이 온 몸으로 퍼져 마치 돌처럼 굳어가는 것만 같다. 이러다 무너져 내릴 것만 같다... 간신히 입을 연다. `아이들아, 이제 가거라 오늘 수업은 없다. ' 내 말이 진담인지 확인하려고 어린아이들이 나를 살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말한다. `그래, 맞아. 오늘은 가서 놀아라.  하루 종일. 숲에 가서 놀든지, 개나 고양이와 함께 놀려무나.  내일까지 학교에 돌아올 필요는 없다.' "  166-167쪽


"우리 아이가 이렇게 달라졌어요"라는 프로그램을 한 때 열심히 본 적이 있다. 그 프로그램에선 어떻게든 아이를 어른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교정하기 위해 노력하고, 결국 프로그램의 말미에선 아이가 교정되고야 만다. 잘못된 습관을 고쳐주는 것은 어른의 책임인 것은 맞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 조급한 것은 아니지 되돌아봐야 한다. 이 책의 저자라면 아마도, 보다 더 많은 인내와 대담한 용기를 부모에게 요구했을 듯하다. 그리고 좀 더 참아주고 인내하지 않았을까. 아이가 어른의 사랑과 인내에 보답하는 그 순간까지 말이다. 아이가 잘못된 습관과 못된 행실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어른의 책임이기 마련이다.  우리는 아이가 바뀌길 희망하면서, 우리 자신을 바꾸지는 않는다. 


말로써,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치지 말고 행동으로 어른이 본을 보이는 것은 어렵다. 교육과 양육이 어려운 것은 어른 자신은 변하지 않으면서 아이에게 이상적인 욕망과 형태를 투사하기 때문은 아닐까?  레마르크의 소설 <귀로>에 나오는 선생님은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그는 아이들을 볼 낯이 없는 것이다. 그가 교단에 선 것은 어른이기 때문이지 선생으로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전쟁과 욕망에 파괴된 세상이야말로 아이들의 정직과 순수함에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진정한 스승이며 거울이다. "아이는 언제나 옳다"  잘못된 것은 세상이고 어른들이다.  하여, 우리는 하루에 수십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 아이들이 번번이 말썽을 피워도, 아이를 향한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저자는 "아이들에게 희망이 없어라고 체념하는 것은 본래 그들에게 희망이 부족한 탓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사랑이 부족한 탓이라"고 단언한다.  자녀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사랑이다.  그곳에서 지혜와 인내가 샘솟을 것이다. 사랑, 그것 하나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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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2015-05-08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이 답이겠지요. 좋은 서평을 읽고 깊이 공감하는 바, 메일을 드렸어요. 확인 부탁드립니다.

개츠비 2015-05-08 11:36   좋아요 0 | URL
네이버 메일로 답장 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러셀 자서전 - 하
버트런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 사회평론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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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없이 살긴 쉬워도 신없이 죽긴 어렵다. 무신론자에게 필요한 것은 확고한 신념이 아니라 용기다.  20세기 영국 수학자이자 논리학자였던 버트런트 러셀은 우리에겐 무신론자의 대명사처럼 알려져 있다. 20대에 내가 접한 러셀의 책도 그와 같다. 최근 읽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도 그런 부류였다. 자서전을 읽고 나서야 내가 한 인간을 피상적인 지식과 편견으로 이해하려 했음을 깨닫게 됐다. 그를 종교적인 관점에서만 바라본 지금까지의 시점은 편협한 것이었다. 그의 삶은 진리에 대한 갈망, 무지와 폭력에 대한 증오, 사랑과 지식에 대한 열정 자체였다.  버트런트 러셀 1세기의 삶을 정리하고 있는 러셀 자서전은 방대하다. (상)(하)로 나뉜 이 책의 두께에 짓눌려 사놓은지 수 년동안 서재에 잠들어 있었다. 느리게,  의미있는 책 위주로 독서하겠다는 올해의 계획에 맞춰, 50여일 책장을 넘겼고 비로소 러셀 자서전을 완독했다.

러셀은 1872년에 태어나 1970년에 영면에 든 사람이다. 영국 빅토리아 왕조 말기에 태어나 1,2차 세계대전을 겪었고 한국 전쟁과 미소 냉전과 베트남 전을 모두 지켜보았다.   놀라운 것은 이 역사적 사건 마다 자신의 생각을 대중에게 표명했고, 소신에 따라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는 점이다. 러셀의 조부는 초대 러셀 백작이자 영국 수상을 두 차례 역임한 존 러셀 경이었다. 명문 집안의 자손으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할머니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과 도덕 과학을 공부했다. 젊은 시절 그는 수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고 31살이던 1903년 심열을 기울인 저작 <수학의 원리>을 발표했다.  이 책을 통해 세계적 명성을 얻는다.

그의 삶은 평탄한 수학자이자 논리학자로서 이어질 수 있었다. 세계적인 명성을 쌓았으니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일생 편안하게 생을 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1914년의 1차 세계 대전과 유럽의 위기는 러셀을 투사로 만들고 만다. 제국주의 경쟁에 빠져든 유럽대륙의 정치인들이 민족주의와 애국심에 호소하며 1차 대전을 일으키려 하자, 적극적인 반전 투쟁에 앞장선다. 러셀은 징병반대 문건을 쓴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받았으나 납부를 거부했고 곧바로 트리니티 칼리지 대학 강의권을 박탈당했다. 1차 대전 중에는 전쟁반대를 선동했다는 이유로 6개월간 투옥되기도 한다. 당대 러셀의 이런 행동은 기행으로 여겨졌을게 분명하다. 명문가의 자손이며, 당대 유명 철학자이자 귀족으로서 상류층이었던 그의 행동은 민족과 국가라는 개념앞에 배반이자 반역으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믿는 가치에 대해 의문을 갖고 집요하게 그것을 사유하며 옳지 않다고 믿는 것에 대해 적극적인 의사를 표명한 것은 확고한 자유주의 철학 덕분이다. 러셀이 자서전에서 `자유주의자의 10계명'으로 풀이한 이것의 제 1 원칙은 "어떤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하지 말라"이며, 제 5 원칙은 "다른 사람들의 권위를 존중하지 말라. 그 반대의 권위들이 항상 발견되기 마련이니까"였다.  9원칙은 "비록 진실 때문에 불편할지라도 철저하게 진실을 추구하라"다. 뼛속까지 자유주의자였던 그는 국가나 종교의 권위와 편협을 참아내지 못했다. 그의 생애는 권위와 편협에 대한 저항의 과정이었다. 대학 입학을 앞둔 청년 시절, 그는 무신론으로 기울어진다. 반박 불가능이라 믿던 신학의 제 1원인론을 그는 포기한다.  " 누가 나를 만들었는가?" 라는 질문이 "누가 하느님을 만들었는가?"라는 보다 깊은 의문을 불러왔기 때문이었다. 

"종교적 회의로 보낸 긴 세월 동안 나는 점차 사라져가는 믿음 때문에 대단히 불행했다. 하지만 과정이 끝나고 나자 놀랍게도 그 주제를 모두 정리하고 크게 기뻐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러셀 자서전(상) 63쪽

러셀의 회의하는 자유주의적 태도는 종교 영역 뿐 아니라 정치와 남녀평등, 교육과 선악의 이분법, 성도덕과 결혼 등 모든 영역에 걸쳐 확장된다.  그는 줄기차게 남녀간의 평등한 성 역할을 주장했고 이것은 시대의 경향을 앞서가는 것이었다. 영국 민주주의의 후진성을 질타하는 그의 농담섞인 자조는 왠지 오늘날 민주주의의 모순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민주주의에는 단 하나라도 장점이 있다. 의원이 멍청하다면 그를 뽑아준 사람들은 더 멍청한 셈이니 적어도 의원들이 유권자들보다는 덜 멍청할 수 있다"(러셀 자서전 상, 130쪽) 1927년에는 두 번째 아내인 도라 블랙과 비콘 힐 학교라는 실험 학교를 만들어 기성 교육의 모순을 제거하고자 노력했는데, 이것은 오늘날 대안학교의 시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929년 출간한 <결혼과 도덕>이란 책에서 우애결혼이란 개념을 설파하며 자유로운 성과 연애, 기존 관념을 타파하는 결혼의 의미를 주장한다. 결국 이 책은 청교도적 성도덕이 지배하는 미국 사회에 숱한 논쟁을 불러왔다.  결국 그는 미국 대학에서 강의할 기회를 잃게 되며 추방 압력과 대학 당국의 단합아래 교수로서 채용될 기회를 박탈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히틀러와 파시즘을 제외한 어떤 전쟁에도 반대했던 그는 국가와 정치 세력의 모순을 지적하고, 견제하는데 힘을 쏟았다.  국가권력이 항상 시민과 인류 생명의 유익을 위해 행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에, 그는 지속적인 시민불복종 운동을 기획하고 주도했다.   핵무기가 발명된 이후로 그는 전세계적 핵철폐 운동에 앞장선다.  핵무기가 처음 발명되고 실험된 시대는 막 2차 대전이 끝나고, 미국과 소련으로 양분된 세계 권력이 언제든 핵전쟁을 감행할 수 있는 위기의 순간이었다. 그는 아인슈타인 등 수많은 과학자와 학계 유명인사들과 규합해 핵전쟁 반대와 핵전력 감축 협상에 정치인들이 나설 것을 주장했다.  그는 숱한 저작의 문학적 업적을 인정받아 여든 나이에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 과히 최고의 명성과 그에 따르는 부를 얻었다 할 그 이후에도, 그의 사회 활동과 저작은 멈추지 않았다.  98세에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베트남 전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세상과 인간에 대한 그의 관심과 애정은 일생동안 지속됐다.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열정들이 마치 거센 바람과도 같이 나를 이리저리 제멋대로 몰고 다니며 깊은 고뇌의 대양 위로, 절망의 벼랑 끝으로 떠돌게 했다."   러셀 자서전 (상), 프롤로그 中

그는 신없이 일생을 살았고 신없는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동시대인들에게 존경받는 가장 위대한 지성인이었지만, 무신론을 주장하고 성 해방과 반민족, 반국가적 세계시민으로서의 정치이념을 주장했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기도 했다. 특히 미국 독자들 가운데 기독교인들은 노골적으로 그의 사생활(아내가 넷이며 이혼 경력이 세번이란 사실)을 들먹이며, 성적 타락이 도덕적 성장을 막았다며 그의 업적을 깎아내렸다.  러셀 자서전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프롤로그의 도입부는 그가 지향한 삶을 간략하고 명쾌한 세 단어로 규정짓는다. 사랑과 지식, 그리고 연민이다.   이것은 그가 일생을 걸고 집착하고 집중한 생의 방향성이었다.  그 과정에서 네 명의 아내를 맞이하고, 세번을 이혼했지만 그 누구에게도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은 하지 않았다. 

첫번째 아내였던 앨리스 러셀은 80세 생일을 앞두고, 러셀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와 함께 했던 결혼 시절을 일생 가장 행복했던 시간으로 회상하고 있다. 일부 편협한 종교인들과 권력자들을 제외하곤 그의 놀라운 업적과 열정을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반핵운동을 하다, 88세의 나이에 법정에서 2개월 형을 선고받는 그를 보며, 자연스럽게 진실과 인류를 위해 싸우는 행동하는 지식인의 진면목에 존경과 전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어떤 정치이념에도 치우치지 않았던 그는, 냉전 시절 소련의 후르시초프 등 세계 주요국 지도자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긴장완화와 핵전쟁 방지, 군비감축, 동서 냉전 해소를 위해 죽는 순간까지 분투했다. 특히, 미국이 일으키는 패권 경쟁과 전쟁들마다 그는 강력한 반대와 비난에 앞장섰다.

러셀의 삶은 사랑과 지식에서 출발해 연민이란 인류애로 끝난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존중이며, 문명에 대한 사랑이고, 자유와 인권에 대한 투쟁이었다. 그는 종교를 버렸지만 가장 종교적인 태도로 세상과 인류 앞에 봉사했다. 진리와 타락한 권력에 대한 그의 싸움에 세계 최강국 미국이 세계 최빈국인 베트남을 상대로 한 살육의 실상을 깨닫게 됐고, 핵전쟁의 위험성을 아흔 노구의 몸으로 알린 까닭에, 호전적인 국가 권력이 핵전쟁의 불장난을 일으킬 위험성은 견제될 수 있었다. 그는 진리앞에 자유롭기를 소망했다. 하여,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신념에 맞서 "거짓과 더불어 제정신으로 사느니, 진실과 더불어 미치는 쪽을 선택하고 싶다"는 소망을 표명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반복되는 철학적 질문 앞에 러셀은 명쾌한 힌트를 제공해 준다.  무엇에 헌신해야 하는가, 라는 사명감에 대한 질문 역시 마찬가지다. 고뇌하는 청년에게, 인류의 어리석음 앞에 좌절하는 시민에게,  사랑과 지식, 연민을 추구한 러셀의 100년 시간은 그 자체로 위대한 가르침이자 교훈으로 환원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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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창비시선 237
김태정 지음 / 창비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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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세계에서 가난은 무능 아니면 동정의 대상이다. 모두들 무능과 동정이 따르는 가난을 기피한다. 검박함을 미덕으로 알아야할 수도자들까지도 고급 승용차를 타고 좋은 옷과 음식을 갈망한다.  가난은 이래저래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자본주의 세계의 기피 대상 1호다. 하여 사람들은 밥이 되는 일에 모든 시간을 쏟기 마련이다. 우리가 쳇바퀴 도는 일상을 신줏단지 모시듯 살아가는 것도 가난과 벗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영혼이 가난해도 신경쓰지 않지만,  물질적 빈곤 만큼은 벗어나려 한다.   그게 세상의 통념이다.

그런데, 이 상식에 반기를 든 사람이 있었다.  그는 김태정 시인이다.  서울 토박이였고 노동자였고 좀더 세련되게 표현하자면 민중서정시인이었다. 생전 김남주 시인이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이사로 있을 때 그 곁에서 간사를 맡았다. 13년 동안 시를 썼고 그 시를 모아 2004년에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이었던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창비)를 펴냈다.  그 즈음 시인은 서울 생활을 접었다. 그 후, 그는 전남 해남의 땅끝에 있는 미황사란 사찰에 둥지를 틀고 7년 남짓을 살다 암과 투병 끝에 생을 마쳤다. 

시인보다 시인의 삶이 더 궁금해졌다.  그런데, 김태정 시인의 서울 살이와 마흔 여덟 생에 대한 흔적이 별로 없었다. 어떻게 검색어를 넣어도, 그 이상 정보가 없는 것은 난감한 일이었다. 이것은 궁금증을 더 증폭시키는 것인데 사실 바보같은 일이 아닌가. 시집을 첫 장부터 끝까지 읽어나가면서 내가 가까운 지름길을 놔두고 쓸데없는 짓을 했단 생각이 들었다. 시 속에서 김태정의 마음을 읽는다.  가난, 글쓰기, 외로움, 고된 노동, 돈이 되지 않는 시, 서울살이의 실망감, 상실감, 맑게 세상을 살피는 서정성, 검박함, 시에 대한 집착. 자연에서 살고 싶은 바람. 

첫 페이지에 등장한 `호마이카상'이란 시는 그녀가 시로써 남긴 자서전이다. 간소한 밥상을 차릴 수 있는 흔하디 흔한 앉은뱅이 책상이었던 시인의 호마이카상은 시인에게 애증의 대상이다. 시인은 이제 호마이카상을 갈아치우고 싶어한다. 그것은 "네가 낡아서가 아니고 싫증 나서도 아니다. 이십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해온 네가 이젠 무서워졌기 때문"이다. 20년 동안 시인은 같은 호마이카상을 썼다. 그곳에서 그녀는 밥을 차려 먹고 시를 썼다. 그 상 앞에 앉으면 호마이카상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조차 알 만큼 노련해졌다. 내 생각을 다 읽는 그것 앞에서 "거짓말도 할 수 없고 변함없이 궁핍한 끼니도 네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 불편해졌다. 이 검박함과 겸허함이 그녀의 삶을 받치는 주춧돌 아니었을까.

"책상도 되고 밥상도 되는 네 앞에서 
시도 되지 못하고 밥도 되지 못하는 
나의 현재가 문득 초라해졌다
시가 밥을 속이는지
밥이 시를 속이는지
죽도 밥도 아닌 세월이 문득 쓸쓸해졌다
이 초라함이,
이 쓸쓸함이 무서워졌다
네 앞에서 발바닥이 되어버린 자존심
아무래도 이 시시한 자존심 때문에
너를 버려야 할까보다
그래 이젠 너를 갈아치울 때가 되었나보다"  

<호마이카상> 일부, 김태정


검박함은 그녀의 시에 등장하는 소품들로 형상화 된다. 2000년대에 여전히 286 컴퓨터를 애지중지하는 그는 그것을 `나의 아나키스트'로 명명한다. 이 컴퓨터는 그가 "1996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색인 교정 아르바이트 일당 4만원으로 장만한 재산목록 1호"였다. 그 이후, 그 철지난 컴퓨터는 글을 쓰는 시인의 밥줄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286 컴퓨터를 여전히 쓰는 것은 "일당 4만원의 땀 밴 추억 때문도 아니고 재활용에 대한 알뜰한 집착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감시당하고 핍박받았던 80년대 정치상황에 대한 은유로 이어진다. 그의 시가 서정과 민중성으로 결합되는 지점이 바로 이런 곳들이다. 

"어떤 사상이든 어떤 정견이든 어떤 욕설이든 내뱉어도 
발설하지 않는 나의 286은 외계와의 교신을 버린 아나키스트라서
흔적을 사냥하는 광견의 시대 팔공년대를 통과하면서
천기누설공포증이라 해도 좋을 풍토병을 다만 아웃사이더
였을 뿐인 나까지 덩달아 앓았으니" 

<나의 아나키스트> 일부
 

궁핍과 가난에 대한 그녀의 태도는 긍정과 부정을 오고간다. 그것은 때로 불편함이자 때로 조력자가 되곤 한다. `궁핍이 나로 하여'라는 시에서 김태정은 "몇주째 견뎌오던 보릿고개를 박차고 일어나 다시, 밥이 되고 공과금이 되고 월세가 될 글을 쓴다"고 적고 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글발이 서지 않는 때가 있기 마련이다. 하여 시인은 " 이 핑계 저 핑계로 오래도록 원고뭉치를 묵혀 두고 말았다."  그 원고뭉치의 먼지를 털게 한 것은 다름 아닌 궁핍이었으니 그것은 나를 죽게 하면서 동시에 살리는 것 아니겠느냐고, 시인은 가난의 역설을 표현하는 것이다.

" 이것도 보릿고개 덕이라면 덕이겠다
궁핍이 나로 하여 글을 쓰게 하니
궁핍이 글로 하여 나를 살게 하니
가난은 어쩔 수 없는 나의 조력자인가 " 

<궁핍이 나로 하여> 일부


시인은 2003년 문인 동료와 해남 미황사를 방문한 적이 있다. 무슨 연유에서였을까.  그는 2004년 토박이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한반도의 끝자락 사찰 미황사로 거처를 옮긴다. 그의 시집에는 미황사와 해남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 제법 담겨 있다. 달마산의 솟아난 바윗돌들이 바닷바람을 막아주고 사철 따뜻한 햇살이 쏟아지는 미황사에는 관광객 뿐만 아니라 문인들의 발걸음이 잦다.  한 때, 김태정 시인과 일했던 김남주 시인의 생가가 있는 곳도 해남 땅이다.  김태정 시인의 작품집 안에도 `미황사'란 제목을 단 시 한 편이 등장한다. 이 시 안에서 엿보이는 정서는 상실감과 결핍이지만, 미황사를 통해 종교와 자연에서 오는 잔잔한 치유의 에너지 또한 흘러 넘친다.



"열이레 달이 힘겹게 산기슭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사랑도 나를 가득하게 하지 못하여

고통과 결핍으로 충만하던 때

나는 쫓기듯 땅끝 작은 절에 짐을 부렸습니다


세심당 마루 끝 방문을 열면

그 안에 가득하던 나무기둥 냄새

창호지 냄새, 다 타버린 향 냄새

흙벽에 기댄 몸을 살붙이처럼

아랫배 깊숙이 그 냄새들을 보듬었습니다


열이레 달이 힘겹게 산기슭을 오르고 있었고

잃어버린 사람들을 그리며 나는

아물지 못한 상실감으로 한 시절을

오래, 휘청였습니다


……색즉시고옹공즉시새액수사앙행식역부우여시이사리자아아시이제법공상불생불며얼……불생불멸……불생불멸……불생불멸……


꽃살문 너머

반야심경이 물결처럼 출렁이면

나는 언제나 이 대목에서 목이 메곤 하였는데


그리운 이의 한 생애가

잠시 내 손등에 앉았다가 포르르,

새처럼 날아간 거라고

땅끝 바다 시린 파도가 잠시

가슴을 철썩이다 가버린 거라고……

스님의 목소리는 어쩐지

발밑에 바스라지는 낙엽처럼 자꾸만

자꾸만 서걱이는 것이었는데


차마 다 터뜨리지 못한 울음처럼

늙은 달이 온몸을 밀어올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필생의 호흡이 빛이 되어

대웅전 주춧돌이 환해지는 밤

오리, 다람쥐가 돌 속에서 합장하고

게와 물고기가 땅끝 파도를 부르는

생의 한때가 잠시 슬픈 듯 즐거웠습니다

열반을 기다리는 달이여

그의 필생의 울음이 빛이 되어

미황사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홀로 충만했습니다 "


미황사 <전문>


 


생전 시집 한 권을 남겨놓고 2011년 생을 마감한 김태정은 주목받지 못한 시인이었다. 글을 써서 돈을 벌고 싶은 마음도, 출세하고 싶은 욕망도 없었다. 무려 13년동안 쓴 시를 엮어 겨우 시집 한 권을 남긴 그였다.   그는 여전히 시인들 마음속에 살아 있다. 그를 아는 시인들의 전언을 통해 우린 김태정을 다시 살펴보게 된다. 지리산에 사는 이원규 시인은 생전 그를 일컬어 " 이 땅에 태어나 가장 죄를 적게 짓고 사는 시인이 있다면 달마산에 깃들여 사는 김태정 시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또 시인의 사후, 그를 알고 지냈던 시인 김사인은 `김태정'이란 시 한 편으로 그를 기렸다.   동료 시인의 눈에 비친 김태정의 마흔 여덟 짧은 생이 비로소 손에 잡힐 듯 생생히 전해온다.

슬픔 너머로 다시 쓸쓸한

  솔직히 말해 미인은 아닌

  한없이 처량한 그림자만 덮어쓰고 사람 드문 뒷길로만 피하듯 다니 던

  소설공부 다니는 구로동 노동자 공아무개 젖먹이를 도맡아 봐주던

  순한 서울 여자 서울 가난뱅이

  나지막한 언덕 강아지풀 꽃다지의 순한 풀밭

  응, 나도 남자하고 자봤어, 하더라는

  그 말 너무 선선하고 환해서

  자는 게 뭔지 알고나 하는 소린지 되려 못 미덥던

  눈길 피하며 모자란 사람처럼 웃기나 잘하던

  살림솜씨도 음식솜씨도 별로 없던

  

  태정 태정 슬픈 태정

  망초꽃처럼 말갛던 태정 "


  김사인의 시 <김태정> 中




나를 미황사로 이끈 이는 김태정 시인이었다.  그것이 알길없는 시집 한 권의 마력이겠다. 그곳에서 기억속 연인을 그리듯 나는 그 시인을 생각하고 있었다.  전날 늦은 밤까지 그녀의 시를 반복해 읽었고, 시집의 말미에 담긴 동료 시인의 비평도 꼼꼼히 보았다. 그러나, 나는 김태정에 대해 뭐라 말할 수 없었다.  내가 그날 미황사에서 찾으려 했지만 결국 찾지 못한 것은 그가 사랑하고 회피하려 하지 않았던 `자발적 가난'과 `무욕' 의 정체 아니었을까. 

누구나 가난과 마주할 수밖에 없는 시기가 있다.  청춘의 시간들이 그렇다. 십 몇 해 전, 무작정 해남 땅끝에 갔던 밤이 생각났다.  느지막이 도착한 그곳에서 난 혼자였다.  바람이 거셌고 가을의 끝물이었는지 체온을 빼앗는 공기는 차가웠다.  나를 위무하는 별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내가 지금껏 바라본 별 가운데 가장 크고 선명한 별빛이 그 하늘에 있었다. 아마 난 그 밤, 그 쓸쓸한 땅끝에서, 청춘의 궁핍과 무능을 오래도록 증오했을 것이다.

그 시간 이후로, 내 삶은 결핍에서 멀어지려 발버둥치는 삶이었다.  나는 풍부한 자아의 상상력보다 월급날의 넉넉한 통장잔고에 만족해하는 속물이 되고 말았다.  때묻었지만 때가 묻는지도 모르는 삶이 결핍 건너편에 존재하는 내 미래일 것을 그때는 몰랐을 것이다.  하여, 나는 오랜 시간 시를 읽지 않았다.  시 속에서 나는 스스로의 오염도를 확인해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완독해 낸 시집 한 권을 통해 이제 시 읽는 독자로 돌아가고자 한다. 순수하고 욕심없고 가난했지만 비굴하지 않았던 김태정의 시편들은 내 성정의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것이다. 다시 미황사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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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과차 2019-09-09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불리한 청춘은 있어도 불행한 청춘은 없다
이정훈 지음 / 느낌이있는책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젊음은 죽음이란 단어와 친하지 않다. 젊음이란 피어나는 꽃이며 생기로 가득한 시간이다. 그곳에 소멸과 죽음이란 음울한 기운은 느낄 수 없다.  젊음 뿐인가.  살아 있는 누구도 죽음과 거리를 둔다. 나이가 들어서도 죽는다는 것은 그저 머릿속 상상속에서만 가능하다. 그렇지 않다면, 생물학적으로 죽음이 가까운 나이에 이른 사람들이 그렇게 돈과 권력에 집착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아무도 죽고 싶어하지 않는다. 존재란 본능적으로 죽음을 회피하고 삶을 사랑한다. 사람은 죽음을 경험할 수 없고 오직 죽음을 목격할 수 있을 뿐이다. 죽음을 통해 삶을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은 그러므로 귀중하다.  누군가의 장례식에 들렀을 때 풍겨오는 그 엄숙하고 장엄한 분위기, 나이와 성별에 관계없이 납골당 선반위에 도열한 유골함과 영정사진들. 사람은 이런 경험들을 통해 죽음과 간접적으로 만나고 한층 성숙해지는 법이다.


여기, 한 청년 사업가가 있다.  젊은이들이 기피하는 장례사업에 뛰어들어,  8년만에 대한민국 상위 1% VIP 장례기획 분야 1위 기업을 일구어 낸 <중앙의전기획>의 대표 이정훈이다. 그는 30대 초반 아버지의 장례업을 돕다 천편일률적이던 장례 사업분야의 블루오션을 개척한다.  정.재계 유명인사들의 장례식과 순직경찰, 소방공무원, 군인 등 대한민국이 슬퍼하는 특별한 장례식의 뒷편에서 그는 장례기획자로 맹활약했다.  장례기획자는 일반 장례업에서 다루지 않는 독특한 분야다. 누구도 관심갖지 않는 장례 분야를 개척하고 이젠 건실한 기업으로 성장시킨 30대 한 청년 사업가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책 한 권이 등장했다.  <불리한 청춘은 있어도 불행한 청춘은 없다>(느낌이 있는 책, 2015년)이다. 


자기계발서와 같은 제목이 붙었지만 청춘보고서 같은 에세이에 가깝다.  저자가 견디어 온 가난하고 근성있는 청춘의 시간들이 그의 글을 받침하는 버팀목이 되고 있다. 그는 1997년 외환위기로 집안이 몰락하는 과정을 두 눈으로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했다. 96년 갓 대학교에 입학 후 스무 살의 나이였다. 서울의 명문대학교에 다니던 누나는 감자로 하루 끼니를 때우며 버스비도 없이 걸어서 과외를 다녔고, 아버지는 빚 독촉에 시달리다 자취를 감춰 오랫동안 연락조차 닿지 않았다. 군문을 나온 후 집안은 한 겨울 보일러 기름조차 뗄 수 없는 지경에서 헤어나오질 못했다. 그는 이 때, "나란 존재의 무기력함에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고 회고한다.


그는 빨리 돈을 벌어 집안을 건사하겠다는 일념으로 일본행을 결행한다.  유학자금 800만원을 목표로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런데, 출국 2개월 앞둔 시점에 유학원에 송금하려던 돈을 잃어버린다. 300만원 때문에 일본행을 포기하려다 어머니가 어렵게 모아둔 돈을 지원받고 결국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는 이때를 기억하며 "지금의 나를 키운 것은 온전히 어머니의 희생 덕분"이었다고 고백한다.  어머니는 자신의 삶의 든든한 뿌리였고, 그 뿌리가 있었기에 흔들릴 지언정 쓰러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학생 신분으로 왔지만 목적은 일본에서 돈을 버는 것이었기에 일자리를 찾고자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언어와 지리, 문화에 문외한인 그에게 일본에서의 일자리찾기는 쉽지 않은 길이었다. 겨우 구한 일자리는 한 여름 도시 전역에 전단지를 돌리는 일이었고 그 일을 하며 일본에 온지 한달만에 15kg의 몸무게가 줄기도 했다.


그는 이후, 식당 서빙과 청소, 번역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일본의 2년제 대학에서 실내 디자인을 전공했다. 유학 초기엔 돈을 벌고자 했으나 어느 순간 삶은 일본어와 디자인 공부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가 열정에 찬 일본 생활을 정리한 것은 또 한 번 모아둔 학비를 사기 당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유학와 친하게 지내던 한살 위 형이 학비로 모아둔 돈을 들고 튀었고, 그는 결국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일본행은 실패한 셈이었다. 목적한 돈과 공부 그 어느것도 성취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일본에서 경험을 지금 성공의 발판으로 생각한다. 일본어를 마스터한 것과 실내 디자인을 공부한 것은 훗날 그가 청년 사업가로 크는 데 여러모로 도움을 준다. 지금의 작은 실패가 결코 영원한 실패는 아니란 교훈을 준 시간이었다. 


" 동경에 있는 기숙사에 여장을 풀고 내게 남은 전 재산이라고는 배낭 하나와 원화 17만 원이 전부였다. 타국 땅을 밟은 지 일주일도 안 돼서 육체 노동을 시작했고 한 달 사이에 15킬로그램이나 살이 빠졌다. 일본에서의 생활 자체가 도전이었다. (중략..) 누구의 도움도 구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은 내면에 잠들어 있던 동물적인 생존본능을 일깨웠다.  살고자 하는 야생적 본능이 풀을 뜯던 온순한 동물을 사나운 육식동물로 변화시켰다. "   115쪽, 이정훈 <불리한 청춘은 있어도 불행한 청춘은 없다>


그가 일본 유학 이후, 장례업에 뛰어든 것은 아버지의 일을 곁에서 도우면서부터다. 젊은 나이에 장례업을 한다는 것을 숨기고 싶었던 시절도 있었다. 죽음을 꺼려하는 사회 분위기, 장례업에 대한 편견을 이겨내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장례를 통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육체의 종말을 보면서 삶에 대한 허무함과 생에 대한 강한 집착"을 얻었다고 말한다.  그는 직업적 체험을 통해 죽음이란 의례를 통해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게 되었다. 그의 에세이는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깊은 통찰과 혜안이 돋보였다.  이것은 죽음을 다루며 삶을 성찰해온 습관 덕분일 것이다. 


그는 기적을 믿는 사람이다. 기적이란 저절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VIP 장례기획사를 정상에 올려 놓은 지난 8년 동안 그는 무수한 기적과 만났다.  처음 VIP 장례 시장에 뛰어 든다고 했을 때, 채 1년을 못 버틸 거라 확신한 사람이 99%였으며 그 가능성을 믿은 사람은 1%, 곧 그 자신뿐이었다.   지방대학을 겨우 졸업했다고 말하는 그가 지금 대학 강단에 서서, 인문학과 장례기획을 강의하고 있는 것도 기적이라면 기적이다.  사업을 본궤도에 올려 놓기 위해, 고군분투한 8년간, 그는 책을 쓰는 사람이 되는 새로운 꿈을 가졌고 그 꿈을 결국 실현시키고야 말았다.  새벽 네 시에 일어나 글을 쓸 때면 영혼이 정화되는 것을 느낀다는 그는 그 두 시간을 투자해 6개월만에 책 한 권이 될 만한 분량의 원고를 생산해 냈다.


" 나에게 일은 배움이고, 배움은 곧 놀이다. 나에게 일과 놀이의 구분이 없다. 그래서 꿈꾸는 자는 꿈 안에서만 논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일을 생각할 때면 심장이 뛰고 흥분된다. 일을 사랑하는 사람은 일에 대한 묘한 흥분을 느낀다. 일을 사랑한다는 것은, 일 자체가 내가 `나로서' 살아가게 하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되었다는 증거다 "   226쪽


청년의 성공담은 놀라운 기적이지만 그 자체로 위험하다. 청년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때이른 성공'이란 말도 있다. 너무 이른 성공이 자만과 교만을 불러오고 결국 인생에 독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우리 주위를 둘러봐도 30대에 튼실한 기업을 일군 청년들이 하루 아침에 몰락하는 경우를 흔하게 보게 된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성공담을 책으로 엮었고 많은 독자를 끌어모았지만 결국 실망을 불러오곤 했다. 무엇이 이른 성공과 실패를 불러오는가.  나는 그것을 자신에 대한 되돌아봄, 곧 성찰이란 단어로 정의한다. 성공과 실패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정상에 올라서도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자만하지 않고 겸손해지는 법이다.  실패하더라도 지나치게 자신을 책망하지 않는 사람은 자존감을 훼손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부와 권력은 언젠가는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 생의 진실이다. 죽음은 평등하며 죽음은 외롭고 죽음은 단출하다.  돈과 권력, 인연과 관계, 기쁨과 슬픔, 원한과 증오 모두를 내려놓고 가야하는 것이 죽음으로 나 있는 길이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그 누구도 이 길을 비껴갈 수 없다. 그러니, 돈보다 권력보다 명성보다 중요한 것은 매순간 어떤 자세로 살아가느냐다.  30대에 장례기획사를 일구어 성공의 반열에 오른 청년 사업가 이정훈은 역설적이게도 죽음을 기획하며, 삶을 배워가는 사람이었다. 돈도 권력도 없이 처절한 밑바닥 젊음을 견디어온 사람이기에 청년들에게 들려주는 말에는 진실과 공감이 담겨 있다. 


새벽 시간 조용히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사업가는 흔치 않다. 책 속에는 삶의 상처와 가난과 고통을 이겨낼 보물들이 가득하다.  죽음을 기획하는 업을 통해 삶을 돌아보고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그는 인생을 오독하지 않을 듯하다. 삶 자체가 성찰의 기회로 가득한 젊은 사업가의 책 속에선 성공의 비결 하나가 등장한다. 그것은 곧 `죽음의 재발견'이다. 그는 "죽음의 끝에서 생을 발견하는 순간, 가족이라는 무거운 부담감은 살아가는 기쁨이 되고, 직장이라는 반복적인 굴레는 생산적인 에너지로 변한다"고 해석한다.  인생을 대하는 이런 성숙하고 의젓한 자세야 말로 독자들이 진정 주목해야 할 이 책의 고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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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특별 보급판 세트 - 전9권 미생
윤태호 글.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2월
평점 :
품절



<미생> 열풍에 동참했다.  9권짜리 만화책을 며칠에 걸쳐 읽었다.  짧막한 나의 소감은 드라마 <미생>이 훨씬 재밌다는 거다.   유머나 풍자 보다는 `공감'에 방점을 찍을 수 있는 웹툰이다. 현실성이 없는 드라마 같은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미생>은 비교적 든든한 현실 위에 이야기의 집을 짓는다.  더군다나 밋밋한 직장생활의 애환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것이라지만, 그래서 식상할 수 있다. 직장생활 다 그렇고 그런 거지, 라고 결론 내리면 더 이상 할 말 없다.  현실성 있는 주제를 공감가는 톤으로 풀어내는 드라마는 귀하다. 언제가부터 텔레비전은 드라마 천국이 돼 버렸다.  하루도 드라마가 빠지는 날이 없다.  그런데, 현실을 감추는 드라마 일색이다.  어쩌다 드라마에서 낯익은 `현실'을 보게 되면 사람들은 <미생>처럼 열광하기 마련이다. 

 

지금 <미생> 열풍은 우리들이 정말 보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되묻는다.  텔레비전을 켜면 뉴스는 거짓말을 하고 드라마는 세상을 감추고 예능은 맥락없이 웃긴다.  텔레비전은 우리 시대에 진짜 바보상자가 돼 버렸다. 드라마 <미생>을 본 사람들마다 공감간다고 말한다.  겨우 이 정도 캐릭터, 이 정도의 스토리에 저 열광이라니 놀랍지 않은가.  드라마 시간대를 맞춰가며 볼 자신이 없는 난 <미생>의 원작을 읽겠단 생각을 했다. 미생에서 내 직장생활을 보고 내 동료들의 얼굴을 보고 우리의 일을 되짚었다.  뜬금없이 이런 질문이 앞선다. 윤태호 작가는 직장생활을 해보고 이런 작품을 쓰는 것인가.  몇 군데 작위적이고 별 내용없고 지루한 부분이 있긴 했지만 그런대로 선전했다고 본다. 

 

사실, 종합 상사의 깊이 있는 비지니스를 우리가 어떻게 알 것인가.  이 작품도 그런 부분에선 한계를 보인다.  일은 하는 하는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지 파악은 할 수 없다.  작가는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척 하지만 결국 사람들 사이의 이야길 하고 있다.  미생은 바로 캐릭터에 집중하게 한다. 그들 사이의 관계에 포커스를 맞춘다. 모든 직장에서의 불문율 같은 것이 있다. `사람 사이의 관계가 힘들지 일은 힘들지 않다'  어떤 캐릭터가 내 상사인지, 내 후임으로 들어오는지가 중요하다.  여기서 풀리지 않으면 일은 보이지도 않는 법이다. 그게 직장생활임을 실제 경험이 없을 윤태호 작가는 잘 꽤고 있다.  직장에서의 하루가 행복한 것은 정말 일 때문이었나.  뛰어난 성취 때문이었나.  사람 때문이다.  사람간에 소통이 되면 일은 이미 끝난 것이다.

 

모든 상사들에게 이상적인 후임은 바로 주인공 `장그래' 아닌가.   그는 일단 공손하고 예의바르다.  요즘 신입들 스펙이 얼마나 다채롭나. 그런 스펙에 견줄만한 능력있는 상사 사실 없다.  하여, 신입들은 자뻑하기 쉽다.  자기 소신 강하고 할 말은 한다.  경험이 없을 뿐이지 일처리 상사보다 더 깔끔하게 잘 한다. 그런데, 소위 말해서 `싸가지가 없다'면 직장생활 꼬이는 출발선에 선 것이나 진배없다.  장그래는 고졸 출신에다 2년 계약직이다.  스펙도 형편없고 파리목숨이다.  그런데, 내용상 상사들에게 인정받는다.   왜 그랬을까. 정직원이 되겠다는 정직한 욕심을 표출하면서도 시킨 일 군소리 없이 잘 처리한다.  신입은 인사성 좋고 시키는일만 잘 해도 통과다.  장그래가 2년이 지나고도 정사원이 되지 못한 것은 순전히 사회적 요인에 의한 패착이다. 

 

오차장, 항상 눈이 충혈 돼 있어 웹툰에서 토끼눈을 한 인물. 사내 정치나 직장 상사로서 갑질 같은 것엔 관심도 없다. 그는 언제나 일에 치여 산다. 그의 꿈은 승진이 아니다.  지금 직장에서 오래 생존하는 것.  그는 직장이 자아실현을 위한 공간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어떤 인물들과 일하든 어떤 일을 맡든 그는 그 모든 것에 동화되어야 한다.  무채색, 그것이 그의 색이어야 한다.  끝까지 남아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회사 안이 전쟁터라면 밖은 지옥이다.  높이 일찍 날아오른 사람들, 허튼 욕심을 부리다 샛길로 빠진 이들이 당도한 회사 밖 `지옥 풍경'을 그는 목격했다.  그 사이에 낀 10년 차 `김대리' 역시 이상적인 장그래의 상사이자 오차장의 후임이다.  밀어주고 끌어주는 것, 능숙하게 조율하고 적절히 질책하고 응원하는 분위기 메이커.  그러니까,  <미생>의 종합 상사 내 영업 3팀은 드림팀이다.  일단 캐릭터 구성이 아주 훌륭하다. 이런 인적구성 현실엔 쉬 없다.

 

<미생>은 캐릭터의 이상적인 팀 구성 때문에 또 다시 비현실적이란 멍에를 질 판이다. 뭐, 웹툰이나 드라마가 얼마나 현실을 보여주길 바라겠는가. 이것만도 감지덕지다.  `미생'이란 단어는 바둑에서 왔다.  사람들은 이 작품의 제목에 일단 끌린다. 미생은 바둑에서 사석(死石)과는 달리 살 여지가 남아 있는 집이나 대마 혹은 그 돌을 이르는 말이다. `미생'의 반대편에 `완생'이란 말이 있다.  미생은 생사 여부가 아직 명확히 갈려있지 않은 상태, 가능성으로만 똘똘 뭉쳐 있는 상황을 가리킨다.  작가는 우리네 직장에서의 삶을 바둑판 위에서의 위태위태한 승부와 그에 따른 승패에 비유하길 원했다. 바둑은 여러모로 삶에 빗대어지지 않는가.  바둑용어는 흔하게 통용된다.  포석, 대마, 사활, 장고, 훈수, 묘수, 자충수, 정석.  이 모든 단어들이 세상사와 엮인다.

 

장그래에게 오늘과 내일은 미생이다. 그는 한국 기원을 나와 들어선 첫 직장 원 인터내셔널에서 결국 `미생'으로 남는다. 그에게 정직원이란 완생은 오지 않았다. 그러면 오차장과 김대리 처럼 정직원들은 이미 완생에 이르렀는가. 웹툰의 끝에서 이들은 직장을 나와 새로운 사업을 도모한다. 그들에게 원 인터내셔널은 완생의 무대가 아니었다.  <삼국지>를 10번 읽으면 인생이 보인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믿던 시절도 있었다. 난 <삼국지>를 아직 읽지 못했다.  <미생>이 인생과 직장생활의 교과서라고?  상술이다.  삶이 그리 간단하겠는가.  <미생>만이 아니라 평생을 독서해야 한다.  그러고도 삶을 알 수 없다고 고수들은 전한다.  <미생>의 결말은 씁쓸하다.  허무하다.  윤태호 작가는 의외로 말미에 허무한 대사들을 심어놓았다.  이것이 그의 고갱이요 통찰력이다. 

 

" 업무만 아니라면 크게 부딪힐 일도, 사적으로 시간을 나눠야 할 필요도 없는 관계."  " 이런게 회사였지"

" 일 하나 하면서 무슨 일씩이나 하는 사람이 되려고 했을까."  "학원이 아니라고, 여긴 직장이라고, 공부하지 마! 공부해서 와."

" 이런 거에 충족감 느껴봐야...(성취)  우리만 힘들어진다고요 (허무)"   

" 그런데, 왜 외롭냐  "  232-234쪽,  <미생> 제 9 권 

 

그들은 매번 혼신을 다해 일한다. 목숨을 내걸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들 손에 회사의 운명이 내 걸렸으니까.  그런데, 그래봐야 월급쟁이다. 9권짜리 드라마가 이렇게 허무한 대사들로 마무리 되는 것은 섭섭한 일이다. 그럼에도, 이같은 허무개그 같은 마무리가 마음에 든다. 왜 직장인들은 깊은 외로움을 느껴야 할까.  월급쟁이의 일은 자아실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거대한 프로젝트를 실현시켜도 임원으로 고속 승진을 해도 그가 증명해낸 실적은 그를 대신해 누구든 그 자리에서 해 낼 수 있는 일이다.  월급쟁이의 비애는 그를 대신할 수많은 `보충병력'이 진을 치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자아가 대체될 수 있느냐가 직업과 예술을 가른다. 그래서 모든 예술가는 가난해도 그렇게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다. 자아의 유일성을 증명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내세울 때, 그는 예술가의 반열에 오른다. <미생>을 읽는 독자가 아니라 <미생>을 지은 윤태호 작가가 바로 그다. 

 

모든 직장인들이 <미생>의 캐릭터와 닮진 않았다. 현실의 캐릭터는 훨씬 다면적이다.  그들은 한 때 장그래였거나 김대리였다가 오차장이었지만, 사내 비리로 퇴출되는 `박과장'이 아니라고 우길 수 있겠는가.  박과장보다 훨씬 더 `나쁜 놈'들은 드라마처럼 쉽게 퇴출당하지 않는다. 그들의 직장 내 생명력은 질기다. 처세의 달인들은 얄밉게도 승승장구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내가 그 얄미운 상사가 되지 말란 법도 없다.  이야기 밖의 직장인들은 그런 `현실의 미생'위를 살아간다. 직장인을 괴롭히는 것은 직장 상사나 회사 만은 아니다.  정치에 기반한 정책은 때로 직장인의 생사여탈권을 갖고 흔들기도 한다.  사는 일은 본래 치열하다.  동서양의 성인군자를 직장안으로 가져다놔도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렇게 쉽지 않은 싸움을 매일 반복해야 하는 것이 바로 직장인의 숙명이다.   완생은 바라지도 않는다. "핵심은 남아 있는 것이다.(237쪽, 미생 9권)  가장 근사치에 가까운 답이 여기에 있다.

 

직장에 들어가기 전에는 내게 `자아실현'은 필생의 꿈이었다.  직장을 잡곤 그게 1순위에서 밀려나 2순위다.  1순위는 밥벌이다. 굶고서 자아실현은 난센스다. 잘 살기를 바라진 않는다.  평균치가 가장 무섭다. 남보다 잘 살지 못해도 남같이는 살아야 한다. 직장 생활 10년 차, 대리에 이르자 그 생각도 또 약간 달라졌다.  1순위와 2순위는 똑같이 중요하다.  단지, 피치못한 순위경쟁일 뿐이다.  2순위가 1순위로 바뀌는 것을 모든 직장인은 꿈꿔야 한다.  자아를 잃는 것과 자아가 없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언젠가부터 저축에 목숨걸지 않는다. 세월호 이후, 젊은 청년들 사이에 떴다는 한 가수의 동영상 강연의 제목은 "늙어 잘 살기 위해 오늘의 아메리카노를 참지 말라"였다.  백배 공감이다. 언제 어떻게 생을 끝마칠지 모른다. "핵심은 남아 있는 것이다"  결국, 근사치에 가까운 인생의 답이 참는 것이라면, 그게 다라면 참다가 인생 끝날지도 모른다.  그러니 누리자.  참는 것과 즐기는 것은 같이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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