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행 야간열차 세트 - 전2권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들녘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 난 가끔 오빠의 영혼이 다른 그 무엇보다도 언어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어요."  제 2 권, 134 쪽  파스칼 메르시어 <리스본행 야간열차>

 

어떤 소설은 쉽게 규정지을 수 없다.  대체, 이 소설이 무엇에 관한 이야기일까?  평론가들은 작품을 분해하고 그것을 둘러싼 의미망을 추적하려 하지만 독자들은 그들의 해석에 쉽게 수긍하지 못한다. 평범한 나의 독서는 왜 그런 명쾌한 정의와 분석에 가닿지 못할까?  열패감을 안기기도 한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명사들의 극찬에도 불구하고 첫 독서에서 큰 감동과 끌림을 남기지 못했다. 내가 이 소설을 다시 보게 된 것은 밑줄을 긋고, 페이지를 접어둔 책을 두 번, 세 번 훑으면서부터다. 곱씹을수록 대단한 문장들이 내 눈에 선명히 와서 박혔고 작가가 문장속에서 담아내고자 하는 우리 삶을 비추어주는 철학이 예사롭지 않은 통찰력 속에 담겨 있었다. 만약 내가 이 책을 두 번 읽고 서평을 쓰게 된다면 이 글은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할 것이다.

 

더군다나 독자들은 이 소설에 대한 예비적 지식이나 추측이 쓸모 없는 착각이런 걸 곧 깨닫게 된다. 제목에서 암시되는 `기차'라는 사물이 갖는 상징성은 지극히 약하게 보인다. 그게 일단은 착각일지라도 !  `일상이 낯설어진 한 남자의 돌연한 일탈'과 그에 얽힌 흥미진진 뒷 이야기를 기대하는 것도 무리다.  그게 이 소설의 발단일지라도 !   그러면 무엇이 남는가?  독자들은 제목과 출판사의 멋들어진 홍보문구를 보고 책을 잡았을 듯 하다. 사건의 발단은 독자들을 강렬히 유인한다. 한번의 이혼경력을 갖고 있는 주인공 그레고리우스는 예순을 바라보는 스위스의 베른, 김나지움의 고전어 선생이다. 그는 학생들 사이에서 문두스(Mundus, 세계, 우주, 하늘이란 뜻을 지닌 라틴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그의 완벽한 수업 능력과 고전어 실력은 익히 알려져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더군다나 30년 동안 그의 일상은 단조롭고 규칙적이었다.

 

그런 그가 아침 출근길에 김나지움과 연결되는 키르헨펠트 다리 위에서 자살하려는 여인을 우연찮게 구한다. 이 여인과의 대화 한 구절이 그의 잔잔한 일생에 전환점이 된다.   "모국어가 뭐지요?"  "포르투케스(Portugues)"  그녀는 포루투칼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이다. 평소 언어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는 `문두스'에게 이 소리는 하루종일이라도 들을 수 있는 멜로디였다. 서점에 들려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책을 읽는다. 그것은 공교롭게도 포루투칼어로 쓴 것이었고, 지은이는 아마데우 이나시오 드 알메이다 프라두라는 사람이었다. 번역을 통해서야 한 구절 진도를 낼 수 있는 그 책은 묘한 감동과 느낌을 전해준다.  드디어, 그레고리우스는 `57년이 지난 후 처음으로 자기 인생을 이제 완전히 장악하려는 시도' 즉 프라두의 고향이자 조국인 도시, 포루투칼의 수도 리스본으로 향한다.  

 

하여,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오른 것이다. 사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다고 봐야 한다. 소설은 짧은 열차여행을 포착한다. 소설은 리스본에 도착한 문두스가 프라두의 삶의 궤적을 쫓는 것' 그리고 그가 작품 <언어의 연금술사>를 번역해 조금씩 읽어내는게 전부기 때문이다. 사실 소설의 내용이란게 고작 프라두라는 인물이 포루투칼의 독재 시절을 살아온 이력을 추적하는 것이다. 뼈대를 이루는 이야기, 서사에는 흡입력이 약하다.  이 작품이 뛰어난 점은 다른 곳에 있다.  책 속의 책인 프라두의 <언어의 연금술사>를 조금씩 번역해 소개하는 그 문장들이야말로 작가가 독자에게 드러내고픈 이야기의 진실, 알맹이였다.

 

" 여행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연민을 느끼는 이유는 뭘까?  그들이 외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면서 내적으로도 뻗어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계발할 수 없고, 스스로를 향한 먼 여행을 떠나 지금의 자기가 아닌 누구 또는 무엇이 될 수 있었는지 발견할 가능성을 박탈당한 채 살아간다 "    제 2 권, 30쪽

 

`프라두'라는 인물은 여러가지로 화자 `그레고리우스'와 연관된 인물이다. 그들은 태생도, 자라온 환경도, 달랐다.  프라두가 귀족 가문의 엄한 법률가 아버지 밑에서 교육받고, 귀하게 자랐다면, 그레고리우스는 박물관의 경비원 아버지를 둔 가난한 집 출신이다.  스위스와 포투투칼이라는 지리와 역사적 배경 또한 다르다. 그럼에도, 독자들은 이 두 인물의 유사성에 대한 의혹을 품고 나가게 된다. 이 유사성의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소재는 세가지다. 바로 `언어와 글쓰기, 그리고 존재론적 사유'다.  독자는 메르시어와 그레고리우스, 그리고 프라두를 잇는 이상한 유사점을 눈치챈다. 그들은 고전어 강사요, 언어학자요, 작가였다.  언어라는 공통항이 그들 삶을 묶고 있는 끈이었다.

 

30년이 넘는 시간동안 세상과 담을 쌓고, 고전어로 대표되는 언어의 세계에서 행복과 존재의 이유를 찾은게 그레고리우스다. 그런데 그가 감행한 일탈이란게 또다시 `언어'에 대한 끝없는 사랑과 집착 때문이란게 놀랍다. 자살하려던 여인에게서 들려온 새로운 언어, 포르투게스가 낯선 세계, 낯선 인물로 그를 이끌어 낸다. 질서정연했던 한 인간의 삶에 벼락 같은 충격을 안긴 것이 새로운 언어와 그 언어로 빚어진 프라두의 책 한 권 이었다.  그 책의 제목을 보라.   `언어의 연금술사' 아닌가.    왜 작가는 언어에 집착하는가?  

 

프라두는 다방면의 천재였다.  하지만, 그는 실력있는 고전어학자 그레고리우스를 숙연하게 만드는 `글쓰기의 천재'였다. 프라두라는 인물의 삶에는 미숙한 점이 발견된다. 아버지와 주변인물, 그리고 시대와의 갈등은 평범한 인물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언어의 연금술사'를 통해 바라본 프라두는 독자까지를 전율케 할 정도로 훌륭한 글을 써낸다.  이 소설은 프라두의 글귀를 이정표처럼 곳곳에 배치하고, 독자를 글쓰기와 사유의 세계로 인도한다. 본래의 주제로 알려졌던 60대 남성의 일탈과 방황은 서서히 잊혀지고, 남겨진 것은 언어가 빚어낼 수 있는 궁극의 아름다움이며, 언어와 글쓰기가 가닿을 수 있는 신비한 세계, 또 우리 삶에서 그것이 가진 의미를 발견해 내는 일이다.

 

" 그리고 몇 주 후에는 `왜 좀 더 일찍 시작하지 않았을까!  글을 쓰지 않으면 사람은 결코 깨어 있다고 할 수 없어. 자기가 누구인지 알지 못해. 자기가 어떤 사람이 아닌지는 더욱 알지 못하고` " 제 1 권, 171쪽

 

이 소설은 흥미롭다기보다는 정교한 깊이를 선물한다. 소설이라기보다는 소설을 가장한 `언어 철학'이다.  하여, 무턱대고 제목의 매력에 끌려 책을 잡은 독자들이 당황하는건 당연하다.  인내하며 도달한 마지막 장은 허무하다.  허나,  깊이 있고 사변적인 언어로 삶을 포착하려한 작가의 글을 참아낼 수 있는 독자들은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밑줄 그은 부분들과 다시 마주할 수 있다.  그레고리우스는 독자에게 다른 삶이 가능하며, 그것이 비교적 쉬운 일임을 보여준다. 그는 30년간 다녔던 출근길을 포기하고, 리스본행 열차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자신의 삶과는 전혀 연관도 없던 한 인물의 역사와 종적을 추적한다. 그 동기를 건네 준 것은 그가 일생을 거쳐 사랑한 대상 즉 `언어의 세계' 덕분이다.

 

" 단어들은 윤을 낸 대리석처럼 흠이 없고, 자기 자신이 아닌 것은 모두 완벽한 침묵으로 변화시키는 바하의 변주곡 음색처럼 맑아야 한다."   제 1 권, 46쪽

 

우리 삶은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가?  혹여 집착의 대상이 물질적인 것은 아닌가 ?  그것은 죽음과 동시에 덧없이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언어는 그렇지 않다. 언어는 생명력이 강하고 특히 아름답게 빚어진 언어는 더욱 더 오랜시간 사람들의 기억속에 뿌리내려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며, 한 사람의 가치를 증명하고 나의 존재와 나의 사유 능력을 북돋을 테다.  책장을 덮기 전, 파스칼 메르시어는 프라두의 언어를 마지막으로 인용한다.    "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제 2 권, 334쪽    우리가 사는 그것은 물리적 세계의 곤궁함이다.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은 언어와 사유로 대표되는 차원높은 세계다.  

 

우리가 이 부분에서 김춘수의 `꽃'이란 시를 상상한다면 적절하지 않겠는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파스칼 메르시어는 똑같은 말을 달리 표현하고 있었다.  " 말은 시(詩)가 되고 나서야 진정으로 사물에 빛을 비출 수가 있어" (제2권, 286쪽), 바로 그것이다.  이 작품은 물리적 세계가 아닌 언어와 사유의 세계를 강조한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이 작품은 독자들의 통속적인 언어습관을 되돌아보게 한다. 시가 되는 언어, `윤을 낸 대리석 같고, 바하의 변주곡 처럼 맑은' 그런 언어에 대한 갈망을 이처럼 극적으로 표출한 작품은 없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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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4-02-04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서사가 아니라 시, 소설이라기 보다는 시집, 외부세계로의 여행이라기 보다는 내면으로의 탐색과 침잠 인 작품이죠 ..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개츠비 2014-02-08 12:07   좋아요 0 | URL
다시 살펴보고 싶은 부분이 많은 소설입니다. 감사합니다^^